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히데모토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毛利秀元
1579년 11월 7일 ~ 1650년 10월 3일
전국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 나가토 조후번(長府藩) 초대 번주

2. 생애


1579년 11월 7일 호이다 모토키요[1]의 차남으로 빗츄국(備中国) 사루카게성(猿掛城)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宮松丸
1584년 형 宮鶴丸가 12세의 나이로 병사했기 때문에 모토키요의 적남되었지만, 1585년에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던 사촌 형 모리 데루모토양자가 되었다.
1590년 겐푸쿠[2]를 치르고, 1592년 4월 11일 히젠국(肥前国) 나고야성(名護屋城)으로 향하던 중 히로시마성(広島城)을 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면회, 데루모토의 양자가 된것을 인정받고 히데요시에게 히데(秀)라는 글자를 받아 이름을 히데모토로 고친다.

1592년 임진왜란때는 데루모토와 함께 조선으로 출진, 1593년 6월 우키타 히데이에, 백부(伯父)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 했다.
1595년 양부(養父) 모리 데루모토가 친아들을 얻어 모리 가문의 가독 상속을 고사하였으며, 같은 해 2월 히데요시의 양녀[3] 혼인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떄는 병중인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해 모리 가문의 3만 군대를 지휘하는 우군(右軍)의 총대장이 되어, 사촌 형 킷카와 히로이에와 함께 참전한다.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조선의 황석산성을 함락 시켰으며, 직산 전투에서는 구로다 나가마사를 돕기도 했다.
1599년 나가토국(長門国) 전체와 스오국(周防国)의 요시키군(吉敷郡), 그리고 아버지 모토키요로부터 상속받은 아키국(安芸国)의 사에키군(佐伯郡)을 합한 총 17만석의 영지를 가진 독립된 다이묘가 되었다. 다만 아직 히데모토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안코쿠지 에케이후견인(後見人)이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데루모토가 서군(西軍)의 총대장이 되어 오사카성에 있었기 때문에, 데루모토의 대리인 자격으로 히데모토가 모리군을 이끌고 세키가하라로 향했다. 하지만 같은 서군(西軍)으로 참전한 사촌 형 킷카와 히로이에는 이미 동군(東軍)의 총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으며, 킷카와군은 히데모토의 모리군이 도쿠가와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길을 막는 방해까지 하였다. 결국 히데모토와 모리군은 전투를 방관할수밖에 없었고 종래에는 전장에서 이탈해 버렸다.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성으로 퇴각한 히데모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함께 데루모토에게 철저한 항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종가(宗家)인 모리 가문은 킷카와 히로이에의 내통[4]에도 불구하고 영지를 대폭 삭감 당했으며, 히데모토의 기존 영지는 모리 종가(宗家)의 영지가 되어버렸다. 히데모토는 기존 영지 대신 나가토국(長門国)의 오사군(厚狭郡), 토요우라군(豊浦郡) 2개 군(郡) 6만석의 영지를 할양 받고, 조슈번(長州藩)의 지번(支藩)[5]조후번(長府藩)의 초대 번주가 된다. 데루모토의 신임을 얻어 종가(宗家) 조슈번(長州藩)의 정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1609년 정실부인이 사망, 1613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였으며, 같은 해 아직 나이가 어린 조슈번(長州藩)의 후계자 모리 히데나리[6]후견인(後見人)이 되었다. 1614년부터 1615년까지 있었던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에도 막부(江戶幕府)로부터 신뢰를 얻는데 진력하였다.
1616년부터 모리 히데나리의 대리로서 막부와의 절충을 담당하고, 1625년부터 1632년까지는 조슈번(長州藩)의 검지를 시행하여 석고를 증가시키는 등 번정(藩政)을 총괄하여 조슈번(長州藩)의 기초를 다졌다.
1630년 종가(宗家)의 당주 모리 히데나리와 갈등이 생기게 되는데, 히데모토의 종주권(宗主権) 주장과 히데모토의 적남인 모리 미츠히로와 히데나리의 딸과의 혼담이 깨진게 원인이 되었다. 히데모토는 후견역(後見役)을 사임하고, 조슈번(長州藩)이 에도성(江戸城) 수리 공사에 동원 되었을적엔, 히데나리의 도와달라는 요청도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에도 불화는 깊어져 1634년 모리 데루모토의 차남이자 히데나리의 동생인 모리 나리타카조슈번(長州藩)으로부터 독립을 획책하자, 히데모토는 나리타카를 도우려는 모습을 보인다. 히데나리는 종가(宗家)를 가벼이 여기는 히데모토의 행태에 격노하여 히데모토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오토기슈[7]직에 있던 히데모토가 에도 막부(江戶幕府)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와 친밀한 관계였기에 처벌하지 못하였다.
1636년 막부(幕府)의 중재로 히데나리와 화해하게 된다.
1650년 에도에서 사망했다. 항년 72세. 가문은 차남[8]모리 미츠히로가 이었다. 3남인 모리 모토토모는 후에 조후번(長府藩)의 지번인 키요스에번(清末藩)을 세운다.

3. 여담


완력이 강해서 바둑판 위에 사람을 세우고 그것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조슈번(長州藩)의 5대 번주 부터 13대 번주까지는 모두 모리 히데모토의 후손들이다. 1대 번주 부터 4대 번주, 마지막 번주인 14대 번주는 모리 데루모토의 후손.
[1] 모리 모토나리의 4남[2] 元服 - 일종의 성인식[3]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딸[4] 모리 가문의 영지 보존 약속 등[5] 에도시대때 번주(藩主) 가문의 일족 및 유력 가신 등에게 영지를 분배해 만든 번(藩)[6] 모리 데루모토의 장남[7] 높으신 분들의 말상대 역[8] 장남인 미야마츠마루(宮松丸)는 어릴적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