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난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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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南海, 중남해.중난하이의 조감도
1. 개요
2. 역사
2.1. 금나라와 원나라
2.2. 명나라
2.3. 청나라
3. 주요 건축
3.1. 중해
3.2. 남해
4. 기타
5. 같이보기


1. 개요


베이징시 시청구(西城区)에 있으며 자금성의 서쪽 바로 옆에 위치한 곳으로 과거 ··· 시대에는 황실의 원림이었다.[1]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당/정/군의 전현직 최고위 지도자들의 집무실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등이 있어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2006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청와대국무총리 관저와 공관을 합쳐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더군다나 중난하이는 현직 지도부는 물론 전직 지도부의 거주지 역할 또한 한다. 상당수의 전직 지도부와 그 가족들이 퇴임 이후에도 오랫동안 거주하기도 한다.

2. 역사



2.1. 금나라와 원나라


베이징이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였을 때 현재의 북해와 중해는 태액지(太液池)라는 호수였고 그 인근에는 황제의 여름 별궁인 대녕궁(大寧宮)이 있었다. 이곳의 경치는 이미 이때부터 절경으로 이름 높아 황제들이 자주 머물렀다. 이후 원나라가 금을 멸망시킨 뒤 쿠빌라이 칸이 금의 중도를 폐기하고 새로운 수도인 대도(大都)를 건설하면서 태액지를 황궁에 포함시켜 그 주변에 대내(大內)[2]·융복궁(隆福宮)·흥성궁(興聖宮)의 세 궁전을 지었다.

2.2. 명나라


그리고 명나라 때인 1406년(영락 4)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자 이곳은 다시금 황궁의 후원으로 편입되었다. 영락제가 자금성의 위치를 원나라의 황궁보다 약간 남쪽으로 앞당기면서 태액지 남쪽에 남해를 팠으며, 여기에서 나온 흙과 자금성 주위를 두르는 호성하를 파면서 나온 흙을 모아 황성 북쪽에 만수산(萬壽山, 뒷날 경산(景山)으로 개칭)을 쌓았다. 1459년(천순 3)에는 이곳에 광대한 규모의 서원(西苑)을 건설했다. 가정제가 자금성 건청궁에서 벌어진 임인궁변으로 죽을 뻔하자 서원으로 거처를 옮겨 20년간 지내다가 죽기 전날에야 환궁하기도 했다(…).

2.3. 청나라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후에는 북해·중해·남해의 3해(三海) 주변에 붉은색 담을 둘러 원림의 면적이 호수 주변에 거의 맞닿을 만큼 축소되었다.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며 정무를 돌봤고, 사람 살기에는 살풍경한(…) 자금성보다 이곳을 선호했다.
사실 대부분의 황제들이 국가적인 주요 의식이 몰려 있는 12월에서 1월까지의 연말연시에만 자금성에 머물고, 그 이외의 기간에는 중난하이나 원명원, 승덕 피서산장 등의 별궁에서 기거하였다. 이는 동치제광서제 때 권력을 잡고 중국을 통치한 서태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술정변 이후 광서제가 죽을 때까지 유폐된 영대(瀛臺)가 바로 이곳의 남해에 있었다. 1900년(광서 26) 의화단 운동 때는 8개국 연합군의 약탈을 당하기도 했고 선통제가 즉위하면서는 생부인 순친왕이 머무는 섭정왕부가 지어지기도 했다.

2.4. 중화민국


1911년(선통 4)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멸망하면서 위안스카이북양정부 총통부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중난하이를 신화궁(新華宮)으로 개칭하기도 했지만 한바탕 칭제 소동의 와중에도 계속해서 북양 정부의 요인이 집무하는 관저 역할을 수행했다.[3] 1927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로 취임한 장쭤린이 집무실로 사용한 것을 마지막으로[4], 1928년 6월에 베이징이 국민정부에 함락되고 국민정부가 그간 수도로 삼아온 난징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더 이상 관저로 쓰이지 않고 일반인들에게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2.5. 중화인민공화국


오랜만에 일반에 개방되었던 중난하이는 개방한지 20여년만인 1949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 들어서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이곳에 관저를 두면서 다시금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다만 중해와 남해만 그렇고, 북해는 '북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3. 주요 건축



3.1. 중해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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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광각(紫光閣)'''
중해의 서북쪽에 있는 정면 7칸의 2층 전각이다. 원래 명나라 정덕제 때는 평대(平臺)위에 황색 유리기와를 올린 작은 전각이 있었으나 가정제 때 이를 밀고 자광각을 지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 중수했고 이후 1760년(건륭 25)과 1775년(건륭 40) 두 차례에 걸쳐 증축했다. 자광각 뒤쪽에는 정면 5칸의 무성전(武成殿)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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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전(萬善殿)'''
중해의 동쪽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숭지전(崇智殿)이었으나 순치제 때 만선전으로 개칭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의 삼세불상(三世佛像)이 모셔져 있다. 만선전 뒤쪽에는 천성전(千聖殿)이 있으며 내부에는 7층으로 된 천불탑이 봉안되어 있다.

