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신례
免新禮
면신(免新)또는 신래침학(新來侵虐)으로도 불린다. 조선시대에 신입 관료가 치루었던 가혹한 신고식. 자의로 풀어보면 '신입, 신진을 면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명백한 악습이며 그 행태들을 보면 양반 관료들이 한다는 것 말고는 요즈음의 군대나 대학의 똥군기 잡기와 별 차이가 없다. 참 예나 지금이나 이런 건 다를 바 없던 모양. 정도가 심하면 사람이 죽는 경우까지 있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신입생 환영회에서 과도한 술 강요 등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고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 행위는 고려 말 우왕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음서 등의 방법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일이 빈번해였다. 그러자 이들에게 질투심을 가진 기존 관료들이 기를 꺾고 상관에게 복종시키기 위한 명목으로 시작하였고, 이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면신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을 제수할 때 신임 관리는 기존의 상관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데 이를 허참례(許參禮)라 한다. 이를 풀이하면 그 집단에 참여를 허락한다는 뜻이다. 이 때는 거창하게 술상을 차려서 대접함은 물론이고 상관들의 각종 벌칙들을 받아야 했다.[1]
허참례가 끝나면 곧이어 본격적인(?) 면신례를 행하는데 이 때도 다시 음식 대접 및 벌칙이 이어졌다. 벌칙의 종류도 얼굴에 붓으로 낙서하기, 더러운 것을 만지게 하고 손을 씻은 뒤 그 물을 마시기, 진흙탕에서 구르기 등 매우 다양했다.[2] 이 면신례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관리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3]
과거 급제와는 별개로 면신례 통과일에 따라 승진 순서 등을 정했으며 이 면신례를 거부할 경우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상관들은 해당 인물에게 관리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상관에 대한 접대로 인해 경제적인 부담이 클 뿐만 아니라 벌칙 때문에 신체적인 고통도 상당했으며 이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에겐 아들이 2명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면신례를 행하다 그만 사망했다. 유림들에게 그토록 존경받는 인물의 후손도 이런 수모를 당할 정도로 면신례는 엄격했다는 의미.
물론 대부분의 신고식과 마찬가지로 '''비공식이고 불법'''이었다. 앞의 음서 드립은 말 그대로 명분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신참에 대해서 망신주고 기를 꺾으면서 자기들이 이득을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악습이건 뭐건 없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국왕이나 고위 관료들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없애라고 계속 명령을 내렸으나, '''이것도 관행이다'''라고 대놓고 버티기도 하는 등의 저항이 잇달아서 꾸준히 문제시되었다. 그리고 관료들의 신고식이라고 하는데, 이게 사헌부 감찰을 비롯한 신임관료들에 대한 신고식에서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기존관료들도 전임관료가 신임관료에게 공공연하게 받아 먹는 향응접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는 윗물이 썩으면 아랫물이 썩는다는 법칙에 의거해서, 일반 병사들까지 이를 따라하는 폐단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행하지 않으면 기수열외를 해버리거나, 혹은 대놓고 "면신례를 안하다니 잘라버리죠. "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조선시대 왕들은 계속해서 이를 폐지하고 처벌해야 했다. 사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군대의 막장문화는 다를 바 없었다는 소리.
- 성종 18년 기록 중 일부.
역시 성종 25년의 기록이다. 왕보고 이건 우리 관습이라고 대놓고 반박하고 있다.
바로 앞 기사에서 1달 후의 기사로, 사간부에서 면신례는 당연한 건데라고 하면서 반대하고 있다.
중종 9년 기사. 이제는 사관도 비난한다. 위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간관(諫官)이란, 임금의 잘못된 행실을 고치도록 권하고, 벼슬아치들의 비행을 고발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벼슬아치의 비행을 고발해야 할 인간이 오히려 비행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저 최숙생이라는 사람은 그런 간관의 우두머리인 대사간의 직책에 있는데도 저런 소리를 임금에게 대놓고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사관은 그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중종 33년 기사. 이제는 면신례를 이용해서 돈 뜯은 내용까지 나온다.
중종 36년 기사. 면신례의 폐단이 사대부를 넘어서 하위 지위까지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걸로 2번째 없어졌다.
는 페이크. 명종 8년 기사. 변한 게 없다.
현종 2년 기사.
