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프라이스
1. 개요
前 NBA 농구선수 및 지도자로, 90년대를 대표하는 3점 슈터이자 캐벌리어스의 레전드. 현역시절에는 발 느리고 운동능력 부족한 평범한 백인 가드취급받았지만 정교한 3점슛과 자유투를 갈고닦아 All NBA 퍼스트팀에도 오르고 드림팀에도 몸담은 2라운더의 신화이다.
2. 입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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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공과대학교 시절에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와의 경기에서 팀을 챔피언쉽 우승으로 이끌게 하여 두번 연속 올 아메리칸과 네번 연속 올 ACC 농구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3. 입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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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공과대학교를 졸업한 뒤, 1986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25순위로 댈러스 매버릭스에 지명되었으나, 당일날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렇게 캐벌리어스에 입단한 프라이스는 프라이스는 첫 시즌을 전 경기 벤치에서 출장하고 두번째 시즌[1] 부터 주전으로, 그리고 팀 역사상 최고의 포인트 가드가 되어 리그를 대표하는 슈터로써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90.4%의 자유투 성공률은 NBA 드래프트에서 1위였고, 3점슛 통산 성공률도 40%를 넘었다. 1988-89시즌에는 40%이상의 3점슛, 50%이상의 슛 성공률, 90%이상의 자유투 성공률이었다. 프라이스는 캐벌리어스에서의 어시스트 4206개를 기록하고 있고, NBA 올스타 게임도 4번 출전하여 3점슛 콘테스트에서도 2번 우승하였고, 1992-93시즌에는 올 NBA 퍼스트 팀에도 발탁되었다.
프라이스의 가세는 레니 윌킨스감독이 이끄는 캡스의 큰 힘이 되었다. 프라이스와 같은해 전체 1번으로 입단한 센터 브래드 도허티와 피닉스 선즈에서 영입한 올스타 포워드 래리 낸스[2] 는 3인방이 모두 동시에 올스타에 선발될 정도의 수준급 선수들이었으며, 86시즌에 입단한 론 하퍼는 비록 올스타엔 선발되진 못했지만 신인시절부터 평균 22점을 올리는 좋은 선수였다.[3]
이들이 이끄는 캐브스는 이때까지 팀 역사상 최고의 시기를 보냈으며, 1988-89, 1991-92 시즌에 57승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옆 동네 시카고에는 그 분이... 그래서 플레이오프 운은 참 없었다.
1987-88 시즌, 캐벌리어스는 동부 6위에 해당하는 42승을 거두며 세 시즌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으나 50승을 거둔 신흥강호 불스에 3전 전패, 탈락한다.
1989년 당시 기준으로 구단 역사상 최고승률을 거두고 3번시드로 플레이오프를 산뜻하게 시작했지만[4] 하필 47승에 그친 6번 시드였던 불스엔 마이클 조던이 있었다. 최종 5차전(당시 1라운드는 5전3승제), 종료 직전까지 1점차로 앞서고 있었지만 이때 불스는 조던에게 어렵사리 공을 건냈고, 조던은 공을 잡자마자 원드리블 후 점프, 특유의 체공력으로 공중에서 크레익 일로의 블럭을 피한뒤 더블클러치 점프슛을 적중시킨다. 이 엄청난 플레이는 단순히 "The Shot"[5] 으로 불리며 조던의 역대 최고 명장면중 하나로 남는다.
그 다음 두 시즌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1989-90 시즌엔 캐브스는 론 하퍼가 부상으로 7경기 출장, 낸스가 62경기 출장, 도허티가 시즌 절반을 날려먹는 통에 프라이스 본인은 커리어 하이 19.6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42승에 그치며 필라델피아에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만다. 1990-91시즌은 프라이스 본인이 드러누우며 아예 플옵이 탈락하고 만다.
그러나 캐브스는 92시즌에 전력을 재정비하며 다시금 57승을 거두고 동부 2위에 오른다. 그리고 1라운드에서 뉴져지 네츠를 스윕하고, 부상과 노화로 힘이 빠진 래리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를 7차전만에 제압하고 동부 결승에 76시즌 이후 처음으로 오르게 된다. 그러나 상대는 67승을 기록한 최강 불스(...) 결국 6차전만에 패배한다.
