시바 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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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일본인은 이렇게 빠가가 된 걸까' 하고 22살 때 생각했습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을 텐데. 거기서부터 저의 소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을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일본은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까. 쇼와로 와서 잘못된 것이 틀림없어.' 그러나 옛날 일들을 잘 몰랐습니다.
35~36살 때부터 문헌과 자료를 읽으면서 쓴 소설은 22살 때의 자신에게 부친 편지였습니다.
<료마가 간다>도 <언덕 위의 구름>도 그 이후의 작품들도 '일본인이란 것은 뭐야?'가 테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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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司馬 遼太郎.'''
1923.8.7 - 1996.2.12.
일본의 유명 소설가. 현대의 시점에서 역사를 되짚어 보는 역사 소설과 일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글을 남긴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본명은 후쿠다 데이이치(福田 定一)이며, 1923년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태어났다. 사망 시점은 1996년으로 사인은 흉부 대동맥 파열. 공교롭게도 소설가 엔도 슈사쿠와 출생년도와 사망년도가 동일하다.
2. 상세
일본의 역사소설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인 역사소설가로, 특히 일본 근대사 관련 역사소설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작품을 쓰기로 유명했다. 또다른 유명 역사소설가인 요시카와 에이지와 비교할 때, "요시카와 에이지는 서재에서 펜 1자루에 의지하여 소설을 쓰는데 시바 료타로는 트럭 1대분의 자료를 들고 와서 소설을 쓴다."는 말이 있을 정도. 고서점 거리에 트럭 1대를 몰고 나타나 손에 잡히는 대로 트럭에 던져 넣었다느니, '언덕 위의 구름'을 집필할 당시 역시 러일전쟁을 소재로 쓰려던 작가가 있었는데 자료 수집을 위해 고서점에 가보니 '''시바 료타로가 다 쓸어가버려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등의 전설이 남아 있다. 심지어 학술 논문에 인용이 될 정도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한 듯, 사마료태랑이라는 필명도 '사마천[1] 에 미치려면 아직 멀었다(遼 요원하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중일 문화 교류를 위해 교류 협회의 이사직을 맡았을 때에도 "내 작품이 뛰어나다고 해도 '스승' 사마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러한 철저한 고증이 곧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의 주관 및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적 사실을 철저한 조사를 통해 '''재구성'''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기에 이 사람의 시선을 통해 소설화된 역사적 사실을 실제와 같다고 보면 위험한 것.[2] 소위 일본식 역사소설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며, 장르가 다소 다르다고는 해도 다나카 요시키나 시오노 나나미와 같은 작가들도 이러한 시바 료타로의 스타일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시바 료타로 작품들의 특색은 역사 속에서 패자 혹은 무명으로 남겨진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라 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등의 소위 1급 인물들은 작중 주인공들이 넘어야 할 벽 내지는 그들이 활동하는 무대라는 느낌이 강하며[3] 대신 사이토 도산, 아케치 미츠히데, 이시다 미츠나리, 야마우치 카즈토요 등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부정적으로 기록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인물들을 발굴해서 영웅화시켰다.
이런 작가의 스타일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안티라느니 이시다 미츠나리를 광적으로 존경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한 시바 료타로의 호의적인 서술은 사이토 도산에 대한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냥 그런 부류의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정도로 생각해둘 필요가 있다. 더욱이 작가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읽어보면 미츠나리의 인격적 결함도 서술하고 있어서 미츠나리 빠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에야스에 대해서는 "재미없는 현실주의자" 정도로 평가한 적이 있을 뿐이지 딱히 안티라고 보기도 힘들며, 소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이에야스가 천하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나 이에야스의 강점과 장점 역시 빼놓지 않고 잘 서술하고 있다. 다만 소설 속의 이에야스가 악역을 맡고 있어서 그렇게 보일 뿐.
