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 윌킨스
1. 개요
전 NBA 농구 선수이며 현 애틀란타 호크스의 부사장이다.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덩크슛을 가진 한명으로 기억되며 슬램덩크 콘테스트 2회 우승 수상자이다.[2]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으며 비록 매직 존슨, 래리 버드, 그리고 마이클 조던에 가리긴 했지만 그들 가운데서도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80년대와 90년대 초를 풍미했던 뛰어난 농구선수. 가장 많이 뛰었던 호크스의 상징적인 선수로 기억되며 은퇴후 여러 유럽 리그를 걸치다가 현재는 호크스의 부사장을 맡고 있다. NBA 뿐만 아니라 유럽 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다.
여러 하이라이트 필름이 있지만 전성기의 공격스킬에 있어서는 몇 안되는 블랙캣 시절 조던의 대항마였다.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폭발적인 운동능력과 돌파,점퍼를[3] 갖춘 득점 머신 스타일, 단, 후기 조던처럼 스타일을 바꾸지 못하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하락세를 탄 케이스이다.
2. 선수 생활
2.1. 초기 생애 및 대학 경력
윌킨스는 미합중국 공군에 있는 아버지가 그 당시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후 그는 댈러스와 볼티모어를 거쳐 이사다니다가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워싱턴에 정착하며 고등학교를 마치게 된다. 고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나낸 그는 여러 MVP를 차지했고 많은 기대를 받으며 조지아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시절 3년간 그는 휴 더럼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평균 21.6점의 득점을 올렸고 SEC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한다. 3학년을 마치고 NBA 드래프트에 신청했고 유타 재즈에 세번째 픽으로 선택받게 된다. 같은 드래프트에는 동기로는 쇼타임 레이커스의 제임스 워디[4] 가 있다.
2.2. 애틀란타 호크스
1982년 1라운드 3순위로 유타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나, 자금상의 문제와 윌킨스 자신도 별로 유타에서는 뛰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바로 애틀랜타 호크스로 트레이드 된다. 나중에 이 트레이드는 NBA 역사상 가장 한쪽이 손해본 트레이드 중 하나로 기억되게 된다.[5]
애틀란타로 이적하며 윌킨스는 9차례 올스타로 선정되었으며 신인 시절을 제외하고는 매년 20득점을 해주는 주 득점원으로 자리매김 했다. 그리고 1983년에 부임한 마이크 프라텔로 감독 아래 1985-86년에는 기라성 같은 후보들을 제끼고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6] 그리고 올스타에 선정되어서 슬램덩크 컨테스트에서도 멋진 덩크들을 보여주며 1위를 차지하는 등 여러모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덩크 콘테스트는 현재와 달리 일부 예외 (마이클 조던의 자유투라인 덩크 등)를 제외하면 경기 중 보여주는 덩크를 얼마나 완성도 있게 보여주냐를 겨뤘기 때문에 그의 덩크콘테스트 덩크가 그대로 인게임 덩크라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윌킨스와 줄리어스 어빙, 마이클 조던은 역대 최고의 "실전용 덩커"로 꼽히며 이들이 경기 중 보여주는 덩크나 운동능력은 후대의 최고의 덩커들보다 결코 아래가 아니다.
아래에도 서술되지만 역대 최고의 덩커라고 하면 보통 저 셋에 빈스 카터까지 꼽히는데 [7] 점프력과 스피드도 대단했지만 윌킨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파워. 스몰포워드치고 비교적 평범한 체격이었음에도 림을 쥐어뜯을 듯이 정말 압도적인 파워덩크를 자랑했다. 이 때문에 그는 그냥 투핸드 덩크를 해도 명장면으로 남을 정도로 엄청난 덩커였다. 실제로 조던이 수많은 명장면을 남겼음에도 덩커로선 윌킨스가 평가가 앞서고, 명실상부한 덩크왕 빈스 카터가 가장 높게 평가받았에도 윌킨스를 두고 누가 더 뛰어난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 카터와 윌킨스 둘 다 윈드밀의 고수지만, 카터는 길고 유연한 팔을 마치 풍차처럼 돌리며 꽂아넣었다면 윌킨스는 팔의 궤적은 더 작았지만 더 역동적으로 쑤셔넣었다. 실제로 카터는 원핸드윈드밀이, 도미니크는 투핸드 윈드밀이 가장 높게 평가받는다.
