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중동전쟁

 



히브리어: (מלחמת יום כיפור) מלחמת יום הכיפורים, מלחמת אוקטובר, מלחמת רמדאן
아랍어: حرب أكتوبر, حرب أكتوبر "حرب العاشر من رمضان, حرب تشرين التحريرية , حرب يوم الغفران
영어: Yom Kippur War (The 1973 Arab-Israeli War), Ramadan War, October War
러시아어: Четвёртая арабо-израильская война, («Война Судного дня», Октябрьская войн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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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여 바레브 선을 돌파하는 이집트군 기록화
1. 개요
2. 대(大) 복수극의 시작
3. 전쟁 경과
4. 미국의 장비 지원과 반격
5. 결과
6. 영향
7. 기타
8. 둘러보기






1. 개요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욤 키푸르 라는 유대교 전통의 속죄일[1]이었기 때문에 흔히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또는 10월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전쟁기간은 1973년 10월 6일 ~ 1973년 10월 25일.

2. 대(大) 복수극의 시작


1970년 가말 압델 나세르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서방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시나이 반도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도 보였으나 이스라엘의 무성의한 반응에 결국 전쟁을 통해 시나이를 회복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주변국들과의 공조를 강화하여 결국 시리아가 또 이집트와 손을 잡는다.
사다트는 군대의 체질과 훈련강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소련 고문단을 초빙하고,[2] 이전의 전훈(戰勳)을 연구하여 대응 방법을 연구하고, 최신 병기들을 대거 도입하면서 철저한 훈련과 함께 군조직의 개편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장교단의 경우, 병사/수병/부사관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이전의 귀족적 악습을 타파하고[3] 젊은 대학생들을 장교로 선출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보안에 심혈을 기울여, 6일 전쟁처럼 시작하기도 전에 맞고 뻗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스라엘 정부도 모사드에서 사전에 이집트의 이런 움직임을 감지하여 보고했기에 일단은 전쟁에 대비하기는 했으나, 정작 골다 메이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가 지금까지의 연승에서 비롯된 긴장감 상실과 아랍군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이전과 다른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당시 이집트는 진짜 전쟁준비를 숨기기 위해 몇 차례씩 허울뿐인 동원령을 발령했는데, 이스라엘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똑같이 동원령을 내리려할경우 동원령에 소집된 국민들에게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줘야 하는 문제가 있어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집트의 동원령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도 무리였다. 전쟁 개시 직전에 서로 다른 루트들을 통해서 결정적 정보들을 확인한 뒤에도 후술할 외교적 이유로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결정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골다 메이어 총리와 모세 다얀 국방부 장관이 속한 노동당 내각의 발목을 붙잡고 만다.
한편 사다트는 공격할 생각이 없으면서 이스라엘을 긴장시켰던 나세르와는 정반대로 공격할 생각을 숨기고 이스라엘이 긴장을 풀게 만드는 술책을 썼는데, 바로 이스라엘을 상대로 몇 개월에 한 번씩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공갈협박을 날렸던 것이다. 처음에야 여기에 잔뜩 쫄았던 이스라엘이었으나 이집트 측이 실제로는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이를 일종의 정치적 제스쳐로 파악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공갈 협박만 날리는 상황이 사다트 집권 후 몇년 동안이나 계속되자 이스라엘 측은 안와르 사다트를 그냥 위협만 일삼는 허풍쟁이로 여기게 된다. 심지어 사다트가 4차 중동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날린 '''진짜 전쟁협박'''에도 "어디서 구라야?" 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
10월 5일, 이집트에 심어놓은 최고위급 스파이인 아슈라프 마르완[4]으로부터 '''당장 내일 전쟁이 시작된다!'''는 정보가 전달되었으나 몇 달 전 마르완이 같은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 때문에 이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불투명한 문제였으며, 골다 메이어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 시점은 전쟁 시작 몇시간 전의 일이었다.[5] 어쨌거나 모사드는 마르완의 경고를 긴급히 메이어 총리에게 전달했고 메이어는 이를 매우 심각한 징조로 받아들여 즉시 장군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하게 했지만 예비군 동원에만 최소 24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마르완의 첩보는 너무도 늦은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욤 키푸르 당일인 10월 6일에, 이스라엘에서 많은 군인들이 휴가를 떠나고[6][7]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집트, 시리아 연합군의 전면적인 기습이 시작되었다.[8]

3. 전쟁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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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6일 ~ 10월 15일: 시나이 반도
이전 세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난 것에 비해 이 전쟁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개전 당일,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거대한 모래벽과 영구진지로 구성된 바레브 선을 돌파하기 위해 8천이 넘는 특수부대를 사전에 도하시켜 미리 요새 후방과 이스라엘군의 기동로 근처에 매복시켰고, 철저한 공격준비사격 뒤 운하 도하를 개시했다. 이때 이집트 육군 공병독일에서 수입한 고성능의 '''소방펌프를 동원해 모래벽을 적셔서 무너뜨려버리는'''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해 이스라엘이 요새 철거에만 이틀은 걸릴 거라고 장담하던 바레브 선을 단 9시간 만에 돌파해버렸다. 해당 작전의 창의성은 기존에는 병역이 면제되던 대학생들까지 입대시켜가며 군 장병들의 질적 향상을 꾀하던 이집트군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래벽이라고 하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까지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국경도발(방어선에 냅다 포격을 가하는 등)에 이스라엘군이 거의 완벽하게 대응해 왔고 심지어 전술핵의 폭발력에도 버틸 수 있을 거란 예상까지 나오던 곳이었다. 이집트군은 이러한 바레브 선의 약점을 꿰뚫었고 사전에 모의실험까지 거친 후 해당 작전을 실행하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하였다. 바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모래벽에서 그치지 않고 화공을 위해 기름 탱크를 준비해 두었고 고지대에 콘크리트 벙커를 추가 설치하긴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이 날이 욤 키푸르였기에 '''해당 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군 병력 대부분이 휴가간 상황이었다.''' 이집트군은 Mi-8 수송헬기로 기습강습을 해 기름 탱크를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군의 화공 전법을 무력화시켰으며 고지대의 벙커의 경우 '''똑같은 높이의 토산을 쌓아 올려서 그 위에 전차를 올려 콘크리트 벙커를 격파해버렸다.''' 이 돌파작전에서 이집트군의 병력 8만 명 중 전사자는 단 208명에 그쳤으며, 당시 3만 명 이상의 피해를 예상하고 있던 이집트 수뇌부는 이런 예상외의 대성공에 기뻐서 날뛰었다고 한다. 이후 잘 훈련된 이집트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수비대 요새 근처에 신속 전개하여, 이스라엘군의 기동예비대인 육군 252기갑사단 예하 전차여단들의 진격로를 틀어막고 적극적인 대(對)전차 방어전을 구사한다. 이스라엘군은 반격을 위해 전차 부대를 투입하지만 이집트군은 이미 잘 준비된 방어진지에서 '''대전차미사일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 이집트군은 결국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전차의 60%인 150여 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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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스라엘 공군조차 이집트 방공군의 지대공미사일에게 하루 만에 전 보유대수의 10%가 넘는 전투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어 이전 전쟁을 항상 승리로 이끌었던 공군력에도 기대기 힘들어졌다. 사실 항공전에서 하루 만에 10%의 손실률이면 거의 기록적인 수준으로, 앞으로도 이런 손실률이 지속된다면 항공전역 수행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열흘 내로 공군기를 모조리 상실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초 이런 끔찍한 피해를 입자 지상군 전선이 엄청난 위기에 빠져있음에도, 일시적으로 지상군에 대한 지원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공군의 주요 피해는 이집트 방공군이 보유한 러시아제 신형 2K12 KUB(나토코드 SA-6) 지대공미사일과 23mm 4연장 기관포를 탑재한 '쉴카' 대공기관포 차량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집트 공군은 애초부터 형편없던지라 방공군의 활약이 컸던 것이다.[9]
