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장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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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3]
본명은 허장현.
선술하였듯이 본업은 외모가 필수 요소인 배우이나, 정작 배우 치고는 전혀 잘생기지 않은 얼굴[4] 로 희극적인 역할이나 악역을 자주 맡았지만, 그 외에도 평범한 소시민, 카리스마 있는 기자 등 매우 다양한 역할을 커리어 내내 훌륭하게 소화했다. 터프가이, 성격파 배우 등으로 분류할 수가 있겠다. 활동 당시에는 한국의 험프리 보가트라고 불리기도[5] ... 김승호, 장동휘, 박노식 등과 함께 국민 중에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당대의 대배우였지만, 어쨌든 단독 주인공 역할을 맡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아서, 아래 수상경력만 보더라도 대개 남우 조연상이다. 게다가 김승호[6] 와 함께 후시녹음 시절 본인이 연기한 영화마다 본인의 목소리를 꼭 녹음하는 소위 '양심파'였다[7][8] .
두 아들 허기호, 허준호 등도 모두 배우로, 허준호는 아버지처럼 단독 주연급은 아니나 카리스마 넘치는 역을 자주 맡는 성격배우로 유명하다. 허기호는 그리 유명하지 않다. 허장강이 굉장히 무서운 인상의 얼굴인데 허준호 역시 그런 무서운 인상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1975년 9월 21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연예인 축구 대회 참가 도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당시 TV에 중계되고 있어서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많았다.[9]
2. 출연작
2.1. 영화 출연작
- 1954년 아리랑
- 1955년 피아골
- 1956년 격퇴
- 1957년 노들 강변
- 1958년 아름다운 악녀
- 1959년 세 쌍동
- 1960년 두 여인
- 1960년 버림받은 천사
- 1961년 일편 단심
-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
- 1963년 언니는 좋겠네
- 1964년 신식 할머니
- 1965년 신화를 남긴 해병
- 1966년 양반전
- 1967년 9인의 귀순병
- 1967년 격장의 아이들
- 1967년 월하의 공동묘지
- 1968년 낮과 밤
- 1968년 단벌신사
- 1968년 고향무정
- 1968년 여자의 일생
- 1969년 생명
- 1969년 동경의 왼손잡이
- 1969년 투명인간
- 1970년 아파트를 갖고 싶은 여자
- 1971년 쇠사슬을 끊어라
- 1972년 무녀도
- 1973년 뜨거운 영광
- 1973년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 1974년 여대생 가정부
- 1974년 사랑이 있는 곳에
- 1974년 어둠속의 목격자
- 1974년 암살지령
- 1974년 왜 그랬던가
- 1975년 조총련
- 1975년 태풍을 일으킨 사나이
3. 수상 경력
- 1961년 제9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조연상
- 1963년 제6회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 1966년 제4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 1968년 제11회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 1970년 제7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 1972년 제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최우수연기상
- 1974년 제13회 대종상 영화제 남우조연상
- 1975년 제14회 대종상 영화제 특별공로상
[1] 1952년 3월 28일생 직업 영화배우이다.[2] 여담으로 이 둘은 동복형제가 아니라 이복형제이다.[3] 현대에도 코메디나 드라마 등에서 자주 튀어나오는 유명한 대사인데, 원조가 바로 허장강.[4] 짙은 눈썹과 큼직한 이목구비로 매끈한 미남형은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남자답게 생긴 것은 맞다.[5] 60 - 70년대 당시에는 남궁원이 그레고리 펙, 최무룡이 리처드 버튼, 신성일이 알랭 들롱에 비교되곤 했다. 그리고 이 셋은 외모도 각각 펙, 버튼, 들롱을 연상시켜서 그렇지만, 사생활적으로 많이 닮았다. 모범적인 가장이었던 그레고리 펙처럼 남궁원 역시 자녀들을 유학까지 보낼 정도로 열심히 키운 훌륭한 아버지여다. 반면에,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불륜(간통)을 저질러서 본처와 이혼 후 재혼했다를 반복한 리처드 버튼처럼 최무룡 역시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지미와 간통해서 본처 강효실과 이혼한 이후에 결국 김지미와도 이혼을 한 나쁜 케이스였다. 또한, 온갖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며 사생아까지 낳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등 다소 지저분한 사생활로 많은 욕을 들어먹은 알랭 들롱과 마찬가지로 신성일 역시 숱한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노년에는 자랑이랍시고 그 여자들을 등장시키는 책이나 쓰는 바람에 죽을 때까지 온갖 욕을 푸짐하게 먹었다.[6] 배우 김희라의 아버지이다.[7] 동시대 신성일 같은 배우는 사실 거의 전부 성우들의 연기로 빛이 난 케이스다. 그가 나중에 나이가 먹고 본인 목소리로 연기한 작품들을 보고 '저런 대배우의 연기력이 이렇게나 형편없었다니!'라며 충격을 받는 사람들이 속출할 지경.[8] 신성일의 경우에는 심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 때문에 본인 목소리를 쓸 수가 없기도 했다.[9] 이 사건은 당시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오랜 촬영 일정으로 심신이 지쳐 있는 허장강을 무리하게 행사에 침여시킨데다 체육 행사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의료진이 전혀 배치되어 있지 않아 허장강이 쓰려졌을 때 후배 배우들이 서투르게 심폐소생술을 했고, 인근 국립의료원으로 이송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지체되어 결국 허장강은 깨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마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십년 후에 이와 매우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