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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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158호'''
'''문무대왕릉'''
文武大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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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분류'''
유적건조물 / 왕실무덤 / 고대
'''면적'''

'''지정연도'''
1967년
'''제작시기'''
통일신라
'''위치'''


1. 개요
2. 해중왕릉(海中王陵)
2.1. 알려진 역사
2.2. 1967년 첫조사: 바위 밑에 유골함이 있다?
2.3. 2001년 재조사: 바위 밑엔 아무것도 없었다
2.4. 그러면 왜 이곳을 조성했는가?
3. 무속 관련
4. 인근
5. 미디어
5.1. 교통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대종천 봉길해수욕장 맞은편 동해 바다에 있는 작은 바위섬으로, 신라 문무왕왕릉으로 유명하다.
기록과 대조해 감은사지나 이견대 등의 용도, 구조 및 위치로 보아 대왕암이 바로 승하한 문무왕을 장사지낸 문무왕릉임은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래에 있는 논란들은 문무왕의 화장한 유골을 뿌린 산골처인가, 아니면 유골함과 부장품이 지금도 안에 들어있는 수중릉인가에 대한 논란이었고, 전자라고 해도 이미 신라 당대부터 윤회해 동해의 이 된 문무왕이 있는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실상 왕릉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사적 제158호. 일명 대왕암(大王岩), 대왕바위라고도 한다.

2. 해중왕릉(海中王陵)



2.1. 알려진 역사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뒤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안장하면 이 되어 침입해 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고 유언하고는 재위 21년(681)에 사망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서 장사하였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해 인근에 왕사(王寺) 감은사를 세우고,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까지 파 놓았는데 이 수로가 동해 바다로 이어져[1] 대왕암으로 직결된다. 신문왕이 만든 전망대(이견대) 역시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장소에 있다. 이 대왕암은 오랫동안 '댕바우(대왕바위)'라 하여 문무왕의 왕릉으로 알려졌고, 해녀들은 이 근처를 신성시해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왕암이 한때 잊혀져 있던 걸 후술할 1967년에 '발견'했다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미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고유섭이 발표한 <경주기행의 일절>에서도 '모름지기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아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라'고 할 정도로, 이미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적이란 건 알 만한 사람들한텐 모두 알려져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방문객이 꾸준히 있는 그런 관광지는 아니라서 1970년대까지 대왕암 앞은 지금과 달리 인가가 하나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말 그대로의 '동해 바다'였지만,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밤에는 참배객들이 마치 약속된 시간인 것마냥 기도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2.2. 1967년 첫조사: 바위 밑에 유골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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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16일자 한국일보 보도에 실린 문무대왕릉 바위 아래의 구조 모식도.[2] (출처: 신동아)
1964년 10월 24일, 한국일보는 문화재청과 함께 신라오악학술조사 사업을 통해 문무왕릉에 대해 조사하다가 문무왕릉이 현재의 대왕암 바위라는 것을 알아내게 된다. 그리고 조사를 하게 되는데 이곳이 문무왕의 장례지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조사를 하게 된다. 정영호 교수를 포함한 3명의 학자들은 그 당시 대왕암까지 조각배를 타고 가서 대왕암 내부 웅덩이에 들어가 장대를 쑤셔 그 복판 바윗돌 밑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조사 성과를 토대로 조사단이 그린 대왕암 내부 모식도가 5월 18일자 한국일보 5면에 실렸다. 여기서 조사단이 그린 모식도에는 바위 밑에 유골상자와 부장품을 담은 같은 석함이 있다.

대한뉴스의 1967년 당시 문무대왕릉 발견 보도
당시 조사단 중 한명인 정영호 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1967년 5월 15일 오전 10시에…필자는 김원룡·김기웅 선생님과 함께 해중 능역(陵域)에 들어가 3t 무게의 복개석(覆蓋石) 밑에 용혈(龍穴)이라 칭할 수 있는 큼직한 암혈(巖穴)이 있음을 확인하여 길이 6m가 넘는 대나무 장대가 다 들어가도 모자람을 알게 되었다. 5월 중순 동해수(東海水)는 역시 냉기로 몸이 떨렸으나, 흥분된 1시간의 작업을 끝내고 나니 오히려 훈기가 들었다.