10월 8일에는 이스라엘에서 2개 기갑사단이 더 투입되었지만 이들 역시 이집트군 대전차미사일의 화력 앞에 혼쭐이 나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전차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나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단독으로 진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이 이스라엘의 인구 문제로 인한 보병의 부족, 그리고 제3차 중동전쟁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맹활약에 의한 전차 만능주의 때문이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반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보병의 대전차 공격능력 자체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집트군이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하여 시나이 사막을 가로지르기 전에 일단 그 기세부터 꺾고 보자'''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군의 계획이었던 것. 이 때문에 공세 주력이었던 2개 동원기갑사단은 아예 사단 보병과 포병이 본토에서 한창 이동 중인 상태에서 전차만으로 선공에 들어갈 정도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러한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인 편에 속했다. 당시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인 RPG-7은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도 짧았기에 베트남 전쟁 같은 정글이면 몰라도 교전거리가 길게 나오는 시나이 사막의 특성상 이스라엘군은 적 보병의 방어진지 정도는 전차포로 장거리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집트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전차전 같은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터라, 이집트군은 RPG보다 더 강한 소련AT-3 말륫카 대전차미사일을 이미 대거 들여온 상태였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1. 진지에 숨어서 이스라엘 전차를 기다린다. 이때 AT-3는 뒤에, RPG-7은 앞에 겹겹이 위치시킨다.
2. 이스라엘 전차가 오면 AT-3를 쏘고 숨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차의 시야가 생각 이상으로 좁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위에도 서술하였듯이 당시 이스라엘군은 전차의 눈이 되고 서포트를 해줄 '''보병 없이 전차만으로 돌격했기 때문에''' 이 전략이 더 빛을 발했다.
3. 엄폐물로 숨으면서 장전하고 장전이 되면 다시 쏘는 식으로 이스라엘 전차를 순차적으로 부순다.
4. 이스라엘 전차가 만약 살아서 엄페물 방향으로 접근하면 파괴력에 비하여 정확도가 떨어지는 RPG-7으로 처리한다.
물론 이스라엘군은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국경에서의 분쟁을 통해 말륫카 미사일의 존재와 그 성능을 파악하고 있었고 치명적인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AT-3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으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단점을 이를 뒷받침해줄 기동전략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돌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대전차 보병의 전술적 역량을 낮게 평가하는 실수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당시 시나이 사막에서 투입 가능했던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는 참패를 겪었다. 앞서 2일간의 전투에서만 이스라엘군은 300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고, 골란 고원까지 포함하면 800대가 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 훗날 파괴된 전차 중에서 400여 대는 이후 회수해서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였고, 거기다 미국의 긴급원조로 수령한 대량의 패튼 시리즈와 아랍 측의 T-55, T-62 전차도 다수 노획해 종전 후에는 전차 보유수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전차를 젊은 간부의 관이라 부를 만큼 인원손실이 커 노련한 전차 승무원들을 잃은 것은 회복하지 못했으며 전차 보유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후의 이야기로 전쟁 중이던 당시에는 가히 뼈를 박살낸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다.[10]
이집트군은 소련식의 조직적인 보병 중심 대(對)전차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이스라엘군을 끌어들였다. 특히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맞선 이집트군은 이미 전날 밤 운하 일대의 원래 방어책임을 맡고 있던 이스라엘군 만들러 소장의 252기갑사단 전차 전력의 60%를 대전차 방어전에서 격파할 정도로 그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전날보다 더욱 취약한 상태로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군 2개 사단에 맞서 말 그대로 최고의 선전(善戰)을 펼쳤던 것이다. 그나마 이스라엘군의 반격은 이집트군이 진격을 멈추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만드는 효과는 거두어 결국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는다는 당초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 대신 만약 이집트가 작심하고 제대로 밀어붙일 경우 이에 맞서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원래 소련식 군사교리의 특성상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 6.25 때에도 이러한 특성이 보이지만, 중앙 집중화된 지휘체계상 각 제대는 원래의 목표선까지 진출하면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상태를 보고하고 피아 간의 상황을 분석해서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게 된다. 당시 이집트 지휘부는 지난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집트군이 예상 이상의 전공을 세우자 이것이 이스라엘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이스라엘을 너무 밀어 붙일 경우 '''미군이 전면개입하거나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11] 그리고 어차피 이집트의 목적도 수에즈 운하 회복과 미국-이스라엘과의 수교였지 이스라엘 전멸이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 진격할 필요도 없었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지리멸렬해서 상급 지도부가 공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도 여유를 얻어 일부 동원병력을 먼저 시리아 전선에 돌리는 도박수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시나이 전선에서 우세를 차지한 이집트군은 예상되는 역습에 대비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시리아군 역시 초전에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특수부대 강습으로 헤르몬 산의 이스라엘군 관측소 겸 진지를 한시간만에 점령하고[12], 기갑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이스라엘군 제188기갑여단의 방어선을 남단에서 수적(數的) 우위로 돌파하며[13][14] 쾌조의 진격을 거듭해 7일에는 요르단 강 가까이에 이르렀다. 시리아군 기갑부대가 골란 고원 서쪽 저편에서 빛나는 갈릴리 호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진출한 것이다.[15]
상황이 심각하게 변하자 다급해진 이스라엘군은 일단 가장 가까운 시리아군부터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당장 이집트 방면은 시나이 반도를 제물(祭物)로 바치면서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있었으나, 시리아 방면은 골란 고원이 돌파당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시리아군의 공격 앞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용병력을 대부분 골란 고원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골란 고원의 방어선 북단을 담당한 이스라엘 현역 부대인 제7기갑여단, 그중에서도 카할라니 중령이 이끈 제77전차대대는 1:10의 수적 열세하에서 몰려드는 시리아군 기갑부대를 말 그대로 혈전(血戰) 끝에 격퇴하면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으로 투입될 시간을 벌었다.

