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폐제(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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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육조시대 유송의 제7대 황제. 휘는 유욱(劉昱). 송명제 유욱(劉彧)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이름 한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기 때문에 소(小) 유욱이라 부른다. 폐위를 당한 황제라서 묘호도 시호도 없으므로 후폐제(後廢帝)나, 작위명인 창오왕(蒼梧王)으로 부른다. 참고로 창오왕으로서의 사시는 걸(桀).[1] 재위기간 내내 원휘(元徽)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전폐제 유자업보다 명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하지만 유자업이 패륜과 근친상간으로 막장을 찍었을 뿐이라면, 이쪽은 말 그대로 과연 군주는커녕 폐서인 될 자격조차 있는지 의심스러운 살육에 맛들린 미치광이 연쇄살인마였다.[2] 중국 네티즌들조차 유욱을 폐제로도 치지 않는 수준이니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2. 생애
대명(大明) 7년(463) 정월, 아버지 송 명제 유욱(宋明帝 劉彧)과 어머니 진묘등(陳妙登)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후폐제 유욱은 총명해서 의복을 재단하거나 모자를 만드는 모습을 한 번만 보아도 곧장 만들었고, 한 번도 불어본 적이 없는 악기도 금방 배워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어서 높은 장대나 천막 기둥에 기어 올라가길 좋아했으며, 밥 먹을 때가 되어서야 내려오곤 했다.
유욱은 겨우 9살이라는 나이에 즉위한 어린아이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 나이대에 흔한, 모험심이 강한 개구쟁이처럼 보이겠지만, 어느 날부터 자신의 재능을 남용해서 연장을 만들었다. 자기 재능과 열정을 총동원해서 심혈을 기울여 집게, 끌, 송곳, 망치, 톱 등을 만들어 소중히 다루고 직접 하나하나 이름까지 붙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목수왕 천계제나 공돌이 루이 16세 같이 평범한, 미니어처를 좋아하는 암군으로 끝날 수 있었으나, '''그는 결코 그 정도가 아니었다.'''
2.1. 잔혹성
유욱은 자기가 만든 연장으로 나무나 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썰고, 분해하며 노는 쾌락살인을 즐기기 시작했다'''.
유욱은 사람을 톱으로 썰고 그 모습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등 미친 짓을 많이 벌였다. 심발(沈勃)이라는 자가 보물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서 뺏기 위해 협박하다가 싸닥션을 맞고 욕을 처먹자[3] 이에 심발을 연장들로 조각조각 인수분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차하르족 출신인 손초라는 사람 입에서 마늘 냄새가 나자 산 채로 배를 갈라 속을 확인하기도 했고, 승려를 묶어서 몸을 해체한 후 언제 죽나 기다리기도 했다. 이처럼 하루라도 살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는지 아예 반역자를 직접 자신이 조각조각 잘라 살해하기도 했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대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시종들과 창을 들며 민가와 거리를 습격해 사람과 가축, 야생 동물 등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유욱은 명제 유욱의 장남이라고 하나, 명제가 어느 순간 고자가 되어 불임이 됐기 때문에 친자식이 아니었다. 아버지 유욱이 부인이었던 진묘등을 총애하는 심복 이도아(李道兒)에게 하사했다가 임신하자 나중에 돌려받은 다음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4] 그래서 항간에서는 이도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유욱이 즉위한 후 '''짐은 이장군(李將軍)이다!'''하고 자칭함으로써 이씨의 혈통임을 스스로 커밍아웃했다. 왕조에서 제왕 자신이 황실의 혈통이 아니라고 밝힘은 '''"난 황제지만 황실의 혈통과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야."'''라고 자기 스스로 정통성을 내다버리는 짓이니, 정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5]
2.2. 소도성에 대한 위협
이 일로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의 난이 일어났다. 그러나 유휴범은 폭군 유욱의 정통성을 명분으로 삼아서가 아니라, 무능한 주제에 재상으로 임명해주지 않는다고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6] 유휴범은 자신이 유일하게 남은 숙부라면서 재상으로 임명해달라고 유욱을 꼬셨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위 장군 소도성이 거짓 투항으로 유휴범을 안심시키고, 그를 살해한 뒤 난을 평정했다.
이어 원휘 4년에 유욱의 폭정을 보다 못한 24세 건평난왕 유경소(劉景素)[7][8] 의 난도 평정하는 등 소도성은 잇따른 반란들을 진압하면서 점점 명성을 높이고, 친위군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9] 그래서인지 유욱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친위군 장수이자 당시 명성이 높던 소도성이었다.
