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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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도요토미 히데나가 豊臣秀長
'''출생'''
1540년 오와리 국 나카무라
'''사망'''
1591년 2월 15일 야마토 고리야마
'''국적'''
일본
'''직업'''
무장, 다이묘
'''초명'''
하시바 히데나가 羽柴秀長
'''통칭'''
고이치로 小一郞
'''아명'''
고치쿠 小竹
'''이명'''
야마토 다이나곤 大和 大納言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통칭은 코이치로(小一郞)로 개명 전에는 기노시타 코이치로(木下小一郞)이라고 불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참모로 알려진 타케나카 시게하루구로다 간베에보다 현대 매체에서 덜 조명되는 감이 있지만 히데요시를 가장 오래 섬긴 중신이고, 정치와 전투 양면에서 형을 보좌한 사실상 '''도요토미 정권의 진정한 일등공신'''이다.

2. 생애


일단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동생이긴 한데 정확한 관계가 밝혀지지가 않았다. 일단 가장 유력한 설은 어머니가 같으나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는 설[1]이 있고, 어머니만 다른 이복형제라는 설도 있으며 히데요시의 친동생이라는 설이 있는 등 확실치가 않다. 설이 여러 가지로 갈리지만 어쨌든 히데요시와 혈연관계로 이어진 동생인건 확실하다. 전국시대 관련 매체에서는 친형제인지 이복/이부형제인지에 대한 언급 없이 그냥 '히데요시의 동생'으로만 묘사되는 경우가 흔한 편이다.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무렵부터 형을 도왔다고 하며,[2] 형을 정치와 전쟁 양면에서 도와가며 형의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다. 1573년 아자이 나가마사가 패망하고 형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을 영지로 받자, 나가하마성의 죠다이[3]를 맡았으며 이시기에 히데나가라고 이름을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1575년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을 받았으며 이 시기 쯤 도도 다카토라가 히데나가의 가신이 되었다[4] 이후 히데나가는 히데요시가 주고쿠 방면 군단장으로 나섰을 때에도 정략과 전투 양면에서 활약하여 마침내 타지마국 내의 7군 등을 가증 받아 10만 5천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히데요시의 주고쿠 회군에 함께하여 아케치 미츠히데를 쓰러뜨린 야마자키 전투에도 참전했으며 시바타 가츠이에와의 시즈가타케 전투[5]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고마키 나가쿠테의 전투에도 참전했으며,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있었던 시고쿠 정벌에서는 총대장으로 일군(軍)을 이끌어 시고쿠 평정에 큰 공을 세웠다.[6] 이 공으로 야마토 고리야마 성을 거성으로 하는 116만 석의 대다이묘로 출세했다.
1587년에는 규슈 정벌에서 별동대 총사령관으로 공을 세워서 종2위 다이나곤까지 올랐지만[7] 1590년 즈음 병으로 쓰러져 히데요시의 호죠 정벌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이 동생을 걱정하여 건강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 1591년 1월, 야마토 고리야마성에서 향년 52세로 죽었다. 아들이 요절했기 때문에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야스를 양자로 들여 가독을 잇게했으나, 히데야스도 17세의 나이에 요절해서 히데나가의 가문은 단절되었다.

3. 기타


상당히 온화하고 유한 성격으로 인해 인망이 두터웠던 인물로 사람간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가 죽어 장례를 치를 때 '들과 산에 사람이 가득 찼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백성들에게도 인망이 두터웠던 것을 알 수 있다. 히데요시 역시 그의 도움이 막대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히데나가의 진언에는 항상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도도 다카토라는 한때 이 사람의 가신이었다. 다카토라는 히데나가 사후 그의 아들을 모셨으며 그의 아들이 요절하자 잠시 출가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멸망 이후에도 히데나가의 무덤을 돌본 것을 보아 가신이었을 적 감명을 많이 받은 듯.[8][9]
임진왜란을 반대했다는 설이 있다. <무공야화>에 의하면 죽을 무렵에 조선을 침공하려는 계획에 대해 "전쟁을 하면 얻을 것은 없고, 차라리 화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낫다"는 요지로 발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공야화는 진위가 의심스러운 기록이 많아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어쨌든 그가 죽은 이후 임진왜란을 일으키거나 도요토미 히데츠구 할복 사건, 센 리큐 할복 등 히데요시가 총기를 잃고 난행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임진왜란만 봐도 원인이 너무 복합적이라서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의 중추이자 뛰어난 기량인이었던 것은 분명해서 이 사람이 오래 살았더라면 히데요시의 난행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쉽게 전횡하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도요토미 정권의 수명도 길어졌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4. 창작물에서



