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1. 개요
2. 상세
3. 명칭
4. 용도와 제작법
5. 한국의 고인돌
5.1. 출토되는 유물
6. 대한민국
6.1.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7. 종류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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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olmen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초기 지배층의 무덤 역할을 하기 위해 세워진 석재 구조물의 일종이다.
거석(巨石)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유럽아프리카는 기원전 5천 년-기원전 4천 년, 동아시아는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수백 년 전후에 건설했다고 추정한다.[1]

2. 상세


농경이 도입되어 계급분화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었다. 수십 톤이나 되는 거대한 바위를 많은 인력을 동원해 옮겨서 짓는 방식이기 때문에 대개는 지배층의 무덤으로 사용되었으나, 한반도에서는 거대돌무덤 뿐만 아니라 소규모 덮개식 고인돌도 많은 편이라서, 고인돌이라고 해서 전부다 지배층의 무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일반인들도 상당수가 고인돌에 묻혔음을 짐작할수있다. 뉴스에서 간혹 수십~수백개의 고인돌이 동시에 발견되었다고 나오는 것은 '한 지역 부락의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그 군집 중에서도 큰 규모의 고인돌, 또는 고인돌에서 석검이나 청동검이 발견되면 지배층의 무덤이라 인식하는 편이다.
한반도에는 고인돌을 만들 수 있는 '''돌'''이 풍부했기 때문에, 벼농사 덕분에 '''노동력'''이 갖춰진 청동기 시대 전기부터 이러한 고인돌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한국의 고인돌은 그 규모가 크고 구조도 다양한데, 한국에만 약 4만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한다.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특히 전라남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이곳에만 거의 2만여 기의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비록 비교적 근래까지 고인돌 귀한줄 모르고 석재로 써먹었기에 유실된 고인돌도 많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한반도 전역에서 대량의 고인돌이 계속해서 발견되어 해마다 그 숫자가 추가되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은 기원전 3500년 무렵에 만든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카르나크 고인돌이다. 하지만, 이 고인돌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대석조유적은 아니다. 자그마치 기원전 9600년 무렵에 건설된 괴베클리 테페가 있다. 또한 이집트 피라미드 같은 훨씬 크고 정교한 건축물 역시 4000년 전에 건설되었으니, 이들 모두 한반도 고인돌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만들어진 석조 유적이다. 괴베클리 테베의 경우 T자 모양의 석조 건축이라는 점은 고인돌과 비슷하지만, 괴베클리 테베는 지배자의 매장 무덤이 아니라 돌기둥을 세워 축조한 고대 신전, 혹은 조장을 위한 장례시설로 추측되는 유적이라서 고인돌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3. 명칭


덮개돌을 받침돌로 괴어 놓았다고 해서 '고인돌'이라고 불린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하필 무덤 기념물이다보니 죽은 사람을 높여부르는 호칭인 고인(故人) + 돌이라고 짐작해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물이 고인다.'와 같은 맥락으로 '돌을 괴어서 만든 것'이라는 뜻이다.
한자로는 支石墓(지석묘), 또는 石棚墓(석붕묘), 영어로는 dolmen이라고 불린다. dolmen은 프랑스어에서 온 단어인데 그 중에서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인돌이 있는 지방인 브르타뉴의 언어인 브르타뉴어의 'Taolvaen'에서 유래했다. Taol은 테이블, maen이 돌이라는 뜻이다.[2]