이런 상대에게는 아무리 황제라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게 정상이지만 유욱은 그 정도의 개념조차 갖추지 못했다. 그는 나무로 소도성을 조각하고 조각상을 과녁 삼아 시종들과 함께 활을 쏘았으며, 심지어는 한여름 더운 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 소도성의 막사에 몰래 들어가 윗통을 벗은 뚱뚱한 소도성의 배에 자는 동안 과녁을 그려놓고 활로 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주변 내관들의 간언 덕에 진짜 화살로 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화살촉이 없는 화살로 소도성의 배를 쏘면서 자신의 활 솜씨를 자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욱의 파멸을 초래한 최악의 선택이었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때렸으면 맞을 각오를 하는게 보통이지만 황제라는 직위를 이용해 협박, 강탈, 고문, 살인을 밥먹듯이 하며 살아온 유욱은 저항할 능력이 있는 상대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지 못하였다.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소도성은 월기교위 왕경칙(王敬則)과 힘을 합쳐 양옥부, 양만년 등 유욱의 심복 10여 명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2.3. 최후
7월 7일 칠석날 밤, 유욱은 변복을 하고 절간에 가서 개를 훔쳐 삶아 술과 함께 먹고, 궁궐에 돌아온 뒤 양옥부(楊玉夫)에게 '''너는 오늘 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는 것을 보면 당장 보고하라. 하지만 보고하지 못하면 내일 죽으리라'''는 으름장을 놓고 잠들었다. 하지만 양옥부는 유욱이 깊이 잠들자 유욱이 아끼던 수제 살인 도구를 꺼내 그의 목을 베었다. 살해당할 때의 나이는 고작 '''14세'''였다.
유욱을 암살하고 양옥부는 그 머리를 왕경칙에게 바쳤다. 왕경칙은 머리를 가지고 소도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소도성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후폐제의 머리를 연못에 씻고 확인하니 과연 맞았다. 이에 소도성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점령한 다음 정권을 장악했다. 왕경칙은 소도성에게 바로 황제에 즉위하라고 했다.
그러나 무관이라도 유학자 뇌차종(雷次宗)에게서 학문을 어느 정도 배운 소도성은 선양이라는 미덕을 알고 있어서 일단 '''선양의 선배들'''처럼 바로 황제가 되지 않았다. 소도성은 진태후를 협박해 폐제 유욱을 창오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정변을 인정하게 했다.[10]
유욱은 죽은 뒤 단양 말릉현 남교단 서쪽에 안장되었다. 그가 죽자 슬퍼해주는 사람은커녕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을 통해 이 사람의 행적을 엿볼 수 있다.[11]
3. 평가
중국 3대 폭군 중에서도[12] '''가장 포악한 폭군'''. 중국사의 유명한 폭군으로 수나라 양제가 꼽히지만 '''얘는 그나마 사람들을 대놓고 학살하지는 않았으며 남겨놓은 대운하가 너무 좋은 쪽으로 커다란지라 그냥 난폭한 쓰레기로 남았지만''' 이쪽은 대놓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쾌락살인마였다.
기록에 남은 유송 후폐제 유욱의 막장 행각은 한국사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 및 2010년대에 본격적으로 폭군이자 암군이라는 부정적 재평가를 받게 된 세조와 광해군은 당연히 비할 바도 못 되고[14] 한, 중, 일 3국 역사상 최악의 악질 폭군들인 봉상왕, 충혜왕, 부레츠 덴노, 수양제, 해릉양왕, 순화군[15] 마저 한수 접어야할 정도다. 그나마 비교하자면 같은 유송의 유자업이나 남제의 소보권 아니면 멀쩡한 나라를 1년 만에 무너뜨린 북주의 우문윤 정도 돼야 이 말종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16]
가뜩이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유송에 더더욱 피냄새를 짙게 만드는 원흉으로 지금까지의 황제들이 실로 여러 가지 방향성에서 그 악랄함과 미친 짓으로 후세인과 당대 정상인들의 치를 떨게 만들었지만 유욱만큼 살인 그 자체를 수단이자 목적으로, 그것도 가장 사악하게 이용하는 놈은 없었다. 남북조시대의 유자업과 소보권, 고양도 유욱 못지 않은 사악한 존재였지만 그들에게 있어 살인은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었다.[17] 하지만 유욱은 그저 죽이기 위해 죽이고 죽였던, 희대의 싸이코패스였을 뿐이다.
후세의 사관도 유욱의 행동에 치를 떨었으며, 소도성이 유씨 황족을 멸족시킨 것에 대해 '''"유욱 때문에 유씨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없어졌으니 굳이 몰살할 필요가 없었다. "'''라는 평가를 내렸을 정도였다.
