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간섭
영어 : Triple Intervention
한자 : 三國干涉
독일어 : Tripel-Intervention
프랑스어 : L'intervention tripartite
러시아어 : Тройственная интервенция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게서 요동(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3국이 일본 제국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 사건.
만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는 그곳에서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1] , 칭다오와 산둥 반도에 세력을 갖고 있던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와 영일동맹에 반대하는 프랑스를 끌어들여[2]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에서 6일이 지난 1895년 4월 23일 각국 대사들과 함께 일본 외무차관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다.
삼국의 압력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크게 세가지 방안을 검토한다. 첫번째는 지금 당장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자는 것. 하지만 청일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너무 컸기에 이 의견을 지지하는 쪽은 거의 없었다. 두번째는 곧바로 반납하는 것이었고 세번째는 회담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요동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냥 돌려주면 영 모양새가 안 서니 일단 회담을 연 뒤에 여기서 돌려주는 방식을 채택하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하지만 외상 무쓰 무네미쓰가 "회담을 벌이면 다른 문제가 제기되어 얻은 것도 놓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두번째 안이 채택된다.[3] 또한 청일 전쟁에서 할양받은 타이완 섬, 펑후 열도와 더불어 하이난 섬을 랴오둥 반도 대신 받으려고 하였으나 너무 멀어서 결국 배상금을 3천만냥 더 받는 선에서 타협을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볼때 러시아 제국의 압력에 부담을 느낀 일본이 어쩔 수 없이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한 것이다. 일본 대중과 일본군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반감과 분노를 지니게 되었으며, 특히 1898년에 러시아 제국이 일본이 반환한 뤼순(여순) - 다롄(다련)을 점령하여 군항으로 활용하게 되자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일본의 반러 여론은 결국 러일전쟁의 계기가 된다.
이러한 일본의 승리에 멘붕 + 완전히 친일 내각의 허수아비가 된 고종은 미국 공사관으로 달아나려다 실패(춘생문 사건)하고, 이후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러시아의 비호를 도모하나 이후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선에서 손을 떼고 만다. 고종은 러시아 대신 독일, 영국, 미국 등을 대신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딱히 실효도 없었고, 그때는 이미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패권이 공고해진 상태라 설령 삼국 간섭과 같은 사례가 다시 일어났다고 해도 위기를 반전할 결정적 계기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 사태에서 있었던 이 삼국들의 입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vs 영국 - 프랑스 - 러시아 라인을 생각하면 이 라인은 비교적 변방인 아시아의 사건이라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19세기부터 유라시아의 패권을 놓고 도처에서 영국과 대립하고 있었고, 프랑스 역시 영국의 식민지 팽창에 늘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4]
결과적으로 삼국 간섭은 20세기 초 이후의 독일의 팽창주의가 부상하기 직전, 잘 나가는 일본(과 그를 후원한 영국)이 부담스러웠던 주변국들의 반발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독일에 상당 기간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말은 실로 진리다.
한편 저 멀리 떨어진 대만 섬의 역사에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른 타이완 섬 할양에 동요한 대만의 한족들이 할양을 인정하지 않고 타이완 민주국을 수립한 것은 일정 부분 삼국 간섭과 같은 이유로 열강들이 타이완 민주국을 승인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막강한 일본군의 군사력 앞에 타이완 민주국은 5개월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가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거나 조선 왕실에 대한 호감이 강한 이들은 삼국 간섭이 곧 명성황후와 고종의 외교 정책의 승리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러시아면 또 모를까 조선왕실이 거둔 승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삼국 간섭 이전에 러시아와 접촉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까지 조선의 종주국 노릇을 했던 청나라와 빠르게 부상하던 일본 모두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아거일겸 인아거청이 있었던 셈.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청일전쟁 전까진 적극적으로 고종을 돕기보단 조선의 요구에 직답을 피하고 자신들이 당면한 유럽문제에 집중하며 조선의 가치를 저울질을 하던 중이었다.[5]
삼국 간섭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불러서 자주 접견하며 밀담을 나누었고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괄시하는 등 대놓고 친러 노선을 천명했으며, 이에 일본 정부는 고종과 명성 황후의 인아거일(引俄拒日)[6] 정책에 매우 경계하게 된다.
