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다얀

 

'''이스라엘 제4대 국방부장관'''
'''모세 다얀'''
'''משה דיין | Moshe Dayan'''
<colbgcolor=#0038b8><colcolor=#fff> '''출생'''
1915년 5월 20일
[image] 오스만 제국 데가냐[1]
'''사망'''
1981년 10월 16일 (66세)
[image] 이스라엘 텔아비브
'''임기'''
이스라엘군 제4대 참모총장
1953년 12월 6일 ~ 1958년 1월 29일
이스라엘 제7대 농업부장관
1959년 12월 17일 ~ 1964년 11월 17일
이스라엘 제4대 국방부장관
1967년 6월 5일 ~ 1974년 7월 3일
이스라엘 제5대 외무부장관
1977년 6월 20일 ~ 1979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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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b8><colcolor=#fff> '''부모'''
<colbgcolor=#fff>아버지 시무엘 다얀, 어머니 데보라 다얀
'''소속 정당'''
'''종교'''
무종교(무신론)[7]
'''최종 계급'''
'''원수'''
'''참전 전쟁'''
1936년 팔레스타인 봉기
제2차 세계대전
제1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제3차 중동전쟁
제4차 중동전쟁
'''소속 군'''
[image] 하나가 (1929 - 1948)
[image] 영국군 (1939 - 1945)
[image] 이스라엘군 (1948 - 1959)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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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의 군인, 정치가. 건국 초기 이스라엘의 여러 군사적 승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주인공. 특히 전격적인 기습, 기동으로 유명했다. 이외에 안대를 한 애꾸눈폭풍간지 명장이란 점도 유명한 이유.

2. 생애


[image]
팔레스타인 갈릴리 근방의 ‘데가냐’에서 태어났다. 1929년 농민 자위대에 들어가 반영 운동에 참가하고, 1939년 지하 활동 중에 체포되어 약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41년에 석방되어 비시 프랑스 정부 때 시리아 진공 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이때 한쪽 눈을 잃었다.[2]
1948년 5월 마침내 영국군이 철수하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모세 다얀은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요르단 계곡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아 수적으로 우세한 시리아 군을 물리치고 자신의 고향 데가냐를 사수했다. 석 달 뒤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휴전협정 조인을 위한 협상에 참여해 군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자질도 발휘한다.
제1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었지만 국가의 기틀, 특히 저마다 출신 배경이 각양각색인 이스라엘 방위군(IDF)을 재정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1953년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직에[3] 오른 다얀은 대대적인 군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젊고 공격적인 장교들을 파격적으로 고위 지휘관에 임명하였다. 또한 기갑부대와 공수부대 등 실제 전투를 치루는 공세적 성격의 부대들을 강화해 나가는 반면, 행정과 지원부대 등의 군살은 빼나간다.
[image]
생애 최고의 순간. 1967년 6일 전쟁의 전격적인 승리로 점령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다얀. 오른쪽은 당시 이스라엘군 총참모장이었던 이츠하크 라빈. 출처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바로 나타나는데,1967년 6월 5일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승리로 입증이 되었다. 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다얀은 총참모장 이츠하크 라빈 등과 함께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의 압도적인 병력 포위를 공군력과 기갑 전력을 동원한 선제 기습으로 분쇄했고,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 등을 점령하여 기존 영토에 대한 완충지대를 확보했다. 1969년 레비 에슈콜 총리가 급사하자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노동당의 반대를 받았고 부총리 겸 이민장관 이갈 아론과의 갈등으로 인해 골다 메이어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허나 국방장관으로 누구보다도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골다 메이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에도 국방장관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6일전쟁의 최고 영웅은 엄밀히 말해서 이츠하크 라빈이었고 국방장관에 임명된 지 4일밖에 되지 않았던 다얀은 솔직히 말해서 숟가락 얹은 면이 강했다. 그리고 다얀은 자신의 군사적 업적과 이스라엘 정보기구의 능력에 도취되어 아랍 국가들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군 일선의 모든 경고를 무시했다. 그 결과, 1973년 제4차 중동전쟁(10월 전쟁/욤 키푸르 전쟁)에서는 이집트, 시리아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적 기습에 대한 초기 대처의 실패와 전세 회복 지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77년 메나헴 베긴 내각의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가[4] 1980년에 수상 베긴과 심하게 대립하다가 대장암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어 사임하였고, 1981년 6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가족으로는 첫째 부인 루스 다얀에게서 낳은 2남 1녀와[5] 두 번째 부인 라헬 다얀이 있다. 모세 다얀은 여성을 좋아하여 여성 편력이 심했다. 그래서 첫째 부인 루스 다얀과 이것 때문에 불화가 커져서 이혼까지 했고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해서도 바람피우곤 했다. 나중에 모세 다얀이 죽고나서 재산분배 때문에 전처와 전처의 자식들 후처 라헬 간의 소송문제가 터졌다.[6]

[1] 현 이스라엘 데가냐알레프.[2] 모세 다얀이 쌍안경으로 적정을 살피고 있을 때 총탄이 날아와 그의 쌍안경을 치면서 깨진 유리조각과 철제 파편이 왼쪽 눈 속을 뚫고 들어가 눈언저리를 모두 파괴하는 중상을 입혔고. 의안을 해 넣을 뼈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심각한 상태였다. 이때부터 왼쪽 눈을 감싼 검은 안대는 모세 다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3] 이때 나이가 38세로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참모총장으로 기록되었다.[4] 이때 이집트와의 평화 협상 작업에 착수,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과 정상회담을 성사시킨다.[5] 아씨, 야엘, 에후드로 모두 이스라엘의 유명한 영화 감독, 정치인, 조각가이다.[6] 사실 다얀은 자식들과도 관계가 좋지 못했다. 특히 라헬과의 결혼식은 자식들이 매우 싫어하여 참석하지 않았고 막내인 에후드는 아버지의 좋지못한 사생활을 폭로하고 비난하는 책을 쓸 정도로 아버지와 관계가 나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