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중동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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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Six-Day War, June War, 1967 Arab-Israeli War, Third Arab-Israeli War
히브리어:מלחמת ששת הימים
아랍어:حرب 1967, نكسة حزيران, نكسة 67, حرب الأيام الستة
1. 개요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엄청난 영토를 획득했던 전쟁. 6일 전쟁이라는 별명으로 매우 유명하다. 아랍 측에서는 6월 전쟁이라고 부른다.
1,2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국제정세나 여론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세계의 눈치를 많이 보던 상황에서 전쟁 발발 시 UN의 개입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UN이 개입하고 중재하는 순간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따라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UN이 개입하기 전의 단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토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1] . 장기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 언론에서는 이집트군의 가짜 승리를 계속 보도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로운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스라엘의 승전보가 세계에 최대한 늦게 알려지는 것이 도움이 됐기 때문.
2. 배경
제2차 중동전쟁에서 압도적인 패전을 당하고도,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둔[2]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랍세계의 주도권을 쥐고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야심차게 전쟁준비에 나선다. 소련의 군사고문단과 최신 장비를 들여와 전쟁준비에 나서며,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물밑지원하면서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한편, 예루살렘 서안지구를 두고 충돌을 계속하던 요르단 및 골란고원을 거점으로 이스라엘과 무력충돌을 벌이던 시리아 역시 이집트와 동조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역시 아랍국과의 국경선에서 일부러 도발을 걸며 영토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원래 6일 전쟁 이전의 이스라엘 영토는 상당히 작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좁은 영토 때문에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영토 형상의 문제상 임시수도인 텔아비브가 조금만 밀리면, 함락돼서 국토가 양분될 지경이었을 정도로 중부 이스라엘 쪽 땅이 취약했다. 이후 6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얻어낸 땅을 합쳐도 남한 크기에 못 미쳤고, 가장 큰 적인 이집트와의 화해 및 현실적으로 인구문제상 관리가 힘든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현재 영토는 남한의 1/5밖에 안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도발을 행했다. 예를 들어 상호 간에 비무장지대로 합의했던 곳에 경작용 트랙터를 끌고 들어가는 등의 수단으로 아랍 병사들의 선제공격을 유도했다. 아랍 병사들이 경고사격이라도 하는 순간에 국지전으로까지 전투가 확대되는 등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제2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정보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주변국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며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인적자원의 불리함과 좁은 영토 때문에, 장기적인 소모 방어전에 유리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선제타격론으로 대표되는 예방전쟁이 군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실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다. 제2차 중동전쟁인 수에즈 전쟁에서 나세르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으로 크게 패하고도 정치적으로 큰 승리를 얻었다. 때문에 나세르는 이번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시위를 통해 강력한 압박을 줌으로써,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이스라엘의 항구로 향하는 선박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집트 공수부대는 대전차화기, 대공포, 해안포는 배치했지만, 실제 봉쇄에 중요한 기뢰는 전혀 부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이집트의 움직임에 대해서 블러핑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야 조금만 잘못 했다간 지중해 앞바다에 온 국민이 몸을 던져 죽는 수도 있는 판국이었고 주변국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결코 녹록하게 대처할 수도 없었다. 앞선 2차 중동전쟁도 이스라엘에서 나세르가 아랍의 결집을 위해 이스라엘을 제물로 삼을 것이 틀림없다고 이스라엘에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세르는 3차 중동전쟁의 전야는 물론이고 2차 중동전쟁의 전야에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원하던 것은 이집트를 맹주로 하는 아랍의 통합이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이집트군은 예멘에서 벌어지던 왕당파와 살레의 공화파 간의 내전에 정규군 절반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심각한 손실로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3] 또한 당시 공군 원수인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의 무능함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경직된 지휘체계와 무능력한 아메르로 인해, 이집트 공군은 공습으로부터 전투기를 보호할 쉘터 하나도 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압둘 하킴 아메르는 이미 2차 중동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임박했음에도, 모든 보고를 무시한 채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내며 태업을 한 무능의 대명사로서, 그 대가로 이집트는 수에즈 일대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해야 했다. 심지어 이집트의 유능한 장교들은 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을 조사하고 중동전쟁의 대세는 장차 '''선제공격이 될 것이라며''' 이스라엘이 선제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을 가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상부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다 떠나서 나세르는 유대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정신론적, 혈통론적인 우월성을 맹신하면서 결전의 날이 온다면 퇴폐 서구문명에 물든 '겁쟁이' 이스라엘은 허망하게 무너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을 굽히지 않았다.