4. 용도와 제작법


고인돌은 '무덤'보다 '거석 구조물'의 인상이 더 강하지만 밑에는 무덤이 있다. 대개 땅을 파서 돌널무덤 형식으로 방을 만들어 사람을 매장하고 그 위에 굄돌과 고인돌을 쌓는다. 다만 전부 무덤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묘표석, 제단 등으로 만들어진 고인돌도 있다. 기사 사진
몇몇 아주 운두가 높은 고인돌들은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의아해지는 조합을 이루지만, 실은 간단한 원리로 만들어진다.
알기쉽게 (출처(zum 학습백과)로 설명해보면,
현존하는 고인돌들의 접접면을 봐도 그 당시 끼인 흙 층을 발견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선사시대 거석 유적들도 거의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3]
사적 137호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뚜껑돌만 해도 길이 7.1미터, 폭 5.5미터, 높이 2.6미터에 달하는 흑운모 편마암으로 추정무게는 80톤이다.)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800명 남짓 장정이 있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는 구상이 나온다. 해외 학자들의 연구와 실험에 의하면 둥근 통나무 위에 약 1톤 무게 돌을 올려놓고 옮기는 데에는 성인 남자 약 10명이 필요하다고 추정한다고 한다. 관련 논의
여담으로 소수설이기는 하지만, 통나무를 굴리고 끈을 썼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통나무를 깔자면 당연히 그것을 벨 수 있는 도구가 있었어야 하고 끈으로 당겼다면 그 정도의 인장력을 견딜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술들이 있었는지 어떤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 그러나 나무는 돌도끼로도 충분히 자를 수 있고, 실제로 발견되는 저 시기의 대형 움막 유적에는 내부에 큰 지붕을 감당하기 위해 수많은 나무기둥들을 세운 흔적이 있는 터가 발굴되고 있어 견고한 나무 기둥을 가공하는 기술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고, 이 시기에는 직물을 짜거나 실을 뽑는데 사용한 가락바퀴와 돗자리나 원시적인 거친 직물을 짜는 데 사용된 추인 고드랫돌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실을 뽑고 돗자리를 짤 기술력이면 굵고 튼튼한 밧줄 정도도 충분히 만들고 남는다.[4]
최근 지리학계의 한 논문에서는 고인돌이 산비탈에 위치한다는 점[5], 장축의 방향이 대부분 경사방향과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풍화현상에 의해 지표에 노출된 거석들이 솔리플럭션 현상에 의해 자연스럽게 산정부에서 산록부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이 경우 돌을 옮길 필요 없이 산의 하단을 약간 파내서 굄돌을 괴기만 한다면 손쉽게 고인돌을 만들 수 있어서 한반도 고인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반식 고인돌은 이와 같이 축조했으리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덮개돌 하단의 무덤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점, 평지나 낮은 구릉지대에 조성된 고인돌도 많다는 점 등의 문제점이 있는 가설이다.

5. 한국의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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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전세계 고인돌 약 6만여 기 중 남북한과 산둥성, 랴오둥 반도, 큐슈를 합쳐서 약 3만~4만여 기 정도가 한반도에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일부 동네에서는 집을 지으려고 보니까 무지막지한 돌덩이가 막았고 치우기도 너무 커서 그냥 안에 두고 지은 뒤 알고 보니 고인돌이더라 하는 집도 더러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한의 고인돌은 대부분 전라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6] 지역별로 보자면 강원도에 338기, 경기도 502기, 충북 189기, 충남 478기, 전북 1597기, '''전남 1만 9068기''', 경북 2800기, 경남 1238기, 제주 140기로 거의 대부분의 고인돌은 전남에 집중되어 있다. 최근 강원도 춘천시 중도에서 대규모 유적지가 발굴되어 여기에 101기가 더 추가되었다. 여기에 북한이 주장하는 고인돌 수를 합하여 3만여 기라고 하는 것.
참고로 서울특별시에도 고인돌이 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 개발이 급속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고인돌이 거의 멸실되었다.정릉동, 개포동(4기), 개포동 대모산, 우면동, 양재동(6기), 원지동(16기), 고척동 등에서 존재하였으며 그 중 원지동 고인돌은 1984년에 16기가 관련유물과 함께 발견되었으나 보호시설물과 안내판의 설치, 문화재 지정 등 아무런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는 대부분 사라졌다. 서울 외에도 적극적 보호를 하지 않는 이상 멸실되는 경우가 많다. 농경지에 위치했다면 경작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구석으로 치워버리거나 조경용으로 판매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크기가 크다보니 꽤 비싼 값에 사간다고 한다. 또한 잘 다듬은 돌은 집 지을 때 주춧돌 등 석재로서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석재로 많이 쓰였고, 비교적 근래까지도 고인돌을 깨부서서 채석장으로 보낸다는지 하는 식으로 고인돌 유적 귀한줄 모르고 이런식을 재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충청, 경기도 일대의 주거 유적은 많이 나오는데 분묘유적이 적기도 하고...
과거 동아시아에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 부르며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실증주의적 고고학이 대두하기 전까지는 흥미의 대상이었을 뿐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돌 밑을 캐면 사람 뼈와 함께 경우에 따라서 청동검, 석검, 거울, 토기같은 골동품이 나왔기 때문에 대충 옛날 사람들 무덤이라고 여겼기는 했지만 기록이 없던 시대이다보니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던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연대 자체가 오래된 점, 탁자식 고인돌의 경우, 매장부가 지상으로 드러나 도굴이나 유실의 위험이 큰 점 등 여러 이유로 유물 등이 잔류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연구하기에 아쉬운 점이 있다. 다만, 무덤의 수효 자체가 많아 자잘한 발굴은 계속되는 중이며 당대의 사실에 대해서 어느정도 추론할 정도가 되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은 경남 김해시 구산동 고인돌이며, 그 무게가 무려 350톤이나 된다. 기사 이 전까지 가장 큰 고인돌이 280톤(전남 화순)이고, 모아이석상 3-10톤, 피라미드 돌 하나가 2.5-10톤, 스톤헨지 5-50톤이므로 350톤이면 어마어마하게 무겁다. 이것은 지자체 예산이 없어 땅에 묻힌 채로 방치되었는데, 이렇게 무거운 고인돌의 덮개를 그냥 대충 들어올리는 것도 아니고 유적의 손상 없이 안전하게 들어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2020년 5월 청주시 동량면에서 다량의 청동기 시대 문화유적이 출토됐다. 탁자식과 기반식의 고인돌 형태가 모두 발견된 이른바 '고인돌 백화점'으로 불리며 역사적 가치도 높이 평가받는다. 이번 출토 현장에서 함께 발견된 붉은관 민무늬토기, 돌칼, 화살촉 등의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또한 중층 형태인 지석묘가 국내에서는 첫 발견됐다. 충청북도는 이번 유적터를 당초 조성 중이던 재난안전체험 복합타운 한켠에 교육자료로 보존조치할 방침이다. #