또 하나의 필살기는 바로 풋백 덩크.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은 웬만하면 이런 명장면을 많이 남기지만 윌킨스는 유독 풋백 덩크가 엄청났는데 '''풋백 덩크조차 풀 파워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압도적인 운동능력으로 상대 수비수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상태에서도 박스아웃이고 뭐고 그냥 다 뛰어넘고 덩크를 찍었는데, 워낙 높이가 높다보니 풋백할때도 그냥 강력하게 내리찍었다.
이 파워 때문에 그의 덩크는 유독 수비수들이 많이 나가떨어졌는데, 케니 스미스가 표현한 바에 따르면 "다른 위대한 덩커들은 수비수들이 '으아아... (감탄)'하게 만들지. 그런데 도미니크 덩크에는 수비수들이 '으아아!!!ㅠㅠ'하게 된단 말이야."라고 표현했다.
다음 해에도 올스타에 선정되고 슬램덩크 컨테스트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팀 동료 스퍼드 웹이 173cm의 키에도 뛰어난 덩크를 보여주며 2관왕에는 실패한다. 이 당시 윌킨스가 뛰고 있던 호크스는 나름 괜찮은 팀이었다. 가드로는 키는 작지만 운동신경이 좋은 스퍼드 웹과 닥 리버스가 있었고, 케빈 윌리스라는 준수한 센터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시의 경쟁팀들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점(...) 서부 지구는 갈 필요도 없이 동부 지구만 봐도 래리 버드가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 아이재아 토마스가 이끄는 배드 보이즈 그리고 그들 뒤에는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8][9] 그들 사이에 묻혀 윌킨스는 제대로 컨파도 가보지 못하는 불운함을 겪었다.
80년대는 정말 윌킨스가 뭘 해도 안되는 시절이긴 했는데 득점왕을 차지한 후에도 좋은 성적으로 윌킨스는 1987-88년에 평균득점 30.7점이라는 지금이라면 득점왕을 거의 따놓는 평득점을 달성했는데 이해에 조던이 평균 35점 득점을 해버렸다(...) 결국 득점왕 실패. 그 해에 지금도 꽤 회자되는 조던과의 슬램덩크 대결에서도 2점차로 아쉽게 패배하면서 참 아쉬운 콩라인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1988년 동부 지구 우승전에서 래리 버드와의 대결도 꽤 알려졌는데[10] 7차전 경기에서 윌킨스는 47점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냈지만 하필 버드가 마지막 쿼터에 20점을 득점하면서 2점차로 패하게 된다. 이게 윌킨스가 우승에 가장 근접해본 성적이다. 여기엔 훗날 윌킨스가 토크쇼인 "Open Court"에서 밝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날 래리버드의 총 득점은 34점으로 3쿼터까지는 14점으로 래리 버드 답지 않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윌킨스는 "순조롭게 진행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동료 케빈 윌리스가 래리 버드를 가리키며 "이 XX가 더 이상 득점 못하게 해"라고 조롱하는 것을 목격했다. 윌킨스는 그 동료를 보면서 "어...너 지금 무슨 짓이냐?(Uh....What are you doing??)" 라고 했는데, 그 때 래리 버드가 빡돈 걸 느끼고 "아 망했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1]
그 다음해인 1989-1990 다시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이번에는 슬램덩크 컨테스트에서 인 케니 스미스를 만나 승리하며 슬램덩크 우승자가 된다. 개인적으로도 26.7득점을 하고 팀에서 스틸도 이끌며 좋은 성적을 냈지만 팀의 성적은 5할에 그치며 윌킨스 선수 역사상 두번째로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맛본다. 시즌이 끝나고 은사인 프라텔로 감독이 해설자로 전직해 팀을 떠난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팀의 필요에 따라 그는 리바운딩과 어시스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삼점슛도 장착함으로 더욱 더 완성형 플레이어로 다가가게 된다. 문제는 이 시기가 "배드 보이즈"의 전성시절. 배드 보이즈의 질식 수비에 막힌 그 역시 부진한 성적을 냈다. 1991-1992년 시즌에는 아킬리스건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 당하기 직전까지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다는게 상당히 아쉬운 항목.[12] 그러나 다음해에 성공적으로 컴백했으며 다른 여러가지 부상을 겪는 불운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29.9점의 평득점을 달성하지만 역시 이 분위에는 그 분이 있었기에 또 득점왕을 내줬다.[13] 계속해서 그는 호크스에서 활약하며 밥 페티트의 프랜차이즈 기록도 깨고 20000점을 달성하는등 큰 활약을 했으나 이때는 또 불스의 전성기라 불스에게 처참하게 깨진다.