숙종 25년 기사. 군졸들에게도 유지되고 있는 신고식의 달콤함. 그렇다고 삼사 대간들 사이에서 사라졌느냐 하면 그럴 리가.
영조 51년 기사이다. 영조 정도 군주가 되면 삼사 중 하나가 통으로 갈린다.
오해와 달리 일제강점기 시절 생겨난 악습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존재해오던 악습이다. 실제로 일본 제국군의 병영 문화에서 유래하는 한반도의 '''근대적 똥군기'''와 달리 이런 신입에게 갑질을 하며 위계질서를 다잡는 악습은 전세계에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고[6] 일제 강점기 이전 조선시대에서도 이미 존재했었다. 심지어 완화된 형태로 지금도 볼 수 있다.
천일야사의 어사 박문수 코너에서도 면신례에서 자행된 가혹행위[7] 로 인해 신입 사관이 자살했던 사건을 다뤘다. 박문수가 '''그놈의 면신례는 어찌 그리 안 변하느냐'''고 자조하는 것을 보면 박문수가 신입이었던 시절[8] 에도 가혹행위가 심했던 모양.
1. 개요
면신(免新)또는 신래침학(新來侵虐)으로도 불린다. 조선시대에 신입 관료가 치루었던 가혹한 신고식. 자의로 풀어보면 '신입, 신진을 면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명백한 악습이며 그 행태들을 보면 양반 관료들이 한다는 것 말고는 요즈음의 군대나 대학의 똥군기 잡기와 별 차이가 없다. 참 예나 지금이나 이런 건 다를 바 없던 모양. 정도가 심하면 사람이 죽는 경우까지 있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신입생 환영회에서 과도한 술 강요 등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고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2. 내용
이 행위는 고려 말 우왕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음서 등의 방법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일이 빈번해였다. 그러자 이들에게 질투심을 가진 기존 관료들이 기를 꺾고 상관에게 복종시키기 위한 명목으로 시작하였고, 이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다.
면신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을 제수할 때 신임 관리는 기존의 상관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데 이를 허참례(許參禮)라 한다. 이를 풀이하면 그 집단에 참여를 허락한다는 뜻이다. 이 때는 거창하게 술상을 차려서 대접함은 물론이고 상관들의 각종 벌칙들을 받아야 했다.[1]
허참례가 끝나면 곧이어 본격적인(?) 면신례를 행하는데 이 때도 다시 음식 대접 및 벌칙이 이어졌다. 벌칙의 종류도 얼굴에 붓으로 낙서하기, 더러운 것을 만지게 하고 손을 씻은 뒤 그 물을 마시기, 진흙탕에서 구르기 등 매우 다양했다.[2] 이 면신례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관리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3]
과거 급제와는 별개로 면신례 통과일에 따라 승진 순서 등을 정했으며 이 면신례를 거부할 경우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상관들은 해당 인물에게 관리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상관에 대한 접대로 인해 경제적인 부담이 클 뿐만 아니라 벌칙 때문에 신체적인 고통도 상당했으며 이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정몽주의 손자인 정보에겐 아들이 2명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면신례를 행하다 그만 사망했다. 유림들에게 그토록 존경받는 인물의 후손도 이런 수모를 당할 정도로 면신례는 엄격했다는 의미.
물론 대부분의 신고식과 마찬가지로 '''비공식이고 불법'''이었다. 앞의 음서 드립은 말 그대로 명분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신참에 대해서 망신주고 기를 꺾으면서 자기들이 이득을 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악습이건 뭐건 없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국왕이나 고위 관료들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없애라고 계속 명령을 내렸으나, '''이것도 관행이다'''라고 대놓고 버티기도 하는 등의 저항이 잇달아서 꾸준히 문제시되었다. 그리고 관료들의 신고식이라고 하는데, 이게 사헌부 감찰을 비롯한 신임관료들에 대한 신고식에서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기존관료들도 전임관료가 신임관료에게 공공연하게 받아 먹는 향응접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는 윗물이 썩으면 아랫물이 썩는다는 법칙에 의거해서, 일반 병사들까지 이를 따라하는 폐단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행하지 않으면 기수열외를 해버리거나, 혹은 대놓고 "면신례를 안하다니 잘라버리죠. "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조선시대 왕들은 계속해서 이를 폐지하고 처벌해야 했다. 사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군대의 막장문화는 다를 바 없었다는 소리.