4. 미국의 장비 지원과 반격


자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마지막 보루인 미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8일 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전술핵탄두 조립을 승인했다. 특급 비밀이어야 할 핵무기의 준비는 그다지 비밀스럽지 않게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여차하면 이집트와 시리아에 쏴버리겠다는 협박이자,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는 것을 미국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는 계산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9일 오전 미국 국무부에 날아들었다.
이스라엘이 대놓고 핵무기를 조립하는 반응을 보이자 소련과 접촉하였다. 최악의 상황인 이스라엘이 핵공격을 실제로 실시할 경우, 소련은 이집트에 핵무기를 공급해서 핵 보복을 시행하도록 허락하여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을 공멸시키고 이후 미국과 소련은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주 내용이다. 즉, 여차하면 미국과 소련은 양국의 전면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버섯구름 아래로 사라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외교 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직하며 외교정책을 장악했던 헨리 키신저는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제3차 중동전쟁의 후속편을 찍어버리면, 이후 미국 입장에서 아랍국가들을 회유하여 평화협정을 주도,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될 여지가 아예 사라지기 때문에' 초기에 대대적 지원을 꺼려했던 것이다. 전쟁 초기 키신저의 큰그림은 이스라엘이 아예 망하지 않을 만큼만 지원, 이스라엘이 아랍군을 1967년 휴전선까지 다시 몰아내면 그때 정전을 중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지원을 받긴 받았으니 군말할 수 없고, 아랍 측도 미국의 영향력으로 멸망을 모면하게 될 테니 미국이 중동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이와 같이 자신만만했던 키신저였지만 개전 초기 전황이 이스라엘에 불리해지자 지원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랍측의 보이콧을 의식한 기업들이 차터 항공편을 내 주지 않았고, 군사적 충돌에 예민했던 국방부도 협조를 거부해 첫 1주 간은 엘알 항공기 7대가 미국까지 날아와 장비를 직접 가져가는 것으로 충당해야 했다. 미국은 전선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12-13일 사이 영국에 부탁하여 휴전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사다트의 완강한 거부로 실패, 전쟁이 생각보다 장기전으로 돌입될 위험에 처하자 14일경에야 최대물량 지원을 시작하였다. 오히려 그동안 워터게이트 사건에 정신이 팔려있어 중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닉슨이 당장 하라고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시리아와 이집트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은 48시간 만에 이스라엘군 17개 여단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시리아-이집트 연합군의 기습으로 패전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 군부는 마지막 카드로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스라엘 여성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는 핵무기 사용에 반대하면서[16]

비밀리에 미국 워싱턴 D.C.로 날아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에게 매달렸다. 키신저의 회고록 『위기Crisis』에 따르면 외교적 프로토콜을 무시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워싱턴에 나타난 메이어 총리는 1시간 동안 닉슨 대통령을 붙들고 눈물로 도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신형 무기들을 이스라엘로 긴급 공수하고 첩보위성기로 아랍군의 동태를 알려줘 전쟁의 흐름을 뒤집었다. 막판에 승리하긴 했지만 이스라엘이 지불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아 전사자가 2,500명,[17] 부상병 7,500명에 이르렀다. (김재명,『오늘의 세계 분쟁』, 235쪽)[18]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리처드 닉슨 행정부였지만 그 대응은 빨랐다. NATO 최전선, 즉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신예 M60A1을 포함한 대규모 전차와 항공기, 막 배치가 시작된 스마트 폭탄을 비롯한 정밀유도 병기는 물론, 일설에는 핵무기까지 포함된 대규모 지원이, 봉쇄된 바다와 지상을 넘어 항공로를 통해 날아들었다. 공장에서 갓 나온 F-4들이 공중급유기의 급유를 받으며 이스라엘까지 날아왔고 대서양과 지중해에 전개해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A-4를 잔뜩 싣고 와 이스라엘 근해에서 이함시켜 배달해주었다. 이 무제한 작전(니켈 그로스 작전)은 33일 동안 계속되었다.
