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나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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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러시아
2.2. 독일
2.3. 미국
2.4. 말년
3. 작품
4. 기타


1. 개요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나보코프(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Набо́ков, 영어: Vladimir Vladimirovich Nabokov, 1899년 4월 22일 ~ 1977년 7월 2일)는 러시아계 미국인 작가, 번역가, 곤충학자이다. 조지프 콘래드와 손꼽히는 영문학계의 다언어 작가이며, 노문학영문학 두 문학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필명은 '블라디미르 시린(Владимир Сирин)'.

2. 생애



2.1. 러시아


1899년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나보코프(Владимир Дмитриевич Набоков, 1870 ~ 1922)는 이름난 자유주의 정치인이자 변호사였고 어머니 옐레나 이바노브나 루카비시니코바(Елена Ивановна Рукавишникова, 1876 ~ 1939)는 금광 소유주의 딸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러시아 제국의 귀족들이 다들 그랬듯이, 러시아어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어, 영어를 사용하면서 자랐고, 이와 같은 성장 배경은 후일 그의 작품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후 아버지가 온건파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내각에 참여했지만 당시 러시아의 정세는 온건파에서 볼셰비키로 혁명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결국 나보코프 일가는 유럽으로 망명한다.

2.2. 독일


그의 가족은 1919년 영국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듬해인 1920년 독일 베를린에 정착하였고 나보코프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한 1922년에 베를린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 와중에 나보코프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첫 시험에서는 최고등급인 1등급 (1st Class 혹은 distinction)을 받았으나 두번째 시험이 아버지가 암살당한 직후였기에 2등급 (2nd Class)을 받았다.[1] 졸업 후 가족이 정착해 있던 베를린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엔 아버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암살당한다. 1920년대 당시 베를린은 독일 내의 각종 정파, 정당뿐만 아니라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의 망명객들이 활동하는 난장판이었다. 명망 있는 정치가였던 나보코프의 아버지도 당연히 러시아 이민자들의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일환으로 자신이 속해있던 입헌민주당 당수였던 '파벨 밀류코프(Павел Милюков, 1859 ~ 1943)'를 베를린으로 초청하였다. 그런데 밀류코프의 강연도중 극우파 정객 '표트르 샤벨스키보르크(Пётр Шабельский-Борк, 1893 ~ 1952)'가 밀류코프의 암살을 시도했고 그를 지키려고 막아서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표토르의 공범자인 세르게이 타보리츠키에게 목숨을 잃게 된 것.
이후 나보코프는 기자, 번역가, 어학 교사, 테니스 강사에 이르기까지 할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하는 지경에 이른다. 롤리타가 워낙 유명해져 나머지 작품들이 한국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지만, 이 때 이미 그는 베를린에서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모국어인 러시아어 문학에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나보코프가 러시아가 자랑하는 작가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알렉산드르 푸시킨과 나란히 등장했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다.
흔히 노어노문학과 교수들이 원탑으로 꼽는 나보코프의 작품은 36년 출판한 "절망(Отчаяние)"이다.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범죄 소설인데, 엄청난 수준의 언어유희로 독자들을 가지고 놀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전개를 다채로운 심리물로 이끌어냈다. 나보코프는 스스로가 이 작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이미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65년에 직접 영어판으로 개작 하기까지 했다. 1938년 출간한 나보코프의 마지막 러시아어 소설 재능(Дар) 역시 높이 평가받는다. 나보코프의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간 이 난해한 소설을 통해 나보코프는 푸시킨, 고골, 레르몬토프 같은 자신을 품어주고 키운 선배 러시아 소설가들에게 대한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이때 나보코프가 아내 '베라 옙세예브나 슬로님(Вера Евсеевна Слоним, 1902 ~ 1991)'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보코프는 현실감각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런 나보코프를 옆에서 다독여 주고 보살펴 주며 평생의 반려자 역할을 해 준 것이 바로 베라였다.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나보코프의 작품들을 읽고 비평하고 편집해 준 사람이 베라였다. 후의 미국 시절 나보코프가 태워 버리려고 했던 롤리타를 구해 낸 것도 베라였고 평생 운전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나보코프를 위해 운전수 노릇도 모자라 핸드백에 총을 넣어 다니며 보디가드 노릇까지 했다.
이렇게 차츰 작가와 가장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와중에 1937년 나보코프 일가는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나치의 프랑스 점령을 피해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한다. 나보코프의 동생 세르게이는 독일에 남았는데,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다가 1945년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는다.

