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안칭
1. 개요
중국의 군인, 학자, 언론인. 마오쩌둥의 차남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23년 11월, 호남성 창사에서 마오쩌둥과 양카이후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직후 마오쩌둥은 1차 국공합작이 실행됨에 따라 중국 국민당에 가입했으나 국민당 우파와의 갈등으로 광저우에서 돌아와 고향인 호남에서 사업을 행하고 있었다. 1927년 국공결렬이 일어남에 따라 마오쩌둥은 취추바이의 지시에 따라 지하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마오안칭은 형 마오안잉과 함께 어머니의 고향인 호남성 반창에서 양카이후이 밑에서 그런대로 잘 자랐다. 그들의 외할아버지인 양창지가 호남성에서 존경받는 학자였기 때문에 관료나 경찰들도 양카이후이 가족들을 건드리지 않았으며 이때 삼촌 마오쩌민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러나 1930년,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권력을 잡은 리리싼이 마오쩌둥에게 좌경적인 폭동노선을 지시함에 따라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1930년 8월, 마지막으로 마오안잉, 마오안칭 형제와 양카이후이를 만나본 후 창사 폭동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당했다.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은 양카후이에게 1000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1930년 10월 24일, 양카이후이는 맏아들 마오안잉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마오안칭은 군인들을 움켜쥐고 저항했다가 군인들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뇌진탕을 일으켰고 이후 평생 그에게 장애를 가져다 줄 뇌손상을 입었다. 허젠은 양카이후이에게 남편과 의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거부하여 1930년 11월 4일 총살당했다.
이후 마오안잉, 마오안칭, 마오안룽 삼형제는 외할머니의 집에 살면서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31년 2월 15일, 춘절 준비를 위해 경찰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삼촌인 마오쩌민이 마오안칭 형제를 안전한 상하이로 데려와 자신이 키우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마오안칭은 이름을 양융서우로 고친 후 상하이로 이주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국제 조계지 안에서 중국 공산당이 운영하는 다퉁 유치원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리리싼, 차이허썬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자식들과 함께 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막내 동생인 마오안룽이 이질에 걸려 사망했으며 1931년, 공산당 특무인 구순장이 국민정부에 체포되어 공산당 지도부의 은거지에 대해 실토하면서 마오쩌민과 그의 부인 첸시쥔은 홍콩을 거쳐 강서 소비에트로 도주했다. 천애고아나 다름없던 마오안칭 형제를 챙긴 것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특과 공작원이자 유치원 원장인 둥젠우였고 그가 거두어 잠시 키웠다. 하지만 둥젠우도 체포를 피해 우한으로 달아나게 되면서 마오안칭은 둥젠우의 전처인 황후이광의 집에 맡겨졌다.
2.2. 소련 유학과 귀국
1932년, 황후이광의 집에서 나온 마오안칭 형제는 4년이나 길거리를 떠돌면서 앵벌이와 구걸로 살았다. 신문지 팔이를 하기도 했고 버려진 절간에 들어가 재밌는 이야기를 팔면서 벌어먹기도 했다. 1936년, 상하이 당조직이 마침내 마오안칭 형제를 발견하여 거두었고 코민테른에 그들의 상태에 대해 보고했다. 이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들을 소련으로 보내라고 지시했고 둥젠우가 다시 파견되어 영국령 홍콩, 마르세유, 파리를 경유하여 이들을 소련으로 데려갔다. 마오안칭은 6개월 간의 여행 끝에 1936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세르게이 윈서우라는 이름으로 이바노보 고아원에 들어갔다. 소련에 체류하는 동안 캉성이 그들을 돌봐주었다. 소련 체류 시절에 공부 대신에 체스를 두거나 러시아 금발미녀를 꼬시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1938년 봄, 마오쩌둥의 새 부인인 허쯔전을 만나게 된 마오안칭과 마오안잉은 허쯔전을 어머니라 부르면서 매우 잘 따르게 되었다. 1941년 1월이 되어서야 마오쩌둥은 자식들에게 관심을 보이게 되었으며 12년만에 편지를 보내 정치가 아니라 자연과학연구에 초점을 맞추어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얻고 행복지라는 조언을 하였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인 1947년 3월, 마오안칭은 여동생 쟈오쟈오, 양어머니 허쯔전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소련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미 중국어를 모두 잊고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얼빈에 도착한 마오안칭은 현지 공산당원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마오쩌둥의 지시로 시골에 내려가 돼지와 당나귀를 돌보며 살았다. 1949년, 22년 만에 아버지인 마오쩌둥과 재회하게 되었다. 소련 전권대사 이반 코발레프가 마오안칭과 쟈오쟈오를 마오쩌둥에게 소개했고 마오안칭과 쟈오쟈오는 마오쩌둥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호남성 사투리로 말을 걸었지만 호남성 사투리는커녕 중국어조차 몰랐던 마오안칭과 쟈오쟈오는 웃기만 했다. 이후 1949년 9월, 베이징 중난하이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허쯔전을 어머니로 잘 따른 것과 달리 장칭과의 사이는 서먹했다. 이후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바탕으로 인민일보 러시아어 통역사로 일했다.
