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하퍼
1. 개요
오하이오 출신의 NBA 선수. 클리블랜드와 클리퍼스의 에이스 가드였다가 시카고 불스 왕조와 LA 레이커스의 2000년대 왕조를 거치면서 5개의 반지를 손에 넣었다.
2. NBA 커리어
캐벌리어스에 1라운드 8픽으로 지명되어 인상적인 활약을 하면서 80년대 후반 강팀이었던 캐벌리어스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캐벌리어스는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전성기임에도 가로막혀버렸고[1] 하퍼는 1989년 플레이오프에서 불스를 만나 조던을 수비하다가 감독이 막판에 수비선수를 바꿔버리는 바람에 마이클 조던의 전설의 ' The Shot'에 팀이 박살나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보고 만다.[2]
The Shot으로 시즌이 끝난 이후 하퍼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로 트레이드되었고 NBA 사상 최악의 팀이었던 90년대 클리퍼스에서 나름 에이스 역할을 하면서 팀을 지탱해냈다. 하지만 1989-90시즌 그의 커리어 전체를 내리막으로 끌고간 부상을 당하게 된다. 클리퍼스에서 하퍼는 7위로 2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3] 2번 다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그 뒤에 클리퍼스는 또 바닥을 기기 시작했고 하퍼는 93년 은퇴한 조던의 자리를 메꾸고자 했던 과거의 원수 시카고 불스로 1994년 트레이드 되었다.
당시 불스는 은퇴한 조던의 빈자리를 피트 마이어스란 지극히 평범한 슈팅가드로 교체한 채 93-94시즌을 치렀다. 이때는 조던이 야구하러 떠난 후 피펜과 그랜트가 우리도 스타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라면서 열심히 뛰고 있던 시기였고, BJ 암스트롱, 피펜, 그랜트가 모두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며 3명이나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쾌거를 거뒀다.[4] 특히 정규시즌에선 55승이나 거두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에이스 득점원의 부재로 인해 플레이오프에서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이 와중에 영입한 선수가 바로 론 하퍼였던 것.
하퍼는 당시 꽤나 거물급 선수였다. 93-94시즌 당시 클리퍼스 소속이던 그는 리그에서 7번째로 많은 399만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샤킬 오닐 (389만달러) 패트릭 유잉 (382만달러)보다도 많은 액수였으며 현역 가드 중에선 가장 높은 연봉이었다. [5] 어쨌거나 당시까지 하퍼는 당시만 해도 (비록 올스타 선정은 없었지만) 올스타급 가드로 인정받았으며, 실제로 불스 시절 한 해설자는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부분인데 하퍼는 올스타였죠"라고 잘못 해설할 정도였다. 그만큼 올스타 선정 한번이 없다는게 이상할 정도로 좋은 선수였던 것. 당시 불스와 하퍼의 계약은 계약 직후엔 "연평균 3백만 달러 이상의 장기계약"으로 알려졌으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총액 1천9백만 달러 이상의 5년 계약이었다.
하퍼의 계약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94-95시즌 당시 불스는 피펜과 연봉으로 인한 갈등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돈 아까워하는 불스 프런트는 피펜을 트래이드하고 리빌딩을 시작하는 걸 고려하고 있었다. 시카고는 93-94시즌 당시 야심차게 영입한 토니 쿠코치가 NBA에서 당초 기대대로 가드를 보는 건 (키가 너무 커서) 불가능하고, 파워포워드를 보기엔 너무 연약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된 상황이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들어갈 포지션은 스몰포워드였으나 문제는 여기엔 팀 내 최고의 선수인 피펜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당시 불스는 피펜을 매물로 파워포워드를 찾고 있었다. 이 중 불스가 가장 군침을 흘린 건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젊은 슈퍼스타 숀 켐프였으나 워싱턴 불리츠(현 위저즈)의 루키 주완 하워드, 마이애미의 로니 세이컬리의 이름도 오가던 상황.
만약 피펜을 떠나보낸다면 당장 우려되는 것은 백코트 수비의 약화이자 슬래셔의 부재. 이 상황에서 돌파능력과 긴팔을 잘 활용하는좋은 수비력을 지니고 다재다능한 하퍼는 (피펜보다야 못하지만) 피펜의 대체자 역할로 기대받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시카고 트리뷴의 샘 스미스 기자는 "불스가 드디어 하퍼를 얻었다. 문제는 이 (영입이) 과연 그들이 스카티 피펜을 트래이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의미냐는 것이다"란 기사를 썼다. http://www.chicagotribune.com/news/ct-xpm-1994-09-17-9409170144-story.html 피펜 트래이드가 이뤄졌다면 BJ 암스트롱-하퍼-쿠코치-숀 켐프(?)-윌 퍼듀란 공격라인업을 이루게 됐을 것이다.
