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릉 전투

 

'''마릉 전투
馬陵之戰
Battle of Maliing'''

'''시기'''
기원전 341년
'''장소'''
중국 허베이성 다밍현
'''원인'''
위(魏)의 한(韓)나라 수도 신정 공격
'''교전국'''
제濟
위魏
'''지휘관'''
<^|1>전기
손빈
방연
태자 신(申)†
'''병력'''
100,000여 명
100,000여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다수 전사
'''결과'''
위나라의 패배
'''영향'''
'''위나라의 세력 위축. 제나라의 전성기 도래'''
1. 개요
2. 배경
2.1. 위혜왕의 확장정책
2.2. 제나라의 참전
3.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
3.1. 위나라의 한나라 침공
3.2. 제군의 참전과 손빈의 작전
3.3. 방연의 반격
3.4. 방연이 이곳에서 죽다, 앉은뱅이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
4. 결말


1. 개요


BC 343년 전기손빈이 이끄는 제나라#s-1.3군이 마릉에서 위나라 방연의 군대를 대파한 전투. 이 전투에서 손빈은 소수로 다수를 누르고 약세로 강세를 누르는 전법을 구사해 위나라 군사를 크게 이겼다.

2. 배경



2.1. 위혜왕의 확장정책


[image]
마릉 전투 직전 동아시아의 판도.[1]
전국시대 초창기 패권국은 위나라였다. 위문후는 자하를 스승으로 섬기며 많은 인재를 등용했고 그렇게 등용된 이극, 서문표 등이 입법, 행정 체계를 공고히 해 전국시대에 맞춰 새롭게 개편했고 오기, 악양 등의 장수는 정복활동을 펼쳐 위나라의 강역을 넓혔다. 그 후 뒤를 이은 무후 역시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 받아 훌륭한 정치를 펼쳐 위나라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렸다. 당시 위나라는 전국 7웅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고 가장 부유한 나라였으며 가장 강한 보병을 가진 국가였다. 그러나 문후 말기에 들어서 국가 재정의 투자에 비해 손해가 커지는 등 패권국가의 위상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후의 뒤를 이은 위혜왕이 즉위하자 그동안 축적되어왔던 모순들이 표면화되어 혜왕은 즉위초반부터 많은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위나라가 가졌던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영토가 중원 한가운데 위치하여 방어가 매우 불리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위문후, 무후 치세에 걸쳐 위나라가 발전하고 강대국이 된 계기였다. 중앙이 위치하여 진출이 쉽고 물자가 모인다는 점을 적극 활영한 결과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들을 상대적으로 쉽게 제압하여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혜왕 대에 이르러 주변에 강대국만 남아 확장이 어렵게 되자 이미 확장한 영토를 관리하고 방어하는 문제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위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했던 위나라의 입지가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서쪽의 진나라와는 하서지방을 두고 교전이 끊기질 않았으며 남방의 초나라의 북상은 전투의 승리로 일시적으로 막았으나 분쟁의 씨앗은 남아있었다. 동쪽의 제나라#s-1.3 역시 위나라의 확장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고 인접한 조나라한나라와의 사이도 벌어지기 시작했다.[2][3]
  • 국경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거점간의 연결에 문제가 있었다. 역시 삼진이 원래 진나라의 가신이었다 분리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그 와중에 가장 세력이 강했던 지백의 영토까지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월경지가 많았다. 당장 위나라의 두 중심지였던 안읍과 대량만 해도 중간에 한나라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4] [5]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한은 중간에 가로막고 있던 상당을 포함한 영토 교환을 시도해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위-한이 서로 강해지는 꼴을 두고 볼 다른 나라들이 아니었고, 특히 두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최대 이해 당사자였던 초나라와 조나라의 결사적인 견제로 인해 물건너가게 된다.
  • 문후와 문후 시절 국정을 이끌던 신료들의 후손들이 보수세력화 되어 개혁을 가로막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며 그로 인해 위나라에서 출세에 한계를 느끼고 떠나는 인재들이 많아 인재 유출이 심각했다. 진나라의 개혁정치를 이끌었던 위앙도 본래 위나라에서 출세에 한계를 느껴 떠난 사람이고 초나라의 개혁을 이끌었던 오기도 위나라 서하태수였다 그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는 무후에 실망하여 초나라로 건너간 사람이었다. 물론 혜왕도 인재를 사랑하여 많은 인재를 끌어안으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위나라에 빠져나간 인재들의 능력치와 보수세력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만 등용되었던 위나라의 인재들 간의 능력치 차이는 크다.
  • 주변국들의 국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위나라에서 실시했던 법가적 제도와 군제개혁이 효과가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진나라와 초나라에서도 위나라 출신 인재들을 끌어가 같은 개혁을 시도하여 급격히 국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특히 인접국인 한나라는 신불해를 등용해 강한 법치정책을 추진하고 정나라를 병합해 요충지인 신정을 수도로 삼아 점점 강해졌기 때문에 가뜩이나 한나라 영토 사이에 월경지가 많았던 위나라에 큰 위협을 주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위혜왕은 이와 같은 위나라의 문제점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 계속해서 인재를 등용하고 계속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위나라의 패권을 지키려고 했다.[6] 그래서 방연 등을 등용하여 인접국이자 비교적 국력이 약했던 조나라와 한나라를 신나게 털며 세력을 계속 확장했고 표면적으로 위나라의 위세는 전보다 더 강해 보였다.[7]
조나라와 한나라는 이러한 위나라의 침공을 받아 대항하지만 연달아 싸움에 패해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길밖에 없었다. 위나라 승상공숙좌나 대장군 방연 같은 인물들이 나름 유능한 인물들이었고 위나라의 국력이 그만큼 강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2.2. 제나라의 참전


