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와르 사다트

 


'''안와르 사다트의 주요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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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대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
أنور السادات
'''
<color=#ffffff> '''이름'''
안와르 엘 사다트
Anwar El Sadat
أنور السادات
<color=#ffffff> '''생몰년'''
1918년 12월 25일- 1981년 10월 6일 (63세)
<color=#ffffff> '''출생지'''
이집트 왕국 미누파야
<color=#ffffff> '''사망지'''
이집트 카이로
<color=#ffffff> '''신장'''
179cm
<color=#ffffff> '''약력'''
이집트 국회의장
이집트 부통령
<color=#ffffff> '''정당'''
무소속
<color=#ffffff> '''종교'''
수니파 이슬람
1. 개요
2. 집권 이전 생애
3. 집권 이후
4. 최후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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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의 군인, 정치가. 제4차 중동전쟁으로 아랍 민족주의 진영의 영웅으로 대접받기도 했지만, 이후 이스라엘과의 화평 정책으로 평가가 엇갈리게 되었으며, 특히 아랍 내에서는 배신자 취급받았다. 결국 자국 내의 이슬람 과격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참고로 누비아 출신이었다.

2. 집권 이전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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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와르 사다트는 이집트의 미누파야에서 가난한 수단계 이집트인 부모의 형제들 중에서 13째로 태어났다. 외모에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는 수단계 흑인이었으며, 아버지는 이집트인이었다. 사다트는 1938년에 카이로 왕립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통신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영국의 지배에 있던 이집트 왕국[1]을 독립시키기 위한 장교들의 독립단에 참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안와르 사다트는 이집트의 독립을 위해 당시 엘 알라메인에 있었던 에르빈 롬멜과 함께 카이로 시내에서 싸우다가, 영국군에게 테러 용의자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총살당하는 신세는 면했지만, 군적을 박탈당한 채 이집트 감옥 내에 있던 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러던 중 1944년에 탈옥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카이로일본 정원에 숨어 지냈다. 그 후 사관학교 동기이던 나세르와 함께 자유장교단을 결성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52년에 파루크 1세를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며 공화정을 세웠고, 쿠데타 당시에 국민들에게 혁명공약을 라디오와 TV로 발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이집트 공화정부에서 1960년부터 1969년까지 국회의장 등의 주요 관직들을 역임하다가 1964년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나세르에 의해 이집트 부통령에 취임하기도 했고, 다시 1969년에 이집트 부통령직에 있었다. 그러던 중 1970년 9월 28일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나세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3. 집권 이후