여기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전술적 대가는 막대했지만 지난 3차 중동전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선제공격을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19] 미국의 압박으로 2차 중동전에 이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외교적 패배를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략적으로는 아랍 측의 공격 가능성을 48시간 전에 파악하고도 선제공격보다 먼저 공격을 당하고, 그 뒤에 방어전에 들어간다는 도박수[20]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둬 이것으로써 다시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군을 재정비해 반격에 성공한 것도 이스라엘군의 전술적 승리라 하겠다. 무기를 줘도 운영하지 못해 패하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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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 고원 작전
미국의 지원에 더해 예비 병력의 바닥까지 긁어모은 3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에 전개된 10일경,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대한 전면적 반격(Counter-offensive)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완전히 박살난 시리아군은 500대가 넘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시리아 공군 역시 10일 마지막 결전을 노리고 대규모로 출격했으나 이스라엘 공군에 격퇴당해 시리아 전선은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상황으로 돌변했다.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군의 포격이 떨어지고 있었고 시리아 정부는 일대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는 요르단에 대한 성의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소련의 으름장으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암만-다마스쿠스 가도에서 진격을 중단했다.[21]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하도 박살이 난 관계로 이라크군과 요르단군도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과의 전투에 일부 참전했다. 다만 이스라엘도 애초에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면 요르단이 아랍 연합국을 구원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고, 요르단도 전쟁을 요르단 본토 쪽으로 확대시키지 않으려 했기에 투입한 병력의 수가 적었다. 이라크군은 투입되자마자 이스라엘군에게 관광당하고 공군은 시리아를 도와주러 급파된 소수의 요르단군 전투기와 오인교전을 벌이다가 패해서(...) 퇴각하는 등 시리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전투력 면에서는 별 도움은 안 되었던 모양이다(...). 사우디군도 일부 참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주장은 여단 규모 부대를 골란 고원에 파병해서 시리아의 방위를 지원하긴 했으나 파견 시점이 늦어져서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나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내 작전기간 중 미국제와 영국제 장비를 상당량 노획했는데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조기 참전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시나이의 이집트군은 지난 제3차 중동전쟁과는 다르게 '''시리아가 말아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에서 뛰어나와 이스라엘로 진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역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정면대결은 무리였는지 아주 박살이 나버렸고, 16일 새벽 아리엘 샤론 소장(나중에 수상이 된 바로 그 사람)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이 이집트군의 전투지경선을 파고들어 수에즈 운하를 기습도하해 텅텅 빈 수에즈 서안으로 밀고 들어가 수에즈 운하 남반부의 이집트 3군 병력을 포위하면서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3군을 포위 섬멸함으로 이집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 했지만 이스라엘을 기사회생시킨 미국과 이집트, 시리아의 뒤에 있던 소련이 개입했다. 두 나라는 모두 이스라엘이 3군을 물리적으로 섬멸하여 이집트에 불필요한 굴욕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천명했으며 이스라엘이 포위된 3군에게 식량, 의료지원을 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키신저는 만약 이스라엘이 3군을 섬멸하려 한다면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이집트 편으로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선을 넘는 순간 이스라엘이 얻은 모든 성과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이러한 중대한 개입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대한 결정적인 설욕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외교적 승리만 거둔 수에즈 전쟁이나 군사적으로 재앙적으로 가깝게 패한 6일 전쟁과 달리 이집트 쪽이 외교적, 군사적으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스라엘군이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상전과 달리 해상전에선 이스라엘 해군이 압승을 거두었다. 개전 첫날 저녁 시리아 라타키아항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자국산 가브리엘 함대함미사일을 이용해 시리아 해군 소속 미사일 고속정 3척과 어뢰정 1척, 소해정 1척을 격침시켰고 시리아군이 발사한 스틱스 미사일은 ECM에 의해 모조리 빗나가버렸다. 그리고 이후 발팀에서 벌어진 이집트 해군과의 결전에서도, 이스라엘군 고속정 6척이 이집트군 고속정 4척 중 3척을 격침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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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15일 ~16일: 시나이 반도

5. 결과



'''[NHKBS1다큐] 되살아나는 악몽 - 1973년 알려지지 않은 핵전쟁 위기 (2019)'''
개전초기 궁지에 몰리게된 이스라엘은 자국의 핵미사일 제리코1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이집트 또한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핵탄두가 탑재가능한 스커드 미사일B형으로 반격할 준비를 해 핵전쟁으로 확전될 양상을 보인 무시무시한 전쟁이었다. 게다가 양측을 지원했던 미국의 닉슨과 키신저, 소련의 브레즈네프와 각료들은 서로의 잘못된 판단과 오해가 쌓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초강대국간의 전면 핵전쟁 직전의 상태까지 갈뻔 했다. 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대의 전면 핵전쟁 위기였던 것이다.
위 다큐멘터리의 내용대로 24일 밤-25일 새벽 사이 브레즈네프의 일방적 파병 위협, 백악관의 데프콘 3 발령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번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서 주요 증거로 제시한 소련의 핵물질 운반 관련 보고는 26일에 처음 들어왔기 때문에 데프콘 3 발령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소련이 이집트에 핵무기를 제공하려고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높지 않은데, 세 가지 이유에서다.
1. 소련 해군의 지중해상 핵물질 운반은 빈번히 있었으며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2. 소련이 아예 실전 사용을 작정하고 핵무기를 옮겼다면, 미국이 시퍼렇게 눈 뜨고 감시중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시키지 않고 비밀리에 항공수송했을 것이다.
3. 핵무기에 극도로 민감한 소련이 공산권도 최우방도 아니며, 심지어 전쟁 중인 제 3국에 핵무기를 넘겨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그나마 비슷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핵무기의 통제권은 철저히 소련이 가지고 있었다.[22]
결론적으로 두 번에 걸친 정전 시도가 무산되자 위험천만한 미-소 대립 양상으로 치닫긴 했지만, 미국에서 소련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데프콘이 상향조정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에 가깝다. 여러 학자들도 굳이 핵무기가 아닌 재래식 병력도 소련이 실제로 투입했을 가능성이 적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24-25일의 위기는 브레즈네프의 과장 섞인 일방적 개입 위협과 극도로 긴장을 탄 키신저의 강경 대응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23] 우발적 핵전쟁 문서에도 나와있듯, 그 이후 사소한 오해나 경솔한 행동이 누적되어 핵전쟁이 발발했을 위험은 충분하지만.
결국 이스라엘군은 전쟁에서 겨우 승리하긴 했지만[24] 그렇게 자랑하던 정예 기갑부대와 공군이 이스라엘군의 자만심과 방심으로 인해 이집트 대전차 보병들과 방공군에게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다. 그리고 일이 닥치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임기응변적 사상과 예비군을 빨리 소집하면 된다는 현역병 최소화 사상이 동시에 파기된다. 이는 실제로 전쟁에 돌입하니 예비군이 동원 완료되는 72시간을 소수의 현역병이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버티지 못해서 파국이 일어났으며, 예비군을 위한 예비 장비와 물자는커녕 현역병을 위한 장비와 물자, 심지어 무기와 탄약도 태부족이라서 미국이 대량원조하지 않았으면 포탄과 탄알 같은 기초적인 탄약이 떨어져서라도 망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전후 탈 장군(메르카바 전차개발로 유명)에 의하면 이스라엘군이 소모한 각종 탄약은 비축되어 있던 물량내였고 유일하게 175mm 포탄(M107자주포)만 비축분을 다 소모하고 미국의 긴급지원포탄까지 사용했을 뿐 105mm 전차포탄의 경우 약 30만 발의 비축분 중 절반 정도를 소모했다고 한다. 단지 급박한 전황 속에서 보급과정이 혼돈에 빠져 급한대로 전방 탄약고들의 탄약들이 우선 일선부대에 공급되어 소모된 후 후방 비축탄들이 보급대의 트럭에 실린 채 원활하게 보급되지 않아 일선부대들이 탄약부족에 시달렸다고 한다.
