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추바이

 





[image]
'''중국 공산당 임시 중앙위원회 총서기'''
'''본명'''
구무묘(瞿懋淼), 이후 구상(瞿雙) [1]
'''한문'''
瞿秋白
'''한국식 독음'''
구추백
'''영문'''
Qu Qiubai
''''''
웅백(熊伯), 이후 추백(秋白)
'''출생'''
1899년 1월 29일 청나라 강소성 무진현
'''사망'''
1935년 6월 18일 중화민국 복건성 장전현
'''국적'''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소비에트공화국 [image]
중화민국 [image]
'''학력'''
베이징대학(청강생), 외교부 소속 러시아어학교
'''직업'''
언론인, 정치가, 문필가
'''종교'''
무신론
'''총서기
재임 기간
'''
(사실상)2대[2] 1927년 8월 7일 ~ 1928년 7월 11일
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입문까지
2.2. 중국내에서의 혁명 활동
2.3. 최후
3. 후일담
3.1. 문혁 시기의 격하와 복권
4. 저서
5. 여담
6. 매체에서
7. 관련문서
8. 참고문헌


1. 개요


취추바이는 구추백이라고도 한다. 중화민국 시절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언론인, 작가, 번역가로, 본명은 구무묘, 이후 구상, 자는 웅백, 또는 추백이었다. 1899년 강소성 무진현에서 태어나 1920년 러시아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블라디미르 레닌을 인터뷰하는 등 소비에트 러시아의 형편을 중국에 널리 알리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192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1927년에는 총서기가 되어 공산당을 영도했다. 그러나 연이은 폭동 전략의 실패로 1928년 좌경맹동주의자, 교조주의자로 비판받고 총서기직에서 물러났다. 1931년경에는 리리싼 노선 비판을 통해 파벨 미프, 왕밍, 보구28인의 볼셰비키들이 당권을 장악하면서 그동안 유지하고 있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정치국 위원 등 당의 모든 지도적 위치에서 해임되었다. 1935년 국민당의 손에 붙잡혀 죽음을 맞이했다.