그리고 1993-1994년중 애틀란타의 상징인 윌킨스를 LA클리퍼스로 트레이드 하는 만행을 저지른다.[14][15] 이후의 호크스의 행적을 보면... 표면상의 이유는 더욱 다방면으로 활약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다 였지만, 이미 35살의 노장에 가까워진 되어버린 윌킨스를 자유계약선수로 잡기는 뭐하고 해서 자금상의 이유로 트레이드했다 여겨진다. 중요한 건 이때 트레이드로 받아온 매닝을 호크스는 시즌이 끝나고 '''안 잡았다.''' 프랜차이저를 트레이드해버리고 기껏 받아온 올스타급 선수도 버렸다는 소리. 즉, 전력보강은 핑계고 그냥 돈 아낄려고 팬들에게 사랑받는 소중한 프랜차이즈 선수를 팔아버린 것. 이 때문에 94시즌 57승이나 거둔 호크스는 다음 시즌에 42승으로 추락한다. 괜히 90년대 호크스가 충성스런 팬층이 얇은 게 아니다.
2.2.1. 88년 덩크 콘테스트
NBA가 인기를 끈 시기가 상대적으로 짧은 한국에서는 덩크 콘테스트라고 하면 닥치고 2000년이 꼽히지만, 사실 미국에선 88년 덩크 콘테스트가 더 인기가 높다. 덩크 자체도 멋지지만 무엇보다 역대 최고의 인기스타이자 역대 최고선수인 마이클 조던과 역대 최고의 덩커 중 하나이자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중 하나였던 윌킨스가 진검승부를 펼쳤기 때문.[16]
1988년에는 시카고 불스의 홈인 시카고에서 올스타 주간이 열렸으며, 이 때문에 홈타운 스타인데다 이제 리그 최고의 인기스타로[17] 거듭난 조던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여기에 걸맞게 조던은 올스타전 본게임에서도 윌트 체임벌린 이후 최고 점수인 40점을 퍼부으며 MVP에 선정되었다.
조던과 윌킨스는 85년에도 한 차례 덩크 콘테스트 결승에서 맞붙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윌킨스가 루키 조던을 꺾고 우승했다. 이후 86년도엔 많이 알려졌다시피 조던은 부상으로 결장, 애틀란타 호크스 동료들인 스퍼드 웹[18] 과 윌킨스가 맞붙었는데 윌킨스가 객관적으로 더 우월한 덩크를 보이고도 단신 어드밴티지를 얻은 웹에게 패배, 87년엔 조던이 돌아왔지만 이번엔 윌킨스가 부상으로 불참해 이들의 재대결은 3년만에야 이뤄지게 된다. 마침내 붙은 둘은 그들이 커리어에서 참여한 덩크 콘테스트 중 최고라고 볼 수 있을 만한 기량을 선보인다.
일단 조던의 첫 우승인 87년에는 그 유명한 leaner [19] 덩크, 85년에는 rock-the-cradle 덩크를 선보였지만 88년 덩크에서 보인 자유투라인 덩크는 그 전과는 차원이 다른 완성도가 있었다.
윌킨스의 경우도 본인 커리어에서 역대 최고라고 할 수도 있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는 우승 트로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지금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덩크들을 연달어 선보였는데, 특히 백보드에 볼을 튕겨 한 원맨 앨리웁의 경우 방송국에서 그의 머리 높이를 자체측정했는데 (물론 첨단 기술은 아니고 그냥 녹화화면 보고 한거라 정확하진 않다) 무려 10피트 2인치 (약 310cm)가 나왔다.[20] 게다가 80년대에는 같은 덩크를 여러 번 해도 괜찮았는데, 이 때 윌킨스는 같은 덩크를 거의 하지 않고[21] 하더라도 약간씩 변형시켜서 했다. 레파토리, 완성도, 박력 면에서 전혀 흠잡을게 없는 완벽한 퍼포먼스. 특히 본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투핸드 윈드밀을 결승 마지막으로 선보여 우승에 쐐기를 박으려고 했고,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윌킨스의 우승은 확정적이었다. 조던이 그 전에 선보인 투핸드 덩크가 48점을 받았기에 윌킨스는 48점을 받으면 우승하는건데 저 덩크는 '''누가봐도 50점 짜리였다.''' 그러나 이 덩크가 말도 안되게 '''45점을 받아서''' 윌킨스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심지어 시카고의 관중들조차 야유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들 알다시피 뒤이어 조던이 그림같은 자유투라인 덩크를 성공시키며 우승.
