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 무사

 

'''말리 제국의 역대 황제'''
8대 아비바카리 2세

'''9대 만사 무사 케이타 1세'''

9대 마간 1세
[image]
금화를 살펴보는 만사 무사. <카탈루냐 지도첩>, 1375년 제작
'''제호'''
만사 무사(Mansa Musa)
'''휘'''
무사 케이타 1세(Musa Keita I)
'''생몰 년도'''
? ~ 1337년
'''재위 기간'''
1312년 ~ 1337년
1. 개요
2. 위대한 갑부 왕
3. 여담
4. 등장 매체


1. 개요


만사 무사는 말리 제국의 제9대 왕으로 아프리카의 황금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재위 기간은 1312~1337년이다. 만사 무사의 '만사'는 만딩카어로 '황제', '무사'는 구약성경, 쿠란, 토라의 등장인물인 '모세'의 아랍어 표기다.

2. 위대한 갑부 왕


이전 왕은 말리 제국을 건국한 순디아타 케이타의 누이 콜론칸(Kolonkan) 가문 출신[1]인 아부바카리 2세였는데, 바다 끝에 뭐가 있는지 찾아내겠다며 두 차례에 걸쳐서 함대를 이끌고 '''대서양 원정'''을 나갔다가 두번째 원정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2] 그래서 섭정을 맡았던 친척 무사가 왕이 되었다. 그는 1312년부터 1337년까지 말리 제국을 지배했다.
말리 제국은 막대한 금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교역의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했는데, 당시 세계 은 모두 말리로부터 나온다고 했을 정도로 말리에는 금이 넘쳐났다. 그러나 말리 제국은 어디까지나 금을 제공하는 교역소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그 경제력에 비해 이슬람 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는 않았다. 만사 무사는 이런 2류 이미지를 벗고 말리 제국이 당당한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1324년에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로 대대적인 성지순례를 떠나게 된다. 이 순례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고 화려한 행렬이었는데, 만사 무사와 만사 무사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개인적인 시종 500명이 순례에 따랐을 뿐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과 귀족들도 행렬에 합세했다. 60,000명의 시민들과 황금으로 만든 지팡이를 든 500명의 전령이 행렬의 앞에 서고 그 뒤를 12,000명의 노예가 따랐는데, 노예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커다란 황금 주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600마리의 낙타가 한 마리 당 100kg이 넘는 황금 덩어리를 짊어지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으며, 이 어마어마한 행렬이 소비할 식량을 짊어진 낙타 무리도 당연히 행렬에 함께 했다. 가히 인류 역사상 가장 호화로운 순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규모.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만사 무사는 순례길 중 마주치는 거지들과 지나가던 시민들에게 '''문자 그대로''' 황금을 한 움큼씩 뿌리고 다녔으며, 구전되는 이야기 중 하나에 따르면 매 주 금요일 마다 모스크를 그냥 새로 하나씩 지었다고도 한다. 그는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거쳐간 카이로, 메디나, 메카 등의 주요 도시에서 매우 관대한 가격으로 물건들을 사들였는데, 특히 카이로에서 수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금을 물쓰듯 하여 카이로의 금 값이 폭락했다고 한다. 금값이 너무 떨어져서 지중해권과 서아시아 전체의 물가가 엉망이 되었고, 당연히 지역 전체의 경제에 악영향을 주었다. 결국 만사 무사는 일부러 고율 이자를 받기로 하고 시중의 황금을 사들여 부랴부랴 물가 안정을 시도했는데, 그럼에도 '''이미 풀린 금이 너무 많아서 금값과 물가가 안정될 때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만사 무사가 정치적인 술수를 부린 것도 아니고, 여행길에 물건을 지나치게 많이 산 것 만으로 그 지역의 경제를 흔든 것이다.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은 여러 요인이 맞물려지며 일어났다. 당시 이집트 화폐는 불량 화폐의 유통 때문에 가치 하락을 겪고 있었고, 본래 만사 무사 이전에도 맘루크 왕조 치하의 이집트는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성과 구리가 섞인 동전의 유통으로 인해 여러 번 인플레이션을 겪었다.[3] 또한 중세 이집트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로 여겨지는 Al-Maqrizi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이집트에서는 맘루크의 술탄인 안나시르 무함마드가 화폐의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수천 개의 동전을 다시 찍어내는 일도 있었다.[4] 그런 상황에서 만사 무사의 과소비는 치명적이었으며 곧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일화가 이집트인들에게 어찌나 큰 충격으로 남았던지, 만사 무사의 이야기는 점점 살이 붙으며 수백년이 지나도록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베니스 출신의 상인들의 귀에까지 들어가 말리 제국의 명성은 유럽 세계로도 전해진다. 만사 무사의 목적이 단순한 종교적 순례가 아니라 말리 제국의 이름을 높이고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상당히 성공적인 순례길이었던 셈이다.
순례를 다녀온 후에는 메카에서 이슬람 학자, 건축가 등을 데려와 제국의 중심도시인 팀북투가오에 사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에 팀북투는 일대 이슬람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상코레(Sankore) 대학교에는 세계 각지에서 유학생이 찾아와 25000명의 학생과 40만권이 넘는 책을 보유한 도서관이 있었으며, 현대까지도 '팀북투 필사본(Timbuktu Manuscripts)'이라고 불리는, 이슬람권 전역의 정보들이 담긴 귀중한 책들이 남아있다.[5]
그러나 14세기 중동에서 활동한 위대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말리 여행기를 근거로 만사 무사의 이야기가 허황된 것이며, 실제로는 만사 무사의 과소비로 말리 제국은 기울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븐 바투타는 만사 무사의 전설이 퍼진지 20년이 지난 뒤 말리 제국과 팀북투를 방문했는데, 말리 제국을 인색하고 가난한 국가로 묘사했다.
물론 이븐 바투타의 기록도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성이 있는데 여행가이기 이전에 상당히 보수적인 이슬람 신학자였고, 그의 여행은 이슬람 세계 곳곳을 모험하면서 이슬람교의 지식을 공유하고, 그 지역의 신앙심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목적도 띄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문화상대주의 따위는 없었던지라, 여행한 지역의 토착민들의 문화가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야만인 취급을 곧잘 하곤 했다. 그러나 말리 제국은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고, 실제로 지도 계층이나 상인들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지만, 일반 민중들은 여전히 아프리카 토속 신앙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말리 제국의 지도자들 역시 굳이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고 이슬람교와 토속 신앙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며 말리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이런 모습을 본 이븐 바투타는 굉장히 실망했다.
이븐 바투타가 보기에 남편이 있는 여성이 머리카락을 가리지도 않고 외간 남자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현지의 울라마들은 남성과 여성이 우정을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되려 이븐 바투타를 설득하려고 해 그 학자의 집을 당장 뛰쳐나갔다는 일화도 있다. 말리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을 때도 이븐 바투타는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슬람 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국가의 수도에서 마저도 젊은 여성들이 거리낌없이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길거리를 돌아다녔고, 아프리카 전통 종교들, 즉 (바투타의 눈에는) 이교도들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으며, 신하들은 격의 없이 황제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러한 실망감은 이븐 바투타가 말리 제국을 묘사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보면 말리 제국에 당도하기 전 까진 방문하는 오아시스 도시마다 말리의 황금으로 넘쳐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심지어 소금 광산에서 노예들이 소금을 캐내 먹고 사는 조그맣고 동떨어진 마을에서도 언제나 막대한 양의 황금이 거래되고 있다고 묘사했다. 뿐만 아니라 말리 제국은 치안 유지에 대단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 일단 말리 제국의 영토 안으로 들어왔다면 도둑질 걱정 없이 어디든 홀로 여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형법도 대단히 공정했고, 만약 길거리에서 사망한 상인이 있다면 그 상인의 짐을 국가가 보관하고 있었다가 가족이나 친척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면 상인의 재산을 그대로 돌려주는 제도도 갖춰져 있었다. 만약 말리 제국이 벌써 기울어져가고 있던 국가였다면 치안 유지를 위한 투자를 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부정부패가 만연해 형법도 공정치 못했을 확률이 높지만,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통해서도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븐 바투타의 이야기를 완전히 편향된 시선이라고 일축하는 것 역시 대단히 곤란한 일이다. 이븐 바투타 외에도 말리의 구술 역사가들이 말로 전하는 역사에서 만사 무사는 지나친 과소비로 나라를 망하게 한 폭군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으며, 이슬람만을 중요시해 토속 종교들과 서아프리카의 전통을 무시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든 어리석은 왕이라는 묘사도 있으며, 만사 무사의 이름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6]
종합해 보자면 말리 제국의 문화에 실망한 이븐 바투타와 만사 무사의 친이슬람 정책에 반발한 현지인들이 의도적으로 만사 무사를 깎아 내렸을 가능성도 있고, 반대로 실제로 말리 제국은 만사 무사의 과소비로 기반부터 무너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만사 무사의 전설은 여러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과 수많은 이야기가 뒤섞여 있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미지의 역사로 남아있다.