대(對)이스라엘 압박용으로 시나이 지역에 이집트군을 전개시켜 놓긴 했지만, 이는 블러핑 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과 아랍권 전역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특히 이스라엘을 집중 타격할 것으로 보였던 3국(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들 중에 그나마 이스라엘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요르단으로,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는 대표적인 평화주의자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당시 이집트가 주도했던 언론플레이에 전(全) 아랍권이 광분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친(親)이스라엘적 태도를 취했다가는 정권이 위태로운 처지였다. 요르단군은 이집트군의 전쟁개시에 따라 군사행동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소나마 전쟁준비가 되어있긴 하지만, 실제 이집트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요르단의 준비는 헛된 것이었다. 그리고 시리아군은 쿠데타에 가까운 정권싸움 때문에(…) 이스라엘 공격 (혹은 방어)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러한 시리아군의 태도는 6일 전쟁 발발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초기 이스라엘의 기습을 받고도 언론플레이로 거짓 승리를 보도한 이집트 덕분에 계속 정권싸움을 하고 있었고(…), 이집트군의 패퇴 이후에는 다소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UN에 의한 정전협정이 발효되자 다시 정권싸움을 시작하였다.
이집트 정보부는 해안봉쇄가 시작되며 이스라엘 내부에서 선제타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포착했지만, 이 정보 역시 경직된 조직 탓으로 상부로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튼 형식적이지만 이집트의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여론은 매우 심각해진다. 사실 이집트도 '아랍의 소리'란 라디오 방송으로 중동 여론을 선동하고 있었으며, 이 방송은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멸망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중동과의 협상을 준비하려던 장관이 실각하고, 선제타격론파가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동원령이 내려지기 시작한다.
미국이나 유럽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다만 소련이 문제였다. 소련이 아랍 세력을 지원한다면, 중동의 문제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판국이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소련에게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연막을 치고 있었고, 다른 아랍국가들 역시 자신들의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지난 18년간 불리한 전세를 한 번에 역전시킬 선제타격론 교리가 연구되어 있었다. 만약 개전 48시간 동안 상대의 공군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사막에서의 전쟁은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약 이집트가 먼저 선제타격을 가해 이스라엘의 공군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좁은 영토와 부족한 인적자원을 가진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 될 꼴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망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3. 전쟁의 시작
6월 5일,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4] 레이더 기지의 교대시간을 노려[5] , 이스라엘 공군의 전투기들은 '''사막에서 초저공비행을 하며''' 이집트 방공망을 우회해 주요 공군기지들로 침투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을 자랑하던 이집트 공군에 대해 '''주요 공군기지들에 거의 같은 시간에 동시에''' 기습폭격을 가했다.[6][7] 약 3시간에 걸친 폭격으로,[8] 이집트 공군은 450여 대의 항공기 중 300여 대를 상실하고, 공군기지와 레이더 기지 등을 모조리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단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의 80%를 격파한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이집트 영토를 오가며, 그야말로 이집트군을 초토화시키며 돌아다니게 된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자국영토의 3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 현대전사(現代戰史)의 전설을 만들게 된다.