한편 당시 제나라의 왕은 위왕이었다. 제위왕은 즉위 후 9년 동안 이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열중했는데 순우곤이 간하는 말을 듣고 이를 멈추고 정사에 열정을 다하여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8]
아무튼 제위왕은 학문을 사랑하여 제나라 수도 임치의 남문인 직문 주변에 학교를 세우고 여러 인재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이들을 연구 결과를 정책에 반영했으며 많은 인재들을 영입하여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있었다. 그러한 인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상국 추기, 외교관 순우곤, 장군 전기와 손빈이다.
특히나 손빈은 원래 위나라의 대장군 방연과 동문수학한 사이였으나 손빈의 재주를 시기한 방연 때문에 무릎을 잘리고 앉은뱅이가 되어 미친척을 하여 겨우 목숨을 보존하다 제나라 사신 손에 목숨을 구해 제나라의 군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방연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손빈 항목 참조. 기록상으로나 결과가 보여지는 점이나 방연을 압도했던 손빈이 제나라의 군권을 잡은 만큼 제나라의 병력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주 위나라의 침공에 시달리던 조나라와 한나라가 의지할 곳은 제나라밖에 없었고 제나라의 입장에서도 위나라의 확장은 위협적인 일이었기에 참전하여 위나라의 세력을 꺾어야만 했다.
결국 위나라가 방연을 대장군으로 삼아 조나라 한단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청하게 되고 제위왕에 이에 응해 전기를 장군으로 삼고 손빈은 군사로 삼아 출전시키면서 제, 위 두 나라는 본격적으로 패권을 위한 전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전기는 조나라로 진격하여 구원하려고 했지만 손빈은 지금 위군의 정예병이 모두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빠져있으니 위군의 의표를 찔러 위나라 본토로 곧장 진격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전기는 손빈의 헌책을 받아들여 위나라 본토로 진입했다.
한편 조나라를 치고 있던 방연은 크게 승리했지만 제군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회군했는데 손빈은 방연의 이러한 행위를 미리 예상하고 계릉 땅에서 병사들을 충분히 휴식시켜주며 위군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피로한 상태였던 위군은 제군의 복병과 포위전술에 말려들어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훗날 기록된 계릉전투이다.
방연을 대패시킨 제나라는 그 기세를 몰아 송나라, 위(衛)나라와 연합해 위나라 영토인 양릉을 포위하는데, 방연은 한나라를 끌여들어 이를 격파하고 제나라와 강화를 맺는다. 이에 위혜왕은 그동안의 전공과 공로를 인정하여 계릉에서의 패배를 용서해 줬다고 한다. 그리고 서쪽에서 기회를 보던 진나라는 패전 소식을 듣자 하서지방을 공격하기 위해 함곡관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위나라는 여전히 강국이라 패배를 만회할 저력은 지니고 있었고 결국은 진나라를 다시 함곡관 안으로 몰아붙여 위세를 과시했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위나라의 주력 전선이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제나라를 비롯한 동쪽 전선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며 그렇게 13년이 지났다.[9][10]