무엇보다 극심한 소모전을 겪고 나니 세 집 걸러 한 집 꼴로 집안 남자들이 죽어서 돌아오는 끔찍한 경험을 하면서 이때 다수의 이스라엘군 장교와 장군들이 전사해서 '''여단장과 대대장, 중대장이 전사하지 않은 부대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에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된다. 사전에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난여론이 빗발쳐 이스라엘 의회에서는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를 벌였고, 결국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모세 다얀 국방장관은 하루아침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졸장이 되어 사직서를 내야만 했고[25] 그와 더불어 수많은 전쟁 영웅들, 이스라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장성들이 되려 범죄자들로 몰리면서 많은 수의 별이 떨어지고 배신감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난 장성들과 고급 장교들의 수도 상당했다. 이스라엘군에서 가장 미약하고 천대받던 해군만이 라타키아 해전의 승리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중동의 지역강국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믿음이 무너졌으며, 언제든지 전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이스라엘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이는 비교적 온건파인 노동당 내각을 무너뜨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과격파들 간의 난맥상을 낳게 된다. 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은 다시 6일 전쟁 때 처럼 '''외부의 위협이 들이닥치기 전에 예방적으로 선제 공격'''으로 회귀했고, 이는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에서 증명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F-15 전투기를 해외도입국 중 세계최초로 도입하고, 자국 사정에 걸맞는 메르카바 전차를 개발하는 등 무기 도입 과정에서 욤 키푸르 전쟁의 뼈저린 교훈을 대폭 반영했고, 1982년 레바논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시리아군을 격파하며 복수를 단행한다.
한편, 이집트는 놀라운 선전(善戰) 덕에 패하여도 협상 테이블에서 나름대로 당당했다. 일단 이집트는 이 전쟁을 자국이 이긴 전쟁으로 생각한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군이 전투에서는 반격으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략적으로는 시나이 반도 일부(운하 동쪽 30km까지)를 탈환한 이집트군이 승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나이 반도는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인 1977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8년 워싱턴 D.C. 협정으로 완전히 이집트의 손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는 이스라엘 화평 노선으로 외교 정책을 180도 변경했고,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은 이것으로 이스라엘 메나헴 베긴과 함께 78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지만, 1981년 이슬람 과격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리고는 전쟁 중에 활약했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권좌에 앉아 30년간 집권하게 된다.
이는 아직도 골란 고원을 못 찾은 시리아와 비교되는데, 사실 골란 고원의 전략적 가치는 단순한 완충지대인 시나이 반도와는 다른 성격이 있다. 골란 고원을 차지하면 고지대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내려다볼 수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요르단 강의 수원을 차단하여 이스라엘의 목을 죄는 게 가능하게 되기 때문. 단 이 경우 요르단도 같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이스라엘과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한 이집트는 부분적인 승리라 할 수 있지만 시리아는 빼도박도 못하게 완벽한 패배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포기한 것은 시나이 반도를 지키고 유지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인구 부족 탓도 분명히 있었다. 한마디로 땅이 있어도 유지 관리할 인구가 너무나 부족했던 것이다. 1980년 당시의 이집트의 인구는 약 4500만 명이었던 데 반해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390만 명에 불과했다. 이 인구로 이스라엘 땅보다 훨씬 넓은 시나이 반도를 통치할 수가 없었던 것. 인구 늘리려고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여기 유대인들은 당연히 위험한데 오기 싫어하여 거부했다.[26] 동원 병력 또한 차이가 났는데 이스라엘은 예비군까지 포함해서 총력전으로 열심히 긁어모은 병력이 41만 5천 명이었던데 반해 이집트 주도의 아랍 연합군 측은 백만이 넘었고, 이것도 전력을 동원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 없이 이스라엘군만으로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을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27] 이는 이집트가 6일 전쟁 이전 영토를 모두 차지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정전에 합의하자, 이스라엘과 이집트도 협상에 들어가 국경선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6. 영향


제4차 중동전쟁은 여러 가지 일화를 만들었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오일쇼크가 발생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았다.[28] 이때의 오일쇼크로 이스라엘 경제도 큰 타격을 입어서 1970년대 중후반에 두자릿수대, 1980년대 상반기에 '''세 자릿수대 인플레이션을 기록할 정도'''의 경기침체를 겪게 되었다. 특히 1984년 당시의 물가상승률은 445%를 기록하여 기록적인 수준을 보여줬다. 이 탓에 1977년 총선에서 리쿠드가 집권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를 내주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겨우 해결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이미 위력을 보여준 지대공미사일은 여기서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미국에 자극을 주어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부활하는 데에 기폭제 역할을 한다. 또한 이전까지 무적을 자랑했던 전차부대가 대전차미사일에 농락당하면서, 전차 무용론까지 등장할 정도로 군사학계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제기된 전차 무용론은 보병 등의 지원 세력이 없는 전차부대의 단독 공격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이 골자이며, 보병-전차 합동 전술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었다. 또한 전차의 장갑 강화와 정밀 FCS 도입을 골자로 한 3세대 전차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의 당사자인 이스라엘군에서는 단시간에 숙련된 기갑병력이 쓸려나간 뼈저린 교훈으로 주력 전차인 메르카바 전차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메르카바의 특징인 보병 탑승 능력과 승무원의 생존성에 대한 집착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개전당일 이스라엘 공군의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대공전력 중 SA-6에 대한 ECM 미비와 이스라엘 해군의 스틱스 교란 성공은 이후 서방, 특히 미국ECM 및 ECCM 개발 집착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즉, 현대전과 근미래전의 다양한 무기체계 및 전술 개념과 그 효용이 이 전쟁에서 확고해진 것이다.
또한, 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의 여러 아랍 국가들 중에서 유달리 이집트와 과하게 적대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정확히는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크게 위협할 수 있는 세력과의 적대를 꺼리게 되었다. 건국 이래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던데다 환골탈태한 이집트에게 제일 피해를 많이 본 뒤, 이집트만 배제시켜도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월등히 유리해짐을 깨달은 것이다. 거기에 사다트무바라크 정권도 이스라엘과 크게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고 있어, 시나이 반도 쪽은 그나마 평화로워졌다.[29] 2018년 경, 시나이 반도의 다에시를 소탕하기 위해 이집트군이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했는데 이스라엘을 자극할 소지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은 이를 묵인하며 오히려 협력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21세기에 들어 역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 가운데 군사력이 이스라엘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크게 개선하였다. 현재 이스라엘과 무력을 포함한 분쟁을 겪는 국가는 레바논이나 시리아같은 중동 내에서도 군사력이 한 수 아래이거나 혼란속에 빠진 국가들이며 그 이외에는 이란, 이라크, 오만, 쿠웨이트, 기타 북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국경을 맞닿지도 않으며 거리가 멀어 실제적인 군사력 투입이 서로 무리인 국가 정도다.