이집트 육군은 이스라엘군의 번개 같은 진격을 받았다. 당시 이집트군은 나세르의 최측근이었던 압둘 하킴 아메르 공군원수 겸 국방장관이 시리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모든 최전선 지휘관들이 아메르를 마중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야 했고''' 지휘 공백이 있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집트 육군에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제2차 중동전쟁 당시 돌파되었던 구역인 시나이 반도 방면 이스라엘 국경선의 중앙부와 남부에 강력한 병력을 모아둔 상태였다. 이들은 해당 방면으로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들어오면, 반격해서 꺾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좁은 남단부 영토를 관통해서 요르단과 직접 연결한 다음,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이번에는 국경선의 북부에서 강력한 공세를 해서 돌파에 성공했으며, 이후 아부 아게일라 전투에서 패하면서 시나이 반도의 전군이 포위당할 위험성에 빠지자 패주(敗走)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에 도착한 뒤였다(…). 이스라엘군은 공세가 한 번 실패하면 자국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절박감에 고속 공세를 단행했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공세에만 목을 메달았는지 전차 부대의 기동력을 보급이 못따라가자 헬리곱터로 급히 공수했으며 전투식량이 떨어지자 보급을 기다리지 않고 '''장군들도 주스로 떼웠을 정도였으며''' 이집트군 포로가 발생하면 생수 하나 던져준 채 그대로 풀어주고 목표를 향해 기동했을 정도였다. 이집트군 방어거점이 있을 경우 후방 부대에게 소탕을 맡기고 '''그대로 무시하고 진격하는 기동 부대도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소탕에 몰두하다가 시간을 뺏겨 UN에게 저지당하기 이전에 차라리 수에즈 운하 주요 거점을 고속 동으로 선제 장악해 이집트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시나이 반도의 방어병력을 포위 섬멸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삼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는 개전 뒤 1시간이 지난 후부터 요르단군과 이스라엘군의 교전이 발생했다. 서로 예비군을 주축으로 하여 지루한 대치전 양상을 보이다가, 7일을 기점으로 이스라엘군이 전차를 동반한 부대가 강습하며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다. 물론 요르단군은 그 명성답게 가장 정예화되고 훈련도가 높은 군대라,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매우 힘들어했지만, 장비가 부실하고 제공권을 상실한 처지라서 결국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서안에 남은 요르단군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패주하여 요르단강 동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시리아군은 뒤늦게 실전에 참가했는데, 이들은 '''이집트군이 신나게 깨지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이집트군이 자신들이 승리하고 있다는 자체주장을 정말인 줄 알고 참전(…)했다가,[9] 개전 첫날 이집트군을 개박살내고 돌아온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폭격을 당해, 역시 2/3의 전력을 상실하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일부 지상군은 이스라엘 국내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랍국들 간의 상호불신과 지휘체계의 혼란으로 대부분 격퇴당한다. 그러던 와중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더욱 빨리 요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내부 깊숙이까지 진격했다는 거짓방송을 내보냈으나, 국제사회 개입보다는 전선에서 싸우던 시리아군이 그 소식에 먼저 붕괴되어 버렸다. 결국 그나마 끝까지 남아있던 기갑부대가 요르단강에서 수장당하면서, 아예 지상공격을 포기하게 된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박살낸 이스라엘은 마지막 남은 골칫거리인 골란고원 요새에 대한 전면공격을 결정하고 전력을 투입한다.
골란 고원은 해발고도 500m의 바위산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엄폐물도 찾기 힘든 척박한 지역이었다. 여기에 두꺼운 콘크리트 요새를 다중 철조망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에도 시리아군의 병력 상실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은 그 난공불락의 절벽을 전차와 기계화보병이 탑승한 장갑차로 올라가려고 했지만.골란고원은 땅이 자잘히 부서지는 현무암 이라 폭약으로 현무암 바위를 부수고 그 지역을 불도저로 길을 닦으며 올라갔다. 거기다가 엘리 코헨이 상세히 관찰한 골란 고원에 대한 정보들은 이스라엘군의 요새 점령에 큰 도움이 되었다.[10]
시리아군의 지뢰지대와 포격을 버텨 내면서[11] 여단 내 90%의 사상자가 나오면서도 현무암을 부수고 길을 내느라 철조망을 부술 폭약이 모두 소진 되어지자 철조망을 돌파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군은 ''' 그동안 올라 오느라 8명밖에 남지 않은 병력 중 일부가 자신의 몸을 철조망에 내 던져서 자기 몸에 덮어 얼마 안 남은 전우들이 지나갈 수 있게끔 길을 내어 주었고''' 결국 9일 밤 이처럼 이스라엘군의 처절한 진격에 방어선이 뚫리자, 날이 밝기도 전에 모든 병력이 철수해 버렸고 골란고원에 이스라엘 국기가 올려졌다. [12]
이를 지켜보던 골라니 여단의 여단장 요나 여단장은 작전이 실패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란 고원에 이스라엘 깃발이 올라왔고. 이를 망원경으로 보던 여단장은 통곡을 했다고 한다.