3. 여담


그의 추정 재산은 현재가치로 따지면 약 4000억 달러(한국가치로 약 480조원)다. 한 때 만사 무사가 인류 역사상 최고 부자로 알려져 있었고 현재도 그런 자료가 있으나 석유재벌 존 데이비슨 라커펠러보다는 재산이 적다. 금과 소금은 그 당시로써는 목숨보다도 귀한 것이었으니 충분히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을 법도 하다.

4. 등장 매체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14세기 초 말리 지역의 왕으로 등장했다. 플레이 가능하나 능력치는 좋지 않은 편이다. Holy Fury DLC에서는 혈통도 받았다.
[1] 직계의 대가 끊어진 순디아타의 만사 가문이나 그의 누이가 조상인 콜론칸 가문이나 모두 케이타(Keita) 가문 소속이었다. 즉, 만사 무사 직전까지는 케이타 가문이 말리를 통치했다는 얘기다.[2] 그가 정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도 200년 가까이 앞선 것이다. 다만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고 증거는 발견되지는 않았다. 물론 당대기술로도 해류를 잘타면 아메리카를 가는것 자체는 가능했지만 그럼에도 결국 돌아오지는 못했던것을 보면 대서양을 돌아다니던 도중에 풍랑이나 무풍지대에 갇혔던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좌초되었거나 아니면 돌아오던 길에 좌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 출처: Economic Concepts of Ibn Taimiyah, Abdul Azim Islahi.[4] 출처: السلوك لمعرفة دول الملوك, المقريزى[5] 투아레그 반군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우상숭배라며 팀북투 필사본을 전부 불태워버리려고 시도했으나 말리 현지 역사학자들의 기지로 가짜 책과 바꿔치기하여 고문서들은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다. 불안정한 말리 치안 상 또 훼손의 위험이 있기에 현재는 고문서들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6] 출처 - 히스토리 채널. 역사의 진실을 깨워라. 아프리카의 엘도라도 팀북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