2. 생애



2.1. 유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입문까지


1899년 강소성 무진현(오늘날 장쑤성 창저우시) 태생. 말에서 말까지 300년 동안 관리를 지낸 신사계급 선비 집안에서 6남 1녀 중 장자로 태어났다. 조부 구예소는 광서 연간에 호북성 포정사[3]에 임하였고 백부 구세호(瞿世琥, 1866~1930)는 저장, 소산, 상산의 현 지사를 역임했다. 그의 아버지 구세위(瞿世玮, 1875~1932)는 서화와 검술, 의학에 능하였으나 아편 중독자로 일가를 돌보지 않아 백부가 일가를 이끌었다. 1903년 조부가 죽고 기울기 시작한 구씨 집안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풍비박산나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가출했고 청말 고위 관료의 딸이며 시에 능했던 어머니는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릴 길이 없어 1916년 2월 자살했다.[4] 1915년 창저우부중학(이 때 훗날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초대 서기가 되는 장타이레이와 함께 중학을 다녔다)을 졸업한 뒤 베이징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사촌형 구순백(瞿纯白)의 도움을 받아 한커우의 우창 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이후 마찬가지로 사촌형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학비로 어려움을 겪었고 이 때문에 1917년 외교부가 개설한 학비를 면제해주고 러시아 공사관에 유급채용까지 보장해주는 러시아어 학교(아문수료관)에 입학했다. 그는 이 곳에서 줄곧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나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북경 지역의 학생운동 지도자들 중 하나로 떠오른다. 5.4 운동의 와중에 그는 러시아어 학교의 학생총대표에 선출되었고 북경대중학교학생연합회(北京大中学校学生联合会)에서 활동한다. 1920년 초에는 천두슈, 리다자오 등이 북경대에서 동년 3월 조직했던 마르크스주의연구회에 가입해 마르크스주의를 접한다. 이때 취추바이는 톨스토이 문학에 빠져 있어서 평론가 겸 작가인 정진택과 함께 잡지 <신사회>를 발간하고 문학연구회 지도 간부로 활동했다. 그 해 8월에는 러시아어학교를 졸업, 상하이의 시사신보(时事新报)와 베이징의 신문 신보(晨報)에서 2천원의 연봉을 제시하자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게 된다. 모스크바에 파견된 취추바이의 임무는 10월 혁명 이후의 소련을 살펴보고 중국에 알리는 것이었는데, 번역가로 활동하며 톨스토이 작품을 번역할 정도의 러시아어 실력을 가졌던 취추바이는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심지어 그는 블라디미르 레닌을 최초로 인터뷰한 중국인 기자였으며,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레프 톨스토이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톨스토이의 딸 소피아와 함께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생가에 방문했으며, 오페라 가수 표도르 살리아핀이 푸시킨의 시를 노래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으니 매우 감격스러웠을 것이다.[5] 이 당시 10월 혁명 3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인터내셔널가를 처음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이후 중국어 번안 가사를 쓰게 되었다고 전한다. 모스크바에서 머무는 기간 동안 그는 ⟨공산주의인간화⟩, ⟨소비에트러시아의 경제문제⟩ 등 수십편의 문건을 발표하고, 특파원 수기인 《아향기정(饿乡纪程)》, 《적도심사(赤都心史)》를 저술하였다.
1921년 가을에는 코민테른이 운영하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이 중국반을 개설하자 그곳의 통역사 겸 조교수가 되었다. 이 해 7월 1일, 중국공산당이 창당된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제3차 세계대회의 중공 대표로 머물던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서기이자 중학교 동창 장타이레이가 그에게 중국공산당 입당을 권유하였다. 그는 입당 이후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취추바이는 번역과 저술 활동을 하며 극동민족대표대회 및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1922년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중국반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60여명의 유학생들을 지도했다. 동년 11월, 천두슈가 중공 대표로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에 참석하였을 당시 그는 통역을 맡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귀국해서 당에 공헌할 것을 천두슈에게 요청받아 그 청에 응해 1923년 1월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온다.