시리아의 이러한 졸전과 이스라엘군의 영토 확장 능력에 놀란 국제사회는 즉각 정전을 요구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랍세계에서 서방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한 소련의 압박에 못 이겨 이스라엘은 정전(停戰)에 수락한다. 하지만 소련 내 강경파 군부는 실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군부의 계획대로라면 이스라엘에 소련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예정이기도 하였다. 다만 소련상륙군에 이스라엘의 폭격이 가해지는 즉시 소련의 직접 개입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런 상황이라면 미군 역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즉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13] 실제로 이 계획을 알게 된 소련 수뇌부가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막고 정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사실 소련이 선전하고 다니던 군사압박 역시 아랍권에 대한 립 서비스였기 때문이다.
결국 6월 10일 오후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아랍 3국은 이스라엘군의 전설을 하나 더 만들어줬다.[14]
4. 분석 및 결과
6일전쟁의 발발원인은 실제 이스라엘의 예방전쟁적 성향도 있었지만[15] 이스라엘로서는 이집트(정확히는 나세르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세르는 언론과 군사적 선계공격의 가능성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궁지로 모는 정치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선제공격과 승리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이집트의 군사적 위협은 실제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와 같은 굴욕(?)을 견뎌낸다면, 평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인내는 바로 이집트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더불어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내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나세르 역시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예상도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군의 공세에 이집트군이 어느 정도 방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집트군이 방어를 하는 사이에 국제사회의 중재가 개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제사회의 중재로 정전이 발효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세계에 대한 이집트의 정치, 외교적 선전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니까. 다만 이스라엘군이 예상보다 너무 강했고, 이집트군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능했다보니,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 전쟁은 요르단의 입지가 이스라엘이나 아랍 측 모두에게 크게 상승하는 영향을 주었다. 물론 요르단도 풍요로운 요르단강 서안을 날려먹은 데다가 관광수입 측면에서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상실해서 큰 타격을 입었고, 영토 회복을 위한 모든 노력이 불가능해지는 등의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패전의 와중에서도 끝까지 가장 잘 싸운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제4차 중동전쟁부터는 이스라엘과도 암묵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아랍 측에도 나름대로 군사지원을 하는 등의 양다리를 걸쳐도,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 위치까지 오르게 된다.
이런 위치는 앞서 언급했듯 제3차 중동전쟁 때까지 이스라엘과의 교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아랍 측에게 압박받은 것과는 천지차이로 달라진 것이다. 물론 이걸로 당시 요르단 GDP 40% 이상을 생산하던 요르단강 서부 영토의 상실로 인한 영토 축소 + 경제, 인구의 대손실을 메꾸기엔 너무 손해지만... 지도에 나온 요르단강 서안지구가 1967년에 빼앗긴 요르단 영토다. 골란고원은 돌덩이, 시나이 반도는 사막으로 전략적 요충지지만, 인구, 경제면에선 큰 도움이 안되는데,[16] 이 요르단강 서안 지역 땅은 전략적 요충지 + 경제적 요충지라 이후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집트는 자만심과 독재 체제 특유의 경직된 의사결정 시스템으로 인해 결정적인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련제 무기들을 대량으로 들여와 군사력을 강화한 것은 좋은데 '''이를 아랍 민족주의와 연계해 정치적으로만 활용하려 했었고''',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고 자신만만해 한 결과 이스라엘과 전쟁하면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약점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고 결국 이스라엘군에 제대로 허를 찔리게 된 셈이다.
한편 가말 압델 나세르는 종전 3일 뒤 대국민 방송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하야할 것을 표명했지만, 이후 3주 동안 거리로 국민들이 밀려나와 외치는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아우성에 "그렇다면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다시 복귀하겠다." 고 밝히고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나세르의 정적, 이스라엘, 미국 등은 이 같은 과정을 나세르의 정치적 쇼로 분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방장관 아메르는 패전의 책임으로 실각했으며, 이후 자신의 오랜 친구인 나세르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음독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한다.
그동안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통해 이스라엘을 내려다 보며 공격을 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유일한 수자원인 갈릴리 호수로부터의 상수도 공급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었으나''' 전쟁의 참패를 통해 전략적 거점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균형의 추가 완전히 이스라엘에게 기울여지는 수모를 당했다.
