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나 카르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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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1215년에 선포한 ‘마그나 카르타’
영어
Magna Carta, issued in 1215
프랑스어
Magna Carta, promulguée en 1215
국가·위치
영국
소장·관리
영국국립도서관
링컨 대성당
솔즈베리 대성당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2009년
제작시기
121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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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작성과 그 이후
4. 내용
5. 기타


1. 개요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 대헌장(大憲章)'''
1215년 6월 15일, 잉글랜드존 왕에게 실망한 귀족들이 국민을 등에 업고 국왕 존을 협박해 얻어낸 일종의 계약서. 국왕귀족 연합체 간의 단순한 서약서에 불과한 문건이나, 세계 정치사에서 엄청난 위상을 지닌 문서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민주주의화석과도 같은 존재.

2. 상세


마그나 카르타를 단순한 계약서로 치부할 수는 없다. 효력이 한동안 제대로 없었기에 사문화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상징성은 향후 권력의 분배와 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왕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일부 귀족과 나누는 행위를 처음으로 가능케 한 계기였다. 이후 명예혁명과 산업혁명 등을 겪으면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현대까지 권력의 이동의 향배를 정한 사건이었다.
또한 왕권신수설이 남아있던 시대에 귀족들이 감히 일으킨 사건이라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는 시대적으로 십자군 원정 등의 실패로 인한 신-교황/(-)왕-신민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무너지게 되는 큰 계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물론 존 왕이 귀족들과 모의해서 왕좌에 올랐기 때문에 권력구도 자체가 절대적인 제왕과 충성스런 신료의 관계가 아니었고 형인 리처드 1세부터 발생한 막대한 부채 탕감을 위한 경제정책 등 국정을 잘 추진하기보다는 실정을 해왔던 탓도 크다.
실제 남아있는 대헌장 문서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15년에는 영국 켄트 주에서 대헌장 초기 필사본이 삼림 헌장과 함께 발견되었다. 기사

3. 작성과 그 이후


마그나 카르타가 만들어진 건 존 왕의 탓이 크다. 존은 프랑스 내의 영지를 다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전쟁을 일으켜서 패배했고 국가 재정 문제가 생기자 이를 해결하려고 귀족들에게 세금을 물리려고 하다 문제가 된 것. 귀족들은 결국 존에 반발했고 1214년 영주들이 세금 납부를 거부한 데 이어 1215년에는 무장봉기한 귀족들이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출정, 여기에 런던시마저 가세해 무혈로 입성하게 된다. 귀족들과 성직자, 도시민들까지 등을 돌린 것을 알게 된 존은 퇴위는 물론이고 처형될 위기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귀족들 사이에서 '''처형까진 그렇고 왕과 대충 합의보자'''라는 온건론이 고개를 들었고, 결국 존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각서를 받는 걸로 합의하자는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그래서 만들어 진 문서가 마그나 카르타로 템즈 강변의 러니미드(Runnymede) 평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귀족들에게 존 왕이 방문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을 하며[1]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걸로 잉글랜드 국왕의 권한이 약화된 건 아니었다. 존 왕은 인노첸시오 3세에게 귀족들을 고발했고 최강의 교황권을 누리던 인노첸시오 3세는 "너희들 까불래! 어디서 왕을 협박해!"라고 하며 무효를 선언하는 바람에 마그나 카르타는 무용지물이 돼버렸고(...), 그 직후에 일어난 내전에서 섭정이자 헨리 3세의 보호자인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왕당파가 프랑스군과 연합한 반란 귀족들을 개발살내면서 사실상 망했어요 상태가 되어버렸다. 덧붙여서 존의 뒤를 이은 헨리 3세는 '''"너희들이 내 아버지 존 왕하고 약속했지 나하고 약속했냐?"'''라면서 무시해버렸다.[2] 그런 탓인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도 마그나 카르타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마그나 카르타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3]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기 약 50년 전에 인쇄된 출판물에도 등장했으며, 저술가이자 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의원이었던 조지 페러스(George Ferrers)는 1534년[4]에 마그나 카르타를 37개 항목으로 정리해서 영어로 출판했다.[5] 마그나 카르타를 연구했던 에드워드 쿠크 경도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사람으로 셰익스피어보다 먼저 태어나서 먼저 죽었다.
다만 마그나 카르타 자체가 제정된 이후부터 주욱 튜더 왕조까지는 기본법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다른 여타의 법률과 동일하게 취급당해서 '이것은 기본법이니 수정금지!!'가 아니라 '이것도 개정 및 폐지가 가능한 많은 법률 중 그저 하나일 뿐'이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영국 법률 체계상 기본법이나 헌법은 없어서, 취급이 개차반이었다는 말. 엘리자베스 여왕 기간은 절대왕정이라 마그나 카르타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마그나 카르타의 항목을 감히 실행에 옮길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7세기가 되면서 국왕과 의회가 대립하게 되었고 마그나 카르타는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대헌장을 기반으로 귀족들은 전제 왕권과 대결하게 되었고, 특히 에드워드 쿠크 경[6] 같은 재판장들이 마그나 카르타를 연구해 법치주의 개념을 확립하는 데 사용했다.

4. 내용


사실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 자체는 관습법적이고 관례적으로 내려오던 사항들을 문서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대강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교회는 국왕으로부터 자유롭다.