가만히 보면 게임이나 만화 등 오늘날 일본 여러 매체에서 표현되는 센코쿠 시대 무장의 캐릭터에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다 노부나가의 스승처럼 묘사되는 사이토 도산, 불의와의 타협을 모르는 이시다 미츠나리, 여유만만한 성격의 시마 사콘, 단순한 모반자라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쓰고 싶어한다는 아케치 미츠히데 등.
1946년부터 61년까지 기자 생활을 하며 틈틈이 작품을 발표했고(첫 직장은 당시 재일 조선인이 운영하던 오사카의 소규모 지방지였다고.) 《올빼미의 성》으로 1956년 나오키상을 수상, 일본에 닌자붐을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문화 개방의 흐름에 따라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동명의 영화로 알려져 있다.
1966년 기쿠치칸상을 받은 《료마가 간다》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여[4] 5번이나 드라마되고 만화화 되기도 했다. 또한 《신센구미 혈풍록》은 만화 《바람의 검심》의 주 모티프를 제공한 소설이기도 하다. 실제 바람의 검심 작가 와츠키 노부히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70년대 이후에는 소설 집필은 줄고,[5] '어쩌다 일본, 일본인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고심하는 에세이를 주로 썼다.
71년부터 96년까지 에세이집(기행문) <가도를 가다(街道をゆく)>를 집필 중 사망. 25년간 연재한 이 에세집만 단행본으로 43권(...) 분량이다. 국내에는 이 중 2권 <한나라 기행>[6] 과 28권 <탐라기행>만이 번역되었다. 한국 기행문이 2번째 기행문이라는 것이 의외라면 의외. 시바 료타로가 전선으로 끌려갈 때, 기차 안에서 서울역 인근의 청자 기와[7] 를 덮은 지붕들을 보면서 '내가 만약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조선에 꼭 와봐야지'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일 수교가 되자마자 기를 써서 노력한 끝에 한국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한일 수교는 1965년, 이 책이 나온 것은 1972년. 대단한 근성이다.
작가 개인의 성향은 일단 보수 지식인에 가깝지만, 극우는 아니고 온건 보수 정도 컨셉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을 까는 데엔 주저함이 없다. 특히 대전 중 일본군에 대해서는 '''증오'''한다고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깐다. 이는 본인의 경험도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전쟁 말기 그는 학병장교로 전차소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작전 중 "시민과 병사들이 패닉을 일으키면 어째야 하냐"고 상급자에게 묻자 "치어 죽이며 가라"(...)는 대답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8] '''전쟁 바보가 되어버린 일본인'''을 규탄하기 위해 이후 소설을 쓸 결심을 했다고 한다.[9]
쇼와에 대해서는 '귀태(鬼胎)"의 시대',[10] 일본사에서도 특이한 '비연속의 시대'라고 평했다. 즉, 뭔가 잘못돼서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시바는 <이 나라의 형태(この国のかたち)>에서 이 귀태의 시대의 시작은 러일전쟁의 승리로[11] 일본 국민은 "러일전쟁 승리 반자이!! 자국 우월주의(내셔널리즘)"에 빠져, 군부의 폭주와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쇼와라는 귀태(鬼胎)의 시대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시바는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을 내셔널리즘(비뚤어진 애국심)과 패트리어티즘(애국심)으로 구분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내셔널리즘은 그저 집안 자랑이나 하고, 다른 집안을 업신여기고 깔본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쩌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계속 존경받을 수 있는 집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감정을 국가적 규모로 행하는 것이 내셔널리즘과 패트리어티즘이라고 정의했다. 일본이 내셔널리즘(비뚤어진 애국심)이 폭주한 것은 러일전쟁의 승리가 계기였다고 시바는 생각했다. 러일전쟁 직후에 일본은 내셔널리즘이 아닌 패트리어티즘의 길을 선택해서, 해군을 축소하고 주변국과 사이좋게 협조하면서 국가를 발전시켰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 전의 다른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서술했음에도 불과하고 오직 쇼와의 이 시기만큼은 "귀태"라는 단 한 마디로 어물쩍, 일본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본 내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반대로 극우파들에게는 소위 '''자학사관의 전파자'''니 '''친미보수'''니 하는 식으로 까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온건 보수라고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 한편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중증의 메이지 빠'''. 쇼와에 대한 비판도 엄밀히 따지면 "메이지 시대의 영광을 너희들이 다 말아먹었다"(...)고 디스하는 모습에 가깝다.
