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군인)

 


이종구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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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 출생
1935년 11월 21일 (88세)
출생지
경상북도 칠곡군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58년 ~ 1990년
임관
육사 14기
최종계급
대장
최종보직
육군 참모총장
주요보직
육군 제20보병사단장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육군 제2군사령관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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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관료.
육군사관학교 14기로 하나회의 총무를 맡은 하나회 핵심 멤버로써 1980~1990년대 초 전두환 정부노태우 정부에서 군부의 핵심 요직들인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을 모두 역임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하나회의 황태자'라고도 불렸다.

2. 생애


동양척식주식회사 고위 간부를 지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이종구는 경북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14기로 졸업하였다. 이후 1966년 대위 시절 하나회가 창립되자 회장 전두환 밑에서 총무를 맡게 되는데 조직의 전체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총무 이종구는 조직의 핵심이었다. 덕분에 이종구는 대령 보직 중 최고 진급 코스인 수경사 30대대장을 물려받게 된다.[1] 그런데 부임 중 윤필용 사건이 터지고 보안사령부의 수사 중에 하나회가 윤필용에 연루되어 적발된다.[2] 당연히 사조직은 제거해야할 대상이었고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하나회를 제거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조직을 발본색원하기 시작한다. 총무인 이종구는 보안사령부 조사실로 끌려갔고 윤필용 사건에 격노한 박정희가 관련자는 철저하게 숙청하라는 명을 내렸기에 이종구는 군복을 벗고 죄수복을 입을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회는 다행히도 박종규[3], 차지철, 서종철, 진종채 같은 영남 출신 장성[4]들의 쉴드를 받아 박정희는 윤필용 라인의 하나회[5]들만 숙청하는 선에서 끝내도록 한다. 나머지 하나회 멤버들은 오히려 박정희의 암묵적인 묵인을 받으며 성장해 나갔고 이종구는 최대 위기를 피했다.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고 하나회는 대한민국의 정권을 탈취했다. 당시 그는 동해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동해안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영남 출신에 집권자 전두환의 직계이며 집권 세력 하나회의 핵심이었던 이종구는 이제 한국군에서 가장 화려한 진급 코스를 달리게 된다. 이후 이종구는 즉각 중앙으로 컴백하여 작전 요직인 육군본부 작전처장을 맡았으며 1980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당시 사단장 중 최고 요직인 20사단장을 차지했다.[6] 20사단장을 마친 뒤에는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과 더불어 군 내 3대 실세 보직인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했다. 임기 중에 수도경비사령부(지휘관 : 소장급)가 수도방위사령부(지휘관 : 중장급)로 확대 개편되어 중장으로 진급했고 임기를 마친 뒤에는 역시 최고 실세 보직인 보안사령관마저 역임한다.[7]계급 최고 보직들을 연이어 역임한 이종구는 1년 후 제2작전사령관으로 진급한다.[8]
1988년 이종구는 육군참모총장직에 오르면서 육군의 정점에 서게 되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국방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군사 정권에서 실세라 할 수 있는 자리는 모두 꿰차며 거침없이 승승장구한 것.[9] 이 때 이종구처럼 전두환계 하나회 군맥의 핵심들로 꼽히는 12기 선두주자 박희도나 13기 선두주자 최세창이 노태우 집권 이후 전두환계 군맥 정리를 위해 숙청당할 때도[10] 이종구는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에 연거푸 오르며 계속 승승장구했다. 노태우가 자신의 직계들을 중용하기 위해 탈하나회를 가장했지만 결국 하나회에 기반한 정권이기 때문에 하나회를 버릴 수 없었던 노태우 입장에서 조직의 핵심이며 영남 군맥의 보스인 이종구까지 숙청하는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11] 그는 자신의 막강한 파워로 보직을 거칠 때마다 예산이 들어가는 많은 사업들을 추진해 성공시켰다. 20사단을 기계화 부대로 개편하고 수도경비사령부를 수도방위사령부로 확대 개편했으며 약체화되어 있던 제2작전사령부에 후방 군단 2개[12]를 창설하고 방위월급제를 도입했으며 육군본부에 밀리던 국방부합참의 위상과 기능을 강화했다. 이종구는 출세 가도를 달려왔고 육군참모총장 임기를 마치고 예편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국방부 장관까지 맡게 되며 군인 경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국방부 장관 시절에는 1기수 하나회 후임인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진삼과 극렬하게 대립했다. 노태우 정권에서 벌어진 하나회 내부의 전두환계와 노태우계의 권력 암투와도 연관이 깊은데 이종구는 비록 노태우에 나름대로 굽히기는 했지만[13] 어쨌든 전두환계와 영남계 하나회 군맥의 보스였다. 이에 반해 이진삼은 노태우의 직속 부하 출신으로 노태우계(이른바 9.9 인맥[14])와 충청계 하나회 군맥의 보스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전두환계에 밀려 설움을 겪었던 이진삼 등 노태우계는 노태우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며 전두환계를 따돌리고 있었다.[15] 양 파벌의 보스로써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었던 이종구와 이진삼은 육군에 대한 국방부 장관의 권한 문제를 두고 대립하기 시작했다.[16] 기자들 앞에서도 숨기지 않고 막말까지 할만큼 극심했던 대립[17]은 이진삼이 임기 만료 6개월을 남기고 경질되며 이종구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으나 보름 뒤에 이종구도 국방부 장관에서 경질되며 무승부로 끝나게 된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대로 이종구를 둘 경우 지나친 파워로 제어하기 힘들 것에 대한 노태우의 견제 의도로 추측되고는 한다. 이진삼은 육군참모총장 경질 이후에도 입각하여 체육부 장관을 역임했으나 이종구는 이후 야인으로 남게 되며 화려했던 공직 경력을 마친다.
이종구의 국방부 장관 재임기는 북핵 문제가 처음 국제적인 이슈로 등장하던 시기였는데 1991년 한 간담회에서 "북핵 문제가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군사적인 특수 조치가 요구될 것이다. 그 방식은 엔테베 작전을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발언해서 국내외적으로 한때 논란을 빚은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북핵 위협에 대한 군사적 선제 타격'을 처음 공개석상에서 거론한 사례였던 셈이다. 하지만 논란이 계속되자 1991년 10월의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전쟁을 막으려고 또 다른 전쟁을 감수할 수는 없다"며 한발 물러섰다. 이후 국방부 장관직을 떠나고 나서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엔테베 발언'이 "북핵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국내외에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의도된 발언이었음을 인정했다.
하나회를 대숙청하고 그간 하나회가 저질렀던 범죄들을 단죄했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율곡사업 관련 방산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검찰 조사 결과 7억 8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감옥행을 앞뒀으나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났다. 이 때 라이벌 이진삼 역시 정보사령관 시절 민간인 테러를 저지른 혐의로 사이좋게 구속당한 바 있다. 그런데 김영삼은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출소한 이진삼을 데려다가 신한국당 국회의원 공천까지 주면서 포섭했는데 이종구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시절부터 자신의 군맥들을 끌어 이명박을 지원해서 이명박 정부 초기 안보 라인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대표적으로 종친 관계인 이상희 국방부 장관 인선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재준 등 대부분의 보수 성향 예비역 장성들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가운데 이종구가 뜬금없이 이명박을 지지한 이유는 바로 이상득 때문. 육군사관학교 동기 중 1명이 몸이 안 좋아서 중도에 자퇴했으나 이후 절친한 친분을 유지하였는데 그가 바로 이명박 정부 최고 실세였던 이명박의 형 이상득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상득은 육군사관학교 시절 절친들이 하나회 회원들이었고 정계 입문도 같은 하나회 출신 이춘구가 권유했다고 한다.