문제는 하퍼가 그리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 클리퍼스 시절엔 공동 주장까지 하고, 93-94시즌엔 20.1점 6.1리바운드 4.6어시스트 1.9스틸을 기록하던 하퍼는 불스 소속이 된 첫 경기에 주전 가드로 출장해 31분동안 야투 12개를 던져 3개를 성공, 8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에 6파울 퇴장당하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 두번째 경기에서는 야투 6개를 전부 실패, 세번째 게임에서는 21분만 뛰며 야투 3개를 던져 1개 성공, 그가 두자리수 득점을 넣기까지는 6경기가 걸렸다. 이후에도 그는 지속적으로 들쭉날쭉한 야투와 득점을 선보였다.
마이클 조던이 복귀하기 전까지 하퍼는 65경기동안 52경기에 주전으로 출장했지만 출전시간은 22분, 기록은 7.5점 2.6리바운드 2.3어시스트 1.4스틸에 그쳤다. 이는 조던의 대체자로서도, 피펜의 대체자로서도 전혀 적합한 기록이 아니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하퍼는 불스 시스템과 그리 맞지 않았다. 일단 하퍼는 운동능력과 센스가 뛰어나고, 슛거리는 짧지만 중거리슛까지 득점감각이 뛰어났지만, 장거리슈팅력은 약한 전형적인 80년대 슈팅가드였다. 그런데 90년대로 접어들며 NBA는 페이스가 느린 하프코트 오펜스 위주의 리그가 되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20피트 이상 장거리 슛엔 약점이 있는 하퍼는, 안 그래도 모션 오펜스 중심인 불스에서 그다지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는 젊은 시절부터 겪은 무릎부상으로 기동력과 운동능력이 예전만 못했다.
그나마 하퍼만 있었다면 그 위주로 시스템을 다시 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능력이 예전만 못하다고 해도 그는 직전 시즌에 평균 20점을 기록한 스코어러였으니...그러나 그는 스카티 피펜과 행동반경이 겹쳤고, 주 볼핸들러 자리를 피펜이 꿰차고 있는 상황에서 캐치앤슛 능력이 필요한 불스의 가드 자리에서 전혀 적응을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불스는 당시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주전 빅맨들 중 빌 카트라이트는 은퇴, 호레이스 그랜트는 올랜도 매직으로 떠났으며, 원래 스몰포워드를 봐야할 쿠코치가 주전 파워포워드로 나가 수비에서 발리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쿠코치가 없으면 Larry Krystkowiak이란 이름도 난감한 허접한 선수가 주전으로 나가나는 상황이었다. 센터진은 윌 퍼듀가 주전으로 나섰지만, 그는 그의 백업인 룩 롱리보다 미세하게 나은 정도였다.
에이스 피펜은 실력은 건재했지만 시즌 내내 입이 튀어나와 불만을 토로했고, 경기 도중 열 받아서 의자를 코트 위에 던지는 대형사고까지 쳤다. 이런 상황이니 팀은 3월 17일까지 34승 31패, 5할을 조금 넘는 성적을 찍으며 지지부진했으며, 별 다른 전력보강이나 움직임 없이 트래이드 마감일을 허무하게 보내고 만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조던이 복귀했고, 제 컨디션이 아닌 조던이었음에도 17경기동안 팀을 13승 4패로 이끌며 플레이오프에선 4번 시드 샬럿 호네츠를 업셋, 2라운드에선 동부 챔피언 올랜도 매직에게 2승4패로 석패하게 된다.
문제는 "황제의 귀환"에서 횡제의 포지션이 '''슈팅가드'''였다는 것이다. 결국 거액을 받으며 기대주로 입단한 하퍼는 시즌 마지막 12경기에서 고작 한 경기 주전, 출전시간 평균 '''8.6분'''에 3.6점 0.8리바운드 0.8어시스트란 처참한 성적에 그친다. 그나마 주전 출장한 경기도 결장한 피펜 대신 출전한 것. 플레이오프에서도 별 비중이 없던 하퍼는 그렇게 시즌을 마무리한다.
