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솔제니친

 


'''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 본명 '''
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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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1918-1922)
[image] 소련 (1922-1974)
무국적 (1974-1990)
[image] 소련 (1990-1991)
[image] 러시아 (1991-2008)

''' 출생 '''
1918년 12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키슬로보츠크
''' 사망 '''
2008년 8월 3일 (향년 89년 235일)
러시아 모스크바
''' 직업 '''
소설가, 수필가, 철학자, 역사학자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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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
러시아 모스크바 돈스코이 수도원
''' 학력 '''
로스토프 주립 대학교 (졸업)
''' 사조 '''
리얼리즘, 르포르타주
''' 활동 기간 '''
1962년 – 2008년
''' 종교 '''
무신론 → 러시아 정교회
''' 부모 '''
아버지 이사키 솔제니친 (?-1911)
어머니 타이시야 솔제니티나 (?-1944)
''' 배우자 '''
나탈리아 알렉세브나 레체토브스카야 (1940년 결혼 - 1956년 이혼, 1957년 결혼 - 1972년 이혼)
나탈리아 디미트리브나 스베틀로바 (1973년 결혼)
''' 자녀 '''
슬하 3명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중기
2.3. 후기
3. 작품
4. 그에 대한 말들
5. 수상
6. 여담
7.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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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이며 20세기 문학사냉전시대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


[image]
1918년 러시아 SFSR 테레크주 키슬로보츠크(Кисловодск, Kislovodsk)[1]에서 유복자로 출생했다. 로스토프 대학을 졸업하였고, 그 이후에 통신대학에서 문학 관련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후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포병 장교로 자원하여 중대장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여, 1944년 7월 8일 적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2.2. 중기


그러나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스탈린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내용과 조롱하는 표현이 문제가 되어 1945년 2월, 스메르쉬에 의해 동프로이센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위해 루뱐카로 보내졌고, 이 곳에서 승리의 날을 맞았다. 7월 7일, NKVD에 의해 8년 형을 선고받고 카자흐스탄의 예키바스투즈(Екібастұз)[2] 굴락으로 보내졌다. 굴락에서 일반 죄수들처럼 지내던 중 수학을 잘하는 것이 발견되어 연구원 전용 수용소[3]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수용소 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다시 굴락으로 복귀해[4] 석방될 때까지 다시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이 생활을 바탕으로 그의 역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수용소군도를 썼다.
수감 생활이 끝난 후 1953년 3월 2일, 카자흐스탄 남부 비를리크 마을로 추방되어 나흘 뒤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종양이 도져 이듬해 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로 옮겨 치료를 받고[5], 유형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나 다행히도, 니키타 흐루쇼프의 반 스탈린주의로 그는 1956년에 사면되었고 이어 노비 미르(Новый мир)지의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Александр Твардовский)를 만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에는 소련 관료제를 비판한 <유익한 사업을 위하여>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제1원에서> 같은 수용소 생활을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소련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6] 당연히 소련작가연맹은 그의 작품을 '''반소 작품'''이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심지어 굴락에서의 노동을 통한 개화를 주장하는 어용 작품과 솔제니친은 사실 죄수가 아니었다는 흑색선전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호응을 얻은 이후, 솔제니친은 굴락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과 수용소 당국의 현실, 재소자들의 사연과 증언들을 정리해 소련 수용소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원고를 지키기 위해 매우 조심했지만 결국 KGB에 의해 발각되자 남은 원고들을 서방으로 밀반출 시켰고, 이 원고가 1973년에 발표된 <수용소 군도> 제1부였다. 당연히 소련 정부와 소련작가연맹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을 인정하지 않고 노벨상 포기와 공개 전향,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했다.[7] 참고로 지금까지 러시아 국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4명의 작가(부닌, 파스테르나크, 숄로호프, 솔제니친)중에 소련 당국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밀어준 작가는 숄로호프 뿐이다. 부닌은 적백내전 때 공산당이 싫어 조국을 등지고 프랑스로 떠난 망명자였고,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은 소련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모진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솔제니친은 조국을 떠날 수 없다며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는 다르게 스웨덴으로 출국,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에 소련에서는 재입국을 거부했고, 그는 미국버몬트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냉전을 겪으면서 서방의 눈치를 보았던 소련에서는 그를 해코지하는 대신 그가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눈 감아 주었다.[8]