그리고 50년 만에 기밀문서를 공개하면서 이스라엘이 이집트 시나이반도에서 핵폭탄 투하 계획을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쟁 이후인 1967년 11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전쟁으로 인한 점령지에서 즉각 철수할 것을 주장하는 결의안(242호)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결의안을 무시하였다. 현실적인 통치의 어려움이 생긴 시나이 반도를 1981년 이집트 측에 반환한 것을 제외하면[17] 여전히 점령지들(골란 고원,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등)을 자국의 영토로 삼고 있다.
6일 전쟁 당시 텔 아비브는 이스라엘의 임시수도(1948년~1977년)였다. 국운을 걸고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1968년부터 1992년까지 국회의사당과 중앙정부청사와 대법원 및 복지부처와 공안기관(공안부+경찰청+소방청+교도청)과 이스라엘은행을 차례로 이전했다. 그래서 1977년에 이르면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탈바꿈했지만, 국내외의 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여 경제부처와 방위기관(국방부+육군청+해군청+공군청)과 국유기업 및 대사관과 공사관과 영사관은[18] 텔 아비브 시내에 있는데, 최근에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앞장서서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했으며, 과테말라, 루마니아 등 몇몇 나라들이 상당수 국가가 대사관을 인전하거나 고려하는 중이다.
전쟁 도중인 6월 8일에 이스라엘군의 전투기와 어뢰정이 미군 정보수집함 USS 리버티를 공격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이른바 리버티 사건. 이 공격으로 34명이 사망하고 17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함선 자체도 크게 파손당했다. 당시 함장인 윌리엄 로렌 맥고나걸(William L. McGonagle)은 본인도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사태를 수습하고 함선을 살렸다. 이 공으로 맥고나걸 함장은 명예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임무 자체가 기밀인데다, 미국은 이스라엘과의 외교 문제 때문에 이 사건을 은폐해야 했다. 결국 사건은 한참 뒤에야 알려졌으며 일부 자세한 사안은 아직도 비밀로 취급받고 있다. 맥고나걸의 명예 훈장 수여식조차 비밀리에 매우 조촐하게 치뤄야 했다.
전쟁 과정에서 얼마나 이집트군이 속절 없이 털렸는지 '''수백대의 이집트군 전차들이 상태가 온전한 채로 이스라엘군에 노획될 지경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 T-55 전차들을 티란으로 개조해 쏠쏠하게 써먹었다.
5. 관련 문서
[1] 즉, UN에서 슬슬 회의를 열고 이스라엘이 더 이상 전쟁을 못하게 압박할 준비를 할려고 할때 이스라엘군은 목적을 이루고 전쟁이 끝났어야 했다.[2] 모르는 위키러들을 위해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국제 정치는 그렇지 못 했고''' 선빵을 친건 이집트 이지만 언론은 이집트를 선량한 나라가 강대국들에게 침략당한 것으로 비춰져 비난이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으로 향했다. 때문에 기껏 힘들게 얻은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는 등 온갖 불이익을 얻고 정작 이집트는 어느 정도 피해를 복구 되었으며 지도자인 나세르의 정권만 더욱 단단해졌다. 즉, 졌지만 이긴 상황이 되었다. 이는 제4차 중동전쟁에서도 똑같이 발생한다. 이집트는 4차 중동전쟁에서 막판에 전술적으로는 패배했지만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해 시나이 반도를 반환받고 이스라엘과의 국경개방을 달성하는 등 전략적으로 이겼다..[3] 결국 8년에 걸친 내전 끝에, 공화파가 승리하여 왕당파를 몰아내고 북예멘 공화국을 확립하긴 했다만...[4] 이때 철저히 이집트군의 레이더 공백을 찾기 위해 계속 초계 비행을 돌려 이집트 공군기들이 대응을 안하는 공역을 레이더 공백으로 판단하는 꼼꼼함까지 보였다.[5] 모사드는 '''이집트 공군 관계자들의 가족 관계와 레이더병들의 습관까지 조사해''' 기습의 적기를 노렸다.[6] 정확한 기습 공격 시간을 위해 전투기가 고장이 날 경우 '''그대로 추락하라는 ''' 지침까지 있었을 지경이었다. 선두의 전투기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할 경우 공군 전체의 선제공격 계획이 다 꼬여버리기 때문이다.