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고리키

 


[image]
'''Макси́м Го́рький
Maxim Gorky
'''
'''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Пешков)
'''출생'''
1868년 3월 28일, 러시아 제국 니즈니노브고로드
'''사망'''
1936년 6월 18일, 소련 모스크바 주
'''국적'''
러시아 제국 [image]소련[image]
'''신체'''
'''193cm'''
'''직업'''
소설가
1. 개요
2. 생애
3. 주요 작품


1. 개요


러시아 제국-소련의 대문호이다. '고리키'는 필명이며,[1]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Пешков)이다. 공산국가의 예술 이데올로기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조로 꼽히며 톨스토이-체호프 등이 활약했던 러시아 제국의 문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장악한 소련 문학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개인 사정으로 정규 교육을 제대로 수료할 수가 없었으나, 학구열과 열정으로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한 소설가이다. 이 때문에 상류층 아니면 중산층 가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교양 교육을 받아온 선배 러시아 소설가들과 다르게 구성과 문체가 투박하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정치 성향 때문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같은 경우에는 고리키의 글이 역겨운 쓰레기라고 대놓고 디스하였으나, 솔제니친 못지 않게 반소련 감정이 강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소설가로써의 역량은 훌륭하지만 기초교양이 부족한 이유로 표현력이나 글 구성력이 많이 제한을 받는다고도 평가했다.
한국에서는 빨갱이 작가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6월 항쟁까지 고리키의 서적은 금서였다. 특히 혁명운동을 묘사한 몇몇 작품들이 문제였는데, 정치에 아무것도 모르던 홀어머니가 혁명운동에 뛰어든 아들을 보고 혁명성을 각성한다는 내용의 '어머니'는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고 한다. 다만 검열의 눈을 어떻게 피했는지는 몰라도 일본어판을 중역한 듯 한 '유년시대'는 청소년 문고에 가끔 끼워지기도 했다. 이후 많은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2. 생애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고 4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11세에 고아가 되었다. 술에 취한 외조부가 상습적으로 모친과 자신을 폭행했던 것 때문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으며 경제적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하여 12세에 카잔으로 가출하면서 5년간 떠돌이로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19살에는 자살 시도도 벌였다. 이때의 경험은 자서전인 '유년시대'와 '세상속으로'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고리키는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책이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좋은 책과 나쁜 책을 확실히 구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여행으로 얻은 견문과 습작을 통해 필력을 얻은 고리키는 성인이 되자 신문 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신문 기자로서 그는 러시아 제국의 모순과 하류계급의 참혹한 생활상을 세세하게 폭로하고, 틈틈히 소설도 쓰면서 명성을 얻어갔다. 초창기의 그는 정제되지 않은 글쓰기로 혹평을 얻었으나 그의 순수한 태도에 감격을 받은 평론가들의 지도로 글쓰기를 다시 배울 수 있었다 한다.
당시 생존해 있던 대문호 안톤 체호프레프 톨스토이의 부인과도 안면을 트고, 혁명세력과 어울리게 되었고 특히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와도 밀접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그의 희곡 “밑바닥에서”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영되면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자선 사업을 벌이며 가난한 어린이들과 실업자들을 위한 도서관을 지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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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막심 고리키와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도 '''181cm'''의 거구였는데[2] 고리키는 그를 훨씬 능가하고 있으니 얼마나 거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참고로 고리키의 키는 '''193cm'''.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이지만 반체제 활동으로 인하여 영구제명당하기도 했다. 그에 대하여 동조하던 선배작가 안톤 체호프는 제명을 반대하다가 그렇다면 나도 나간다며 스스로 아카데미를 탈퇴했다.