5.1. 출토되는 유물


한반도의 고인돌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 전기[7]에 나타나는데, 한반도에 고인돌이 유행했던 기원전 1200년-기원전 800년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논농사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보통 고인돌 10기를 파면 마제석검 1점이 출토되고 비파형동검은 그 수가 훨씬 적다. 비슷한 시기에 만든 암각화와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상태에 따르면, 고인돌 바로 앞의 땅에 마제석검이나 비파형동검을 거꾸로 꽂아 죽은 사람을 기렸다고 추정한다.[8] 또는 검을 2~3개로 쪼개서 고인돌 앞에 묻어 제례의식을 하기도 하였다.
무덤방이 없는 고인돌은 사직단이나 종묘, 나정처럼 종교나 제례의식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인돌에 별자리를 새기기도 했다. 평안남도, 황해도와 전남 등에서 발견되는데, 별 위치로 대략 시기를 따지면 기원전 2700-기원전 1000년 무렵에 새긴 듯하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별자리 기록이다.룡덕리 고인돌

6. 대한민국


세계의 고인돌은 대한민국이 전 세계의 절반에 달한 정도로 많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말고 국내 전역에 많은 고인돌이 있는데, 전라남도 무안군, 순천시에 고인돌공원이 자리한다. 국립광주박물관2010년대에 특별전을 개최한 적이 있고, 옥외에 고인돌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6.1.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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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지석묘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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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영어
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
프랑스어
Sites de dolmens de Gochang, Hwasun et Ganghwa
국가·위치
· 전라북도 고창군
· 전라남도 화순군
· 인천광역시 강화군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7년
등재기준
(iii)[9]
지정번호
977



2000년 유네스코강화군, 고창군, 화순군 지역 고인돌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7. 종류


