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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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閔丙敦
대한민국의 군인. 1935년 경성부 출생. 휘문고등학교 졸업 후[1] 육군사관학교 15기로 하나회 일원이다. 전두환의 1공수여단장 시절 대대장으로 계파상으로는 전두환계에 속하나, 자기 소신을 숨기지 않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민따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군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의 인물답지 않게 정의로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2. 군인 시절
군사 정권 시절 상납이 문화였던 군대에서 상납을 하지도, 받지도 않았으며, 휘하 장병들을 엄하게 다루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원칙에 어긋나면 강하게 털면서도 가난한 병사가 휴가를 갈 때면 차비를 쥐어주는 지휘관이었던 것으로 회고된바. 아울러 군부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민주주의 국가에서 투표란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이다'''라며 군장병의 자유로운 비밀 투표를 독려했던 인물이었다.
하나회 15기의 대표주자이자 전두환의 총애를 받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가는 코스였던 요직 20사단장을 역임했으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병사들에게 현 정권에 대한 투표 독려를 거부하여 준장 보직으로 좌천당했다.[2]
육군특수전사령관 시절에는 서울 올림픽에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테러에 대비한 훈련이 한창이었는데, 특전사 대테러 대원들이 캄캄한 실내사격장에서 야시경을 쓰고 방탄복을 입은 상태에서 서로에게 실탄 사격을 하는 위험한 훈련도 실시되었음을 훗날 회고글에서 밝히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하나회 인물로 전두환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지만 자신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선배들에게도 소신있게 거부하였다. 6월 항쟁으로 인해 위기에 몰린 전두환이 군을 출동시켜 유혈 진압하려는 명령을 내리자 군 출동 시 핵심 부대인 특전사의 사령관이었던 그는 대통령에게 거부 의사를 밝히며 명령 취소 요청을 하기까지 했다.[3] 후일담에 의하면 전두환이 재고하지 않았다면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연습까지 마쳤다고 한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군부 내에서까지 제2의 5.18이 될 수 있는 군을 통한 강경진압에 대해 반대 의사가 터져나오자, 전두환은 군 출동 명령이 진심이었던지 민주화 세력에 대한 협박용 카드였던지 간에 결국 군 출동은 이뤄지지 않았고 6.29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 부분에서는 권력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군대 사회에서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켜온 드문 인물로 평가받을 자격이 충분할 것이다. 이는 하나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육사 각 기수의 유능한 인물들을 영입하기 위해 거의 협박에 강권을 서슴치 않은 선배들에 눌려서 억지로 가입을 한 후배들이 많았다. 민병돈도 아마 이들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민병돈은 전두환계를 숙청하려던 노태우 대통령에게 찍혀 특전사령관 자리에서 육사 교장으로 전보되었다. 둘 다 중장 보직이지만 육사 교장은 곧 군문을 나갈 사람이 받는 자리나 한직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니 좌천에 가깝다. 당장 박희도 육참총장, 김진영 수경사령관 등의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 민병돈 특전사령관도 무사할 수는 없었다. 후임 특전사령관으로 온 이문석은 9.9 인맥의 선두주자로 이후 1990년에 1군사령관까지 달면서 승승장구하게 되었고 육참총장까지 노리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지만....