한국 관련해선 지한파(知韓派)에 속한다. 조선 시대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도 읽어봤을 정도. 참고로 내용이 부실하다고 비판은 했지만, 16세기 이후 일본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조작된 혐의로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당시 스즈키 젠코 총리에게 김대중 씨 구명에 나서 달라는 서한을 보낸 적이 있다.
물론 지한파라는게 무조건적인 친한파라는 소린 아니라,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은근히 미화하는 우익사관을 가진 것 아니냔 비판도 있고, 그가 쓴 수필이나 칼럼 등에서 한국을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다거나, 봉건제가 발달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후지와라 시대와 비교해서 고찰하는 등 후쿠다 도쿠조가 연상되는 내용이 간간이 들어 있어 이것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래도 우파로서는 온건한 축에 드는 인물이며 첫 직장을 재일교포 회사로 정할 정도로 거리낌이 없어 한국계 지인들도 많은 편이라 국내에서는 지한파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에 자주 들렀으며 한국 음식도 입맛에 맞았는지 특히 자주 왕래하던 부산에는 단골로 가는 술집도 정해두고 있었다고 한다.
시바 료타로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한나라 기행(韓のくに紀行)>에서 "나는 일본의 선조의 나라를 간다", "일본보다 오랜 시대부터, 당당한 문명과 독립국을 운영한 조선인(한국인)"이라고 적거나, 또, 진무 덴노는 가공의 인물이라며[12] "일본의 혈액의 60%는 조선반도에서 전해져 왔다. 90%,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라고 적었다. 또한 극우 일본 학자들로부터 실존을 의심받던 조선의 항왜 김충선(사야가)에 대해서도 <가도를 가다>에서 "센고쿠 시대 일본의 상식에서 보면 항복한 무사가 어제까지의 아군에게 활을 겨누는 일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사야가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라며 그의 실존을 긍정했다.
다만 실제로 시바 료타로의 경우 친한파냐 혐한파이냐 구분하는것 자체가 무의미한 인물일 수 있다. 실제 시바는 단순한 고도의 메이지빠(...)로서 한국에 대해서는 특별히 친한이라든가 혐한이라든가의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한국에 대한 표현이나 이미지들은 모두 철저히 근대시대의 일본의 관점에서 쓰여져 있다. 즉 위에서도 이야기된 바와 같이 전형적인 보수우익.[13] 그리고 이와 같은 뉴스에서도 나타나다시피 시바 료타로는 고도의 메이지빠이기 때문에 근대 역사에서의 한국에 대한 관점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근대화시키고 이끌어줘야 하는 상대''' 딱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았다. 물론 이것 자체가 한국인의 입장에선 모욕적인 것이고, 실제로 일본의 시도가 역사에서 어떻게 나왔는가를 보면...
시바는 독자들로부터 쇼와시대 전반기와 2차대전에 관련된 작품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끝내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쓰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이 시대를 다루고자 자료도 조사했지만 결국 쓸 수 없었다. 시바 료타로가 역사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경험한 전쟁 체험이었고, 그래서 자신이 체험한 전쟁 당시의 쇼와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를 다루려고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우울함과 허무함을 느끼고 정신적인 데미지가 컸다. '''만일 내가 쇼와 시대를 소설로 쓰게 되면, 제정신을 잃고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라고...
실제로 출판사의 의뢰로, 노몬한 전투에 대해 30년간 취재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주변에서도 기대받고 있었다.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미화하고 국민들을 속인 윗대가리들은, 노모한 전투도 일본이 승리했다고 정신승리했고, 시바 료타로는 이런 짓을 되풀이하는 멍청한 윗대가리들과 바보가 된 일본인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끝내 집필하지 못했다. 요즘도 일본 우익들은 사실은 소련에게 진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는 우리가 이긴 싸움이라고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있다.