인구가 적어 전쟁을 수행할 인원이 늘 부족한 이스라엘군이지만 이 전쟁에서의 병력 부족은 여러모로 치명적이었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징병제는 꾸준히 강화되었다. 하지만 여성까지 징병하고 3년 가까운 기간을 청년들을 군대에 붙잡아 놓고 있음에도 이스라엘 사회가 군국주의, 근본주의에 경도되고 보수화, 극우화가 진행되면서 징병이 면제된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가 사회적인 혜택에 힘입어 꾸준히 늘어나고 젊은이들의 군 기피 현상까지 더해지면서 징병 가능 인원이 계속 줄어들자 결국 반발을 무릅쓰고 하레디에 대한 징병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제4차 중동전쟁 전까지만 해도 미국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에 시큰둥했고 오히려 중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트러블메이커 취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미국이 대놓고 이스라엘 편을 들면서 2020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몇 년 뒤 미국의 주요 중동 파트너인 이란팔라비 왕조가 붕괴하면서 더욱 이러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걸프 전쟁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주요 우방이 된 이후에도 미국-이스라엘의 밀월관계(라기보다는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편애에 가까운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친 이스라엘 정책은 이스라엘과 관계가 험악한 중동 주요 국가가 미국을 더욱 혐오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미국의 중동 정책에 운신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 정계에서도 맹목적인 이스라엘 편애와 지원이 얻는 이득(이스라엘과의 관계 유지, 미국 내 유대인의 자본 및 지지 확보)에 비해 손실('''석유''', 중동에서의 외교 전략의 한계, 중동 및 이슬람계 테러 조직의 준동 등)이 크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조금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오히려 더욱 강해진 친 이스라엘 외교 정책을 꺼내들면서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30] 그러나 2020년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낙선하고, 중동 이슬람권과의 관계개선을 주창하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 역시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해졌다.

7. 기타


  • 당시 23살이었던 건축학도 아모스 기타이는 헬리콥터 구조대로 참전했다가 전장을 8mm 카메라에 담았던 것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으며, 훗날 '키푸르'라는 제4차 중동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 골란 고원 전선의 붕괴를 막은 이스라엘군 제77전차대대장 카할라니의 수기 《골란 고원의 영웅들》은 현대 전차전의 실상을 잘 기록한 수작으로 꼽힌다.
  • 톰 클랜시의 소설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는 시리아군의 초기 공세에 밀린 이스라엘군이 조립한 핵탄두가 행정 착오로 CAS 임무에 나가는 A-4 공격기에 장착됐다가[31] 해당 항공기가 격추된 후 20년 만에 테러리스트들이 이 핵탄두를 찾아내어 벌이는 핵 테러가 묘사된다. 같은 제목의 영화판 또한 내용이 비슷하지만 영화를 제작할 당시 9.11 테러의 영향 때문에 이 테러 주체가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리스트에서 네오나치주의자로 변경되었다.
  • 한편 자동차 업계, 특히 미제 자동차들이 이때 큰 타격을 입었다. 배기가스 규제 때문에 차량의 출력이 강제로 떨어진 데다 기름값 폭등으로 V8 엔진이 장착되는 중형차 이상급 미제 차량[32]들은 판매량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다가 곧 이어진 2차 오일 쇼크가 이들을 완전히 조져버렸고 결국 저가 브랜드에서 고가 브랜드까지 플랫폼 하나 돌려가며 디자인만 바꿔서 쓰는 뱃지 엔지니어링이나 하는 차로 전락해 버렸다. 밀려들어오는 일제와 독일제 차량들은 덤.
  • 북한은 이 전쟁 때 이스라엘과 적대관계를 맺고 있는 이집트, 시리아 등에 군사적 지원을 하여서 이집트, 시리아와 군사적 우호증진을 맺게 되었으나 이스라엘과는 영원한 적대지간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북한과 이스라엘은 수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이스라엘의 적대관계인 팔레스타인과 국교를 수립하였고 팔레스타인의 UN 정회원 가입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명하며 이스라엘, 미국 등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반면 이스라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아서 모사드 요원들 역시 북한을 주적국들과 같은 급으로 경계하며, 실제로 대북한첩보 성과도 어느정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북 첩보에 가장 열을 올리는 곳인 대한민국과 협력하여 첩보 성과를 공유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 연속된 전쟁의 영향으로 4차 중동전이 끝난 3년 뒤 이스라엘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랍 적국들의 반발로 인해 AFC에서 쫒겨나다시피 했다. 이후 OFC 등을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는 UEFA에 정착.
  • 이 전쟁에 사용된 M48 패튼M60 패튼(마가크들)은 포탑 구동에 사용된 유압 시스템이 너무나도 인화성이 높았기 때문에 대전차 미사일에 맞기만 하면 승무원이 탈출할 시간도 없이 그냥 불타올랐고 해당 문제로 전차병 손실률이 너무나도 높아서 시체 운반기라 불렸다. 반면 센츄리온 전차(Sho't)는 더 구식이며, T-62가 쏜 날탄이 과도하게 관통력이 강하여 전면장갑을 뚫고도 내부에 피해를 주는 대신 그대로 전차 후면까지 뚫고 나갔다는 경험담도 있을만큼 부족한 방어력이었음에도 한방 얻어 맞는다고 해도 쉽게 차량이 불타오르거나 하지는 않았고 어떤 차량은 하루에 전차장이 다섯번이나 바뀌면서까지 분전하며 겨우겨우 시리아군을 이겨냈다. 마가크들의 이 문제점들은 전후 유압을 인화성이 낮은 물질로 교환하고 블레이저 ERA를 장착하며 해결된다.
  • 이 전쟁 당시 아랍 연합군의 전차들이 탄피를 미친듯이 빠른 속도로 일정히 배출하자, 이스라엘군에서 '아랍이 진짜 달라지기는 달라져서 탄약수도 신급이구만'이라며 감탄을 연발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전차가 신형 전차인 T-62였고, 탄약수가 아닌 장착된 자동탄피배출장치가 잘났다는 사실에 2중으로 놀랐다는 후문이 있다.