여기에 이 무렵쯤 친일로 기울어진 박영효가 역모를 시도했다는 사건을 계기로 일본으로 망명하고, 일본이 후원하던 훈련대가 해산되자 자기네가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싸워줬다고 철썩같이 믿던[7] 일본 대중도 명성 황후에게 어처구니 없는 원한을 품게 되고,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사실 이것은 일본의 치밀한 각본이었다는 가설이 있다. 박영효가 역모 사건에 휘말려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갈 때 당시 일본 공사인 이노우에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에 이노우에가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박영효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노우에가 자신이 후임으로 미우라 고로를 대사로 내세우며 을미사변이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8] 그리고 미우라 고로를 전면에 세운 것은 미우라가 아무래도 군인 출신이기에 일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한 무식한 군인이 감정에 치우쳐 저지른 짓'으로 덮을 생각이 어느 정도 있었지 않을까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미우라 고로는 외교업무에 밝은 인사가 아니었고, 괜찮은 인맥을 가진 조슈번 출신이긴 했지만 옛 동기들은 물론 실권을 가진 후배들에게 일선에서 밀려나 전임자인 이노우에 가오루와 비교하면 경력이 초라한 퇴역군인이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에서 이토 내각이 미우라의 배후에서 을미사변을 직접 기획했다는 주장을 증명할 객관적 증거가 부재한 상황이기에[9] 조선측 인물들의 증언을 기반삼아 주로 배후설을 지지하는 한국학계와는 달리, 일본 학계에서는 미우라가 주변의 부추김과 자신의 몽상에 사로잡혀 참사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좌익과 우익성향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말하자면 이후 발생한 2.26 사건, 5.15 사건, 만주사변 등과 유사한 배경이라고 취급하는 편. 국내 대중적인 영역에서 명성황후, 김좌진, 청산리 전투와 마찬가지로 을미사변 배후설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
간단히 요약하자면 '고종과 명성 황후의 빛나는 외교력, 로비로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이 일본을 압박했다'가 아니라, 그 반대로 '러시아 등 유럽 열강이 일본을 데꿀멍시키는 것을 확인한 조선 왕실이 남은 판돈을 러시아에 다 걸려고 했지만,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러시아 공포증 환자 일본이 허겁지겁 을미사변을 일으켰다'가 실상인 것. 냉정하게 봤을때 청일전쟁 개전부터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그리고 삼국간섭에 이르는 동안 '''고종과 명성황후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한자 : 三國干涉
독일어 : Tripel-Intervention
프랑스어 : L'intervention tripartite
러시아어 : Тройственная интервенция
1. 개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게서 요동(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의 3국이 일본 제국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 사건.
2. 전개 및 결과
만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는 그곳에서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1] , 칭다오와 산둥 반도에 세력을 갖고 있던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와 영일동맹에 반대하는 프랑스를 끌어들여[2]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에서 6일이 지난 1895년 4월 23일 각국 대사들과 함께 일본 외무차관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다.
삼국의 압력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크게 세가지 방안을 검토한다. 첫번째는 지금 당장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자는 것. 하지만 청일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너무 컸기에 이 의견을 지지하는 쪽은 거의 없었다. 두번째는 곧바로 반납하는 것이었고 세번째는 회담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요동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냥 돌려주면 영 모양새가 안 서니 일단 회담을 연 뒤에 여기서 돌려주는 방식을 채택하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하지만 외상 무쓰 무네미쓰가 "회담을 벌이면 다른 문제가 제기되어 얻은 것도 놓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두번째 안이 채택된다.[3] 또한 청일 전쟁에서 할양받은 타이완 섬, 펑후 열도와 더불어 하이난 섬을 랴오둥 반도 대신 받으려고 하였으나 너무 멀어서 결국 배상금을 3천만냥 더 받는 선에서 타협을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볼때 러시아 제국의 압력에 부담을 느낀 일본이 어쩔 수 없이 랴오둥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한 것이다. 일본 대중과 일본군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반감과 분노를 지니게 되었으며, 특히 1898년에 러시아 제국이 일본이 반환한 뤼순(여순) - 다롄(다련)을 점령하여 군항으로 활용하게 되자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일본의 반러 여론은 결국 러일전쟁의 계기가 된다.