이 조사 내용대로라면 바위 아래 공간이 발견이 되었기에, 대왕암 내부 복판 바닥에는 관이나 유골상자를 안치할 시설을 안치하기 위한 홈을 파고, 그 위를 복개석이라 칭한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덮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의견만 본다면 대왕암은 물속에 유골을 모신 수중릉의 개념과 일치한다. 당시에는 현재의 최신장비가 없어 주변을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조사했는데, 그 결과 바위 아래에 어느 정도 틈새나 공간이 있음을 알고는, 바위 아래에 유골과 부장품을 모신 공간이 있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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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을 위에서 본 모습 모식도 (출처: 신동아)
위에서 보면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 방향으로 십자 형태로 수로를 조성했음이 특징이다. 이는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의 산치대탑이나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하듯이 불탑 또는 승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수로의 한가운데 해수면 약간 아래에는 마치 석관 뚜껑이나 고인돌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위인 복개석(뚜껑돌)이 있다.
하지만 대왕암이 문무왕의 화장한 유골을 장사한 안장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공조성된 해중왕릉(수중왕릉)이 맞는가 하고 의문을 품는 의견도 있었다. 황룡사, 감은사 등을 발굴했던 조유전이 쓴 <발굴 이야기>(1996년)에는 감은사를 발굴하는 도중 황룡사의 종이 대종천 근처에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 대왕암 근처를 조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993년) 등을 인용하며[3] 대왕암이 해중왕릉이라는 것은 아직 명확한 사실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감은사 종을 수색하면서 대왕암의 관 같은 뚜껑 돌을 들어올릴 수도 있었지만, 신비를 보존한다는 차원에서 들어올리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고 적었다.
사실 현재의 대왕암은 온전한 형태는 아니다. 증보문헌비고에 인조 15년(1637) 10월 유전이나 가스전의 징후로 추정되는 땅불로 대왕암이 불타 바위가 일부 부서졌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경주 바로 옆인 울산 앞바다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가스 자원을 채굴하는 가스전이 있다.

2.3. 2001년 재조사: 바위 밑엔 아무것도 없었다



역사스페셜의 대왕암 조사 내용을 요약한 KBS 영상[4]

역사스페셜의 대왕암 조사 내용 풀 버전[5]
2001년 KBS 역사스페셜이 지리학자들과 함께 최초로 대왕암을 직접 탐사했다. 역사스페셜 팀과 지리학자 조사단은 대왕암 십자수로의 끝을 모래주머니로 막은 후 양수기로 물을 빼내어 대왕암 한가운데에 있는 바윗돌인 복개석을 비파괴검사로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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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사해보니 복개석은 석관 뚜껑이나 덮개돌이 아니었다. 그냥 약 20톤 정도 되는 거대한 바윗돌이었고, 복개석 아래에는 부장품은커녕 '''유골상자나 사리함 등을 묻은 공간이나 흔적조차 없었다.''' 저 바위가 놓인 땅은 부드러운 흙층이나 모래층이 아니라 주변 암초의 일부이자 엄연한 암석층인지라 도저히 파내려야 파낼 수가 없는 구조였던 것. 결론적으로 바위 안이나 바위 밑에 부장품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1960년대 신라오악조사단은 왜 바위 밑에 유골상자와 부장품을 모신 공간이 있다고 추측했을까? 바위 아래가 절리층인지라 쩍쩍 갈라진 틈새가 많은 암석층이어서였다. 위에서 적었듯 당시에는 비파괴검사 장비 등 최신식 장비들이 전무한 상황이어서 바위 아래를 막대기로 쑤셔가며 조사했는데, 하필이면 막대기에 바닥 틈새 공간들이 잡혔고, 이 당시에는 틈새를 유골상자와 부장품을 모신 공간으로 오인한 것이다.
기록상으로도 문무왕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뼈를 갈아 장사 지냈다고 여러 번이나 기록해놨기에 유골이 발견되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

2.4. 그러면 왜 이곳을 조성했는가?