  • 10월 14일, 그 형편없던 이집트 공군이 만수라 공군기지 인근 공역에서 MiG-21로 이스라엘과의 대규모 공중전에서 총 17대의 전투기를 격추하고 불과 6대를 손실하는 승리를 거둔적이 있었다. 이때 이집트 공군의 지휘관이 호스니 무바라크였으며, 이 승리는 그가 권력을 차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집트는 지금도 이 날을 '공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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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교의 설날이라 할 수 있는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와 함께 일명 High Holidays라 불리는 유대교 달력의 주요 절기의 하나이며, 일년 중 가장 성스럽게 여겨지는 날이기도 하다.[2] 소련이 이스라엘을 몰아내는 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빡친 사다트는 개전 직전에 소련 고문과 기술자들을 모조리 내쫓아버렸지만, 개전 이후에도 소련제 무기가 이집트에 계속 지원되는 등 소련의 영향력은 이후에도 일정 부분 유지된다. 사실 소련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당시 시대를 고려하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을 자극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3] 단순히 병사들을 막 부려먹는 정도가 아니라, 똑똑해지면 다루기 어렵다면서 교범 교육을 중지시키고 인간 이하의 뭔가로 보며 학대하고 부려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병사 인권이 좋은 편이 아닌 한국군조차 교육을 강압적으로 시키면 모르되 병사들이 자신의 특기에 관련해서 공부하는 걸 두고 똑똑한 놈이 있으면 위험하다며 방해하는 막장 지휘관은 없다(...). 이딴 생각이 장교들의 뇌세포에 자리잡혀 있었으니 이집트군의 전투력이 개판인 것도 당연했다.[4] 1944~2007. 이집트의 전 대통령 나세르의 '''사위'''이며 사다트 대통령의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전쟁 이후 스파이 행각이 드러났으나 처분은 해외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정작 본인은 런던에서 살면서 조국에 가고 싶어했으나 2007년 역사학자들과의 인터뷰를 코앞에 두고 호텔에서 떨어져 죽은 체로 발견되었으며 시신이 이집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5] 이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마르완에 대해 사다트의 기만전술과 연계하여 이스라엘에 양치기 소년식 작전을 시도한 공작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이스라엘(특히 모사드)에서는 최고의 모사드 정보원이었다며 서로 자기네 요원이었다고 싸우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들어지고 유족들 증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꼭 좋아한 것도 아니라고. 나세르가 죽고 찬밥이 되어버린 터에 배신한 것 뿐이라는 말도 많다. 하지만 나세르 사망 이후 찬밥이란 주장은 철저한 거짓으로, 사다트는 집권 과정에서 나세르의 구 측근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정보 책임자로 마르완을 기용하였다.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모사드는 그의 활용 가능성에 주목하였는데 나세르 이후 찬밥이 됐다는 주장은 마르완을 실드치기 위한 사실 관계 왜곡에 해당한다. 뭣보다도 마르완은 나세르가 죽기도 전인 1970년에 이미 모사드에 자기 발로 찾아가서 첩자가 된 상황이었다. 아슈라프 마르완의 이중첩자 여부 논란에 대해서는 2019년작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앤젤의 추락'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앤젤은 당시 모사드에서 붙여준 마르완의 암호명이다.[6] 속죄일은 이스라엘의 거국적 공휴일이며, 이 기간에는 그 어떤 노동행위도 허용되지 않고 금식과 종교적 행사가 주를 이룬다. 심지어 유태인 출신 스포츠 선수들이 욤 키푸르를 이유로 경기를 거부한 경우도 있을 정도.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메이저리그 베이스볼행크 그린버그샌디 코팩스, 숀 그린이 대표적이다. 특히 숀 그린은 메츠 시절 팀이 내리막길을 타고 있던 시기에도 속죄일에 결장을 고집해 극성맞은 그 뉴욕 언론으로부터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 카할리니 중령의 회고록을 보면, 욤 키푸르 당일 개전 소식을 듣고 급하게 부대로 차를 몰고 가는데 길가의 소년들이 욤 키푸르에 뭐하는 짓이냐며 욕을 하고 돌멩이를 던지려 했다고 할 정도.[7] 이때 이집트군은 인구가 적어 전시 동원 체제에 의존해야 하는 이스라엘군의 약점을 역이용, 개전 이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씩 국경지대에서 대규모 기갑훈련을 벌였다.''' 그 결과 이집트군의 침공에 대비해 산업체의 청년들을 징집해야 했던 이스라엘의 경제는 '''그야말로 마비될 지경이었고,''' 결국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본격적 침공 시 전시 동원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이스라엘군이 피로에 지쳐 방심하고 있을 때 이집트군이 본격적으로 선제공격을 한 것.'''[8] 이 외에 이라크, 요르단,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리비아는 당시 최고 장교 중 한명인 칼리파 하프타르도 참전시켰다.)도 지원군을 보냈다.[9] 이때 치명적인 약점으로 이스라엘 공군의 A-4 스카이호크는 RWR이 없었으며, F-4 팬텀 II의 RWR은 신규 장비인 SA-6 지대공 미사일 레이더 주파수가 등록되지 않아 울리지 않았다.[10] 당시 이집트군은 그야말로 맹훈련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군 전차병들의 피해가 더 컸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의 M48 전차들은 유압식 회전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에 미사일 맞으면 '''그대로 불이 붙어 내부 전체를 구워버렸다.''' 거기다가 불 타 죽어가는 전우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무전을 통해 들어야 하는 이스라엘 전차병들의 심리적 타격도 컸다.[11] 당시 이집트 수뇌부도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하고 있었다.[12]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의 전투력을 얕보고 이런 작전을 펼치리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시리아군이 과감히 헬리본 작전을 수행하면서 제대로 허를 찔린 것. 해당 산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이스라엘군이 불과 '''11명 밖에 없을 정도로''' 궤멸당했다. 패닉에 빠진 이스라엘군은 지난 전쟁 때의 아랍 병사들의 추태처럼 '''도망다니거나 그대로 숨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3] 이때 시리아군 전차병들의 숙련도도 크게 상승해서 '''800m 거리 밖의 이스라엘군 전차를 정확히 타격했다고 한다.''' 시리아군 전차병들의 숙련도를 얕보던 이스라엘군 전차병들은 일대 패닉에 빠졌다. 거기에다가 동료 전차들이 격파되면 그대로 후퇴하거나 심지어 장비를 유기하고 도망치던 지난 전쟁과는 다르게 이 때의 시리아 전차병들은 정신 무장도 탄탄하게 되어서 난전에도 굳건히 진격해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보였다.[14] 이때 188바라크 기갑여단의 피해는 '''다른사람도 아닌 무려 여단장과 부여단장이 전사할 정도로''' 사실상 전멸했다.[15] 시리아군은 저항이 거센 요새는 우회하면서 주요 전략 거점을 신속 점령하는 전격전 교리를 구사했다. '''지난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전격전을 그대로 되갚아준 것이다.'''[16] 별로 안 믿기지만, 골다 메이어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에 중도 좌파 출신에 속했다.