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제(유송)

 


'''유송 제6대 황제'''
'''太宗 明皇帝 | 태종 명황제'''
'''묘호'''
'''태종(太宗)'''
'''시호'''
명황제(明皇帝)
'''연호'''
태시(泰始, 465년 12월 ~ 471년)
태예(泰豫, 472년)
''''''
유(劉)
''''''
욱(彧)
''''''
휴병(休炳)
'''생몰 기간'''
439년 12월 9일 ~ 472년 5월 10일
'''재위 기간'''
466년 1월 9일 ~ 472년 5월 10일
'''부모'''
부황 문황제, 모후 심용희
'''능호'''
고녕릉(高寧陵)
1. 소개
2. 생애
3.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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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육조시대 유송의 제6대 황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명황제(明皇帝). 휘는 유욱(劉彧). 장남인 후폐제 유욱(劉昱)과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아서 대(大) 유욱으로 부르기도 한다.
재위 7년 동안은 태시(泰始), 마지막 1년 동안에는 경화(景和)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마약 사용이 빈번하였다는 점, 즉위 전에는 총명하고 인자했으나 즉위 이후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인간적이게 된 점, 상식 밖의 행동을 한다는 점으로 보아 '''마약중독자로 강하게 의심되는 황제'''이다.

2. 생애


원가 16년(439년) 10월, 문제 유의륭과 심용희 사이에서 11남으로 태어났다. 모친 심씨가 일찍 죽어 이복형인 유준(劉駿)의 어머니, 즉 계모인 노혜남이 유욱을 키웠다. 유욱은 원가 29년(452년) 상동왕(湘東王)이 되었고, 유준이 효무제로 즉위하자 진군장군, 옹주 자사가 되었다.
유욱은 바둑과 문학, 서예를 좋아했고, 비록 뚱뚱했지만 풍채가 단아해서 아버지 송 문제 유의륭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유욱은 조카 유자업에게 능욕을 당하고 그의 폭정을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자신의 심복인 완전부(阮佃夫)·왕도륭(王道隆), 유자업의 행신(幸臣)인 수적지(壽寂之)・강산지(姜産之) 등 11명과 함께 유자업을 폐위하기로 밀모했다.
영광 원년(465년) 11월 29일 밤, 유자업이 죽림당에서 귀신을 잡으러 다니는 것을 보고, 수적지가 들어가서 칼로 유자업을 죽였다. 그리고 유욱은 12월에 태극전전에서 즉위했는데, 장사 등완(鄧琬) 등이 유자업의 아우인 10세의 진안왕(晉安王) 유자훈(劉子勛)을 받들어 심양에서 황제에 즉위시키고 건강을 공격했다. 게다가 전체 274군 가운데 단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유자훈을 황제로 인정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명제는 이부상서 채흥종(蔡興宗)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자업의 폭정을 일소하고 관대한 정치로 인심을 안정시켰다. 또 반란군들을 설득시키고 건강에 있던 그들의 가족을 후하게 대우했다. 동시에 사도 유휴인(劉休仁), 보국장군 심유지(沈攸之), 어사 오희(吳喜) 등을 장수에 임명하고, 이듬해 8월에 유자훈을 주살하며 그 일당을 제거했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 처리한게 있다면 유자훈을 인정했던 서주 자사 설안도(薛安都), 익주 자사 소혜개(蕭惠開), 양주 자사 류원호(柳元怙), 연주 자사 필중경(畢衆敬), 예장 태수 은부(殷孚), 여남 태수 상진기(常珍奇) 등이 모두 항복을 구걸하지만 이걸 거절한 것이다. 정확히는 명제가 난을 평정하자 이들은 괘씸한 놈들이라면서 50,000명의 군대로 진압하려고 했고, 결국 설안도, 상진기, 청주 자사 심문수(沈文秀), 기주 자사 최도고(崔道固) 등이 모두 북위에 투항한다.
명제도 황제가 되자 잔인해졌고, 곧 '''자신의 은인이었던 유휴인을 포함한''' 자신의 형제들과 그 후손들을 도륙내기 시작했다.[1][2] 결국 송 문제 유의륭의 아들들은 이전에 북위에 투항한 유창(劉昶)과 명제 본인, 계양왕 유휴범(劉休範) 외에는 모두 죽었다.[3] 송 명제는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서 효무제의 아들 10명을 모두 죽였고, 결국 효무제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그러고는 형의 자손들이 죽었으니, 선심 쓴다고 양자를 줬다.
명제는 귀신을 지나치게 믿어서 해로운 글자는 말하지도, 쓰지도 못하게 했고 이를 어기면 즉시 죽였다. 또 침대를 옮기고 벽을 장식할 때도 토지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더구나 명제의 판단 실수로 서주, 청주, 기주 3주가 북위로 넘어가면서[4] 송나라는 촉 지역과 장강 이남, 장강 이북의 극소수 영토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황제의 위엄도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명제도 이전 황제들 못지 않게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궁 안에서 황실의 부녀자들을 '''알몸'''으로 발가벗기고 웃고 즐기는 잔치를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5] 왕황후(왕정풍)가 이를 보고 낯뜨거워하며 부채로 얼굴을 가리자 명제는 '''너희 친정은 한미한 가문(寒門)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잔치를 함께 즐기자는데 왜 보지 않는가?'''라며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왕황후는 "즐기는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어찌 시어머니와 자매들이 서로 모여 앉아 아낙의 몸을 벗겨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겠습니까? 우리 친정은 비록 한문이나, 이런 일은 실로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송 명제가 크게 노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서 뭐라 못했다.
송 명제는 어느 날 갑자기 고자가 되자 일부러 종친들의 첩 가운데 임산부가 있으면 데리고 와서 아들을 낳으면 생모를 죽이고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6] 말년에는 매우 부패해져서 '''관리들의 봉급을 중단하고''' 축재한 재산을 숨기기 위해 상궁사라는 절을 지었으며, 그 절 아래에 재산을 숨겼다.
송 명제는 유달리 뚱뚱하고 식탐이 많았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생선 창자로 만든 젓갈로, 이와 흰 쌀밥을 즐겨 먹었다. 젓갈과 밥을 섞어서 매끼 몇 그릇씩 먹은 그는 항상 배가 부른 상태였다.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인 젓갈을 즐겨먹은 것과 폭식으로 그는 복창증에 걸렸고, 그의 사인은 결국 복창증으로 추정된다. 한마디로 '''많이 먹어서 죽은 것'''이다.
태예 원년(472년) 3월, 예장태수 유음(劉愔)이 반역을 저지른다고 '''꿈속'''에서 누군가 알려주자 일어나서 즉시 유음을 죽였다. 4월, 명제는 경복전에서 34세의 나이로 죽었고, 5월에 고녕릉에 안장되었다.