윌킨스는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이고도 우승을 강탈당한 거나 마찬가지라 그는 이때 준우승과 86년 준우승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나 4번 우승했는데 두번만 인정해주더라고." 다만 이게 논란이 적게 된 이유는 어쨌든 조던도 역대 최고의 덩커 중 하나인데다가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자유투라인 덩크가 아름답기까지 할 정도로 완벽하고 멋진 덩크라 (조던은 덩크 콘테스트에 나올때마다 최소 1번 이상 자유투라인 덩크를 했는데 이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적은 없었다) 그의 우승이 충분히 납득이 갔기 때문. 이유가 어찌됐든 윌킨스가 당시 기준으로 만점이 당연한 덩크를 하고도 45점이란 말도 안되게 낮은 점수를 받고, 이 때문에 우승 기회가 사라진 건 맞다.
사실 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누가 이겼어야 됐냐 말이 많은데, 중론은 어쨌거나 둘다 우승할 만한 기량이었으며 약간의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얻어 조던이 우승했다는 것. 아이러니하게 윌킨스가 우승한 85년이나 90년보다 그가 준우승한 86년이나 88년이 더 화제가 되곤 한다. 특히 90년에는 30세가 되어 신체적으론 하락세가 시작된 윌킨스가 예전에 보인 덩크들을, 심지어 같은 대회에서도 반복하며 신예 케니 스미스를 간발의 차로 제치는데 그쳤으니... (결승에서 붙은 스미스가 별로 네임밸류가 높지 않은 선수란 것도 컸다) 반면 86년에는 웹의 퍼포먼스가 워낙 인상적이었고, 88년도엔 80년대 최고 덩커 두 명이[22] 각자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며 맞붙은 대회기 때문.
여담으로 해당 논란은 벌써 수십년이나 됐으며, 윌킨스도 수 차례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한바 있다. 한 선수의 여러 인간적인 면이나 논란에 초점을 두는 다큐멘터리 ESPN Sports Century 시리즈에서 2005년에 방송된 마이클 조던 편에서도 윌킨스는 이런 인터뷰를 남긴 바 있다. 80년대 당시 NBA가 큰 인기를 못 누린 한국 대중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올드농구팬들 사이에선 유명한 얘기.
그런데 2014년엔 한 한국 농알못 기자가 이 뻔한 얘기를 "조던 과거폭로"란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올린 적이 있는데, 해당 인터뷰는 윌킨스가 매번 하는 얘기일 뿐 무슨 폭로도 아니다. 맥과이어가 칸세코랑 사이가 틀어진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한국 언론계 "일각"의 허접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기사.
2.3. 보스턴 셀틱스
1994년 시즌이 끝나고 계약을 했으나 별다른 활약은 없었다. 셀틱스도 그저 어린 선수들의 멘토 정도로 생각했던듯 하다. 결국 윌킨스는 NBA가 아닌 유럽 리그를 알아보기로 한다.
2.4. 그리스 리그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 라는 팀과 2년간 700만불에 계약했다.
처음에는 그닥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당시 감독인 보지다르 말리코비치(Božidar Maljković)가 윌킨스를 워낙 빡세고 엄하게 굴렸기 때문. 처음에는 여러 불만도 많았고 삐걱거렸지만 결국 융화되면서 Greek Cup도 이겼고 유로리그에서도 우승하는 등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그리스 리그 우승은 실패했다. 그는 그리스에서 21득점 8리바운드 1.7 어시스트라는 준수한 성적을 냈다.
2.5. 샌안토니오 스퍼스
그리스 선수 생활을 마치고 NBA로 귀환한 그는 벤치멤버를 보강하려 했던 샌안토니오와 계약했다.[23] 이 시즌에 데이비드 로빈슨도 부상으로 드러눕고 션 엘리엇 역시 부상으로 불참했던 시절 윌킨스는 18.2득점으로 팀의 주 득점원이 된다. 시즌이 끝나고 다시 그는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된다. [24]
2.6. 이탈리아 리그 및 마지막 NBA해
이탈리아 리그의 볼로나 팀과 계약을 맺게 된다. 여전히 준수한 성적을 낸 후에 다시 NBA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그의 동생이 있는 올랜도 매직과 계약하다. 마지막 해의 성적은 평균 5득점에 2.6 리바운드.
3. 선수 생활 이후
2004년 부터 호크스의 부사장으로 팀의 여러가지 면을 담당하고 있으며 지역 사회에 여러가지 면으로 일하고 있다. 동시에 팀의 공동 해설자로도 활약을 하고 있다. 와인 사업에도 매진하고 있는거 같다.