[7] 당시 아메르 국방장관이 시리아에서 전용기를 타고 복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방공 시스템에 대한 발포금지명령이 떨어졌으며''' 상부와 통신망도 끊긴 이집트 방공망들은 이스라엘 전투기에 아무런 대응을 못하다 이집트 공군기와 함께 고철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8] 폭탄을 전부 투하한 이후 미라주 III 전투기들이 계속 이집트 공군기지들을 배회하며 기관포를 난사해댔다. 미라주 III의 30mm 기관포는 이집트 전투기들을 충분히 격파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이집트 공군기들은 이글루도 없이 그대로 주기장에 옹기종기 모여있었기 때문에 한 번 기관포로 긁으면 대여섯대가 연달아서 불나방으로 변했다.거기다가 더 무서운 점은 미라주 III는 델타익이라 저공에서의 실속 위험이 큰 기체인데도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 저공비행을 하며 이집트 공군을 초토화시켰다! [9] 이때 이스라엘군은 아랍 연합군을 격멸한 것을 두고 UN이 조기 개입할까 염려해 되려 자기들의 전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집트군은 이스라엘 공군을 격멸해 이집트 공군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하고 있다는 등 화려한 선전을 계속했다. 나세르도 초기에는 주위 아첨꾼들에게 보고를 받다 보니 제대로 된 전황을 파악할 수도 없었으며, 제대로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이집트 국민들은 그대로 선전방송을 믿고 거리에서 나와 이참에 이스라엘을 짓밟자며 열광했었다. 이러다 보니 시리아를 포함한 전세계 주요 국가들도 전쟁 초기에는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격파하고 있는 줄로 착각했으며 '''당시 한국 언론도 이집트의 선전방송에 단단히 낚였다.'''[10] 6일 전쟁이 벌여지기 몇년 전, 시리아의 기업가 사베트로 위장한 엘리 코헨이 골란 고원을 시찰할 당시 전선의 시리아군 병사들이 더위에 지쳐있는 것을 보고 애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무들을 골란 고원의 주요 시리아군 진지에 제공했다.''' 시리아 군부는 병사들을 위한 그늘막이 제공되었다고 흡족했지만 오히려 독이 되어 '''심겨진 나무들이 진지들의 주요 위치를 이스라엘군에 정확히 알려주게 되었다.''' [11] 이를 피의 등산로로 여겨진다.[12] 지금도 이스라엘군의 최정예 부대인 골라니 여단의 신화 이였다.[13] 가정까지 갈 것도 없이 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배후에 각각 소련과 미국이 지원을 했다.[14] 오죽하면 이때 활약한 모세 다얀 국방장관과 이츠하크 라빈 참모총장이 이런 농담 따먹기를 했다는 전설이 있을까. "심심한데 전쟁 한 판 또 할까?" "글쎄. 그건 좋은데 '''오후엔 뭐하고 놀지'''?" [15] 현대 평가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예방전쟁으로 인정받는 전쟁이다. 그 외 양면전쟁을 펼쳐야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명분을 예방전쟁으로 내세운 경우는 있었지만 이들 경우는 굳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 당연히 침략전쟁이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나 일본의 정한론 등. 물론 예방전쟁이라는 명분만을 대두하여 자체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경우가 아니라, 단순히 동맹국이나 주변국의 전쟁에 참전한 경우가 결과적으로 어떤 일에 대한 예방이 된 경우는 당연히 더 많지만 일단은 아예 전쟁선포의 명분 그 자체가 예방이면서 동시에 그게 후대에도 인정받는 경우는 이 6일 전쟁만이 유일하다.[16] 다만 당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연간 5억 달러라는 알짜 수익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스라엘군에 의해 이게 단절되면서 이집트 경제는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그래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이집트 정부는 외자를 유치해서 원유를 채굴하는 유전의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17] 그러나 사실 현실적인 통치의 어려움보다는 이후 미국의 중재로 친미국가인 이집트와의 외교관계 개선을 위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18] 1980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대사급 외교공관들의 철수를 요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78호'''에 따라 국제사회의 주권국가들 가운데 약 50개국(미국, 러시아, 독일, 체코, 바누아투 등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국가의 정식 수도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