* 왕의 명령만으로 전쟁 협력금 등의 명목으로 세금을 거둘 수 없다.

* 런던과 다른 자유시들은 자체적으로 관세를 정한다.

* 왕은 따로 정해진 사안에 대해서만 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

* 잉글랜드의 자유민은 법이나 재판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유, 생명, 재산을 침해받을 수 없다.

마그나 카르타에서는 귀족만이 아닌 자유민들에게도 권리가 인정되었다. 마그나 카르타는 귀족들과 런던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자유민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업을 통해 발전하던 도시 시민 계층에게만 인정되었고 당시 잉글랜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노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만민을 위한 계약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밖에 여성의 상속권 인정과 강제로 재혼하지 않을 권리를 명시하는 등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한 조항도 몇몇 있었다.
물론 마그나 카르타는 17세기까지 잊혀진 것이 사실이며 소수 귀족들의 권리를 재확인하고 일부 자유민들의 권리를 인정한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체결될 당시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제 효용은 별로 없었다만 적어도 문서자체에 쓰여진 내용은 훗날 평등사상의 전파와 법치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특별히 헌법이라는 게 따로 없는 현재의 영국에 헌법과 같은 위치로 존재하고 있다. 1970년대 들어[7] 봉건적인 조항들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폐지되지 않는 조항이 세 개 있다.
  • '...짐은 이 헌장을 준수할 것이며 짐의 영속적인 후계자들을 위하여 왕국의 모든 자유민은 짐과 짐의 후계자에 의하여 이들 자유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 이는 영국 입헌군주제의 근거로 활용된다.
  • '런던 시는 모든 고전적인 자유를 향유하며 육로 및 해로를 불문하고 관세를 면제한다. 아울러 짐은 기타 모든 시·읍·면 및 항구가 자유권을 가지고, 관세를 면제할 것을 허용한다.': 이로 인해 아직도 여왕이 영국의 금융중심가로 증권거래소와 영국은행 등이 위치한 '시티 오브 런던'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길드장에게 허가를 받아야 한다.
  • '자유인은 동등한 사람들의 적법한 판결에 의하거나 법의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구금되지 아니하며 재산과 법익을 박탈당하지 아니하고 추방되지 아니하며 또한 기타의 방법으로 침해되지 아니한다.': 인신 보호를 위한 영장주의의 시초가 되어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기타


  • 마그나 카르타가 쓰인 종이는 양피지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독피지(犢皮紙 vellum)다.
  • 형법을 '범죄인의 마그나 카르타'라고도 부른다. 범죄인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라고.[8]
  • 2015년 6월 15일, 제정 800주년을 맞아 구글 두들이 바뀌었다.
  • 1215년 전후의 영국의 풍습과 마그나 카르타 전문을 실은 <1215 마그나 카르타의 해(1215 The year of Magna Carta)>가 나왔었다. 지금은 절판.
  • 2018년에 원본이 절도당할 뻔한 사건이 벌어졌다. 절도 시도한 범인은 체포한 상태.# 범인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 현대에 원본은 총 4부가 남아 전한다. 대영도서관에서 2부, 링컨 대성당과 솔즈베리 대성당에서 각각 1부씩 보관한다. 링컨의 주교와 솔즈베리 백작이 서문에서 존에게 마그나 카르타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고 등장한다.
  • 심시티 3000 자막 뉴스에는 브로콜리 시리즈로 "대헌장은 원문이 커다란 브로콜리의 줄기에 적혀있었다고 알려졌다." 하는 드립이 나온다.

[1] 당대 영국의 관습을 고려했을 때, 역사가들은 존 왕 본인이 서명하기보다는 공문서 보관소(chancery)에 소속된 날인자(spigurnel)들이 왕의 인장을 써서 밀랍 위에 도장을 찍었을 것으로 추정한다.[2] 사실 마그나 카르타는 어디까지나 '존 왕의 권리 제한'이 목적이었다. 헨리 3세도 마그나 카르타를 인정하긴 했으나 내용을 상당히 수정했고 나이먹고 나선 아예 무시해버렸다. 결국 또다시 귀족들의 반란이 터진다.[3]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왕을 두고 하는 언급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희곡 존 왕이 존 왕의 일생을 그린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의 정당한 왕위 계승과 왕권 행사에 대해 교황이 이를 부정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비슷한 상황을 겪은 존 왕의 사례를 통해서 묘사한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다시 말해서 희곡 존 왕의 초점은 존 왕이 겪은 일들과 그의 일대기를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에 초점을 놓고 여왕권을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희곡 존 왕에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라고 들이민 주동자들의 이름들이 줄줄이 버젓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몰랐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해석은 각자의 판단. 영어가 된다면 이곳의 두 번째 문단을 읽어볼 것.[4] 셰익스피어는 1564년생.[5] 1215년 당시에는 라틴어로 작성했다.[6] 이름 철자가 Coke라서 '코크'로 착각하기 쉽다(...). 영문위키 참조.[7] 19세기 말까지 온전히 유효하게 남아있었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유효한 조항이 많았다.[8] 죄형법정주의무죄추정의 원칙 참고. 만약 형법이 없었다면 판사가 맘대로 너 사형을 때려도 할 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