3.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


[image]

3.1. 위나라의 한나라 침공


진나라의 침공을 물리치고 끝끝내 서부전선을 안정시킨 위혜왕은 다시 세력 세력확장을 위한 공세에 들어가는데 그 표적이 된 곳이 한나라였다. 당시 한나라의 군주는 한소공으로 유명한 법가학자인 신불해를 등용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그렇게 확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신정으로 옮겼는데 위혜왕은 이를 위협적으로 받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나라 역시 위나라에 패한 것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어 한나라와 비밀리에 동맹을 맻고 침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하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가까운 한나라를 제압할 필요성도 있었다.
혜왕은 태자 신을 총대장으로 하고 방연을 장군으로 삼아 병거 500승[11]을 이끌고 한나라를 쳤다. 태자 신이 한나라의 경계에 왔을 때 위나라의 한 선비가 찾아와 대략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위나라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고 이 세상에 왕보다 높은 지위는 없습니다. 태자께서는 장차 그 나라의 왕이 되실 몸입니다. 태자께서 한나라 정벌을 성공하시더라도 더 높게 올라갈 지위는 없습니다. 지금 위군은 오랫 동안 전쟁에 시달려서 피로한 상태입니다. 태자께서 위군을 이끌고 힘들게 성을 함락시켜 승리하더라도 왕이 되실 뿐이고 핑계를 대고 그냥 돌아가셔도 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싸우다 진다면 좀처럼 왕이 되길 어려우실 겁니다."

태자 신은 그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회군을 결심했지만 선비는 안타깝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태자께서 그리 생각하셔도 그리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위나라에는 태자님이 끓이는 국을 먹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태자께서 끓은 국을 먹기만 기다리는 승냥이들이 있는데 태자께서 국을 그만 끓이겠다고 한다고 고이 넘어가려 하겠습니까?"

선비의 예상은 정확했다. 태자가 핑계를 대어 회군 하려고 하자 방연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결사반대한 것이다. 결국 태자는 회군을 뜻을 굽히고 한나라 정벌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태자 신의 결단력 부족이라는 측면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혜왕이 잘못된 정책에도 기인한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구세력을 정리하지 않고 인재들만 불러 들여 영토를 확장해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정책을 폈기에 방연을 비롯한 신진세력들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라도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울 기회만을 노리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데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 공을 세우는 데 혈안이 된 위나라 장수들은 한나라군을 쉽게 제압하고 한나라 수도인 신정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비의 걱정은 기우인 것처럼 보였다.

3.2. 제군의 참전과 손빈의 작전


한나라는 위군을 당해낼 수 없자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고 제나라 신료들은 한나라를 구원하지 말자는 의견과 당장 구원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했다. 손빈은 한쪽에 가담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이에 제위왕은 군사인 손빈에게 계책을 물었고 손빈은 단순히 양쪽의 의견을 절충한 것이 아니라 명료한 전략전 판단에 기초한 제3의 방안을 내놓았다. 손빈은 계획은 대략 아래와 같았다.
한나라를 방치하여 멸망이라도 한다면 위나라는 반드시 제나라와 싸움을 걸어 계릉 전투의 치욕을 씻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한나라를 구원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구하러 가면 한나라 군사는 손해를 보지 않고 우리가 생생한 위나라 군사와 싸우는 꼴이 되기 때문에 구원을 간다는 약속만 하고 실제 출진은 늦추어야 한다. 한나라의 수도는 신정은 지형이 험준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간다는 약속만 하면 한군은 필사적으로 위군과 싸울 것이고 결국 위군은 신정을 함락 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둘다 팔시적으로 싸워 지쳤을 때 출진한다면 위나라 군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고 힘이 약해진 한나라로부터 얻어낼 것도 많다.
제위왕은 손빈의 탁월한 식견을 높이 사 그 제안에 따랐다. 한나라를 지원하겠다고 사자를 보내놓고 떠들석하게 각지에 동원령을 내리는 척 했지만 실제로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자 과연 손빈의 예상대로 한군은 목숨을 걸고 싸워 위군을 막아냈다. 방연은 일년 동안 다섯 번이나 한군과 큰 싸움을 벌여 모두 다 크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목표인 한성을 함락시키는 일은 지지부진해졌다.
이를 확인한 제위왕은 곧 전기를 주장 손빈은 부장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지난 계릉 전투 때의 전략을 사용하여 한나라 수도인 신정을 직접 구원하는 대신 위나라의 동쪽 중심지인 대량을 공격하여 한나라의 포위를 풀고 회군하는 위군을 상대하는 전략을 짠다.