[image]
함께 같이 뛴 호크스 선수들 및 다른 구단의 유명 선수와 인사들이 함께 했다. 케빈 윌리스, 디켐베 무톰보 등등..
2015년 3월 6일에 애틀란타 호크스 팀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필립스 구장 앞에 그의 동상을 세워주었다. 역대 최고의 덩커답게 덩크를 하며 날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4. 플레이 스타일
'''The Human Highlight Film'''
'''역사상 최고의 덩커[25] 중 한명이자 80년대 후반 조던을 제외한 최고의 득점기계'''
윌킨스는 빈스 카터와 더불어 NBA 역사상 최고의 덩커로 뽑히는 선수이다. 덩크 콘테스트에서도 조던을 누르고 우승한 경력이 있는 만큼, 경연용 덩크도 최고였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바로 인게임에서 림을 찢어버릴듯한 미친 덩크이다. 맨발키 201cm로 스몰 포워드 평균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의 키였지만, 골밑에서 전성기 윌킨스의 덩크를 저지할 수 있는 선수는 리그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성기 윌킨스는 덩크를 할려고 뛸 때마다 매번 머리가 림을 넘기는 느낌을 줬었고, 실제로 그런적이 많다! 이런 NBA 역사상 손에 꼽을 괴물같은 운동능력으로 80년대 전성기시절에는 그야말로 플레이 하나하나가 마치 하이라이트 필름 그 자체였으며 그렇기에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위의 서술만 읽으면 압도적인 운동능력으로 돌파 위주로만 플레이 했을 것이라는 오해가 있다. 그렇지만 윌킨스는 중장거리 점퍼도 쏠쏠하게 사용했던 선수였다. 1980년대 조던과 득점왕 경쟁을 할 정도로 아주 훌륭한 득점력은 돌파 100%가 아닌 윌킨스의 다채로운 공격 방식에 기인한 것이었다.[26] 실제로 1992년 아킬레스 부상을 당한 이후로 더욱 점프 슛에 치중했고 복귀시즌인 1993년에는 3점을 경기당 1.7개 성공률 38%라는 놀라운 수치로 집어넣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아킬레스 부상 이후 훌륭한 복귀 사례.
5. 기타
- NBA 역사상 최고의 덩커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비교되는 대상들은 마이클 조던, 빈스 카터, 줄리어스 어빙 등 역대의 최고의 덩커들. 슬램덩크 대회에서도 두 번 우승했다.[27]
-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인 선정에 선정되지 못해서 말이 좀 있었다. 후에 TNT NBA Inside에서 50명 후보에 대해서 언급할때 상당한 패널들이 선정되어야 할 사람으로 윌킨스를 뽑았다. 물론 이렇게 된것에는 팀의 성적도 준수했고 본인의 기량도 80년 - 90년대 초반에는 충분히 들만했음에도 탈락했다.[28] 비공식적으로 TNT 인사이드 패널에서 10명을 더 추가하자 했을때 거의 모든 패널이 윌킨스를 포함시켰다.
- 팀의 지명도와 그 당시 더 큰 슈퍼스타들 (매직, 버드, 조던, 드림팀 멤버들 등등)에 묻혀 뛰어난 성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다. 물론 말년에 유럽을 왔다갔다한 것이 NBA의 눈밖에 난 측면도 있고, 이 때문에 명예의 전당 헌액이나 행사 참석도 힘들어질 뻔했다.