2.3. 미국


미국으로 이주한 나보코프는 보스턴 교외에 위치한 웰즐리 여대의 비교 문학 겸 노어노문학과 강사로 취직한다. 나보코프의 수업은 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아주 좋았는데, 이는 나보코프 본인의 재능이 대단한 덕분만이 아니라 당시에 소련이 미국의 동맹국이어서 러시아 문화가 큰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9년에는 코넬 대학교로 옮겨 교수로 재직하였다.
생활에 안정을 되찾은 나보코프는 집필에 다시 몰두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나보코프의 대표작들에는 미국 대학을 배경으로 교수, 작가, 편집장 등 지식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한 얘기지만 나보코프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들로 이런 류의 작품 중 '프닌' 이 제일 유명하나 아직 한국어 번역본은 없다. 물론 여러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역시 롤리타이다. 미국에선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해서 프랑스에서 먼저 출판된 지 3년 후에나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미국 정식 출판 3주만에 판매량 10만 부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나보코프는 작품활동 외에도 곤충 수집으로도 유명했는데, 그중에서 나비 수집과 분석에 제일 열심이였다고 한다. 나보코프 작품들에는 이런 "나비 모티프"가 여러번 등장하기도 한다. 대학 수업이 없는 여름방학 때마다 나비 채집 여행을 떠났는데 그럴때면 운전은 당연히 베라의 몫이었다고 한다.

2.4. 말년


롤리타의 대성공으로 경제적인 여유를 찾게 되자 나보코프 일가는 미국을 떠나 스위스 몽트뢰로 이주한다. 스위스에서도 작품 활동과 나비 수집을 이어 나가던 중 1977년 폐병으로 별세하였다.

3. 작품


유년기부터 다양한 언어를 배우며 자라온 배경 덕분에 나보코프는 운율과 수사학에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공감각적인 능력이 있어서 단어나 숫자를 색상과 연계해서 인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보코프의 작품들에는 각운과 두운들을 사용한 독특한 어감의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고 작가 본인이 여러 단어를 이용해 만들어 낸 신조어들도 자주 등장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항상 언급되는 예가 바로 대표작 롤리타의 첫 문단이다. 항목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으니 참조하면 좋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She was Lo, plain Lo, in the morning, standing four feet ten in one sock. She was Lola in slacks. She was Dolly at school. She was Dolores on the dotted line. But in my arms she was always Lolita.

롤리타, 내 삶의 빛, 내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아침에 양말 한 짝만 신고 서있을때 키가 4피트 10인치인 [2]

그녀는 로, 그냥 로였다. 슬랙스 차림일 때는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의 이름은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에 안길 때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3]

물론 나보코프가 20세기의 대문호로 꼽히는 데에는 그저 글만 예쁘게 쓰기 때문만이 아니다. 나보코프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학사조로서의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 의식과 실존에 방점을 둔 예술사조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 의식과 실존 같은 거 뻥 아님?"이라는 예술사조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정상이다'''. 애초에 저 둘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변형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고, 어느 예술가를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는 더더욱 논란이 분분하다. 아니, 오히려 나보코프 같이 두 사조에 다 걸쳐 있는 예술가들 덕분에 보는 사람 입장에선 '''더더욱 헷갈린다'''. 대학 교수들은 흔히 나보코프가 장난을 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문제는 이 천재적인 트릭들을 일반 수준의 독자들이 모조리 파헤치기는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코프를 모더니즘의 종지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나보코프의 작품들이 모더니즘의 특징과 전통을 정확히 간파해 내어 재현해 냈다는 점에 있다. 거기서 머물렀다면 나보코프는 그저 그런 모더니즘 작가에 불과했겠지만, 더 나아가 모더니즘을 부숴 버리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바로 나보코프를 '''종지부'''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산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이다.
그의 모든 작품 곳곳에는 다양한 문학이 인용되거나 패러디되어서 사용된다. 그 예로 롤리타의 험버트의 전공은 마르셀 프루스트 등 프랑스 모더니즘 작가들인데 이 역시 그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베를린 체류 시절의 러시아어 사용 시기에는 푸시킨을 시작으로 한 온갖 노문학을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비틀어서 사용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작품 창작 시기와 사용 언어를 가리지 않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번역본인데도 알아차릴 수 있는 말장난이 한 페이지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경향이 극대화된 또다른 작품이 롤리타와 함께 나보코프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창백한 불꽃(Pale Fire)"이다.[3] 표면상으로는 장편 서사시와 그에 대한 주석들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읽으면 읽으수록 주석과 서사시가 무관할 뿐만 아니라 화자가 미치광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의식과 실존의 흐름을 자세하게 설명한 후 비틀어 버리는 나보코프의 작품세계가 명확히 드러난 예.
이렇듯 나보코프는 복잡한 서사 구조와 믿을 수 없는 화자들, 소설 속에 묘사되는 우연의 연속, 다양한 인용과 패러디 등을 통해 모더니즘의 진수를 그려 낸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길을 터 준 것이다.
  •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Lectures on Russian literature)
  • 나보코프 문학강의(Lectures on literature)
  • 나보코프의 영어 소설: 구조층의 연구(Nobokov's English novels)