4. 둘러보기(계보)
[1] 하나라 걸왕의 그 걸(桀)이다. 수양제와 같은 폭군들도 걸이 아닌 양을 받는 것을 생각하면 후폐제의 폭정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준다.[2] 더 황당한건 후폐제는 즉위 당시 '''10대도 안 되었다!'''[3] 이때 심발의 식솔을 도살하자 심발은 유욱의 귀를 잡아당기며 '''너는 걸주보다 더한 놈이다. 이후 도륙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4] 아마 고자라서 아들을 얻기 위해 일종의 씨내리로 사용한 듯하다.[5] 한국사로 바꿔본다면 조선왕조에서 왕 본인이 직접 나는 전주 이씨가 아니라 김씨나 박씨, 고씨 등이라고 밝혔다고 생각해보자. 하극상 명분을 완벽하게, 그것도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셈이다. 한 마디로 빨리 나 죽여달라는 것. 저런데도 5년이나 재위한 게 신기할 지경[6] 물론 송서가 남제 때 편찬되었기에 진짜일지는 미지수이다.[7] 문제 유의륭의 태자 후보3이던 7남 유굉의 아들. 유굉은 병으로 요절했다. 유경소가 옹립된 이유는 단 2가지로 장성한 어른이고 정상이었다는 점. 이 이상 조건은 필요 없었다.[8] 유욱을 황제로 볼 가치도 없다 하여 폐제로도 보지 않은 중국의 네티즌들은 유경소에게 효난황제(孝赧皇帝)라는 사시를 올리기도 하였다.[9] 소도성이 찬위의 뜻이 있었다고 보는 강력한 증거이다. 유송 충성파 대다수가 유경소의 편을 들었기 때문.[10] 여담으로 왕경칙은 남제를 세운 사실상의 공신으로 고제 소도성-무제 소색-울림왕 소소업-해릉왕 소소문을 거쳐 명제 소란 시대까지 살아 있었다. 왕경칙은 당시 회계 태수로 있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반란을 일으켰다. 명제는 수도를 황태자 소보권에게 맡기고 토벌에 나섰는데, 왕경칙은 '단공의 '''삼십육계 주위상(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니 너희 부자는 달아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면서 맞섰지만 결국 패배하고 전사했다. 여기서 '단공'이란 무제 유유의 부하로 문제 유의륭 때 반간계에 걸려 죽은 명장 '단도제'로 단도제가 싸움에서 불리하면 자주 퇴각을 했기 때문이다.[11] 이는 비슷한 폭군이었던 충혜왕의 죽음 때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12] 남은 둘은 수양제, 해릉양왕[13] 세조는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죽을때까지 고마워하며 아꼈고, 광해군은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그를 암살하려고 인물들을 포섭할때 '''내가 모신 왕을 왜 죽여야하냐 이 쉐끼들아!!''' 하면서 쫓아냈다는 기록이 있다.[14] 연산군은 그래도 즉위 초반에는 비교적 멀쩡했고, 정무도 그럭저럭 돌봤던 편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연산 10년까지 연산은 상당한 명군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오사화는 당시 왕권을 저해하고 실리적 생각도 하지 않던 사림을 제압한, 어찌 보면 필요한 일이었고, '''그 단초는 무려 조선시대에 니네 가족(그니까 왕) 겁나 구제불능에다가 미치광이인 쓰레기였다. 라고 대놓고 거리에다가 같다붙인,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 중 하나인 성종이라도 최소 몇 십 명에서 몇 백명의 모가지 날렸을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세조와 광해군 또한 패륜과 잔혹한 숙청으로 악명 높은 것과 별개로 가족이나 총애하는 신하들 같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매우 아끼는 사람이었지,[13] 유욱마냥 자기 눈앞의 만만해보이는 사람들을 자신의 쾌락살인을 위한 도구로 보는 극단적인 미치광이는 아니었다.[15] 얼마나 막장인지 순화군에게서 자기 아버지를 살려낸 소년이 효자로 인정받았을 정도다. 조선시대 효자는 선정되기 어려웠는데, 그만큼 순화군에게서 자기 아버지를 살려낸 것이 당대 기준으로도 기적이었다. 달리 말하면 순화군이 그만큼 미치광이 살인마였다는 것이다.[16] 그나마도 유자업은 살인은 종실 인사들이나 대귀족들을 상대로 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이런 식으로 미치광이 살육은 안 했다. 물론 그쪽이 정상이냐면 그건 아니올시다이다. 이쪽도 살인은 당연히 했고 근친상간을 주로 밝힌 음란한 황제였다.[17] 최소한 유자업과 소보권, 고담은 누군가를 사랑할 정신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물론 그 사랑도 제정신은 아니지만. 유자업은 고모인 신채공주를, 소보권은 반숙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