- 동상이 세워졌을 때 '"팀에 우승을 하지도 못하는 선수에게 무슨 동상씩이나 주냐'"고 말이 좀 있었다. 그런데 우승 못하고 동상 받은 가장 유명한 콩라인의 선수들도 있다. 하지만 호크스에서는 상징적인 선수였고 호크스 선수중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사람 중 몇 안되는 인물중 하나이며 호크스의 영구 결번 헌액을 받은 몇안되는 선수중에 하나라는 걸 보면 호크스 입장에서는 충분히 줄 만하다.[29]
- 스카티 피펜은 2019년 PO에서 자신이 현역 시절 가장 막기 힘든 상대로 도미니크 윌킨스를 꼽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매치업 상대 중 윌킨스가 3점슛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라고.[30]
[1] 사실 도미니크는 남자한테도 가끔 붙히지만 여자한테 주로 붙히는 이름으로, 미국에선 거의 여자 이름으로 쓰인다. 파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퍼스트 미들 네임 모두 프랑스식인 것. 애초에 도미니크는 미들네임이고, 미들네임은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그냥 의미가 있는 이름 (아버지 이름이나 인연이 있는 이름)을 붙혀넣고 신경 안 쓰는 경우가 대부분. 즉, 부모님은 그를 그냥 "자크 윌킨스"(당연히 남자이름)라고 의도하고 지었겠지만 무슨 이유인지 미들네임을 주로 쓰게 된 것.[2] 5회 참여로 역대최다 참여자다.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타이 기록인데 안습한 것은 드렉슬러는 5번이나 나왔는데 우승은 커녕 결승에도 못 올라갔다. 분명 뛰어난 덩커이건만...[3] 과소평가받는 슈터이다. 비록 80년대 선수라 3점슛을 의미있는 무기로 쓰기 시작한 건 커리어 중후반부터였지만, 조던과 마찬가지로 3점라인 한발짝 앞까지는 매우 안정적으로 슛을 넣을 수 있는 선수였다. 조던과 차이점은 조던은 슛터치가 부드럽진 않고 포물선이 낮아 중거리슛에 특화된 반면, 윌킨스는 슛터치가 부드러워 중장거리슛을 던지면 상당히 넢은 곡선을 그리며 깔끔하게 날아갔다. 애초에 선수들간의 신체접촉이 많고 거칠었던 80년대에 스윙맨이 슛 없이 29~30점씩 넣는 건 불가능했다.[4] 마이클 조던과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동문이다.[5] 존 드류, 프리먼 윌리엄스와 백만달러 현금을 재즈가 받았는데, 윌리엄스는 클리퍼스에 있을땐 상당히 잘 나갔으나 약팀빨이었는지 호크스 이적 후 4.8점으로 추락, 이후 재즈에서 한 시즌만 뛰고 하부리그인 CBA로 가야했고 드류는 2회 올스타에 빛나는 선수였고 재즈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기록은 남겼으나 이미 커리어가 하락세에 접어든 선수라 3년만에 은퇴했다. 사실 윌킨스처럼 선수가 대놓고 뛰기 싫어하면 제 값을 받긴 힘들다.[6] 다만 조던은 이 시즌에 3경기만에 부상으로 60경기 넘게 결장하고, 복귀하고서도 출전시간을 철저히 제한받아 애초에 득점왕 레이스에 끼지도 못했다. 그리고 매직 존슨은 애초에 득점왕 레이스에 낄만큼 고득점을 올리는 선수가 아니다. 이 시즌에 30.3점을 기록한 윌킨스를 턱밑까지 추격한 선수들은 에이드리안 댄틀리와 알렉스 잉글리쉬(둘 다 29.8점)이며, 4위 버드는 윌킨스보다 4.5점 낮은 25.8점에 그쳤다.[7] 미국에선 제이슨 리처드슨이나 잭 라빈처럼 덩크는 최고지만 기량 자체가 슈퍼스타가 아닌 경우는 "역대 최고의 덩커"를 꼽을 때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 00년대까지 "역대 최고의 슈터"를 논할때 레지 밀러나 래리 버드를 언급하지 스티브 커나 크렉 하지스가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처럼.[8] 사실 불스의 경우 조던 시대에 단 한번도 애틀란타와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적이 없을 뿐더러 조던의 데뷔 초창기였던 80년대에는 오히려 애틀란타가 불스보다 더 강한 전력이었다. 벽이라고 하기 애매한 경우. 오히려 지금은 잊혀졌지만 80년대에 셀틱스를 업셋하기도 하는 등 우승후보엔 한끝 못 미치지만 강력한 다크호스였던 밀워키 벅스가 전력상 호크스와 라이벌이었다.