한편, 2001년 때 조사 당시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현재의 복개석인 그 바윗돌은 대왕암에서 자연적으로 떨어져 틈새에 끼어 있었을 텐데, 그 바윗돌을 석공들이 밀어 꺼내어 대왕암 중심에 갖다놓았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2001년 조사 때 대왕암의 십자형 수로와 대왕암 안쪽을 인공적으로 깎아서 다듬은 흔적까지 발견되었다. 바닷물이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빠져나가는데,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서쪽 수로를 깎아서 동쪽 수로보다 더 낮게 만든 흔적이 나왔다.[6] 대왕암의 안쪽도 툭 튀어나온 부위를 정으로 깬 흔적이 있었다.
유골이나 부장품을 안장하지 않았다면 왜 신라 왕실은 석공들을 시켜 대왕암을 다듬고 정리하는 수고를 했는지 의문이 남는데,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 대왕암을 아예 문무왕을 기리는 정식 성지로 만들고자 바닷물이 잘 드나들고 흉한 부분이 없도록 외양을 다듬었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즉, '''문무왕을 제대로 추모할 수 있는 허묘(墟墓)[7]를 해중릉식으로 제작'''한 셈이다. 대왕암에 문무왕의 유골이 안장되지는 않았더라도, 문무왕이 살아 생전에 관계가 깊은 장소이고[8] 신라 왕실에서 대왕암을 추모공간으로 삼고자 작업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학설을 정확히 말하자면 문무왕의 유골을 산골하여 대왕암에서 뿌리긴 하되, 그래도 왕의 장례이다 보니까 아예 일반 사람들이 화장 장례 치르는 것같이 화장한 재를 바다나 강물에 뿌리듯 할 순 없어서 나름의 추모공간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수로에 바닷물이 조금이라도 더 잘 드나들게 만들고, 암초 사이에 끼어 있던 커다란 바윗돌을 십자수로 아래에 밀어 넣어 현재처럼 수로 가운데에 바윗돌이 놓여진 모습으로 정리한 다음 나머지 부분들을 다듬고, 조성 작업이 완료된 후에 그 위에서 화장한 문무왕의 유골가루를 뿌리는 절차 장례를 엄숙하게 치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왕암은 '''문무왕의 유골함이나 부장품은 없지만, 문무왕을 기리는 추모공간이자 사적으로서 '해중왕릉'의 의미는 여전히 충분하다.'''

3. 무속 관련


예부터 영험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인지 오늘날에도 이곳에 가면 제를 올리는 무속인들이나 대왕암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적잖이 볼 수 있다. 아예 캠핑카처럼 트럭에 가재도구를 싣고 와서 장기간 기도하며 상주하는 무속인도 있다. # 문무왕이 동해의 수호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 말로는 전국에서 소위 '기도빨'이 1위인 곳으로 무속인들 사이에서 여겨진다고 한다.
하지만 몰상식한 관광객이나 치성을 올리고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고 가는 무개념 무속인들 때문에 계룡산과 마찬가지로 이들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온다. 계룡산은 그나마 단속을 많이 해서 좀 줄었지만 여기는 지금도 종종 대왕암 맞은편 해변을 찾아보면 크고 작은 기도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띄고, 심지어는 썩은 돼지머리까지 굴러다니는 경우도 있다.혐짤주의 이런 짓은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많은지라 제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치성을 올리는 게 아니라 간소하게 차리고 경만 읽고 가는 이들도 많지만, 모든 무속인이 다 경 읽는 법사인 것도 아니고, 무속인들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중앙교단도 없는지라 그저 관리 인력만 고생할 뿐이다.
2020년 6월, 경주시가 문무왕릉 주변을 정리한다고 발표를 했다. 경주시는 이 일대가 문화재보호구역인 만큼 문화재위원회 승인을 거쳐 오는 2026년까지 220억원을 들여 사업을 마무리 할 계획이라고. 역사광장, 비석공간, 해양역사문화관을 만들어 문무대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인근 이견대와 감은사지로 이어지는 보행탐방로롤 만들며, 위에 적은 무속행위 역시 금지하거나 놔두는 게 아니라 해변 남쪽에 무속인의 공간을 아예 따로 조성할 것이라고 한다. #

4. 인근


이 곳은 근처의 감은사와 관련이 있는데, 동해의 해룡이 된 문무왕이 감은사 금당으로 들어갈 수 있게 바다에서 [9] 물을 끌어와 감은사 금당 밑까지 연결해서 인공 못 위에 건물을 지었다. 또한 감은사지 석탑 내부에서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가 각각 발견되었는데 이 사리함 내부의 사리가 문무왕의 것이라는 견해도 꽤 지지받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아들 신문왕이 만든, 문무대왕릉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정자 이견대가 있다. 감은사와 이견대는 거리상으로는 걸어서 갈 수도 있지만 거리가 서로 애매하게 떨어져 있다. 경주 동부 해안가가 같은 경주 안이라도 경주 중심가에서 매우 떨어져 있고 범위가 넓기 때문에 문무대왕릉 근처, 감은사지 +읍천 주상절리 지형[10]을 하루는 잡고 보는 것이 좋다.
관광 외 순수 해수욕 목적으로 문무대왕릉을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지만(...) 대왕암 앞 해변은 일반(나급) 해수욕장인 봉길해수욕장이다.
사실 야산에 가려서 안 보이지만 구글 지도 등을 확인해보면 코앞에 월성 원자력 발전소도 있다. 울산, 양남쪽에 여기로 올때 터널을 거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도로 자체도 해안가를 한참 따라가다 갑자기 내륙으로 꺾어져있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못보게 될 수 있다.