93시즌은 프라이스 개인 커리어 최고의 해였다. 그는 18.2점 8어시스트, 필드골 성공률 48.4%에 자유투 성공률 무려 '''94.8%'''를 기록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NBA퍼스트팀에 오른다. 팀 성적은 살짝 떨어져 54승이었지만, 동부 컨퍼런스 3위로 플옵에 올라 2라운드에 진출한다.
그런데 상대는 또 불스(...)[6] 팀은 조던 스토퍼의 특명을 띄우고 체격과 운동능력이 좋은 제럴드 윌킨스[7] 를 조던에게 붙히지만 이때 조던은 누가 붙는다고 막아지는 선수가 아니었고 결국 팀은 4차전만에 스윕당하고 만다.
벌써 조던에게만 4번 붙어 네번 패배했다.
199-94 시즌, 도허티와[8] 낸스 둘다 부상으로 뭉터기로 결장하는 가운데 프라이스는 팀의 1옵션 역할까지 하며 고군분투, 다시 한번 올NBA써드 팀에 오르며 팀을 47승으로 이끈다. 심지어 2~3월에 거쳐 11연승을 거두며 동부 6위 자리에 안착한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이들을 기다리는 건 또 시카고 불스(...). 그나마 조던이 은퇴한 상황이었지만, 조던이 없는 불스도 강팀이었고 이들은 또 스윕당한다.
종합적으로 프라이스의 플레이오프 커리어에서 무려 5번의 시리즈 패배를 시카고 불스에 당했다.
안그래도 부상이 잦은 편인 프라이스의 커리어는 30대에 접어들고 부상이 더욱 많아지면서 저물기 시작한다. 1994-95시즌 캐브스는 초반에 무려 20승 8패를 거두는 쾌조의 스타트에도 나머지 기간동안 5할 승률에 못 미치며 또 동부 6위로 시즌을 마친다. 프라이스는 뛰는 동안은 여전한 실력을 보였지만 손목 부상으로 48경기에 그친다. 이후 팀은 뉴욕에게 1라운드 패배를 당하고, 이것이 프라이스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무대였다.
프라이스의 말년은 부상으로 얼룩지게 된다. 그는 워싱턴 불레츠(훗날 위저즈로 개명)로 트래이드된 해에 7경기 출장에 그쳤으며, 주전 가드로 경쟁력을 상실한 그는 골든 스테이트, 올랜도에서 한 시즌씩 더 뛰고 은퇴한다.
프라이스의 커리어는 전체적으로 당시 캐벌리어스와 비슷했다. 이들은 NBA에서 알아주던 강팀이자 선수였지만, 우승후보, 혹은 MVP후보로 가기까지 한끝이 부족했다.
더욱 더 안습인 것은 그 시기 조던에 밀렸던 선수들인 찰스 바클리, 칼 말론, 패트릭 유잉 등은 기억해도 프라이스와 클리블랜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리스트에서 배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때 캐브스를 이끌던 주축선수들인 프라이스와 도허티가 이른 나이에 부상에 시달려 커리어가 일찍 저물어 잊혀진 선수들인 것이 크다.
결국 프라이스는 건강하거나 운이 더 따랐다면 유잉이나 바클리, 드렉슬러처럼 "조던보다 한 수 아래 라이벌"로 기억될 수 있었지만, 임팩트가 다소 부족한데다 전성기가 너무 빨리 저물어서 대부분의 팬들로부터 잊혀진 상태다. 분명한 건 전성기 때 캐브스는 불스를 능가하는 팀전력을 구축한 적도 있으며 무시못할 동부의 강자였으며 프라이스 역시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리그 최고의 PG 중 하나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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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열린 농구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드림팀에 선출되어 금메달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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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벌리어스를 퇴단한 뒤에는 워싱턴 불리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올랜도 매직에서 각각 1년 뛴 뒤에 현역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한 뒤에는 캐벌리어스에서 착용한 25번이 영구결번이 되었다.
4. 지도자
은퇴 이후 1999년부터 덜루스 고등학교를 필두로 16년간 여러 농구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2015년부터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샬럿 캠퍼스의 감독으로 3년을 재직했다.
5. 플레이 스타일
마크 프라이스 하이라이트, 초창기 팀메이트이자 후배인 스티브 커도 나온다.