2.3. 후기


1974년 이후 무국적이었던 그는 1990년 소련 국적을 회복했다. 냉전기가 종결되고 소련이 붕괴된 후인 1994년에 귀국하였는데, 미국 체류 중에도 미국의 천민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일로 반공단체로부터 미움을 받았었다.
이후 그는 그동안 정리한 수용소 군도를 4부로 출간하였고[9] 필생의 꿈인 러시아 혁명사를 집필하게 되었다.[10]
솔제니친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격변기 당시 러시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 것으로 기대하며 옐친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1992년부터 1993년 즈음 러시아 정부에서 무리하게 추진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이 실패해버리고, 이에 대항해 일어난 시위를 유혈 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옐친에게 실망하며 반 옐친파로 돌아섰다. 귀국한 뒤에는 러시아 채널1의 TV토크쇼를 진행하고 <아르구멘티 이 팍티(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라는 신문[11]에 글을 기고하면서 옐친을 비판했다. 결국에 정부 비판적인 성향으로 옐친에게 밉보이면서 아예 프로그램 자체가 날아갔다. 그리고 1998년에 옐친 정부가 준 러시아연방 최고 훈장인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의 수훈도 거부해버렸다.[12] 그러다가 푸틴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의 물질주의 세태 비판과 전통적인 애국주의에 대한 회귀를 주장했으며 푸틴을 강력하게 지지했다.[13]
2008년, 그가 사망하자 러시아 언론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심 중 1명이었으며, 조국 러시아를 향한 긴 발걸음이 이제 멈추게 됐다." 라고 애도했다. 2008년 모스크바의 "대공산주의자 거리(Больш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улица)"가 그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거리(Улица Александра Солженицына)"로 바뀌었다.[14]
솔제니친은 친소련적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대체로 "조국의 어두운 점을 서방에 폭로한 자"라고 미움받고 러시아의 좌파들에게는 소련의 부정적인 점을[15]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훗날 또 다른 권위주의 독재 정권을 지지한 위선자라고 미움받는다. 그의 정치적 노선과 행보를 떠나, 적어도 그의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소련 시절의 '''굴락'''과 이로 대표되는 죄수들의 현실에 관한 묘사에 대해서는 러시아에서도 인정하는 권위자이다. 무엇보다도 솔제니친 본인이 비록 서방에 망명했을지라도 본인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굴락에서 생활하고 목격한 기록을 남겼던 만큼, 작가로서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006년 러시아 1 채널에서 그의 작품 중 '제1원에서(В круге первом)'를 드라마로 제작, 방영한 적이 있다. 솔제니친이 해설 역할로 직접 참여했으며, 예브게니 미로노프 등이 출연했다.

3. 작품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Один день Ивана Денисовича, 1962년)
  • 암 병동 (Раковый корпус, 서방에서는 1967년 출판, 소련에서는 1990년 출판)
  • 제1원에서 (В круге первом, 서방에서는 1968년 출판, 소련에서는 1990년 출판)
  • 수용소군도 (Архипелаг ГУЛАГ, 서방에서는 1973-1975년 출판, 소련에서는 1989-1990년 출판)
  • 붉은 수레바퀴 (Красное колесо, 1993년)
  • 200년을 함께 (Двести лет вместе, 2001년 1부 출판, 2002년 2부 출판)

4. 그에 대한 말들


'''제국을 멸망시킨 작가.'''

뉴욕 타임스[16]


'''솔제니친은 모범적인 고귀함과 극도의 용맹을 지닌 사람이다. 강력한 소설가이자 없어서는 안 될 역사가인 그는 동포들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 소련인과 러시아 역사의 이름으로 기괴한 제도를 장엄하게 기소한 예술가, 도덕주의자다.'''

― 아서 M. 슐레진저 주니어 (미국 역사학자)[17]


'''솔제니친의 비범한 정치와 지적인 위업은 포로수용소의 지옥에서 나와 현대사에서 도덕적, 기록적 힘이 비할 바 없는 책들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18]

(스페인 소설가)[19]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이반 투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막심 고리키와 같은 재능을 가진 문학적 천재다.'''

― 해리슨 세일스버리 (미국 비평가)[20]


'''그는 우리의 유일한 살아있는 고전이다.'''

예브게니 옙투셴코[21]


'''진정한 참된 애국자.'''

블라디미르 푸틴[22]


'''솔제니친은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도덕적 전통이 끝나는 마지막 러시아 작가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전세계 문학의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후에도 적어도 100년이상은 지속될 것이다.'''