3. 영향
이러한 일본의 승리에 멘붕 + 완전히 친일 내각의 허수아비가 된 고종은 미국 공사관으로 달아나려다 실패(춘생문 사건)하고, 이후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러시아의 비호를 도모하나 이후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선에서 손을 떼고 만다. 고종은 러시아 대신 독일, 영국, 미국 등을 대신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딱히 실효도 없었고, 그때는 이미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패권이 공고해진 상태라 설령 삼국 간섭과 같은 사례가 다시 일어났다고 해도 위기를 반전할 결정적 계기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 사태에서 있었던 이 삼국들의 입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vs 영국 - 프랑스 - 러시아 라인을 생각하면 이 라인은 비교적 변방인 아시아의 사건이라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19세기부터 유라시아의 패권을 놓고 도처에서 영국과 대립하고 있었고, 프랑스 역시 영국의 식민지 팽창에 늘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4]
결과적으로 삼국 간섭은 20세기 초 이후의 독일의 팽창주의가 부상하기 직전, 잘 나가는 일본(과 그를 후원한 영국)이 부담스러웠던 주변국들의 반발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독일에 상당 기간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말은 실로 진리다.
한편 저 멀리 떨어진 대만 섬의 역사에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른 타이완 섬 할양에 동요한 대만의 한족들이 할양을 인정하지 않고 타이완 민주국을 수립한 것은 일정 부분 삼국 간섭과 같은 이유로 열강들이 타이완 민주국을 승인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막강한 일본군의 군사력 앞에 타이완 민주국은 5개월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4. 구한말 역사 관련
가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거나 조선 왕실에 대한 호감이 강한 이들은 삼국 간섭이 곧 명성황후와 고종의 외교 정책의 승리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러시아면 또 모를까 조선왕실이 거둔 승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삼국 간섭 이전에 러시아와 접촉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까지 조선의 종주국 노릇을 했던 청나라와 빠르게 부상하던 일본 모두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아거일겸 인아거청이 있었던 셈.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청일전쟁 전까진 적극적으로 고종을 돕기보단 조선의 요구에 직답을 피하고 자신들이 당면한 유럽문제에 집중하며 조선의 가치를 저울질을 하던 중이었다.[5]
삼국 간섭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불러서 자주 접견하며 밀담을 나누었고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괄시하는 등 대놓고 친러 노선을 천명했으며, 이에 일본 정부는 고종과 명성 황후의 인아거일(引俄拒日)[6] 정책에 매우 경계하게 된다.