95년 오프시즌에 불스는 변화를 맞이한다. 주전 포인트가드 BJ 암스트롱이 신생팀 토론토 랩터스의 확장 드래프트에서 지명이 되어 떠나게 된 것.[6] 그러나 당시 불스의 로스터에 또다른 포인트가드는 슈팅력을 제외하곤 별볼일 없던 스티브 커, 그리고 새롭게 합류한 운동능력과을 제외하면 별볼일 없는(...) 랜디 브라운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스의 코치진은, 비록 슛거리가 짧고 득점력이 많이 사라졌지만 농구센스가 대단하고 수비력이 좋은 론 하퍼를 '''포인트가드'''로 올리게 된다. 불스 시스템은 PG의 역할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어차피 피펜과 조던이 볼핸들링을 했기에, 제3볼핸들러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고 농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하퍼를 다른 가드로 세운 것.
사실 하퍼는 공격 면에선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센스가 뛰어나 좋은 움직임으로 수비를 교란시키거나 컷인, 킥아웃해주는 볼을 받아 중거리에서 득점 정도는 해주었지만 기본적으로 캐치앤슛이 그렇게 뛰어난 선수가 아니라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긴팔과[7] 센스를 이용한 압박 수비수로서 좋은 역할을 해주었다.
단독으로 하퍼는 톱급 수비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사이즈를 이용한 압박은 상대 PG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도움수비가 뛰어난 불스의 팀수비가 효과를 보았다. 대표적으로 2년 연속 불스와 붙은 존 스탁턴은 칼 말론과의 2대2 플레이로 인한 미스매치로 재미를 보는 선수였는데, 이건 누구랑 스위치를 해도 비슷한 사이즈니 별 재미를 못 보았다. 특히 불스에서 센터를 제외한 네 명이 모두 사이즈가 비슷하고 운동능력이 평균 이상이며 팔이 길다는 것은 매우 큰 장점이었다.
단점은 그가 무릎이 그리 좋지 못하며 기본적으로 키가 크기 때문에 작고 재빠른 선수들에게 약했다는 것이다. 위에 나온 스탁턴은 30대 중반이라 전성기에 비해 스피드가 느려져서 그나마 괴롭힐 수 있었고, 알렌 아이버슨의 경우 하퍼와 매치업될 때마다 폭발을 하곤 했다. 비슷하게 털린 케이스가 95-96시즌에 리그 꼴찌팀 주제에 불스에게 1패를 안긴 랩터스의 신인 데이먼 스타더마이어.[8]
어쨌거나 새 역할을 맡은 하퍼는 큰 부담 없이 안정적으로 주전 포인트가드로서 23~28분 가량만을 뛰며 조력자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이 새로운 변신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하퍼는 98-99시즌 이후 은퇴를 하고자했으나, 필 잭슨 감독의 설득으로 그가 취임한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해 비슷한 역할로 주전 PG를 맡게 된다.
슈퍼스타가 아니고, (불스시절엔) 그리 화려한 선수가 아니라 많이 간과되고, 특급 식스맨이었으며 사실상의 주전이나 다름없던 쿠코치에 밀리는 감이 있지만, 하퍼 역시 불스의 후반 3연패 당시 빼놓을 수 없는 조력자 중 하나였다.
98-99시즌 마이클 조던, 스코티 피펜, 데니스 로드먼, 필 잭슨, 스티브 커 등이 모두 떠나버린 황무지 불스는 토니 쿠코치가 분발했으나 급격하게 내리막을 타버렸고 하퍼도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불스를 떠나게 되었다.
하퍼가 향한 곳은 불스 시절 은사 필 잭슨 감독이 취임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스티브 커가 불스에서 떠나자마자 1999년 반지를 손에 넣었듯이 하퍼도 불스를 떠나자마자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가 리그를 휩쓸고 있던 레이커스에서 반지 2개를 얻었다. 우승 운은 확실히 있었던 선수. 공을 조금 더 많이 소유하는 플레이가 오랜만에 가능했던 1999-00시즌에는 플레이오프에서 결승샷을 넣는 등 활약했으나 2000-01시즌에는 노쇠화로 크게 도움은 되지 못하고 쓰리핏까지는 함께하지 못하면서 도중에 은퇴를 결정하게 된다.
선수 은퇴 이후에는 2005년에서 2007년까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근무했다.
3. 기타
동료 선수들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갈궈대던 마이클 조던이 터치하지 않는 드문 선수였는데 클리블랜드 시절부터 상대팀 선수로 만난 하퍼를 직접 상대해보면서 조던이 그에 대한 파악을 다 끝냈기 때문이라고. 조던의 갈굼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였는데 '열심히 안 하는 놈'을 갈구는 것과 '이 선수는 나와 함께 뛸 만한 선수인가?"를 파악하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강도를 시험해보는 것이었다. 이미 몇 시즌동안이나 서로 상대해보면서 파악이 끝난 베테랑 하퍼를 굳이 조던이 다시 시험해 볼 이유는 없었던 것.