2.3. 정신병이 심해지다
1950년, 형 마오안잉이 6.25 전쟁에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고 마오안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원래도 군인들의 구타로 뇌손상이 있었던 마오안칭은 신경쇠약증과 만성적인 불안증세에 시달리며 불면증을 호소했고 방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혼잣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오안칭은 경비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마오안칭은 중좌계급을 받고 당 중앙위원회 산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로 옮겨져 그곳에서 번역을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마오안칭은 10여권의 책을 번역하고 논문 10여편을 발표했으나 걸핏하면 상관에게 욕설을 퍼붓고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등 정상적인 업무가 불가능하였다. 이에 마오쩌둥과 장칭이 그를 중난하이에 데려와 마오안칭에게 자아비판을 시켰다. 의사들은 그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고 더 이상 마오안칭이 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 마오안칭은 장칭과도 계속 다투었는데 장칭이 자신을 비판할 때마다 중국말을 모른다는 핑계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장칭은 매우 화나게 하는 재주를 터득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마오안칭을 다른 도시에서 치료를 받게 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 마오안칭은 다롄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쉬라는 매우 예쁜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자 장칭은 이 관계를 반대하였다. 결국 마오안칭은 소련으로 보내져서 치료를 받았다. 쉬 간호사는 마오안칭과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 소련에서 마오안칭은 쉬 간호사에게 계속 연애편지를 보냈으나 장칭은 이것을 가로채버렸다. 1954년, 각료들이 쉬 간호사를 마오안칭에게 보내주자고 제안했으나 장칭은 이를 극구 반대했고 결국 쉬 간호사는 1955년, 다롄의 한 청년과 결혼했다."마오 주석이 위대하다고 했지? 그럼 나는 주석 아들이니까 나도 위대한 건가?"
마오안칭은 이번에는 러시아 간호사와 사랑에 빠졌다. 이에 장칭은 마오안칭을 소련에 눌러앉게 하기 위해 러시아 간호사와 마오안칭이 결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 간호사에게 보석과 옷감을 보내면서 결혼을 부추겼으나 마오안칭이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면서(...) 관계는 깨졌다. 결국 마오안칭은 소련에서의 치료에서 큰 차도를 보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중국에 돌아온 후 다롄의 군대 요양원에 입원하여 형수 류쑹린과 그녀의 동생 사오화가 마오안칭을 간호했는데 마오안칭은 사오화에게 반하였다. 장칭은 자신이 미워하는 류쑹린의 힘이 세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오안칭과 사오화의 연애를 방해하려 했으나 마오쩌둥에게 들키는 바람에 실패했고 1960년 마오안칭은 사오화와 결혼하였다. 마오쩌둥은 마오안칭과 사오화를 창사에 보내 양카이후이의 친척들을 만나게 하였다. 1962년, 상태가 많이 좋아진 마오안칭은 사오화와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뇌질환이 완전히 치료되진 않았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렇게 자손을 빼앗겨야만 하는 것인가?"라고 중얼거리며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2.4. 문화대혁명
한동안 마오안칭은 아내와 단란하게 살았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966년 7월, 장칭은 중앙문혁소조의 동료인 천보다, 캉성과 함께 베이징대학에서 정치 토론회를 개최하고 사오화를 맹비난했다.
당황한 천보다가 장칭을 말리려 했지만 장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천보다가 장칭의 어깨를 잡고 그만하자고 강하게 말하자 장칭은 "이것은 사실이에요. 나는 지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이 여자와 이 여자의 가족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가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겁니다. 그 여자 때문에 나는 다시 심장질환이 악화되었던 것 입니다."라고 소리쳤다. 이날 대회는 사오화와는 전혀 관계도 없는 대회였다. 오죽하면 몇몇 홍위병이 "혁명적 관점에 서 있지 않다."고 중얼거리며 장칭을 비판할 정도였다."그 여자는 진짜 며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여자의 어머니는 정치적 사기꾼이었습니다! (...) 나는 그 여자를 며느리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마오 주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사오화는 마오안칭이 정신질환을 앓는 틈을 타서 그와 동침했습니다. 그러고는 결혼으로 낚은 거죠!"
1970년, 사오화는 베이징 301호 병원에서 마오신위를 낳았다. 장칭은 경악하여 공군참모총장 오법헌에게 지시하여 병원을 격리하고 병신 절화를 끊고 사오화의 친정집 전화까지 바꾸게 하였다. 70일이 지나도 사오화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한 마오안칭은 사오화와 아기가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고 충격을 받아 정신질환이 매우 심각해졌다.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는 장칭이 그의 정신상태를 이유로 부르지 않아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였다. 이후 마오쩌둥을 추모하는 장칭의 화환에 사오화, 마오신위와 함께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후 화궈펑, 예젠잉의 반격으로 장칭이 체포되자 사오화는 장칭을 고발하는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했다.
2.5. 말년
1988년 12월, 마오쩌둥 탄신 95주년 기념식에 가족들과 함께 참석했다. 정신병이 호전된 후에는 마오쩌둥과 양카이후이 기념사업에 참여했으며 기념문집 출판, 선전영화 제작 등에 참여했다. 가족들과 함께 대장정의 길을 순례하기도 하였다.
2007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외동아들인 마오신위가 영정을 운구하고 있다.
3. 참고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장칭 평전, 로스 테릴, 교양인.
[1] 이때 사오화는 장칭이 마오안칭을 원숭이를 가두는 우리에 가두어 학대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