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마드 나지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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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e0000>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대통령'''
'''본명'''
'''모하마드 나지불라(파슈토어·페르시아어: ډاکټر نجيب الله)'''
'''출생'''
'''1947년 8월 6일 아프가니스탄 왕국 카불'''
'''사망'''
'''1996년 9월 28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카불'''
'''국적'''
'''아프가니스탄''' [image]
'''부족'''
'''파슈툰족'''
'''직업'''
'''정치인'''
'''학력'''
'''카불 대학'''
'''배우자'''
'''파타나 나지브'''
'''종교'''
'''수니파 이슬람'''
'''정당'''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경력'''
'''제2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1987 ~ 1992)'''
'''자녀'''
'''3녀'''
1. 개요
2. 생애
3. 최후


1. 개요


아프가니스탄 공화국대통령이자 독재자.
1987년 9월 30일부터 1992년 4월 16일까지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직을 역임하였다.

2. 생애


모하마드 나지불라는 1947년 8월 6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한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 최대 공산주의 좌익계 정당이었던 인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75년 카불 대학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나지불라는 의사 일을 하면서 인민민주당 당원들과 교류하였다. 1978년 인민민주당과 군부내 좌익계 군 인사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후 나지불라는 새로 수립된 인민민주당 공산 정권 아래에서 하위 관리직을 맡게 되었지만 부정부패 혐의를 받게 되면서 국외로 망명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나지불라는 다시 귀국했고, 소련군의 침공 아래 새로 성립된 친소계 바브라크 카르말 정권 하에서 비밀경찰 국장 하위 직급인 정치국 고위급 관리로 승진했다. 1986년에는 인민민주당 당수직을 맡게 되었다. 1987년에 카르말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나지불라는 카르말의 뒤를 이어 아프간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나지불라는 9월 30일 정식으로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편 대통령이 된 나지불라는 국호를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으로 변경하고, 사회주의식 경제 체제를 버리고 일단의 시장 경제 체제를 아프가니스탄에 도입했다. 그리고 1978년 공산 정권 출범 이래 사실상 내전 상황에 놓여있던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한 정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국 내 여러 비공산 정치 세력들과 무자헤딘 반군 측에게 인민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치 철폐와 연합 정부 수립 등 일단의 유화 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무자헤딘 측은 이러한 나지불라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나지불라의 유화 정책은 실패로 끝났고 결국 정권에 비교적 협조적이고 무자헤딘에게 적대적인 일부 비공산주의 세력들만이 나지불라 정권에 참여했다.[1]
그러던 1988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래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었던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 철수를 시작하면서 나지불라의 운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한다면 아프가니스탄은 끔찍한 피바다가 될 것이라며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아프간 철군 계획을 비난하며 철회를 요청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더라도 현 아프간 정부에 대한 무기 지원 등은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라고 나지불라를 설득했고, 그에 따라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에도 나지불라는 이어지는 소련의 지원 아래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련이 두고 간 전투기, 전차, 미사일 등 막대한 무기들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련의 지원 아래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에 대한 강력한 진압 작전에 나서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편 무자헤딘 반군과 나지불라 정부군 간 내전이 진행될 무렵, 나지불라는 무자헤딘 세력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갖가지 심리전을 벌였다. 