1997-98시즌을 다룬 라스트 댄스에서 BJ암스트롱이나 빌 카트라이트에 비해 인터뷰 분량이 적은데 말을 조리있게 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다가 살짝 언어장애가 있어서였다고 한다.[9]
[1] 당시 캐브스가 얼마나 좋은 팀이었냐면 루키 시즌부터 평균 22점을 넣은 하퍼를 '''제외하고''' 세명의 올스타를 배출했다. 사실 하퍼 정도면 최소 한두번 정도는 올스타에 선정될만했으나, 당시 캐브스에서는 마크프라이스-래리 낸스-브래드 도허티가 확고한 상황이었고, 실력으로 따지면 이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나 프라이스는 PG로 공격의 시발점, 도허티는 센터였기에 올스타에 한번도 선정되지 못했다. 과거 팀의 수가 적었을때면 몰라도 80년대 이후 NBA에서 한 팀에서 올스타가 네명 배출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어졌기 때문. 이후 클리퍼스에서도 딱 중위권 정도 성적이었는데 에이스 대니 매닝에 밀렸다. 하퍼는 실력으로 보나 기록으로 보나 88년 올스타였던 대니 에인지나 닥 리버스보다는 확연히 한 수 위였는데, 여러모로 상황이 애매했다. 캐브스에선 실력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네명이 팀의 중심이었고, 그 중 하퍼가 애매하게 밀렸기 때문.[2] 라스트 댄스에서도 하퍼는 이 작전에 여전히 분노를 감추지 못하며 "그래요 이제 됐수다. XX 감독님 말이 통하나 한 번 해보시든지요."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고백했다.[3] LA 연고이전 이후 첫 포스트시즌 진출이었다.[4] 특히 피펜은 MVP투표에서 3위에 올랐고,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했다. 조던의 사이드킥에서 리그에서 손꼽힐만한 슈퍼스타로 인정받은 시기가 바로 이때.[5] 굳이 왜 현역이란 단서를 붙혔냐면 당시 가드 중 연봉 1위는 은퇴상태였으나 시카고 구단주가 연봉을 지급하기로 했던 마이클 조던 (400만달러)였기 때문. 당시 연봉 순위는 좀 이상했는데, 리그 1위가 573만달러를 받던 데이비드 로빈슨, 2위가 전성기가 지난 벅 윌리엄스(503만 달러), 그 외에 존 윌리엄스나 블라디 디박같은 선수도 조던보다 많이 받았다. 유잉은 뉴욕 선수였는데도 하퍼보다 적게 받을 정도였으니... 왜 이렇게 되었냐면 당시는 계속해서 NBA규모가 크게 성장 중이었기 때문에 샐러리캡 변화가 계속 일어나던 시기라, 계약 당시엔 거액의 장기계약이었던 것이 몇 년지나면 노예 계약이 되곤 했다. 당장 94시즌만 해도 상위권이던 조던은 바로 다음 시즌부터 중상위권ㅇ로 떨어질 정도. 연도별 최고연봉자들의 계약 액수는 이 영상을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SP0nSFjf2x0.[6] 그는 팀 합류 거부 이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자리잡는다.[7] 불스 주전들은 다들 팔이 길었는데 그 중에서도 하퍼의 윙스팬은 돋보였다. 하퍼 윙스팬의 정확한 수치는 불명이지만 조던의 윙스팬은 6피트 11인치 (211cm)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하퍼는 육안으로 봐도 조던보다 명확히 길었다. 게다가 어께가 좁아서 더 길게 보였다. 불스 경기를 보다보면 속공시 하퍼가 레이업을 할만한 높이에서 팔만 슥 올라가 덩크을 하는 기묘한 장면이 가끔 나왔다.[8] 당시 불스는 30대 중반이 가까워지는 조던의 체력 안배를 위해 상대팀의 에이스 수비를 하퍼나 피펜에게 맡길 때가 많았는데, 하퍼가 지나치게 털리면 리스크를 감수하고 조던이 붙는 형식이었다. 때로는 조던이 아예 처음부터 PG 수비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97년 1라운드 2차전으로, 워싱턴의 로드 스트릭트랜드를 틀어막으며 본인은 51점을 넣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됐다시피 많은 시간을 뛰고 득점 부담이 높은 '''노장''' 조던에게 수비까지 맡기는 건 리스크가 굉장히 높다.[9] 말을 더듬는 증상이 있다고 한다. 귀 관련으로 장애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