[9] 하지만 또 맞는 말이기도 한게, 80년대는 셀틱스 왕조, 후반에는 피스톤즈 왕조였고 그 80년대가 끝나자마자 90년대에는 불스왕즈가 들어선다. 단 불스의 경우는 초반에 산이 아니었다가 후반에 산이 된 셈.[10] 참고로 윌킨스는 버드에게 '''인 유어 페이스 덩크'''로 굴욕을 안겨준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그 유명한 영상[11] 참고로 래리버드는 이런 일화가 '''매우 많다.''' 한번은 그가 위닝샷을 터뜨렸는데 감독 K.C. 존스가 실수로 타임아웃을 불러서 취소된 적이 있었다. 타임아웃 이후 그는 굳이 똑같은 장소로 똑같이 가서 똑같이 위닝샷을 터뜨렸다. 또한 시애틀의 엑제비어 대니얼스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가 자신에게 "난 여기서 공 잡아서 여기로 가서 위닝샷을 넣을거야"라고 하고 '''그대로 실행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두 장면 모두 유튜브에 영상자료로 남아있다.[12]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드림팀 선발 과정에서도 윌킨스의 합류가 논의되었으나 이 부상으로 인해 선발되지 못했다.[13] 이 두번을 포함해 87시즌까지 조던에 밀려서 총 세번이나 득점 2위에 그치는 불운을 겪는다. 사실 87시즌의 29점도 잘하면 득점왕을 노릴 수도 있는 고득점이었으나, 이 시즌의 조던은 무려 평균 37점을 기록해 윌트 체임벌린 이후 가장 싱거웠던 득점왕 레이스의 조역이 되고 만다. 다만 이 분야의 최고봉은 조던에게 89~92시즌까지 네시즌 연속으로 밀려 득점 2위를 기록했던 칼 말론. 심지어 말론은 평균 31점까지 찍고도 조던에게 밀려 득점왕에 못 올랐다.[14] NBA 역사상 올스타전 직전에 지구에서 1위에 있는 팀이 팀의 득점왕을 트레이드하는 전후무후한 사례였다.[15] 당시 구단측이 윌킨스를 내주고 받은 선수는 대니 매닝이라는 선수로 NBA 드래프트 1순위 출신이긴 하나 윌킨스보다 딱히 낫지 않은 선수였다. 다만 기량은 어느 정도 비슷한데 (전성기 기량이 비슷하단게 아니다. 하락한 윌킨스와 비슷하다는 것) 나이가 6살이나 어리므로 비지니스적으로만 보면 그럭저럭 말은 되는 행보였다. 그러나 조지아 주 토박이인데다 애틀란타의 프랜차이저로 팬들의 사랑을 받던 윌킨스를 조그만 이득을 위해 팔아버렸다는 점에서 엄청난 욕을 먹었다.[16] 이 때문에 인기를 떠나 "가장 위대한 덩크 콘테스트 (greatest dunk contest)"라고 불린다. 사실 미국에선 한국과 달리 덩커들의 선수로서의 명성도 보는 편. 이 때문에 역대 최고의 덩커를 꼽으라면 슈퍼스타였던 빈스 카터, 도미니크 윌킨스, 마이클 조던, 줄리어스 어빙 사이에서 갈리지, 덩크만 따지면 역대급인 잭 라빈같은 선수는 언급되지 않는다. 추가로 라빈같은 선수는 경기 중 역사에 남을 덩크를 선보인 적은 없다는 것도 크다. 물론 그렇다고 역대급 인게임 덩크가 있는 제랄드 그린이 언급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덩크의 난이도 외에 덩커의 명성도 보기 때문에, 둘 다 역대급 덩커이자 승부를 벌일 당시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던 조던과 윌킨스의 88년 맞대결이 높이 평가받는 것. 이들이 처음 붙은 85년에 조던은 올스타였지만 아직 루키, 윌킨스는 첫 올스타에 뽑히기도 전이라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까진 아니었다.[17] 조던은 87년부터 1차 은퇴하던 93년까지 7년 연속으로 올스타 투표 전체 1위를 차지했다. 복귀 이후 두번 더 1위를 차지해 9회로 당연히 역대 최다. 2위는 2020년 기준 6번 1위를 차지한 르브론 제임스이다.[18] 웹은 키가 168cm 밖에 안되는 단신이지만 여기서 우승하면서 농구는 키가 커야한다라는 편견을 깼다.[19] kiss-the-rim이라고도 한다. 일종의 변형 윈드밀 덩크라고 볼 수도 있지만 팔의 궤적은 그리 크지 않고 대신 앞으로 거의 눕듯이 기울여서 덩크하기 때문에 느낌이 다르다. 윈드밀이 파워풀하다면 이 덩크는 우아한 느낌. 뒤에서 보면 마치 림에 키스할 것 같은 착시효과가 있기 때문에 저 별명이 붙었다.[20] 그냥 육안으로 봐도 거의 림과 눈높이를 맞출 정도의 높이였다. 게다가 러닝점프도 아니고 공을 튕긴 상태에서 스텝 두번 밟고 뛴 것이고, 높이 뛰는데만 집중한게 아니라 덩크를 하려고 점프한건데도 저 정도 높이가 나왔으니 그의 괴물같은 운동능력을 엿볼 수 있다.