집권 이후 반대파를 제거하는 동시에, 나세르의 사회주의식 국유화 정책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사다트는 이집트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슬람주의적 관습들을 없애는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1973년 10월에는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동서 양쪽 전선으로 기습, 선제공격을 가하여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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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지휘실의 사다트
이 전쟁은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이집트-시리아 양측 사이에 영토적 변화를 발생시키지 못한 '무승부'로 끝났지만, 전쟁 초반 완벽에 가까운 기습을 성공시켜 한때 이스라엘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기도 했다.[2]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다시 차지하고, 수에즈 운하를 기준으로 동쪽 30km까지의 땅을 획득하게 된다. 이로 인해 당시 이집트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동안 번번이 이스라엘에게 패배만 계속했던 이집트와 아랍 진영에게는 이 정도의 분전도 충분히 의미있는 군사적 성공이었고, 덕분에 이집트와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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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이스라엘 방문 당시의 모습. 오른쪽은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 직후
그러나 제4차 중동전쟁 후에 사다트는 친미 노선으로 외교 정책을 변경했다. 1977년에 이스라엘메나헴 베긴 수상의 초청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고,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까지 하였다. 불과 4년 전 각자의 명운을 걸고 전쟁을 벌였던 적국의 수도를 방문하는 광경이 펼쳐진 것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이집트 사이의 긴장 관계를 풀고 1978년에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그 유명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성공시켰다. 이 합의에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점령했던 시나이 반도를 평화적으로 반환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가 중동 평화의 선구자로 자신을 포장하는 좋은 성과가 되었고, 이 합의로 1978년 메나헴 베긴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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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사다트, 지미 카터,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이러한 대(對) 이스라엘 화평 노선으로 미국 등 서방 진영에게는 '아랍 평화의 선구자'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아랍 진영 내부에서는 팔레스타인을 위시한 동포들을 저버렸다는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다. 불과 몇년 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승리한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이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국내 이슬람교도들도 점차 사다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자유화를 통한 외국 자본의 도입도 사다트 정부가 경제에서 무능한 바람에 오히려 이집트 사회의 빈부격차 심화,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이어지면서 사다트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9년 1월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 혁명이 일어나자 사다트와 친했던 팔라비 2세이집트로 망명했다가 그 후 바레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이 과정에 사다트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슬람 사회에서 사다트가 아랍인들의 편이 아니라며 사다트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졌다.
그렇게 아랍 국가들과 사다트 반대파의 반발이 높아지던 중, 사다트는 1981년 9월 이집트의 나세르 지지자, 지식인, 여성운동가, 공산주의자, 이슬람 원리주의파, 학생운동가, 대학교수, 언론인, 정치운동가들을 급작스럽게 체포하여 독재자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약 1,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이집트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그 사이에 오일 쇼크[3]와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이집트 경제가 나빠지기까지 하자 사다트의 지지율은 갈수록 하락세를 걸었다.
한편 이러한 사다트의 이스라엘과의 화평 노선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여러 아랍 세계 국가들에서도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당시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승인하자 아랍 국가들은 1979년 아랍연맹에서 이집트를 추방시키고(1989년에 복귀) 이집트에 소재하고 있던 아랍연맹 본부를 튀니지로 이전해 버리면서[4] 같은 아랍 국가들로부터도 따돌림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스라엘과의 화해 노선으로 반 이스라엘 노선을 추구하던 아랍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아랍연맹에서 추방당한 이후 사다트 정권 말기에서 무바라크 정권 초기였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까지 이집트에 우호적이었거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국가라고는 같은 언어와 민족, 종교를 공유하는 아랍 국가들이 아닌 모잠비크[5]탄자니아, 잠비아, 콩고인민공화국, 르완다, 카메룬, 케냐, 자이르, 우간다 같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흑인 국가들 뿐이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 및 이스라엘에 대한 정식 국가 승인으로 중동 및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따돌림당하자 우호적인 제 세력을 만들고자 1980년대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행하는 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의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수립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전쟁할 일이 없어지게 되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소총이나 기관총, 폭탄, 군모와 군복, 헬멧 같은 무기들과 군수물자들을 여러 내전 중이던 아프리카 나라들에게까지 대거 팔아넘겼는데 이후 이집트에서 팔아넘긴 이 무기들을 아프리카 내전 국가들의 반군과 정부군, 민병대 세력들이 전쟁터에서 총탄과 포탄을 퍼붓고 살상하며 죽이는 일도 있었다.

4.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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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운명의 퍼레이드에 참석한 육군 장교 예복 차림의 사다트. 왼쪽의 공군 예복을 입은 장교는 부통령이자 훗날 독재자가 되는 호스니 무바라크.