5. 미디어


앞서 서술했듯이 대왕암이 문무왕이 살아 생전에 관계가 깊은 바위섬이라는 학설에 착안을 하여, 일부 역사 창작물에서는 대왕암 자체가 문무왕이 생전에 추억이나 체험을 간직한 장소로 각색되기도 한다. 가령 문무왕이 태자 시절(어릴 적) 주변에서 수영하며 놀던 추억의 바위섬이라거나 또는 젊은 시절에 올라가 바다 풍광을 구경하며 깨달음을 얻은 인상깊은 바위섬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의 창작과 각색을 곁들이는 것이다. 그런 창작물 중에서는 문무왕이 젊었을 때 대왕암에서 정말로 용을 만나고 그 덕에 자신도 사후에 호국대룡으로 환생하겠다고 마음을 다진 스토리도 있다.
KBS의 사극 대왕의 꿈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서는 문무왕(이종수)이 등장 인물들과 함께 해변가에서 말을 달리며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는데 그 해변이 바로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경주 대왕암 해변가이다. 대왕암이 문무왕의 추억의 장소라는 창작 클리셰를 살짝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게도 일본 만화 공작왕에서 나온다. 주인공 공작이 필요한 것이 봉인되어서 이 곳으로 온다. 헌데 여기에 도착하자 정체모를 용이 나와 막는데 공작의 주술을 죄다 막아낸다. 알고보니 여길 지키는 노인이 주술로 변신한 것.

5.1. 교통


문무대왕릉을 통과하는 경주 시내버스 노선은 총 2개 노선이다.
150번 - 60분
160번 - 1일 8회[11]
150-1번 - 4회
경주터미널 → 문무대왕릉: 150번, 150-1번
경주역(시내) → 문무대왕릉: 150번, 150-1번
보문단지 → 문무대왕릉: 150-1번
앞서 언급했듯 경주 시가지와 거리가 상당하며 오히려 울산에서 접근하는게 더 편하다. 울산에서 701번을 타고 양남에 내려 160, 150번으로 환승하면 된다.
[1] 지금도 대종천 강물로 이어지긴 하지만,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퇴적이 되어 그렇지 신라 때는 감은사 앞까지 바다가 들어와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2] 저 때에는 바위 아래에 문무왕의 유골을 담은 석함(유골상자)이 있었다고 생각하여 저렇게 작성했다는 점을 감안하고 보도록 하자.[3] 유홍준도 역시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4] 역사스페셜의 전체 내용은 아닌 요약한 내용이긴 하지만, 중요한 내용들은 거의 들어 있으니 파악하는 데는 문제 없다.[5] 과거엔 역사스페셜의 내용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게 해놓았기에 우회해서 보아야 했었다.역사스페셜 대왕암 관련 회차 전체내용 현재는 다행히도 KBS 역사그날 채널에서 과거 했던 역사스페셜 회차들을 차근차근 복각하는 모양이니 참고해 보면 좋을 것이다.[6] 대왕암은 동해바다에 있다. 즉 동쪽이 동해 쪽이고 서쪽이 뭍 쪽이므로, 파도 역시 동쪽 바다에서 서쪽 육지 쪽으로 친다. 그러므로 서쪽 수로가 더 낮아야 물이 잘 빠져나간다.[7] 시신이 없는 묘소. 가묘(假墓) 또는 단소(壇所)라고도 한다.[8] 그래서인지 일부 역사 기반 창작물에서는 아예 대왕암을 어릴 적 또는 젊은 시절 문무왕의 추억이 깃든 장소라는 스토리를 덧붙이기도 한다.[9] 감은사 바로 앞까지 바다였음이 확인되었다.[10] 오랫동안 군부대 내에 있다가 2009년에 민간에 개방되었다.[11] 감포-울산 시외버스 대체노선, 양남에서 울산버스 701번과 연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