3. 관련 사료
- 성종 18년 기록 중 일부.
역시 성종 25년의 기록이다. 왕보고 이건 우리 관습이라고 대놓고 반박하고 있다.
바로 앞 기사에서 1달 후의 기사로, 사간부에서 면신례는 당연한 건데라고 하면서 반대하고 있다.
중종 9년 기사. 이제는 사관도 비난한다. 위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간관(諫官)이란, 임금의 잘못된 행실을 고치도록 권하고, 벼슬아치들의 비행을 고발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벼슬아치의 비행을 고발해야 할 인간이 오히려 비행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저 최숙생이라는 사람은 그런 간관의 우두머리인 대사간의 직책에 있는데도 저런 소리를 임금에게 대놓고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사관은 그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중종 33년 기사. 이제는 면신례를 이용해서 돈 뜯은 내용까지 나온다.
중종 36년 기사. 면신례의 폐단이 사대부를 넘어서 하위 지위까지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걸로 2번째 없어졌다.
는 페이크. 명종 8년 기사. 변한 게 없다.
현종 2년 기사.
숙종 25년 기사. 군졸들에게도 유지되고 있는 신고식의 달콤함. 그렇다고 삼사 대간들 사이에서 사라졌느냐 하면 그럴 리가.
영조 51년 기사이다. 영조 정도 군주가 되면 삼사 중 하나가 통으로 갈린다.
4. 기타
오해와 달리 일제강점기 시절 생겨난 악습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존재해오던 악습이다. 실제로 일본 제국군의 병영 문화에서 유래하는 한반도의 '''근대적 똥군기'''와 달리 이런 신입에게 갑질을 하며 위계질서를 다잡는 악습은 전세계에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고[6] 일제 강점기 이전 조선시대에서도 이미 존재했었다. 심지어 완화된 형태로 지금도 볼 수 있다.
천일야사의 어사 박문수 코너에서도 면신례에서 자행된 가혹행위[7] 로 인해 신입 사관이 자살했던 사건을 다뤘다. 박문수가 '''그놈의 면신례는 어찌 그리 안 변하느냐'''고 자조하는 것을 보면 박문수가 신입이었던 시절[8] 에도 가혹행위가 심했던 모양.
5. 관련 문서
[1] 이 허참례 때 대접해야 하는 술상이 정말 '''상다리가 부러지는 수준'''으로 대접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과거에 갓 급제한 신입들에게 이 술상비용을 댈 돈이 있을 리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신입들의 집안에서 이 비용을 댔고, 이 술상비용 때문에 가산이 거덜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지간한 부잣집 조차도 부담이 될 정도의 비용이었다고. 그래도 이 비용은 개개인이 아니라 같이 급제한 신입들이 돈을 모아서 댔기 때문에 같이 급제한 동기들이 많다면 그나마 부담이 좀 덜하긴 했다.[2] 당연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입 관리가 실제로 사망하는 사건도 종종 터졌다. 이 경우 보통은 술 강요 때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먹다가 과도한 음주로 사망하거나, 벌칙 수행 과정에서 선배들이 요구한 온갖 기상천외한 짓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하다가 죽기도 했다.[3] 예외 사례가 있다면 율곡 이이. 이이는 이 면신례를 거부하다가 다른 관료들에게 오랫동안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4] 아래 관원이 상관을 맞이하는 것.[5] 관직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다. 조선 시대에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어지간한 하급자를 대하는 경우에도 예법에 어긋난 것으로 여겨졌다.[6] 예컨대 한국식 학번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 대학들에서도 헤이징(Hazing)이란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고, 간혹 사망 사건으로까지 비화하여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한다.[7] 술 강요 및 술자리에서 이뤄진 동성간의 성추행, 선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요강을 들고 선진의 오줌을 받는 행위,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를 거부할 시 자행되는 물리적인 폭력 등 온갖 반인륜적인 행위가 묘사됐다.[8] 실제 역사에서도 박문수가 관료로 있던 영조 재임 도중에 면신례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박문수 또한 면신례의 폐해를 직접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박문수가 면신례의 악습에 대해 성토하는 것은 그다지 어색한 부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