[21] 당시엔 다양한 레파토리를 준비하기보다는 선수들마다 각자의 필살기를 선보이는 경향이 높았다. 조던은 leaner, rock-the-cradle, 자유투 등 유연성과 공중동작이 돋보이는 덩크들이 많았고, 도미닉은 윈드밀과 원핸드 앨리웁 등 높이와 파워가 돋보이는 덩크들이 많았다. 사실 이 것 때문에 피 본 선수가 클라이드 드렉슬러인데, 그는 윌킨스와 마찬가지로 무려 5번, 역대 최다 참가자임에도 결승에 한번도 못 올랐다. 그는 별명이 glide일 정도로 멀리 뛰어 덩크하는 선수인데, 펄쩍 뛰는게 아니라 진짜 공중에서 미끄러지는 듯 스르륵 먼 거리를 가는 그의 덩크는 경기 중 보면 예술이지만 덩크 콘테스트에서 하긴 심심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22] 줄리어스 어빙도 이들과 동급의 덩커지만 그는 나이가 윌킨스보다도 10살이 많아 선수로선 몰라도 덩커로서 전성기는 70년대다.[23] 근데 하필 이 시즌이 팀 던컨이 합류하기 바로 전 시즌이다.[24] 만약 윌킨스가 잔류했다면 2년 후에 스퍼스가 우승했다는 점을 보면 말년에 우승반지 하나 손에 낄 수 있었을 것이다.[25] FOX SPORTS 선정 역대 덩커 순위[26] 1988년 동부 준결승 7차전에서 래리 버드와 윌킨스의 4쿼터 쇼다운은 역대급 명승부로 꼽히는데, 이때 윌킨스는 오히려 돌파 비중은 훨씬 적고 점프슛 위주로 득점하는 걸 볼 수 있다. 또한 점프슛 자체도 상당히 포물선이 높고 깔끔하다. 당시는 3점 비중이 적은 시대라 모든 수비가 3점 라인 안쪽으로 몰려있고, 신체접촉에 관대한 시기라 아무리 돌파력이 뛰어나도 (컨택으로 인한) 체력소모 때문에 골밑까지 돌파하는 것이 훨씬 힘들었다. 이 때문에 마이클 조던이나 론 하퍼 등 돌파력이 뛰어난 득점원들은 골밑까지 돌파를 하지 않고 돌파 후 단거리~중거리슛 위치에서 풀업점퍼를 던지는 비율이 높았다. 게다가 보스턴 셀틱스는 버드(208cm)-케빈 맥헤일(211cm)-로버트 패리쉬(216cm)란 초대형 프런트코트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골밑으로 닥돌하는 선수는 절대 맹활약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당시 윌킨스는 47점을 맹폭했다.[27] 특히 경기 내에서 하는 덩크가 대단해서 NBA 전직 선수들의 토크쇼 Open Court에서 많은 패널들이 덩콘에서 최고 덩커는 빈스 카터, 경기 내에선 도미니크를 뽑았다. 그의 최대 무기는 투핸드 윈드밀로, 카터가 한팔을 큰 원을 그리며 호쾌하게 꽂아넣는 원핸드 윈드밀로 유명하다면, 윌킨스는 림을 쥐어뜯을듯한 파워의 투핸드로 유명했다.[28] 사실 이 선정에 가장 논란이 많았던건 불과 4년차에 불과했던 샤킬 오닐의 선정이었다. 지금이야 당연히 들만하고 그 당시에도 페니 하더웨이와 올랜도 돌풍을 이끈건 사실이지만 경력이 너무 없었다. 그 자존심 높은 오닐 본인도 "너무 빨리 선정된거 같다" 라고 말할 정도. 그 유명한 데이비드 로빈슨도 사실 10년차를 못채웠긴 했다. 다만 로빈슨은 군대 때문에 데뷔가 늦어 8년차렸지만 당시 만 31세반으로 전성기를 조금 지난 상태인데다 MVP까지 수상한 상태였지만 오닐은 5년차인데다 나이도 만 25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보통 NBA에서 25세는 어린선수/베테랑 선수가 갈라지는 경계선으로 보는데 아직 young이란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24살짜리를 "위대한 50인"에 넣긴 아무리 봐도 시기상조였다.[29] NBA 인사이드에서 패널들이 윌킨스를 언급할때도 그를 호크스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언급을 했다. 레이커스 하면 매직, 피스톤즈 하면 아이재아가 떠오르듯이 호크스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윌킨스라는 것. 실제 호크스는 경영진의 삽질로 인해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부를만한 선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30] 피펜은 덧붙여서 팀내 연습까지 포함하면 마이클 조던이 가장 힘든 상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