2.2. 중국내에서의 혁명 활동


1923년 1월 귀국과 동시에 취추바이는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에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중공의 중앙 기관지였던 ⟨신청년(新靑年)⟩ 발행 업무를 맡아 편집장을 역임하게 되며, ⟨전위(前锋)⟩의 주필, 그리고 ⟨향도(向导)⟩의 편집자로도 활동했다. 중공 최초의 일간 기관지 열혈일보의 창간을 주도한 그는 곧 상하이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광저우에서 열린 1923년 6월 중국 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대표자대회는 6월 12일부터 6월 20일까지 열렸는데, 대회 기간중인 6월 15일 취추바이는 인터내셔널가의 중국어 번안 가사를 최초로 작사,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해 등중하와 함께 상하이 대학을 설립하여 교무장 겸 사회학과 주임이 되었다. 이 때 상해대학의 학생이었던 첫 부인 왕검홍과 1924년 1월에 결혼하게 되지만 채 반 년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인해 사별하고 만다.
1924년 1월에는 제1차 국공합작이 이뤄지자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대회의 선언문을 기초하였고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에 지명되었으며, 7월에는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취추바이가 국민당 중앙이 자리잡은 광저우와 상하이를 오가며 국민당 정객 심정일의 집에서 기거하였을 당시 심정일의 아들인 화가 심검룡의 아내이자 첫 부인과 마찬가지로 상해대학 학생이었던 양지화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양지화는 심검룡과 이혼하고 그 해 11월 7일 취추바이와 결혼했는데, 심검룡은 이 사실을 공인하는 광고를 ⟨민국일보⟩에 게재하면서 자신과 취추바이의 우정은 변치 않을 것이라 공언하는 대범한 모습을 보인다. 이 즈음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팽술지 문제로 천두슈와 크게 싸웠다. 1923년 귀국 이래 취추바이는 지속적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고[6] 27년에는 중앙선전부 부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중국공산당의 유력한 지도자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1927년 4월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분공에 나선데 이어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의 우한정부마저 분공을 결정하여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중국 공산당은 난창 폭동을 일으켰지만 처참하게 실패했다. 직후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였던 8.7 긴급회의에서 총서기 천두슈가 멘셰비키, 우경 기회주의자로 비판받고 전 선전부장 팽술지와 함께 해임되자 취추바이는 임시 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만 28세였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당시는 임시 총서기 겸 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장)로서 1년 남짓한 임기를 보내는 동안 취추바이는 여러 건의 맹동주의적인 폭동과 파업을 기획했으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일단 처음으로 그가 기획했던 9월 9일의 추수폭동은 실패했다.[7]
허나 취추바이의 당중앙은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5기 임시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 지속적인 무장봉기를[8] 주장하며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했고 국민당 좌파를 더 이상 칭하지 말고 소비에트를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첨언하자면 이는 1924년 6월부터 7월까지 열린 코민테른 제5차 세계대회에서 이전까지 시도하던 사회민주당 상층부와의 통일전선을 폐기하고, 사회민주당을 부르주아 제3정당, 파시즘의 한쪽 날개로 정의한 영향이었을 것이다. 이 대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과 동맹한 니콜라이 부하린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문건을 발표하여 레프 트로츠키를 비판하고 '모든 공산당의 조직적인 볼셰비키화'를 결의한다. 이후 1926년 11월 22일부터 12월 16일까지 열린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제7차 전체회의에서 그때까지 코민테른 의장을 맡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가(당시 트로츠키와 동맹하고 있었다) 실각당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중국 정세에 관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제7차 전체회의 결의⟩문건을 발표한다. 스탈린의 주도로 작성된 이 문건을 보면,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관계를 끊을 것, 농민대중을 무장시킬 것, 혁명정부를 건설하는 문제, 광범위한 노농대중 사이에 조직을 형성할 것 등을 결의하고 있다. 1927년 5월 열린 제8차 전체회의의 ⟨중국 문제에 관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제8차 전체회의 결의⟩ 또한 대동소이했으나, 우한정부에 참여해야 한다는 결의 내용과는 다르게 동년 7월 우한정부가 분공을 결정하며 이 결의는 중공 중앙에 의해 기각되고 만다.
그러나 11월 11일의 우한 폭동과 12월 11일의 광저우 폭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그 와중에 장타이레이가 사망하는 등 당에 막대한 손실만 입혔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취추바이는 코민테른에서 좌경맹동주의자로 비판받았고 1928년 6월부터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6전대회)에서 샹중파, 리리싼 등의 공격을 받았다. 7월 취추바이는 총서기 자리를 샹중파에게 넘겨주고 모스크바에 남았으며 이후 당 노선은 샹중파-리리싼-저우언라이가 영도하였다. 6전대회에서 취추바이는 샹중파, 쑤자오정, 저우언라이, 리리싼, 장궈타오, 펑파이 등 23명과 함께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그해 7월에 열린 코민테른 제6차 세계대회에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원에 선출되었으며[9] 코민테른의 중국 대표단 단장 자리를 유지했다. 6전대회에서 취추바이가 제출한 ⟨중국혁명과 중국 공산당⟩은 중요한 문헌자료로 남아있다. 참고로 6전대회에서 코민테른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한 부하린이 <중국공산당과 공산당의 임무>라는 정치문건을 발표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혁명의 현 단계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귀국하는 시점까지 그는 국제레닌학교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서 강의했다. 이 때 그는 소련 비밀경찰과 연계되어 있어 당시 손중산대학 내에 존재하던 중국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는 당시 손중산대학 교장 파벨 미프와 그 제자 왕밍 등이 시작한 '장수-저장 조직'이라는 중국인 트로츠키주의 조직에 대한 숙청을 그가 반대하였기에 그들과 사이가 악화되었다는, 거의 상반되는 진술도 존재한다.
1930년 7월에는 기회주의자들과 개인주의자들을 비호하였다는 당 내의 비판을 받아 코민테른 중국 대표단장에서 해임되어 8월 26일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귀국했다. 대공황에 고무된 리리싼 등이 리리싼 노선을 전개, 1930년 7월 무리하게 창사 폭동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직후였다. 상해에 도착한 취추바이는 9월 중국공산당 6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3중전회)를 열어 리리싼 노선에 대한 비판을 진행하나 그것이 불철저하다며 '조화주의'라 비판받는다. 1931년 리리싼을 불신하게 된 코민테른에서 파벨 미프가 파견,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귀국한 미프의 제자들인 28인의 볼셰비키들을 지도해 6기 4중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샹중파는 총서기 자리를 진소우에게 넘겨주었으며 취추바이도 조화주의자, 좌경 교조주의자로 왕밍, 보구 등에게 비판당하고 리리싼과 함께 덤터기를 쓴 채 중앙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왕밍이 당을 장악하면서 취추바이는 당내의 모든 지도적 자리에서 쫓겨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폐결핵을 얻었다.
당의 활동 대오에서 완전히 물러난 취추바이는 마오둔, 루쉰과 깊이 교류하면서 문예비평, 번역 등 창작활동과 문예운동에 전념하는데, 좌익작가연맹에서 활동하며 주요 사업이었던 대중문예 운동을 조직했다. 1933년 연말까지 상하이에서 번역가, 문필가로 활동하다 국민당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이듬해 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으로 떠난다. 1934년 2월 5일 루이진에 도착한 그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소비에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 인민교육위원회 위원, 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 교육부 부장, 선전부 부장을 맡는다.