3.3. 방연의 반격


방연은 13년 전 패배로부터 교훈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와 싸우는 와중에도 제나라의 상황에 대해 시시각각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결국은 제나라를 제압하는 것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방연은 제군이 참전한다면 신정을 직접 구원하기 보다는 제나라에서 가까운 대량 지역을 공격하리라 예상하여 미리 이 자리에 태자 신의 부대 이끄는 별동대를 배치하여 제군을 견제하고 있었고 실제로 제군이 침공해 온다면 빠른 시간에 한나라에서 철수하여 대량에서 제군과 맞서 싸울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리고 제군의 움직임은 방연의 예상과 들이맞았다. 태자 신은 대량에서 제군과 싸워 결국 대량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방연은 재빠르게 회군하여 교착 상태에 빠진 제군을 엄습한 것이다. 제군은 이러한 방연의 움직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군은 결국 방연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군을 추적하던 방연에게 또 다시 희소식이 전해졌다.
제군의 기강이 완전히 무너져 이미 10만이 넘는 제군 중 절반이 넘는 5만 명 이상이 도주하였고 남은 병사들도 계속해서 도망치는데 제군의 지휘부는 이를 수습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제군의 일종의 모랄빵을 얻어 맞은 듯 보였고 이러한 제군을 추적하여 전멸시키거나 대장을 사로잡는다면 13년 전 계릉의 싸움을 완벽하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승기를 확신한 방연은 태자 신과 함께 조를 나누어 강행군을 하며 제군이 도주한 마릉 방면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방연은 솥단지가 줄어가는 것을 보며 병력 수가 줄었음을 확신했고 보병은 버리고 정예 기병만을 이끌고 이틀 걸릴 거리를 하루에 달려 제나라 군사를 바짝 뒤쫓았다. 그러나 이것은 손빈이 방연을 속이기 위한 계책이었다.

3.4. 방연이 이곳에서 죽다, 앉은뱅이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


이후 손빈은 방연이 저녁 무렵이면 마릉에 도착할 것을 예상했다. 마릉은 길이 좁고 양쪽에는 험한 산이 많아 매복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이에 손빈은 큰 나무를 골라 껍질을 벗겨놓고 다음과 같은 글을 쓰게했다.

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을 것이다.(龐涓死於此樹之下)

그러고는 활을 잘 쏘는 자들을 뽑아 1만 개의 쇠뇌를 준비시킨 뒤 길섶에 매복시키고 "밤에 불빛이 보이거든 일제히 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날이 어두워질 무렵 방연의 군대가 마릉에 도착하고 나무에 글이 써져 있는 것을 본 방연은 불을 비추게 했다. 그 순간 제나라 군사의 쇠뇌가 일제히 발사되었다. 위나라 군사는 큰 혼란에 빠져 뿔뿔이 흩어졌고 방연은 자신의 지혜가 부족하여 패배한 것을 깨닫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며 말했다.

"결국에는 그 녀석의 이름을 떨치게 했구나,"