여기에 이 무렵쯤 친일로 기울어진 박영효가 역모를 시도했다는 사건을 계기로 일본으로 망명하고, 일본이 후원하던 훈련대가 해산되자 자기네가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싸워줬다고 철썩같이 믿던[7] 일본 대중도 명성 황후에게 어처구니 없는 원한을 품게 되고,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사실 이것은 일본의 치밀한 각본이었다는 가설이 있다. 박영효가 역모 사건에 휘말려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갈 때 당시 일본 공사인 이노우에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에 이노우에가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박영효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노우에가 자신이 후임으로 미우라 고로를 대사로 내세우며 을미사변이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8] 그리고 미우라 고로를 전면에 세운 것은 미우라가 아무래도 군인 출신이기에 일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한 무식한 군인이 감정에 치우쳐 저지른 짓'으로 덮을 생각이 어느 정도 있었지 않을까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미우라 고로는 외교업무에 밝은 인사가 아니었고, 괜찮은 인맥을 가진 조슈번 출신이긴 했지만 옛 동기들은 물론 실권을 가진 후배들에게 일선에서 밀려나 전임자인 이노우에 가오루와 비교하면 경력이 초라한 퇴역군인이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에서 이토 내각이 미우라의 배후에서 을미사변을 직접 기획했다는 주장을 증명할 객관적 증거가 부재한 상황이기에[9] 조선측 인물들의 증언을 기반삼아 주로 배후설을 지지하는 한국학계와는 달리, 일본 학계에서는 미우라가 주변의 부추김과 자신의 몽상에 사로잡혀 참사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좌익과 우익성향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말하자면 이후 발생한 2.26 사건, 5.15 사건, 만주사변 등과 유사한 배경이라고 취급하는 편. 국내 대중적인 영역에서 명성황후, 김좌진, 청산리 전투와 마찬가지로 을미사변 배후설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
간단히 요약하자면 '고종과 명성 황후의 빛나는 외교력, 로비로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이 일본을 압박했다'가 아니라, 그 반대로 '러시아 등 유럽 열강이 일본을 데꿀멍시키는 것을 확인한 조선 왕실이 남은 판돈을 러시아에 다 걸려고 했지만,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러시아 공포증 환자 일본이 허겁지겁 을미사변을 일으켰다'가 실상인 것. 냉정하게 봤을때 청일전쟁 개전부터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그리고 삼국간섭에 이르는 동안 '''고종과 명성황후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5. 관련 문서
[1] 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 청과 러시아는 청러 비밀 조차 협약을 맺어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다.[2] 여기에서 러시아는 영국도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당시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제국을 밀어주는 입장이었기에 거부한다. 1902년에 체결된 영일 동맹 또한 러시아의 남하를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다.[3] 이 때 그는 병으로 요양 중이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찾아가서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4]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는 만주 지역의 적당한 이권에 만족하고 1907년부터 영국과의 동맹인 삼국 협상에 뛰어들었고, 프랑스는 1904년 이후 이미 대독 문제에서는 영국과 항상 한편이었다. 반면 독일 제국은 기존의 삼국 동맹(이탈리아 왕국도 포함되나, 사실상은 영국 - 프랑스와 적대적이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5] 이 때 조선에 우호적이던 외무성 아시아파 베베르 공사와 고종, 명성 황후간의 접촉을 도와준 것이 당시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였는데 이 일을 포함해 묄렌도르프가 고종의 대리인으로 다수의 러시아 외교관, 장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청나라에 발각되자 이홍장의 노여움을 사 즉시 해임된다. 일본 역시 고종이 뒤에서 러시아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로는 조선정책을 더욱 강경하게 재고한다.[6] '아라사('''俄'''羅斯:러시아)를 끌어들이고('''引''') 일본('''日'''本)을 거부한다('''拒''')'는 의미.[7] 조선을 자주 독립시켜 청의 영향권에서 떼어 놓아야 일본이 조선을 멋대로 다루기 좋다는 계산(즉, 일본에게 '조선의 자주 독립' = '청의 한반도 축출'을 의미)이 깔린 것이었지만, 당시 일본인들 가운데는 자국이 조선의 자주 독립을 돕고 있다면서 정당한 대의를 위한다고 믿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오늘날에도 일본 넷우익과 제도권의 일부 우익들은 역사논쟁이 일 때면 매번 이런류의 3류 프로파간다를 설파한다.[8]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친일 세력인 박영효를 조선이 내친 꼴이 되어 일본에게 움직일 명분을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9] 6월 4일 및 기타 각의 결정사항과 이노우에 의견서에 대해 각료들이 견해를 교환한 편지들을 근거로 일본정부가 을미사변을 사전에 모의했다는 일부 한국전문가들의 주장도 있으나 정작 그 내용은 정책변화에 대한 논의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다. 여기에 나온 '빠른 결단', '합의를 그대로 단행' 등의 표현을 가져다 전후 맥락 없이 을미사변을 두고 사용한 말이라 확정 짓기에는 중간에 생략된 논리나 증거가 너무 많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