2.3. 최후


1933년 10월 국민당의 제5차 초공작전이 발동되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국민당의 토치카 전술과 화력에 밀려 멸망의 위기에 몰렸다. 이 때문에 주력홍군은 1934년 10월 대장정의 길에 올랐으나 폐결핵을 앓던 취추바이는 대장정을 따라가지 않고 잔류하였다.1935년 2월, 국민당군이 날로 육박하는 와중 취추바이의 폐결핵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공산당은 취추바이를 홍콩이나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취추바이는 양백대의 임신한 부인 장량, 중앙위원인 60세의 하숙형, 여전사 2명과 함께 복건성 용암지방으로 피난한다.
하지만 2월 24일, 일행은 장정현 수구에서 송희렴(宋希濂, 1907년 4월 9일 ~ 1993년 2월 13일)이 이끄는 국민혁명군 제36사단 병력에게 체포되어 장정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숙형은 국민당군에게 현장에서 총살되었고, 체포된 취추바이는 가명을 둘러대며 자신이 루쉰 가족을 만나러 가는 중인 의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4월 10일 장정 감옥에 취추바이가 수감 중이라는 제보가 들어왔고, 국민당은 체포된 포로들을 고문해서 위장한 취추바이의 정체를 밝혀냈다. 국민당 측은 사람을 보내 공개 전향 기고나 자백서를 쓰지 않아도 되며, 전향시 남경 국민정부 소속의 통역사로 채용하여 뒤에는 대학에서 평생 원하는 연구에 종사하도록 보장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괜찮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취추바이는 전향을 거부했다.[10]
이 때, 그는 전향을 권하는 국민당 측 인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人爱自己的历史,比鸟爱自己的翅膀更厉害,请勿撕破我的历史。

인간은 자기의 과거를 소중히 여긴다오. 새가 자신의 날개를 여기는 것 보다 더 지독하지. 청하건대 내 과거를 찢어 부수지 마시게.