마크 프라이스는 NBA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슛 자세를 지닌 선수로, 주로 손목에 의한 스냅을 이용한 외곽 슛을 선보인다. 꾸준한 슛 스트로크와 집중력으로 90%대 자유투 성공률이 말해주듯 기복이 적은 슈터로 잘 알려져있다.
또한 매우 저평가되는 부분으로 위 영상에도 나오지만, NBA에서 픽앤롤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선구자격 인물 중 하나다. 90년대 픽앤롤 오펜스의 완성을 존 스탁턴, 칼 말론으로 보기때문에 저평가되기 쉬우나, 프라이스는 위 영상에도 나오듯 코트 어디서나 팀원의 스크린을 자연스럽게 타면서 상대 수비의 빈틈 사이로 들어가 플로터나 골밑슛을 적중시키는 지금 NBA에도 통할만큼 픽앤롤 핸들러로서 드리블 핸들링과 스피드를 보여주었다. 캡스가 불스, 피스톤즈등 당시 강자들에 비해 존재감없이 묻혀있어서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프라이스는 적어도 백인 단신 가드로서 슛만 할 줄 아는 1차원적인 선수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다 보니 수비에는 다소 약점이 있었다.
매너있는 플레이로도 유명했는데, NBA 데뷔 후 첫 4년간 테크니컬 파울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테크니컬 파울을 선언받자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1] 1987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포인트가드 케빈 존슨을 지명했고 프라이스의 주전 자리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백업 역할에 그치자 1988년 2월 28일에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된다.[2] 그의 아들이 현재 LA 레이커스의 선수로 뛰고 있다. 아버지와 신체조건,플레이스타일이 비슷한 편[3] 하퍼 정도의 실력과 스탯이면 일반적으로 한번 정도는 올스타에 뽑히기 마련이다. 전성기 때 20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 2스틸 블럭 언저리의 스탯을 꾸준히 올려줬으니... 그러나 NBA에선 웬만해선 한 팀에서 올스타 네명이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밀린 케이스. NBA에선 정말 압도적인 전력이거나 그 선수들이 이견의 여지 없이 올스타인 경우에만 한 팀에서 올스타 네명이 가끔 나온다. 다만 97시즌처럼 올스타 3명+아직 후보지만 인기가 너무 많아서 팬투표로 선발된 선수(코비 브라이언트)인 경우도 있다.[4] 프라이스, 도허티, 낸스 모두 올스타에 선발됐다.[5] "그 슛," 너무 유명하고 상징성이 커서 별 다른 설명도 없이 그 슛이라고 하면 다 통한다는 의미로 붙은 별칭이다.[6] 약간 운이 없었다. 당시 불스는 최강의 전력이었지만 시카고 트리뷴의 전문기자 샘 스미스가 낸 "조던 룰스"란 책에서 나온 팀내 불화설의 여파와 조던 도박스캔들의 여파로 팀 분위기가 박살나 57승에 그쳐 동부 2위, 2라운드부터 만나게 된 것. 물론 정상적으로 불스가 팀을 운영해 1위를 차지하고, 캐브스가 당시 전성기를 달리는 유잉의 60승 닉스와 만났어도 버거운 싸움이었겠지만, 하필 플옵에서 제 위력을 되찾은 불스보단 훨씬 나았다. 여담이지만 조던 룰스 사건 때문에 스미스가 팀 내 어두운 면을 폭로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조던이 이적 직후 카트라이트를 괴롭힌 것은 사실이나 바로 몇장 뒤에 '''얼마 후에 둘이 화해하고 갈등을 봉인했다'''고 분명히 나온다. 조던이 카트라이트를 팀 수비의 축으로 존중하고, 공동주장을 맡게 된 이후 1차 3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를 보도한 기자들이 화해 부분은 쏙 빼고 자극적인 부분만 보도함으로서 마치 불스가 아직도 막장팀인 것처럼 보여진 것. 실제로 스미스는 책 발간 이후에도 계속 시카고 트리뷴에서 불스를 담당했다. 로드맨이 97파이널 당시 포스트시즌 내나 계속된 부진에도 라스베가스에 놀러가는 등 비행을 계속하자 방출해버려야한다는 기사를 쓴게 바로 스미스다.[7] NBA레전드 도미니크 윌킨스의 동생으로 실력은 형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덩크 콘테스트에도 나가는 등 운동능력만큼은 형 못지 않았다.[8] 그는 결국 한 시즌 더 뛰고 만 28세란 젊은 나이에 은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