이런 가운데, 고리키는 반체제-운동권작가로 찍혀 결국 여러번 체포되었고, 결국 이탈리아 왕국으로 자의반 타의반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망명지에서도 그는 계속 혁명 운동을 지원하였다. 1913년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으로 사면령을 받자 러시아에 돌아왔다. 1917년 10월 혁명이 발생해 그의 동지들이 정권을 잡았으나, 곧 볼셰비키 정권의 언론탄압과 폭력성에 염증을 느끼고, 이들을 비판하는 논설을 썼다.[3] 1921년 자신의 친구인 시인 구밀료프가 체카(KGB, NKVD의 전신)에 반혁명죄로 처형당하자, 고리키는 이해 다시 폐결핵을 핑계로 다시 이탈리아로 망명을 떠났다.
이렇게 10여년간 이탈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파시스트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자 이탈리아에 있는 것도 안전을 담보하기 힘들어졌다. 이때 이오시프 스탈린은 고리키에게 귀국해 줄 것을 요청했고, 생활의 어려움에 지친 고리키는 이를 수락하여 1931년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다시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소련에 귀국한 그는 스탈린 체제의 정당성으로 활용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특히 고리키가 태어난 니즈니노브고로드도 고리키시로 개명되면서 소련시대 내내 고리키 시로 불려졌다. '''어렸을 적 외조부와 외삼촌들에게 학대당했던 상처가 강했던 고리키는''' 스탈린의 농업집단화 당시 농촌의 어린 소년들이 학교에서 세뇌받은 대로 자신들의 집단농장을 반대하던 자신들의 '''아버지들을 반동분자라고 신고해서 숙청당하게 하는 일을 영웅적인 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농업집단화(콜호스) 계획이 시작된 후 몇년 후 1934년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으로 대숙청이 시작되면서 소련 사회에 암운이 드리우자, 고리키는 사실상의 가택연금상태에 접어들었다. 1936년 고리키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관은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운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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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스탈린과 고리키.
1938년 NKVD 전 부장인 겐리흐 야고다의 숙청 당시 죄목 중 하나가 고리키의 독살이었는데, 이것이 만들어진 죄목인지, 혹은 스탈린의 암살음모를 실행한 야고다가 죄를 뒤집어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굴라크를 찬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사실 처음에는 소련 정부에서 일부러 고리키에게 백해 운하를 파는 굴라크 노동자들이 좋은 옷을 입고 책을 읽으며 정신을 연마하는 곳 쯤으로 보이게 꾸며서 보여준 덕택에 고리키는 당시에는 굴라크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고리키가 굴라크를 찬양하는 글도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 과정에서 징발된 굴라크 죄수들 절반 가까이가 픽픽 죽어나가니 그에게도 실상이 계속 감추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고리키는 자신이 굴라크를 찬양했던 글을 쓴 걸 후회하면서 스탈린에게도 비판적인 말을 했으나, 소비에트 체제 정당성의 상징으로 내세워져 자기 이름이 도시에 붙을 정도였던 고리키는 스탈린이 숙청한 보리스 필냐크, 다닐 하름스, 이삭 바벨 등처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연금에 머물렀고 고리키 본인은 스탈린에게 쓴소리를 하고도 비교적 편안한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4]
고리키가 소년 수감자들을 배신하고 그 소년 수감자들은 처형되었다 라는 루머 역시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데, 소련 노동교화소는 아무도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 혹한지에 노동력을 조달하려는데 숨은 목적이 있었지, 무슨 일본군 포로수용소 수준으로 일부러 수용자를 학대하던 시설까지는 아니었다.

3. 주요 작품


  • 유년시대
  • 세상속으로
  • 나의 대학
  • 어머니
  • 가난한 사람들
  • 밑바닥에서
[1]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몹시 비참하다.(Максимально горький)"라는 뜻을 지닌다.[2] 당시 동유럽인 남자 평균 키가 160cm 중후반이었다.[3] 이 논설은 소련이 망할 때까지 러시아에선 묻히게 된다.[4] 참고자료 및 출처 : 속삭이는 사회 / 올랜드 파이지스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