1935년 6월 18일 새벽, 장제스는 취추바이를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6월 18일 아침이 밝았다. 오전 8시, 36사단 사단장 송희렴이 옥에 들어와 총살 명령서를 낭독했다. 송희령은 취추바이의 상해대학 교수 시절 제자였으니 이 어찌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으랴. 낭독이 끝나자 그는 탈고되지 않은 시가 있으니 쓰게 해달라며 종이와 붓을 요구했다. 송희렴이 지필묵을 내주자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어젯밤 꿈속에서 산길을 걷고 있노라니 막 노을이 지려는 가운데 한기가 엄습했다. 문득 당나라의 시, ⟨석양명멸난산중⟩의 한 구절이 떠올라 거기에서 인용, 시를 한 수 짓는다.'

夕陽明滅亂山中

落葉寒泉聽不窮

已忍伶俜十年事

心持半偈萬緣空

석양이 난산에 명멸하니

낙엽지는 소리, 샘물 흐르는 소리가 제각기 다르구나.

외롭게 견디어온 10년의 세월

마음 닿지 않아 모든 인연이 허망하여라.[11]

시를 탈고한 취추바이는 차분하게 동료 수감자를 바라보며 "인생에는 작은 휴식이 있고 큰 휴식이 있소. 이제 나는 크게 쉬러 간다오."라 말했다고 한다. 그를 인솔한 사단장 송희렴은 죽음을 앞둔 옛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표했다. 옛 제자는 형장인 장정현 중산공원의 정자 앞에서 은사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이 그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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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렴은 취추바이를 풀어주고 자유롭게 중산공원을 산책하도록 한 뒤 만찬과 술을 준비했다. 산책에서 돌아온 취추바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全园为之寂静,鸟雀停息呻吟. 信步至亭前,已见菲菜四碟,美酒一甕.

공원이 온통 조용하니, 새들도 울기를 멈췄다. 정자로 걸어오는 길에, 소박한 요리 네 접시, 그리고 맛좋은 술 한동이를 보았네.

그 길로 그는 홀로 술을 곁들인 만찬을 즐겼다. 술을 반 동이 비운 뒤에는 크게 웃으며 농담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人之公余稍憩,为小快乐 夜间安眠,为大快乐 辞世长逝,为真快乐!

때때로 쉬는 것은, 작은 쾌락이요, 밤에 때맞추어 자는 것은 큰 쾌락인데, 때맞추어 죽는 것은, 진정한 쾌락이니라!

그는 이 와중에도 신색(얼굴빛)이 무변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친 그는 미소를 지으며 형장으로 출발했다. 발길을 옮기면서 그는 수갑을 찬 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마지막 담배가 다 타자 러시아어로 인터내셔널가붉은 군대의 노래를 부르더니 이어서 "중국공산당만세!", "중국혁명승리만세!", "사회주의만세!" 등 각종 구호들을 외친다. 중산공원 내의 작은 언덕 나한령이 그가 이승과 작별할 자리였다. 언덕에 오른 그는 갑자기 풀 위에 무릎을 꿇는다. "이 자리도 참 좋네." 집행관에게 그가 말을 건넸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취추바이는 집행관이 뒤통수에 총을 쏠 때까지 편히 앉아서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유해는 당일 오후 언덕 근처에 매장되었다. 향년 만 36세로, 공산주의 정치활동을 시작한 지 15년째 되는 해였다.
한 혁명가의 육신은 이렇게 스러졌으나, 그의 최후를 두고 루쉰은 이렇게 썼다.

구추백의 혁명정신, 그리고 당과 인민을 위하는 숭고한 품격은 죽일 수 없으니, 영생하는 것이다!