[17] 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전사자가 2백 명도 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초비상이었다. 이에 이집트군은 전사자 약 3,540여 명, 부상병 8천여 명을 기록하여 피해는 조금 더 컸지만, 종전(從前)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를 이스라엘에게 안겨줬기에 크게 만족했다.[18] 이 내용과 달리 메이어 총리는 워싱턴을 방문하지 않았다. 『Crisis』에서 키신저는 당시 주미 이스라엘 대사였던 심하 디니츠(Simcha Dinitz)가 메이어 총리의 방문, 닉슨과 1시간 면담을 요청해 왔으나 닉슨과 상의하지도 않고 단숨에 거절했다고 밝혔다. 군 최고 통수권자가 긴박한 상황에 하루 이상 자리를 비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메이어 총리가 미국에 있다는 소식이 새어나갈 경우 별 움직임 없이 보고만 있던 레바논, 요르단 등 주변국들도 공세에 가담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원 요청은 주로 디니츠 대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디니츠도 이와 같이 회고했다.[19] 이스라엘 측은 아랍측이 전쟁발발 전까지 온갖 협박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선제공격을 옹호하려 들지만, 국제법상 외교적 모욕이나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개전의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20] 원래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시나이 사막이 가로막는 이집트 방면을 제외하고는 작전 종심이 좁은 편인데다가, 적대적인 국가들로 3면이 포위되어 있고, 현대전에서는 동원령이 먼저 발령되는 쪽이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당한 1차 중동전을 제외하고 이스라엘의 기본전략은 선제공격으로 상대의 전력을 먼저 분쇄한다는 것이었다.[21]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영내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흑인 병사들을''' 포로로 붙잡게 되는데 이들은 '''모로코군이었고''' 이스라엘은 이를 통해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경우 '''아랍 전체+소련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러나게 된다.[22] Kumaraswamy, Revisiting the Yom Kippur War[23] 당연히 데프콘 상향 결정을 내릴 당시의 키신저는 소련이 진짜 개입할지는 알 수 없었다.[24] 이집트측의 선전의 영향을 받아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아는 견해가 존재하지만, 이집트의 목적은 시나이반도를 탈환하는 것이었고, 종전까지 시나이반도 탈환하는데 실패한데다 전사자 수도 이집트가 많기 때문에 욤 키푸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술적 승리'''가 맞다.[25] 다얀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한 것이, 이스라엘 군부 안에서 이집트의 반격에 대해서 가장 진지하게 우려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다얀이었다. 이스라엘 군사정보부 AMAN은 시나이 반도 방어 책임자 만들러 장군의 보고를 비롯하여 이집트와 시리아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계속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슈라프 마르완을 통해 입수한 이집트 작계에 의하면, 이집트군이 충분한 파일럿 없이는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집트군이 치장물자를 꺼내서 배급하는 상황에도 오로지 훈련일 뿐이라고 철저히 무시했다. 다얀은 이집트의 동태에 우려를 표하며 수에즈 운하 동안에서 철수한다는 가장 전향적인 타협안까지 제시하던 인물이었고 전쟁 직전에도 유럽 순방 중이던 골다 메이어의 긴급 귀국을 추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작 정보부의 판단을 수용하고 말았으며, 전쟁 발발 직후 20만명 이상을 동원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5만명의 부분적 동원만으로 사태 대응이 가능하다고 보는 치명적 오판을 했다.[26] 미국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건국과 유지에 큰 지분이 없다. 이스라엘 건국에 가장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한 사람들은 동유럽 유대인들과 미즈라힘,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고, 북미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은 (건국 시점에서) 만명은 고사하고 5천명도 안된다.[27] 미국이 병력과 무기를 이스라엘에 쏟아붓고 있을 때, 소련 역시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를 지원하고 있었다.[28] 오일쇼크는 단순히 경제를 뒤흔든 수준이 아니라, 2차세계대전 전후로 계속되던 고도성장기 시절인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박살내고, 복지국가 정책이 쇠락하고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29] 소련제 무기 일색이었던 이집트군도 미국과의 수교 정상화 이후 F-4 팬텀F-16 전투기에 M1A1 전차들을 들여오는 등 미국제 무기들을 대폭 들여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계심은 여전해 미국에 대한 로비를 통해 이집트에 대한 AIM-120 판매를 제한하도록 해 F-16이라는 우수한 전투기임에도 AIM-7을 운용하고 있을 지경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이집트는 프랑스 라팔 전투기의 MICA 그리고 러시아 MiG-29R-77을 통해 제대로 된 능동 중거리 공대공 유도탄을 갖추게 되었을 정도다. 이집트군 M1A1 사양도 열화우라늄 복합장갑 삭제 등 여러가지 부분이 다운그레이드 된 수출형이며, 당연히 F-35와 같은 스텔스 전투기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로비 외에도 이집트의 독재 정치로 인한 미국 의회 차원의 인권제재에 러시아제 무기들도 운용하고 있다는 특성상 선뜻 미국이 자국의 첨단 무기를 팔기 어려운 점이란 것도 한 몫한다.[30] 트럼프 정권이 다른 때 같으면 그야말로 미국과 이스라엘 모두에 날벼락이 떨어질 만한 이런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사우디와는 나름대로 관계를 개선했고 레바논이나 시리아는 군사력이 약하다. 이란이 이스라엘에 협박을 하고 이스라엘도 지지않고 이란을 자극하지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정면 대결을 막고 있다. 그러니 미국과 이스라엘이 다른 중동 국가들의 속을 긁어 놓을 만한 일을 벌여도 사우디와 이집트만 반발하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중동 산유국의 눈치를 덜 보게 된 이유도 있다.[31] 소설판에선 전황이 너무 불리하자 핵폭탄을 전투기에 장착시키고 조종사와 작전 실무진이 그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지상군이 승리하면서 핵공격 명령도 취소되나 하필 기지에 불시착하던 전투기의 폭발사고로 핵공격 임무를 맡은 조종사 일행이 휩쓸려버리고 일반 폭격 임무를 맡은 조종사가 핵폭탄이 탑재된 전투기에 탑승하게 되는데 출격과 사고 수습에 정신없는 나머지 아무도 핵폭탄의 탑재 유무를 안가르쳐줬고 조종사는 조종사대로 별특징없는 탑재물이 보조 연료탱크인 줄 알고 빨리 출격해야 하니까 그냥 달고 나갔다가 격추당하고 핵폭탄을 분실하게 된다. 나중에서야 이스라엘 지휘부에서 핵폭탄 잊어먹은 줄 알고 난리쳤지만 찾지 못했고. 영화판에선 그냥 핵공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투하하기 전에 지대공미사일에 격추된 걸로 간단히 묘사한다.[32] 말이 중형차지 지금 출시되는 현대 EQ900, 벤츠 S클래스만 한 차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