― 독일의 소리[23]



5. 수상


  • 대조국전쟁 훈장 2등급 (1943년 8월 15일)
  • 적성훈장 (1944년 7월 12일)
  • 1941년에서 1945년까지 위대한 애국 전쟁에서 독일에 대한 승리에 관한 훈장 (1957년)
  • 쾨니히스베르크 점령 훈장 (1958년)
  • 프랑스 언론인상 (1969년)
  • 노벨문학상[24] (1970년)
  • 이탈리아 언론인 연합 Golden Cliché 상 (1974년 5월 31일)
  • 프랑스 언론 'Le Point' 선정 올해의 인물 (1975년)
  • 템플턴상[25] (1983년)
  • 랴잔시 명예 시민 칭호 수여 (1990년 9월 20일)
  • RSFSR 국가상 문학 부문 (1990년 12월)
  • 로모노소프 황금 메달[26] (1998년)
  • [27] (수상거부, 1998년)
  • 성 모스코프스키 왕자의 훈장 (1998년)
  • 프랑스 도덕 정치 과학원 대상 (2000년 12월 13일)
  •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명예 박사 (2003년)
  • 성 사바 훈장[28] (2004년)
  • 올해의 러시아 국가 혁신상 (2004년)
  • 러시아 연방 국가상[29] (2006년)
  • 불가리아 보테브상[30] (2008년)
  • 루마니아의 별 훈장 1등급 대십자 (2008년)

6. 여담


  • 소련 시절에는 반소작가로서 명망이 높았지만, 어디까지나 폭압적인 사회주의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것이지 조국을 싫어한 게 아니라서 소련 해체 이후론 러시아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다. 특히 체첸전 당시 체첸 분리주의자들을 강경하게 진압할 것을 주장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의 작품 <수용소 군도>에 따르면 비록 유형지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그가 막 자유의 몸이 돼 사회생활을 재개했을 때 체첸인 특유의 사소한 일로도 수틀리면 대뜸 흉기를 대동하고 다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습성을 직접 목격하는 장면이 나와 체첸인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지기 충분한 장면이기도 했다.[31] 사실 체첸인은 역사적 이유로 인해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골치 아픈 취급을 받고 있다.[32]
  • 수용소에서의 삶과 그 속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 병동", "제1원에서", "수용소 군도"같은 초기작들과 자신의 정치적 사상과 역사적 관점에 대해 서술한 "붉은 수레바퀴", "200년을 함께" 같은 후기작들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며 읽는 게 좋다.
  • 공산주의 유머/소련의 하위 문서에도 있듯이 이 사람의 인기작들은 90년대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금서여서, 소련 내에서 타자기로 쳐서 유포되었다고 한다.[33] 이후 고르바초프의 자유화 조치에 의해 금서가 대거 해제된 1990년 비로소 소련에서 정식 출간되었다.[34]
  • 레프 톨스토이를 상당히 존경해서 여러 작품에 오마쥬가 나온다. 붉은 수레바퀴 연작은 아예 전쟁과 평화에 바친다고 할 정도였고, 1부인 1914년 8월에서는 아예 앞부분에 노년의 톨스토이가 나온다.
  • 한국에서는 반공작가로 분류되어서 오래 전부터 번역본이 나왔다. 그러나 갈수록 떨어지는 국민 평균 독서량을 자랑하듯, 솔제니친이 사망했다는 뉴스에는 빨갱이가 죽었다는 등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댓글들이 달리며 병림픽이 열렸다.
  •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 오슬로국립대학교 교수는 솔제니친을 혹평한다. 당연히 수용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문제삼지는 않았고, 주로 그의 반소 우파 민족주의적 관점과 소련 수용소 사망자 수에 관한 과장을 비판했다. 사회주의자로서 노르웨이 적색당 당원이자 한국 노동당 당원인 인사가 솔제니친의 정치적 관점과 통계에 있어서의 오류를 지나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솔제니친의 소련 붕괴 후 우파 민족주의적 행보는 프랑스의 중도좌파 성향 작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 다른 좌파 지식인들로부터도 자주 비판받았다. 더군다나 그가 권위주의적 푸틴 정권과 통합러시아당을 지지한 것은 그에 대한 비판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 1993년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는 방데 전쟁에서 학살을 이유로 프랑스 대혁명을 '비판'하기도 했다. # 당연하지만 당시 프랑스 집권 사회당 정부에서는 불쾌해하며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압력을 넣었다. 한국에는 이 점에 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솔제니친은 소련의 반체제 운동이나 우파 성향 반정부 운동을 제외하면 혁명이나 반정부 운동 자체에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이다. 한국의 언론 검열을 비판한 것이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에 속할 정도. 그는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이나 스페인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우려'와 '비판'을 제기한 적이 있다.
  • 헨리 키신저는 이 사람을 매우 싫어했었다. 실리주의자였던 키신저를 생각해보면, 소련을 나와 서구에서 반소련운동을 펼친 이 사람이 썩 달갑진 않았을 것이다. 기껏 소련과 화해무드를 만들어놨는데 소련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 반체제 작품 때문에 추방의 형식으로 서독으로 망명한 후 피부에 염증이 나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 인위적인 독극물 중독 가능성이 큰데 이 때문인지 솔제니친 자신은 러시아에 귀환할 때까지 철저한 은둔 생활을 했다. 나중에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KGB는 실제로 솔제니친이 누구도 믿지 않도록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공작했다고 한다.
  • 대중들에게 친숙한 그의 모습은 턱수염만 덥수룩하게 기른 모습이지만 맨 위 프로필 사진에서 보이듯이 말년엔 콧수염도 같이 길렀다.
  • 조던 피터슨에게 영향을 준 작가이기도 하다. 피터슨은 수용소 군도를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말한 바 있다.