3. 후일담


그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1938년, 대숙청 와중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스탈린의 중국 공산당 숙청 계획 명단에 오르기도 했으나 해당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적은 없다.
신중국이 건설된 이후 1950년에는 취추바이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마오쩌둥이 발문을 썼다. 그는 취추바이를 높이 칭송하였는데, 1962년 최초로 전문이 출간된 그의 자서전을 읽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이는 적에게 자수하고 전향한 글이나 다름없다. 왜 공개적으로 비판 선전하지 않는가"라며 크게 화를 낸 것을 생각해 보면 그전까지 취추바이의 자서전에 진위 논란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한 일이다. 그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혁명의 곤란한 나날에 그는 영웅적 입장을 견지하며 굴복하느니 차라리 망나니의 칼에 죽기를 택하였습니다. 이러한 인민을 위해 일하는 정신, 이러한 불굴의 의지는 그가 남긴 글 속에 남아 영생할 것이며,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1954년에는 호남성 공안청에서 취추바이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였고 동년 10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13국에 특별조사단을 설치했다.
1955년, 그의 유해가 중국혁명의 열사들이 묻힌 팔보산 혁명공묘로 옮겨졌다.
1964년, 장쑤성 창저우시에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관람객을 받기 시작했다.
1964년 10월 19일, 10년에 걸친 조사와 재판 끝에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이 보고서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이 보고서는 1979년까지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3.1. 문혁 시기의 격하와 복권


1964년,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에 의해 변절자로 몰렸다. 위에서 언급한 자서전에 대한 비판이 공개된 것은 강소성에 있는 그의 생가가 관람객을 받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생가는 문을 닫았다. 1967년에는 홍위병들이 몰려와 팔보산 혁명공묘에 있던 그의 조각상을 부수고 무덤을 파헤쳤다. 이 와중에 그의 양친의 묘 또한 파헤쳐졌다.
1976년 문혁이 끝나고 4인방이 타도된 직후 그의 가족들이 중공 중앙에 재평가(평반)를 청원하였다. 1979년,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기위)는 취추바이 문제를 재심하는 임시 기구를 꾸려 조사를 시작하였다. 1980년 1월 7일부터 25일까지 당시 중공중기위 제3서기였던 후야오방이 의장으로 임하여 열린 중공중기위 제2차 전체회의에서 ⟨유소기, 구추백동지의 복권 및 평반보고(关于刘少奇、瞿秋白同志的复查平反报告)⟩문건을 동년 2월의 중공 11기 5중전회에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2월 23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중공 11기 5중전회에서는 류사오치의 복권만 심의하였으나 이 때 취추바이도 사실상 함께 평반, 복권된다.
1982년 9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12차 대회에 제출된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업무보고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구추백동지가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된 후 소위 '자수하고 전향하였다는' 문제에 대하여 새롭게 조사하였습니다. 구추백동지는 우리 당의 초기 저명한 영도자들 중 한명이었기에 당의 내외에서 그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그의 체포 전후에 대해 사실적으로 조사하여, 구추백동지가 체포 이후 불요불굴하는 투쟁을 견지하였기에 그로 인해 적에게 살해당했음을 밝혔습니다.

이 시점에서야 취추바이는 완전히 복권되었다.
2009년 9월 10일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중앙조직부, 중앙통일전선부, 중앙문헌연구실, 중앙당사연구실,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 인력자원사회보장부, 전국총공회,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전국부녀연합회,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등 11개 부문조직들이 뽑은 '100인의 신중국성립에 있어 놀라운 공헌이 있는 영웅적 모범인물과 100인의 신중국성립이래 중국을 감동시킨 인물들'중 '100인의 신중국성립에 있어 놀라운 공헌이 있는 영웅적 모범인물'중 한 명으로 뽑혔다.