4. 기타


  • 2009년에 미완성작인 "로라의 원형"이 아들 드미트리에 의해 출간되었다. 나보코프의 집필 과정 자체가 조그마한 단어장 여러 개에 글을 써서 최종적으로 합치고 편집하는 형식이어서 미완성작 "로라의 원형" 역시 그런 단어장들의 스캔 사진들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 나보코프의 작품에는 우연과 오해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들이 많은데, 평론가들은 다른 사람의 암살 시도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 "그의 작품들을 읽고 배운 것이 전혀 없다"라고 악평하였지만 코넬대학교 교수 재직 시절 율리시스를 강의한 적도 있다.
  • 도스토옙스키를 대놓고 싫어했다. 그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기법들과 취향이 진부하다는 게 이유다(...). 그의 소설들이 유럽 감상주의 소설이나 극작, 혹은 추리 소설 기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깐다. "절망"에서는 특히 충격적인 구절이 있는데, 도스토옙스키를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사이에 끼워서 전형적인 추리물 작가 중 하나로 논한다. 계속해서 유머 작가는 될지언정, 위대한 작가는 아니라고 인터뷰했던 것으로 봐선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강의록에선 "도스토옙스키는 비난 받을 수 밖에 없다.", "언젠가 도스토옙스키의 정체를 폭로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라고 대놓고 말한다.(...) 1965년 "절망"을 개작한 것도 도스토옙스키를 비판하는 면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실제로 영어 판본에서는 노어 원작에 비해 직설적인 비난의 어조가 강해졌다.
  • 도스토옙스키가 나보코프가 싫어했던 대표적인 유명 작가로 알려져있으나, 사실 나보코프가 싫어했던 유명 작가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함께 비 네이티브 영문학 작가의 거장으로 꼽히는 조지프 콘래드,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거두인 알베르 카뮈,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윌리엄 포크너, 독일 문학의 정점으로 꼽히는 토마스 만 등을 모두 비판했고, 여류 작가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싫어했던 작가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저자 해리엇 비처 스토로 나보코프는 그를 거의 쓰레기 작가의 대명사인냥 취급했었다. 문학이 삶의 거의 전부고 온 세상이 문학으로 돌아간 사람이라서 정치, 세간의 평가 같은건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의 문학관으로 사람들을 평가해서 세간의 기준으로 인간 나보코프를 평가하면 이해못한다. 이러한 평가들은 모두 원문을 읽고 내려진 것으로 자신이 원문을 읽지못한 작품에 대해서는 평을 유보했다.
  •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 토마스 핀천(Thomas Pynchon, 1937 ~ )이 코넬 재학 시절 나보코프의 강의를 들었다. 문학 사조로 보나 작품들로 보나 나보코프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정작 핀천은 "그 양반 러시아 억양이 너무 강해서 뭔 말인지 알 수가 없었어." 라는 식으로 언급하고 나보코프 역시 "누군지 기억을 전혀 못한다." 라고 했다. 오히려 나보코프의 사무 보조를 했던 베라가 핀천의 독특한 필체를 기억했다고 한다.
  • 미국으로 망명해 웰즐리 대학과 코넬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과 서양 문학을 강의했는데 그 강의 내용이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을유문화사, 2012)"로 번역되어 나와있다.
  • 생전에 정치적인 입장을 강하게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으나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학생운동이나 신좌파 운동을 비롯하여 참여문학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직접 번역하는 경우도 많았다. 원래 러시아어로 출판된 "어둠 속의 웃음소리"를 영어로 번역[4]하거나 영어로 출판된 "롤리타"를 러시아어로 번역할 정도였다. 그와 같이 당대 비네이티브 영문학 작가의 투톱이였던 조지프 콘래드가 무조건 영어로만 소설을 출간했던 것과는 대조적.


[1] 영국 대학에서는 한 과에 1등급 졸업자가 기껏해야 1~2명에 불과하다.[2] 역 147cm이다. 나보코프에 따르면 롤리타는 평균보다 키가 약간 작고 체중은 상당히 가볍다.[3] 출처: 문학동네, 롤리타, 김진준, 2013[2] 단순히 범인들만 나보코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 것이, "절망"의 불어판 서평조차 화자와 작가의 층위를 분간해내지 못하는 삽질을 저질렀다. 그 서평을 쓴 사람은 '''장 폴 사르트르'''[3] 미국의 출판사 모던 라이브러리에서 뽑은 20세기 100대 소설에서 롤리타는 5위, 창백한 불꽃은 53위에 올랐다. 참고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1위.[4] 원래 다른 사람이 영어로 번역해서 출판한 적이 있는데 그게 별로 나보코프 마음에 안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