1981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 개전일에 승전 기념 군사 퍼레이드를 관람하던 도중 이슬람 과격파인 지하드 소속의 할리드 이슬람불리 이집트 육군 중위와 다른 3명의 암살범이 쏜 총탄과 수류탄에 맞아 쓰러졌다. 평소 사다트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언젠가 나는 암살당할 것" 이라 늘 주장해왔기 때문에 무려 4중으로 된 경호를 받았으며, 때문에 사다트를 암살하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그러나 암살당한 당일에는 경호담당 장교가 메카 성지순례를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며, 이집트 공군이 축하 비행을 하며 군중들이 축하 비행에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 이슬람불리와 암살범들은 사열 트럭에 숨은 채 사다트에 접근했다. 이슬람불리가 트럭에서 뛰어내려 사다트에게 경례하는 척 하면서 수류탄을 투척하고 자동소총을 발사했다. 처음에는 이집트 국방장관이 수상하다고 했지만 이슬람불리가 경례를 하자 이에 안심한 사다트가 맞경례를 하려고 일어나자 바로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다. 후일 사다트의 조카의 증언에 따르면 사다트는 그 행동을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슬람불리는 "파라오에게 죽음을 안기라!" 고 외쳤으며, 수류탄 3발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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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사건 당시의 모습들
첫 두 발은 불발이었고, 마지막 수류탄은 터졌지만 거리가 미치지 못했다. 나머지 3명의 암살범들은 집중적으로 AK-47을 사다트 쪽에 퍼부었다. 이후 암살범들은 사다트에게 접근해 확인사살을 한 뒤, 이집트의 외무장관과 기념하기 위해 온 아일랜드 국방장관과 4명의 미군 관계자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암살범들들을 체포하기 위한 총격전에서 쿠바 대사와 콥트 정교회 주교를 비롯한 10명이 추가로 사망하고 총 28명이 부상당했다. 암살범 4명 중 한 명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이슬람불리를 포함한 3명은 부상을 당한 채 체포돼 후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사다트는 병원으로 황급히 옮겨졌으나, 이미 치료를 받기 전에 사망한 상태(DOA)였다. 저격범인 이슬람불리는 체포된 후 국가원수를 살해한 죄로 1982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슬람불리는 독재자를 죽였으니 좋은 일 한거라며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당시 부통령이자 제4차 중동전쟁 당시 공군 장성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도 이때 손에 총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죽음은 면했다. 이후 호스니 무바라크가 후임 이집트 대통령이 되어 무려 30년 동안 집권하였는데,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이어진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로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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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트의 장례식에 참석한 미국의 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프랑스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이스라엘, 서독의 지도자들.
사다트의 장례식은 세계 각국의 귀빈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의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미국 대통령들과[6] 이스라엘, 서방 국가들,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상들이 참석하였으나, 사다트를 싫어했던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요르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저격범인 이슬람불리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웅으로 떠받들었고 사다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였다. 소련의 경우 사다트의 죽음을 애도하기는 했는데, 당시 두 나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던 관계로 주요 인사는 파견하지 않았다.[7]
사다트자 다음에 유대인들은 "과연 미개한 아랍인, 우리 유대인은 아랍인과 손잡았다는 이유로 지도자를 죽이지 않는다!" 라고 비웃었으나, 야세르 아라파트와 회담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1995년에 하레디 유대인 청년인 아미르 이갈이 쏜 총에 살해당하면서 셀프디스가 되었다(...). 이갈은 20년 넘게 복역하며 살아있고 복역 중 온갖 성금도 받아가며 사식도 자유롭게 즐기고 산책도 나가서 하고 심지어 결혼해서 아들까지 얻어서, 아랍에서는 지도자를 죽이고 사형도 못 시키는 얼간이 유태인들이라고 비웃고 있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국가지도자를 죽인 자를 죽이자고 의견이 많음에도 하레디들이 영웅시하는 통에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8]

5. 평가


헨리 키신저는 사다트에 대해서 이츠하크 라빈과 더불어 평화에 대한 신념과 비전을 가지고 있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사다트는 죽었지만 그가 불러일으킨 영감은 꺼지지 않는다고 자신의 저서인 <세계질서>에서 크게 고평가했다.
아랍에서는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을 팔아넘긴 배신자라는 비난이 있지만, 반대로 '영리한 사다트가 이스라엘을 안심시킨 다음에 한 10년 동안 힘을 더 길러서 끝장내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깝게 죽어서 이루지 못했다' 는 식의 음모론도 있다. 효종이 북벌 계획 하루 전에 사망했다'라는 야사와 비슷한 얘기.

[1] 당시 이집트는 말이 독립국이었지 사실상 영국의 허수아비였다.[2] 전쟁 후반기에 이스라엘이 반격을 성공시켰기에 망정이지, 만약 계속 밀렸을 경우 이스라엘은 최후 수단으로 당시 비밀리에 개발해 둔 핵무기까지 동원할 계획이었다고 전해진다.[3] 이집트도 석유가 나오기는 많이 나오지만 이집트 인구가 많은데다가 석유의 품질이 좋지 않고 정제할 기술력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입해야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오일 쇼크 때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 아랍 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등의 걸프 만 국가들과 알제리, 리비아 등은 엄청난 이득을 봤는데 비해 이집트는 별로 이득을 보지 못하였다.[4] 이집트가 다시 재가입하면서 현재는 카이로로 다시 돌아왔다.[5] 이집트는 나세르, 사다트 정권 시절이던 1960, 70년대에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하려고 포르투갈군과 독립전쟁을 벌이던 모잠비크를 지원했다.[6] 당시 대통령이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참석하지 않은 대신, 세 명의 전직 대통령들에게 에어포스 원을 빌려주어서 타고 가도록 했다.[7] 1970년대 후반에 사다트 대통령은 이집트 내의 소련 기술자들을 추방하는 등 반소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이집트와 소련은 사다트가 죽을 때 까지 앙숙으로 지냈다.[8] 이스라엘은 사형제 폐지 국가이다. 그러나 정작 팔레스타인인들이나 반정부적인 인물들을 온갖 고문으로 죽이는 경우가 수두룩하기에 말만 사형 폐지국이라고 비웃음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