7. 바깥 고리



[1] 현재 러시아 북캅카스 연방관구 스타브로폴#s-2 지방.[2] 파블로다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3] 이런 수용소를 샤라시카(Шарашка)라고 부른다. 당시 소련의 과학, 기술 분야에서 한가락 했던 코롤료프, 투폴레프 등이 바로 이런 곳에서 지냈다. 샤라시카의 분위기는 훨씬 느슨한 편이어서, 다른 일반 죄수들과 같이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았고, 가끔씩 면회가 허용되었다.[4]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제1원에서(В круге первом)이다.[5] 이 때의 경험으로 쓴 소설이 '암병동'이다.[6]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당시 수용소에서 철 지난 잡지를 통해 솔제니친의 작품을 접한 죄수들이 '''국가가 무슨 이유로 이런 작품이 나오도록 방조했나'''라고 했을 정도다.[7] 솔제니친은 노벨상 포기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수상하는 안을 제시했지만 당연히 '''거부'''당했다.[8] 스탈린 이후 소련은 '''심각할 정도로 체제를 위협한 게 아니라면''' 자국 내 반체제인사의 이주 허가를 내주거나, 미국에서 잡힌 스파이와 맞바꾸는 식으로 내보냈다. 이 과정은 2015년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9] 굴라그의 생활과 고문을 그린 1~2부 이후는 대부분 혁명 이후의 소련 사회와 소련 보수작가들의 고인드립이 많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대로 이 작품 자체가 거대한 연작의 일부로 구상되었기 때문[10] 이 작품은 끝내 미완되었으나 붉은 수레바퀴라는 이름으로 3부작이 출간되었다.[11]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신문 중 하나로, 일반적인 뉴스보도 방식과는 달리 의견을 두고 의견을 게재하는 방식으로 발행된다.[12] 수여 거부 사유를 밝힐 때 대놓고 '''나라를 파멸로 몰아간 지도자가 주는 훈장은 받을 수 없다'''고 비판할 정도였다.[13]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옐친 이후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하던 푸틴의 입맛에 딱 맞았다. 실제로 솔제니친은 푸틴의 지원을 많이 받아, 장례식도 국가장으로 치를 정도였다.[14] 소공산주의자 거리는 2005년에 스타니슬랍스키 거리(Улица Станиславского)로 바뀌었다.[15] 수용소 희생자 수[16] 출처[17] 출처[18]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19] 출처[20] 출처[21] 출처[22] 출처[23] 출처[24] 불변의 러시아 문학 전통을 따랐던 도덕적 힘으로 수상 선정[25] 영적 생명 연구 또는 발견의 성취에 대한 성과로 수상 선정[26] 러시아 문학, 러시아어 및 러시아 역사 발전에 탁월한 공로로 수상[27] 조국과 세계 문학에 크게 기여한 수훈 선정[28] 세르비아 정교회 최고 훈장[29] 인도주의 활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은 공로[30] 문명의 도덕적, 윤리적 원칙을 수호하는 창의성의 시민에게 주는 상[31] 반면 독일인, 그리스인, 고려인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다.[32] 러시아에서 체첸인들은 안 그래도 체첸 전부터 지속되어 온 테러로 이미지가 매우 나쁜 터라 러시아에서 이들이 받는 혐오는 상상을 초월한다.[33] 이런 출판물을 사미즈다트(Самиздат, 자가(Сам) + 출판(Издать)에서 따온 말이다)라고 부른다.[34] 이 때 조지 오웰1984년 등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