과거에는 탁자식 고인돌을 북방식 고인돌로, 기반식(바둑판식) 고인돌을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분류가 일반적이었으나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다.
  • 탁자식 고인돌
흔히 고인돌 하면 떠올리는 ''자 모양의 고인돌로, 굄돌의 밑둥을 지하에 파묻고, 그 위에 덮개돌을 잘 다듬어서 얹은 형태이다.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난 구조상, 이미 수천년간 사람들이 수없이 파고 가져간 지 오래기 때문에 다른 고인돌에 비해서 유물이 적은 편이다. 본래는 굄돌과 함께 두 판석이 직사각형 꼴의 무덤방을 이루고, 덮개돌이 그 뚜껑 역할을 하는 형태이다. 두 굄돌과 덮개돌은 치울 수 없지만 양쪽의 긴 마구리벽 2장만 치우면 손쉽게 무덤방이 드러난다. 즉 원래는 상석이라 부르는 큰 돌 아래 사면을 돌로 감싼 폐쇄 형태인데 현재 남아있는 'ㅠ'자 모양 고인돌은 후대에 도굴군에 의해 양쪽 돌이 떨어져나간 모습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아래 설명할 다른 형태의 고인돌들은 무덤방이 땅에 묻혀있어 겉보기에 고인돌이란 티도 잘 안 나는데다 무덤방을 찾기 위해서는 일단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덮개돌을 치우고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유물이 더 많다. 이 탁자식을 과거에는 '''북방식 고인돌'''이라 불렀고 실제로 북한 지역에 많긴 하지만, 남한 쪽에서도 전라남도 나주시 같은 지역에서 이와 같은 양식이 발견되는 등 의미가 없어져 더는 북방식이라 부르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주요 유적지인 황해북도 연탄군 오덕리의 이름을 따서 오덕형 고인돌이라 부른다.[10] 이 형태 고인돌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꼽히는 것이 평양 문흥리 고인돌이다. 문제의 단군릉이 이 고인돌 바로 옆에 있어서 단군릉의 피라미드 앞에 올라가면 고인돌이 잘 보인다.
  • 기반식 고인돌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어 놓고 네 개의 굄돌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린 형태이다. 탁자식처럼 무게 중심을 맞출 필요가 없으므로 좀 더 다양한 형식을 보이지만 그 가운데 일부가 마치 바둑판과 비슷하다하여 '''바둑판식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에는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불렀으나, 북한 쪽에서도 이와 같은 양식이 많이 발견되며 더는 남방식이라 부르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주요 유적지인 황주군 침촌리에서 이름을 따서 침촌형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 개석식 고인돌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어 놓고 굄돌 없이 바로 덮개돌을 얹은 형태이다. 대체로 각각 북쪽과 남쪽에 분포하는 탁자식과 기반식 고인돌과 달리,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었다. '''뚜껑식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 위석식 고인돌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난 형태이다. 다만, 탁자식과는 다르게 굄돌 여러 개가 이글루 벽돌마냥 다닥다닥 붙어서 무덤방의 벽을 이룬다. 대체로 굄돌 6-8개 남짓 사용하는데, 개중에는 현무암도 있다. 무덤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다에 위치하여 바다에서 죽은 이의 넋을 기리거나, 바다의 풍랑이 적고 고기가 많이 잡히길 기원하는 목적이라고 추정한다. (제주도의 모든 고인돌이 위석식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제주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므로 '''제주식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제주도와 인접한 중국 지역과 멀리 인도네시아에서도 비슷한 형식이 발견된 바 있다. 고창군, 부안군과 그외 호남지방에서도 이런 위석식 고인돌이라 부를 수 있는 고인돌이 발견되는데, 제주도에 비해서 굄돌이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서로 떨어진 형상이다.
  • 탑파식 고인돌
무덤방 위에 덮개돌 두 개를 겹친 형태이다. 인도 남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태다.
  • 굴석식 고인돌
바위 안을 파내어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씌운 형태이다. 주로 캅카스에 많다.
  • 경사식 고인돌
무덤방을 덮는 덮개돌을 두동강내어 반쪽은 무덤방 위에 그대로 걸쳐놓고 나머지 반쪽은 무덤방 벽면에 기대어 놓거나 무덤방 옆으로 밀어놓은 형태이다.
  • 묘표식 고인돌
덮개돌 아래에 중앙무덤방이 있으며, 이 중앙무덤방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돌아가면서 무덤방 4기가 '卍'자형으로 배열되어 덮개돌 하나 아래에 무덤장이 모두 5기가 모인 형태이다.
  • 묘역식 고인돌
무덤의 범위를 표시해놓기 위해서 돌을 평평하게 깔아둔 고인돌을 뜻한다. 덮개돌이나 무덤방의 형태를 통한 구분이 아니기 때문에 위의 여러 분류들과 조합돼서 나타나기도 한다. 경남 서부 일대에서 이런 묘역식 지석묘가 자주 나오는데, 강원도에도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고인돌에 관한 많은 정보들을 접할 수 있다. 고인돌사랑회