사실 시바 료타로보다 오히려 태평양 전쟁을 옹호한 것은 또다른 일본 역사 소설계의 거두인 야마오카 소하치였다. 물론 시바 료타로의 소설에 비판할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2000년 아사히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3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6위 마츠오 바쇼,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츠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였다.#
3.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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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시에 시바 료타로 기념관이 있다. 시바 료타로가 소장했던 책들과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과 생전에 살았던 자택이 같이 있다. 기념관 자체도 유명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꽤 아름답다.
4. 저서
(번역된 작품 위주로 작성)
- 가도를 가다 (한나라 기행, 탐라 기행만 번역)
- 고개(峠) - 峠 最後のサムライ라는 타이틀로 2020년 영화화
- 나라 훔친 이야기
- 료마가 간다
- 막말의 암살자들
- 몽골의 초원
- 미야모토 무사시
- 세키가하라 전투
- 언덕 위의 구름 ('제국의 아침'으로도 번역)
- 올빼미의 성
- 타올라라 검(燃えよ剣) - 신센구미를 다룬 소설. 2020년 영화화
- 신센구미 혈풍록
- 풍운의 성채
- 항우와 유방
- 패왕의 가문
- 나는 듯이
[1] 《사기》의 저자. 시바 료타로 자신이 가장 애독했던 책이기도 했다.[2] 그렇다고 이러한 방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픽션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접할 필요가 있다는 것뿐.[3]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인공인 패왕의 가문의 경우에는 도쿠가와조차 천재적인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해 부족한 천재성을 우직한 면으로 버티면서 극복하려는 느낌으로 묘사된다.[4]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신문 연재. 요시카와 에이지한테 이전 작품은 고증이 엉터리라고 지적받고, 1,000만엔 이상의 취재비를 들여서 철저하게 자료를 조사했다.[5] 그가 소설가로써 마지막으로 집필한 작품이 명청교체기를 그린 달단질풍록(韃靼疾風録, 1987년)이다. 본작은 1990년에 한국에도 번역되었지만 지금은 중고서점을 뒤져야 겨우 찾을 수 있고, 중고서점에 나오는 매물도 10만 원을 넘어간다. 영어로도 번역되었다.[6] 중국의 한나라가 아니라 한국을 말한다. 원제는 韓のくに紀行. 원문에 가깝게 옮기려다 보니 한국이 아니라 한나라로 번역한 듯.[7] 착각이었을 거라고 덧붙이고 있기는 하다[8] 위에서 '어쩌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바보가 되어버린 거냐'라며 한탄을 느낀 그 순간의 일이다.[9] 전쟁 중에 치누 중전차에 탄 적이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고문관이었던 듯.[10] 귀태란 일본 요괴 오니의 자식이란 뜻으로, 부모와 닮지 않은 아이 혹은 안 태어나는게 나을 뻔 했을 아이 정도의 뉘앙스를 뜻한다.[11] 실상은 손해가 막심했고 그 승리라는 것도 미국의 중재로 얻은 측면이 강한데, 이런 실상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훗날 태평양 전쟁에서 정신승리 같은 짓을 되풀이했다고 시바는 지적했다.[12] 사실 패전 뒤에는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 특히 일본서기에 기록된 덴노들의 기록에 대한 사료 비판이 대세가 되어 특히 결사팔대로 지칭되는 진무 덴노에서 카이카 덴노까지의 아흡 명의 덴노에 대해서는 전혀 허구의 인물이며, 스진 덴노에서 부레쓰 덴노까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일본서기 기록과 행적이 일치하는지도 딱 잘라 말할 수 없고, 게이타이 덴노부터 실제로 존재했던 덴노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행적도 들어맞는다고 하는 학설들이 일본 학계의 주류가 되었다.[13] 실제로 흔히 현재 일본에서 이른바 우익이라 불리는 세력의 무조건적인 혐한 속성은 일본 내 정통우익세력에게도 어느 정도 비판받고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