4. 저서


취추바이는 당대 중국에서 가장 유능한 러시아어 번역가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자 문학비평가였고 언론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저작들은 러시아 문학과 정치문헌들의 번역서나 정치적 문건, 논문, 팜플렛 등으로도 많이 남아있다.
  • ⟪아향기정(餓鄕紀程)⟫(1921)
  • ⟪적도심사(赤都心史)⟫(1924)
  • ⟪다여적화(多餘的話)⟫(1935),[12] 한국에서는 ⟪부질없는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되었다.
  • 유고집으로 루쉰이 편집한 ⟪해상술림(海上述林)⟫(1936)이 있다.
  • 유명 논문으로 ⟨중국 혁명과 중국 공산당⟩(1928), ⟨중국혁명중 공산당 내의 문제⟩(1928)

5. 여담


  • 홍군 지휘관 항영의 아내인 장량(張亮)이 당시에 취추바이를 호위하던 여전사 중 한명이었는데, 장량은 체포 3년 후 보석으로 석방되어 홍군에 합류했다. 하지만 항영은 장량이 취추바이를 국민당에 팔았다고 의심하여 장량을 처형했다.
  • 그의 고향 장쑤성 창저우 시 종루구 관하동로상권 연릉서로 188번지(江苏省常州市钟楼区关河东路商圈延陵西路188号)에 그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사망 50주년을 맞아 1985년 6월 18일에 정식 개관하였다.
  • 그가 1933년까지 거주하던 상하이 홍커우 구 사천북로(上海市虹口区四川北路山阴路山阴路133弄12号)에도 그의 고택과 기념관이 있다. 바로 길 건너에 그의 평생 지기였던 루쉰의 고택이 있고 루쉰 고택에서 한 블럭 정도 걸어가면 루쉰공원(옛 훙커우 공원)과 루쉰묘가 있다.
  • 그가 처형당한 푸젠성 룽옌 시 창팅 현 서외가(福建省龙岩市长汀县西外街)에 또한 구추백열사기념관과 기념탑이 있다.

6. 매체에서


[image]
중국 공산당 선전영화 건군대업에 나온 취추바이. 중국배우 백객(白客)이 분했다.

7. 관련문서



8. 참고문헌



[1] 추백은 가명.[2] 1927년 8.7 긴급회의에서 '임시' 총서기 겸 '임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기에 사실상 2대 총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임시 총서기'로만 표기한다. 공식적인 제2대 총서기는 샹중파[3] 청나라 시기 한 성의 행정을 총괄하는 순무사 아래에서 성의 민정과 재정을 책임지던 관직. 종2품.[4] 이 때까지도 구씨 집안은 여종을 부리고 있었으며, 그의 가족은 가사노동을 해 본 적이 없다고 자서전에 서술하였다.[5] 샬리아핀은 10월 혁명 이후에도 예술가로 대접받았으나, 내전의 피폐함을 견디지 못하고 1921년 이후에는 프랑스에 머무른다.[6] 중국공산당의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은 초기엔 중앙집행위원회, 중앙국 등, 지속적으로 이름이 바뀐다. 일단 통칭으로 서술.[7] 다만 호남으로 파견되어 폭동 지휘를 맡았던 마오쩌둥의 패잔병들이 정강산을 점거하고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며 해방구를 건설하는 결과를 낳긴 했다.[8]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는 아니었으나 당시 점점 경직되어가던 코민테른의 입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다.[9] 참고한 코민테른 문서 자료집을 보면, 당시 취추바이는 Strakhov 와 Tsiu Vito 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10] 본인이 체포된 이후 작성한 회고록에는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책 몇 권 읽은 것을 가지고 10여년을 보냈다." "나같이 신사계급 의식을 시종일관 버리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무산계급의 전사가 될 수 없다."고 자책하며 자신의 총서기 활동이 "역사적 우연"에서 비롯되었고, 자신 같은 불철저한 사람은 당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다고 썼다. 다만 공산주의 신념 자체를 버리거나 공산당에서 탈당하지는 않았다.[11] 첫 행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의 인용이며, 2행과 4행은 당나라 시인 낭사원, 3행은 두보의 인용이다.[12] 그가 체포 이후 한 달동안 저술한 회고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