3. 둘러보기(계보)





'''유송의 역대 황제'''
5대 전폐제 유자업

'''6대 태종 명황제 유욱'''

7대 후폐제 유욱
[1] 유휴인과 유휴우(劉休祐)를 죽인 경위가 정말 가관인데 유휴우을 즉위시키자는 역모가 나오자 유휴약(劉休若)이 명제와 유휴인은 세트니까 같이 죽이라고 유휴우에게 말했는데 유휴우는 오히려 이를 유휴인에게 말했고 그 보고를 들은 명제는 유휴인과 유휴우를 죽였다.[2] 참고로 유휴인과 명제는 '''반란군도 둘은 세트'''라고 보고 있었으며 명제가 죽으면 유휴인이 황태제가 되거나 그 아들이 황제가 되겠지라고 예상하고 있었다.[3] 그나마 계양왕 유휴범은 무능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나 이후 후폐제 유욱이 즉위한 뒤 사소한 문제로 난을 일으켰다가 죽는다.[4] 이미 430년, 450년에 북위의 태무제에게 크게 패해 강북과 회남은 북위로 넘어간 상태여서 이름뿐인 직함이었다.[5] 다만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에서는 여자가 알몸으로 춤을 추는 것이 유행이었고, 성군으로 칭송받는 부견조차 궁녀와 남자들이 궁전 앞에서 집단 성관계를 갖게 하고 대신들한테 그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고 할만큼, 지금보다 성문화가 훨씬 개방적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6] 상식적으로 피도 안 섞인 남 대신 친한 동생인 유휴인을 후계자로 삼는 것이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