4.1. 노부나가의 야망태합입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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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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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도 훌륭한 인재다. 정치력이 발군이며 전투나 지모도 중간은 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형과 함께 족경 고유 전법인 천성금을 배울 수 있지만 히데나가의 전투력이 높은 편이 아니라서 부장을 끼고 써야지 데미지를 기대할 수 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 특기는 '농락'이다. 창조에서는 사망 이벤트도 있는데, 그의 사망 이후 히데요시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동생의 죽음이 히데요시를 흑화시킨 시발점이라고 해석한 듯하다.
태합입지전 5에서는 역시 주인공이 히데요시인만큼 비중 있게 등장한다. 히데요시로 플레이하면 초반부터 배하 가신으로 쓸 수 있는 귀중한 인재. 정치와 전투 양쪽으로 모두 쓸만해서 실제 역사에서 히데요시의 1급 보좌역이었던 것을 제대로 체감할 수 있다.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 CG가 특징이다.

4.2. 효게모노


이 작품에서는 대담하게 혼노지의 변을 히데요시 형제가 꾸민 것으로 그리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에게 회군을 주장했던 구로다 간베에는 이 작품에서는 정 반대로 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에게 속아서 회군하자는 히데나가의 의견에 따르게 된다. 그러나 훗날 히데요시 형제가 노부나가를 죽인 것을 알게된 구로다는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히데나가를 병문안 하는 척 하면서 독살한다.

4.3. 고우 ~공주들의 전국~


여기서는 형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판단력이 흐려지고 무모한 행동을 일삼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계기가 츠루마츠의 죽음과 더불어 히데나가의 죽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설정한다. 히데나가도 생전에 이를 크게 염려해서 유언으로 히데요시에게 '귀에 달콤한 말을 하는 자보다 귀에 아픈 말을 하는 자를 가까이 하라'라고 말하며 아랫사람들의 충언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사망한다.

[1] 이 설에 의하면 히데요시 양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한다.[2] 이 역시 언제부터 형을 도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3] 城代, 성주의 부재시 성을 대신해서 관리하는 사람[4] 다카토라는 히데나가의 양자 도요토미 히데야스가 사망할 때까지 히데나가 가문의 가신으로 있었고 히데야스 사후 출가했다. 다카토라가 아까웠던 히데요시는 다카토라를 계속 설득해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고, 이때 히데요시는 다카토라에게 기존의 영지에 5만석을 가증시켜 줌으로써 다카토라는 7만석의 다이묘가 되었다.[5] 여기서 시바타 측의 사쿠마 모리마사가 돌격하는 바람에 히데나가의 부장이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전사했다. 그 때문에 히데요시의 질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기록의 출처인 <노인잡화>가 신빙성이 별로 없는 사료라고 한다.[6] 여담으로 이 시코쿠 공략 도중 죠소카베 가문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히데요시가 직접 나서려고 했었으나, 처음으로 대규모 군의 총대장을 맡는 동생 체면도 생각해 달라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이 있었다.[7] 그의 영지가 야마토(大和) 지역에 있어서 이 관위를 받은 후 '야마토 다이나곤(大和大納言)'이라고 불렸다.[8] 주군을 7번이나 바꾼 걸로 유명한 다카토라 입장에서는 처음 맞는 제대로 된 주인이었다. 이전 주인들은 그가 사표를 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같이 멸망하고 말았을 정도로 가망이 없었다. 히데나가 아래에선 그 재능을 인정받아 사실상 오른팔격의 대우를 받았다. 낭인에서 출발한 신참자였으나 여느 유력가문 중신들에 못지않은 2만석을 받았으며, 히데나가의 후계자인 히데야스의 대리인격으로 왜란에 참가한 적도 있으니 사실상 히데나가의 가신들 중엔 가장 상석을 차지했던 걸로 보인다.[9] 도도 다카토라와 비슷한 일례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있는데,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 중 가장 으뜸의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필두로서 5천석을 받았고(나머지는 모두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의 1인자로서 활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나서 히로시마 번 49만석(나중에 51만 5,800석으로 증가)을 가증받고 나서도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했고 이로 인해 시나노 번 4만 5천석으로 감봉된 이후 아들 타다카츠의 사망으로 2만 5천석을 막부에 헌납하고 본인의 사망으로 나머지 2만석이 몰수되어 아들 마사토시가 3천석의 하타모토로 몰락한 걸 보면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 중엔 가장 상석을 차지했던 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