전두환 시절의 강직함과는 별개로 육사 교장으로서 보인 이후의 행적은 논란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3. 육사 졸업식 항명 사건
1989년 3월 21일, 육군사관학교 제45기 졸업식에서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이었던 민병돈은 대형 사고를 일으킨다. 바로 대통령 노태우를 공식 행사에서 무시하고 그의 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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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이 시작되고 교장 식사 순서가 되자 민병돈은 연단으로 나가면서 임석 상관이었던 노태우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단순히 실수인 줄 알았는데 연설이 시작되면서, 민병돈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더욱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단순 졸업 축하 식사를 한 것이 아닌 '''대통령을 뒤에 두고 노태우 정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북방 정책을 10분 동안이나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군 장성이 정부 정책을 비판한 것도 전례 없는 일이었으며, 더욱이 대통령을 뒤에 두고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상관인 대통령을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 간단하고 짧게 해야 하는 교장 식사를 10분 가까이 끌며 대통령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연설을 끝나고 돌아오면서도 노태우 대통령에게 끝까지 경례를 하지 않으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방금 전 경례를 하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나의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표한 격으로, 제대로 작심하고 반항을 저지른 것이었다. 황당한 노태우는 대통령 치사를 하러 그를 지나치면서 "민 교장, 왜 이러는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날 당연히 그의 육사 1기수 선배인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구는 그를 강도높게 질책했고, 민병돈 장군은 즉시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20일 후 육사 교장에서 경질되었고 50일 후에는 예편당했다. 이 일은 보수파였던 민병돈이 적국이었던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는 노태우에 대한 강한 이의 제기라고 보는 시각이 있으며, 집권 후 전두환계 군맥들을 숙청한 것에 대한 전두환계의 불만이 섞여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를 두고 "대통령에 대드는 패기, 오오~"라는 식의 허세 섞인, 혹은 6월 항쟁 당시의 군부 동원 거부에 대한 호평이 확대된 나머지, 육사 교장 시절의 항명까지 미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그렇게까지 해석될 일이 못된다. '동유럽 등 공산권과의 국교 정상화'를 비롯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서울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북 체제경쟁 승리, 국력 우위의 입증을 통한 한국의 자신감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약 10년 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서 제기되었던 '퍼주기', '유화정책'이라는 식의 비난도 덜 받았다. 그럼에도 이를 엄연히 민주적-합법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군 통수권자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항명을 저지른 것은 6.25 전쟁 당시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명백한 문민통제 위배였다. 차라리 단순히 야전 군인으로서 이념적인 경직성을 드러냈을 뿐이라는 해석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4. 예편 이후
이후 경민대학교에서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아시아엔이라는 군소 인터넷 언론에서 글을 기고하고 있는 등[4] 의 주로 군사전문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일체의 공직 제의를 뿌리치고 40년 전 마련한 허름한 집에서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하나회였음에도 6월 항쟁 무력 진압에 반대한 인물로 최소한의 애국심과 정의감은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18년 8월 14일 PD수첩에 등장하여 근황을 알리는데 '''1987년 계엄문건'''을 공개한다.
2019년 4월 13일에 상처(喪妻:아내를 여읨)했다.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중풍에 걸린 아내를 20년동안 간호했다고 하며, 본인도 국립묘지 안장[5] 대신에 아내와 같이 살던 집 마당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5. 대중문화에서
드라마 제5공화국 에서는 성우 황윤걸이 민병돈 역을 맡아 6월 항쟁 당시 특전사령관 으로서 전두환의 병력 동원명령 거부에 대해 고명승 보안사령관(최은석 분)과 의논하는 장면을 연기했다.
[1] 휘문중학교 3학년 당시 6.25 전쟁이 발발하고 학도병으로 참전해서 싸웠다.[2]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좌천당함. 그러나 훗날 정보참모부장을 거쳐 특전사령관이 됨.[3] 이 일화는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 '6월항쟁' 편에도 나온다.[4] 탄핵 정국때는 우병우를 비판하기도 했다. 보수인사로는 드물게 친박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다시 강연을 다니고 있다. 근데 최근에 계엄 문건이 터지자 또다시 쿠데타는 안 된다며 조현천을 후려까버렸다.[5] 민병돈은 하나회였기에 승진에 있어 득을 보았지만, 12.12 군사반란이나 5.18 민주화운동과 연관이 전혀 없었기에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있으며 군인연금도 수령하고 있다. 다만 12.12 반란 때 17사단 연대장으로 부대가 혹한기 훈련중이었고 보안사에 있는 허화평에게 어떻게 도와주면 되냐고 묻긴 했지만 허화평은 어차피 북괴가 내려온 게 아니니까 그냥 훈련 진행 고대로 하면 된다면서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단장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상황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고 한다. 5.18 때도 해당 부대에 연대장으로 그대로 재직중이어서 휘말릴 일이 전혀 없었다. 대신 국보위에 가서 전경 도입에 앞장서면서 시위 현장 군부대 출동을 원천 차단하면서 1987년 6.29 선언에 공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