'''수운사(水雲榭)'''
중해의 동쪽 물가에 자리한 정자로 북경의 여덟 가지 경치를 가리키는 연경8경(燕京八景) 중 '태액추풍(太液秋風)'에 해당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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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왕부(攝政王府)'''
중난하이의 서북쪽에 위치한 건물군이다. 섭정왕부가 있는 땅은 원래 서원(西苑) 바깥에 있었지만 1881년(광서 11) 서원을 확장하면서 새로 포함된 것이다. 서태후는 이곳에 집영유(集靈囿)라는 새로운 원림을 지으려 했으나 무위에 그쳤고 1909년(선통 1) 선통제의 생부인 순친왕 재풍이 섭정왕부를 건축했는데 은자 206만 냥이 들어갔다. 하지만 1911년(선통 4)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중화민국 국무원의 소유가 되어 총리 관저 및 집무실로 사용되었으나 1918년에는 당시 대총통쉬스창이 거주하는 관저로 이용되었다가 1923년에 차오쿤이 회인당으로 관저를 옮기고 나서는 육군부, 해군부, 북평[5]시정부가 사용했다. 왼쪽에 있는 사진은 저우언라이 총리가 머물던 서화청(西花廳)으로, 섭정왕부 내 서화원(西花園)에 보존되어 있다.

3.2. 남해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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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문(新華門)'''
중난하이의 정문으로 정면 7칸의 2층 건물이며 1층의 중앙 3칸이 출입문으로 되어 있다. 건륭제 때 보월루(寶月樓)로 지어졌으나 신해혁명 후 위안스카이가 누를 문으로 바꾸고 '신중화민국(新中華民國)'에서 이름을 따 신화문으로 개칭했다.

'''영대(瀛臺)'''
명나라 때는 남대(南臺)로 불렸으며 청나라 순치제와 강희제 때 대규모로 전각을 세운 뒤 영대로 개칭했다. 영대 내에는 인요문(仁曜門), 상란각(翔鸞閣), 함원문(涵元門), 함원전(涵元殿), 봉래각(蓬萊閣), 경운전(慶雲殿), 경성전(景星殿), 조운루(藻韻樓), 기사루(綺思樓), 보동서옥(補桐書屋), 수안실(隨安室), 대월헌(待月軒), 경광정(鏡光亭), 장춘서옥(長春書屋), 수방윤(潄芳潤) 등이 있다. 1898년 (광서 24)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에 의해 이곳에 감금된 광서제가 10년 동안 유폐 생활을 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곳이기도 하다.

'''풍택원(豊澤園)'''
영대의 북쪽에 있으며 강희제 때 지어졌다. 풍택원의 중심 건축인 돈서전(惇敍殿)은 광서제 때 이년전(頤年殿), 중화민국 때 이년당(頤年堂)으로 개칭되기도 했다. 이년당 동쪽의 국향서옥(菊香書屋)은 마오쩌둥 주석이 1949년부터 1966년까지 거주하던 곳이었다. 풍택원 내에는 하풍혜로정(荷風蕙露亭), 숭아전(崇雅殿), 정게헌(静憇軒), 회원재(懷遠齋), 순일재(純一齋), 정곡(静谷), 춘우재(春耦齋)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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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勤政殿)'''
조선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한자까지 똑같다(…). 중해와 남해 사이에 있어서 근정전의 정문인 덕창문(德昌門)은 남해의 북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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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당(懷仁堂)'''
원래 위치는 춘우재 북쪽에 있었으며 광서제 때 중건하면서 의란전(儀鸞殿)이라 이름 짓고 서태후가 거주했으나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훼손되자 중해 서쪽에 새로 의란전을 세웠다. 새로 지어진 의란전은 뒷날 불조루(佛照樓)로 바뀌었고, 위안스카이가 칭제하면서 옛 의란전을 회인당으로 개칭했다. 1923년에 대총통으로 당선된 차오쿤이 섭정왕부에서 이 곳으로 총통 관저를 옮겨 국민정부의 수립때까지 총통 관저로 사용되었다. 1949년 기존 건축을 헐고 새로 지었다. 1967년 2월 역류가 여기서 일어났다.

'''숙청원(淑清院)'''
남해의 동북쪽에 있으며 건륭제 때 세워진 소규모 원림이다. 숙청원 내에는 보광실(葆光室), 봉영재망전(蓬瀛在望殿), 운회루(雲繪樓), 청음각(清音閣), 일지각(日知閣), 만자랑(萬字廊), 쌍환만수정(雙環萬壽亭) 등이 있다.

4. 기타


옛날에는 중난하이에 특히 느릅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1883년(광서 9) 하루는 서태후가 느릅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벌레가 옷에 떨어지자 대노하여 정원의 느릅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도록 했다(…).
2011년부터 중국 정부가 중난하이 확장 공사를 했다고 홍콩의 밍보가 보도했다. 이주 보상금도 다른 철거 지역보다 배 이상을 줬다고.
북해와 후해 지역은 일반에 개방되었다. 그 밖의 지역도 부분 개방 가능성이 좀 보인다.

5. 같이보기



[1] 청와대도 경복궁 후원자리에 만들어졌으니 이러한 점에서 비슷하기는 하다. 다만 청와대의 경우에는 중국으로 친다면 징산에다가 관저를 만든 격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2] 특정한 궁궐의 명칭이 아니라 황제의 정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3] 다만 위안스카이는 1913년 10월10일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기 전까지 외교부 거리의 호텔과 청나라 육해군부 건물을 집무실로 사용했으며 리위안훙은 1912년에 위안스카이가 사 준 건물에 거주하기 시작해 부총통 및 총통 재임기간을 포함해서 사망할떄까지 거주했다. 또한 임시집정 돤치루이는 청나라 육해군부 건물을 집무실로 사용했다.[4] 장쭤린은 중난하이에 거주하지 않고 1921년에 청나라 황족으로부터 매입한 순승군왕부(顺承郡王府)를 관저로 사용했다. 순승군왕부는 이후 장쉐량의 소유하에 있다가 1949년 이후 중국 공산당정부로 소유가 넘어가서 현재는 중국 정부 관련 시설이 들어서 있다.[5] 중화민국이 성립하면서 수도를 남경으로 정해 북경을 북평으로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