8. 여담


  • 한국에서 고인돌은 교과서 내용을 외우고 있는 사람에게는 간단히 청동기 시대, 좀 더 정확히 아는 사람에게는 청동기 시대 전기의 거석 유적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내용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신·구석기를 포함하는 원시 시대 문명 전체를 떠올린다. 만화가 박수동이 그린 1970년대 후반 만화작품인 <고인돌>은 큰 인기를 끌어[11] 이 단어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작품은 실제 고인돌이 제작되던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수렵채집 석기 시대가 배경이다.
  • 석기시대를 다룬 1990년대 게임 Prehistoric도 한국 발매명은 고인돌이었다. 1990년대 인기 미국 만화인 The Flintstones도 배경은 분명히 석기시대이고 제목의 뜻은 부싯돌인데, 한국에는 고인돌 가족이란 이름으로 방영되었다. 또 이 고인돌 항목의 아래의 용도와 제작법 문단에 인용된 제작법 삽화의 의상 등도 구석기에 가깝다.
즉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부분 고인돌을 인간이 돌도끼 들고 사냥하던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로 잘못 알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세월과 문명 발전의 차이가 있다. 일반인들은 고인돌을 수렵 채집 중심의 원시 시대 또는 석기 시대에 건설한 걸로 오해하지만, 실제 고인돌이 주로 건설된 시기에는 한반도에는 이미 , 농경이 시작되었고 집단적인 정주생활이 시작되었다.[12]
  • 현대까지도 고인돌을 만드는 곳이 있다. 동인도네시아의 숨바섬이 대표적인 사례. 여기서 비롯된 민족지로 지석묘 사회를 연구하기도 한다.
  • 경상남도 함안군군북역 이설 지역 앞 논두렁에 있는 바위가 바로 고인돌이다. 이 지역은 제39보병사단이 이주해 오면서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무려 1,500여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1] 재미있는 사실은 동시대 이집트에서는 당시 피라미드를 짓고 있었다.[2] vaen이 된 이유는 합성어에서 m은 대부분 연음화 되어 v가 되기 때문이다.[3] 저 그림에는 큰 오류가 있다.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시대는 이미 원시인 생활은 벗어난 뒤기 때문에 저런 타잔 같은 옷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단 저 그림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교육용으로 제작된 많은 고인돌 그림의 사람들이 원시인으로 묘사되고 있고, 심지어 지역에서 하는 고인돌 축제에도 당연한 듯 타잔 옷을 입고 재연할 정도라 고정관념, 편견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 머리의 길이도 짧고 수염도 없는 등 실제와 학습용 교재의 이미지를 단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4] 물론 당시 기술이 기술인 만큼 제법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참고로 실이 아니더라도 지푸라기로 만든 새끼도 굵고 튼튼하게 만들면 강도가 충분하다.[5] 혹은 과거 비탈이었던 곳.[6] 고대에는 한반도니 하는 경계가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보는게 더 정확하다는 견해도 있다.[7] 기원전 1500년~기원전 400년[8] 경북 김천 구성면 송죽리 고인돌에서 고인돌 바깥에 비파형동검이 땅에 꽂힌 채로 발견되었다. 여수 오림동의 암각화 역시 마제석검이 거꾸로 땅에 꽂혔고 사람 2명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9]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10] 그런데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북한의 대표적 고인돌 밀집지역 오덕리는 저수지가 생겨 고인돌들도 물에 잠겼다고 한다. 가끔 가물면 물 위로 드러난다고 한다.[11] 롯데삼강 빠삐코스크류바 아이스바의 광고 모델이 바로 이 작품. 참고로 주인공 이름이 '고인돌'이다.[12] 이와 관련하여 대가야박물관에서는 고령군에서 발견된 암각화를 새긴 바위로 고인돌을 만든 유적을 소개했다. 고인돌 인근에 암각화를 새긴 바위가 발견되었고, 이 바위에서 떨어져나간 부분이 암각화가 새겨진 고인돌과 일치하여 고인돌에 암각화를 새긴 것이 아니라 암각화가 새겨진 바윗돌로 고인돌을 만들었음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 석기시대에 주술적인 의미로 새긴 암각화가 고인돌을 만들 시대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질 정도로 둘의 시간차가 엄청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