4. 결말


제나라 군사는 승승장구하여 남은 위나라 군사들을 전멸시키고 위나라 태자 신(申)을 사로잡은 후 돌아왔다.[12] 이 전투의 패배로 초창기 전국7웅의 패자를 자임하던 위의 위상은 흔들렸으며, 다시는 천하쟁패를 노리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승전국인 제는 새로운 패자로 부상하게 된다. 또한 이 전투가 벌어진 후, 함곡관 안에 웅크리고 있던 진의 5만 군사가 상앙의 계략으로 하서땅을 점령하면서 약소국의 위치에 있던 진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1] 지도를 보면 초나라의 크기가 압도적이고 위나라는 상대적으로 작아보인다. 하지만 초나라의 영토 대부분의 인구밀도는 낮았던 반면에, 위나라의 인구밀도는 매우 높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국력은 위나라가 가장 강했다.[2] 원래 위, 조, 한 삼국은 진(晉)나라의 가신이었다. 서로 힘을 합쳐 지씨 등의 다른 유력 가신을 몰아내고 진나라 군주를 내쫓고 제후로 인정 받은 국가이기에 서로 사이가 좋았다. 주천자에게 다 같이 주청하여 제후 지위를 얻어내기도 했고 동질 의식이 있어 서로를 자극하려 하지 않았으나 혜왕 대에 이르러선 이러한 동질 의식이 약해지기도 했고 압도적으로 잘 나가는 위나라를 두나라가 경계하기도 하여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3] 이미 한 세대 전에 위무후가 조나라의 왕위쟁탈전에 끼어들어 조나라를 공격하여 삼진연합 파기의 빌미를 제공했고 위무후 사후 위혜왕과 공중 완이 왕위쟁탈전을 벌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나라와 한나라가 연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해 위혜왕을 몰아내려고 했었다.[4] 북쪽의 중산 지역도 문후 시절 정벌할 때 본토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회의적인 의견이 있었는데 이를 지키기 위해 훗날 위무후가 되는 태자가 봉지로 갖고 있었다. 그리고 위 문후 사후 위 무후가 급히 안읍으로 귀환하면서 영향력이 약해지고 남아있던 현지 세력이 중산국을 복권한다. 그리고 위나라가 산서지방에 대한 영항력을 상실하자 결국 조나라에게 다시 멸망한다.[5] 역시 마찬가지로 문후 시절 서문표를 보내 열심히 발전시킨 업군 일대는 후에 조나라가 수도를 진양에서 업군 일대인 한단으로 옮겨버려 점거해 버림으로써 조나라만 좋은 일 시켜준 꼴이 되어버렸다.[6] 맹자에서 양혜왕이라고 불리며 어리석은 군주의 대명사로 까이는 사람이 바로 이 위혜왕이다. 맹자의 눈에는 위혜왕이 국력신장을 한다며 하는 일이 모두 근본적인 원인에는 눈을 감고 행하는 근시안적인 정책이기에 오십보백보라며 신나게 깐 것이다.[7]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보수세력의 기득권을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계속 새로운 인재를 영입했기 때문에 새로 영입된 인재들에게 포상을 주려면 영토를 확장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는 주변국들이 위나라를 더욱 위협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어그로를 끄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그러한 확장사업 사업이 실패했을 때 돌아오는 재정적 손해와 내부적 갈등에 대해선 망각한 처사였다.[8] 초장왕에게도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가 내려오는데 신하가 간하자 바른 정사를 행한 점, 주색잡기의 이유가 실제는 충성스러운 신하와 간신을 가려 내기 위함이었다는 점 등 인물의 이름을 빼고는 100%일치한다.[9]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는 동안 그보다 훨씬 강했던 제나라는 양릉 전투에서 기세가 꺾이고 강화를 맺었기에 위나라의 뒷통수를 칠 수가 없었다. 후에 제위왕와 위혜왕 만나 서로 왕호로 부르며 격식을 올렸다는 점에서 볼때 싸움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다.[10] 소설 열국지에서는 방연이 전기와 손책을 몰아내기 위해 제나라 상국 추기에게 이간질을 했기 때문에 제위왕의 의심을 사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13년이 지나 제위왕이 죽고 제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복직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창작이다. 제선왕은 마릉전투가 있은 후 19년이 지나서야 왕위에 올랐다. 제선왕이 초기 훌륭한 정치를 하다 후에 방탕해져 제나라의 패권이 망가지는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손빈의 은퇴와는 상관이 없는데 열국지에서는 제선왕이 승전이후 오만하게 행동하여 손빈은 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고 전기는 실망하여 실의 속에 죽었다고 되어있다. 작가의 실수이거나 손빈의 드라마를 위한 극적 장치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역사를 무시한듯.[11] 5만 명 정도로 추측된다.[12] 사로잡힌 날 밤 태자 신은 욕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칼을 빼 자결했다. 원래 태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손빈은 그의 죽음을 듣고 탄식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