이슬람주의를 이념으로 삼는 무자헤딘 반군들을 흔들고 국민의 민심을 정부 편으로 돌리기 위해 직접 이슬람 사원을 찾아가 예배하는가 하면, 자신의 권력에 이슬람교 지도자들을 어느 정도 끌어들이기도 하고, 자신은 이슬람교를 적으로 돌리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자국 내 이슬람 세력들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적대 세력인 무자헤딘 내부에서 반군 간의 내분이 일어난 사실도 간파하여 1989년 잘랄라바드에서 나지불라의 정부군이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된 무자헤딘을 상대로 승전을 거두기도 했고, 무자헤딘 진압을 앞세우면서 한편으론 무자헤딘에게 평화회담을 제의하거나 또는 무자헤딘 병사에게 항복, 귀순을 권유하여 투항한 무자헤딘 반군을 정부군 소속 민병대로 편입시키는 등의 삼중 전략도 사용하여 무자헤딘 세력들을 압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자헤딘과 나지불라 정부군 간 무력충돌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나지불라 정부에 불만이 있었던 일부 정부군 장교들이 1990년 3월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나지불라는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내전이 장기화되고 사회불안이 가중되자 나지불라는 군대의 힘을 빌어 강압적인 권위주의적 독재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정부군의 민가 약탈 등의 만행들과 무자헤딘을 잡기 위한 공군기의 지상공격으로 애꿎은 민간인들이 죽고 다치면서 국민들은 나지불라 정권을 비난하였고, 민심을 얻지 못한 나지불라 정부군은 여러 전투에서 무자헤딘에게 패퇴에 패퇴를 거듭했으며, 정부군 내부에서도 군에서 탈영하거나 무자헤딘 쪽으로 투항하는 병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1991년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이어져 오던 나지불라 정부에 대한 지원마저 끊겨 나지불라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1992년 4월 무자헤딘이 수도 카불에 대한 대대적인 대공세에 돌입하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카불에 있는 국제연합(UN) 구역으로 달아나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나지불라는 국외로 달아나려고 해외 망명 시도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3. 최후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뜨리고 카불을 장악한 무자헤딘의 우두머리였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과거 내전을 벌이던 적군의 우두머리였지만 그가 한 때 아프가니스탄의 전 대통령이었음을 고려해 나지불라를 보호했다. 한편 정권을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무자헤딘 지도부 인사들은 나지불라와 나지불라의 전임자였던 바브라크 카르말[3]과 모하마드 아슬람 와탄자르 등 옛 친소련 정권의 전직 대통령들과 정부군의 고위급 장성들을 전범으로 기소, 처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마수드 등 당시 일부 온건파 인사들이 이를 반대했다.[4] 동년 5월 아프가니스탄의 부르하누딘 라바니 대통령은 나지불라, 카르말 등 옛 친소 정권 시기의 전직 대통령과 정부군 장성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면서 나지불라는 무자헤딘 정권 아래에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탈레반 세력이 급성장하자 마수드는 카불을 내줄 수밖에 없었고, 마수드는 나지불라에게 같이 피신할 것을 권했으나, 파슈툰족이었던 나지불라는 탈레반도 대부분 파슈툰족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카불에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였는데, 탈레반은 1996년 카불을 장악하자 파슈툰이고 유엔이고 뭐고 없이 나지불라를 보호구역에서 끌어내 잔인하게 처형했다. 나지불라는 거세당한 후 거리를 끌려다니다가 목 매달려 죽었는데, 비록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지만 당연히 이런 처형은 이슬람권에서도 비난 성명을 낼 정도로 잔인했고, 탈레반 내에서도 "저런 건 알라의 뜻이 아니다"라고 인정했을 정도. 당시 탈레반의 카불 점령을 보도한 국내 모 군사 잡지에 조리돌림당하는 나지불라의 시신 사진이 실린 적이 있다.


[1] 근데 이마저도 인민민주당 세력들이 다수석을 차지하였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2]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국제적으로 소련의 괴뢰국으로 인정되고 있어서 어느 국가도 나지불라의 망명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3] 그래도 이 사람은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기 훨씬 전에 아프가니스탄을 나가 러시아에서 사망해 나지불라처럼 맞아 죽지 않았다.[4] 사실 무자헤딘 역시 1980년대 소련과의 전쟁이나 1989년 소련군 철수 이후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나지불라 정부군과의 내전에서 민간인 학살과 가혹행위, 정부군 포로에 대한 일방적 사살이나 학대와 같은 전쟁범죄들을 자행하던 전적이 있었기에 이들도 전쟁범죄의 책임에서 그렇게 자유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