3. 기타


  • 육·해·공군 및 해병대의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의 10대 회장으로 당선되어 역임한 바 있다.
  • 이종구의 2남은 이정호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인데 농담으로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고 할아버지가 동양척식주식회사 고위직이었다고 밝히면서 할아버지는 친일파, 아버지는 방산 비리범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4. 대중매체에서


  • 제4공화국(드라마) 윤필용 사건편에서는 김기현이 이종구 역할을 맡았다. 보안사 수사관이 하나회 명부를 내놓으라 하자 진술을 이리저리 회피하며 "잃어버렸다, 없다, 배째라"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 제5공화국(드라마)에서 김기현이 장태완 장군 역할을 맡아 하나회 반란 세력을 향해 터뜨린 분노의 일갈과 대조되는 재미가 있다.


[1] 수경사 30대대장은 청와대 옆에 주둔하는 대통령 최근접 근위 부대로 지금도 중요하지만 늘 반란을 걱정해야 하는 군사 정권에서는 더더욱 중요했고 앞으로의 진급이 탄탄하게 보장되는 최고의 자리였다. 당장 30대대장을 역임한 인물들 중 3대 단장이 전두환, 5대 단장이 이종구, 9대 단장이 장세동이다.[2] 하나의 설이지만 윤필용 사건은 평소 윤필용과 이후락을 질시하던 청와대경호실장 박종규와 윤필용의 심복이자 하나회 최고의 실력자였던 손영길(박정희의 부관 출신이라 전두환보다도 더 박정희에게 총애받았다. 하나회의 회장은 전두환이었으나 이 때까지만 해도 전두환이 손영길에 뒤쳐지고 있었다.)을 질시하던 전두환이 짜고 윤필용을 모함한 음모였다고 한다. 전두환은 손영길을 제거할 목적에서 윤필용의 실언을 박정희에게 알렸으나 그 와중에 하나회가 적발되어 버려서 본인도 군생활 최대 위기에 몰리게 된다.[3] 음모의 배후로 여겨지는 박종규는 이를 기반으로 이후락을 윤필용과 묶어 날리고 본인이 중앙정보부장이 되려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육영수 저격 사건의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다.[4] 강창성의 의도를 '영남 장교 파벌 숙청'으로 간주하였고 박정희에게 달려가 영남 장교들 다 죽는다고 이를 말렸다. 이 때문에 강창성은 윤필용 사건 후에 오히려 보안사령관에서 쫓겨난다.[5] 대표적으로 이 때 숙청된 하나회 멤버는 윤필용과 친했던 손영길, 권익현, 안교덕, 배명국, 신재기 등이 있다.[6] 20사단은 당시 서울에 근접 배치되어 있었고 즉각적으로 서울에 출동이 가능한 근위 부대(이른바 '충정' 부대)로써 군사 정권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단이었다. 하나회 정권에서 20사단은 당연히 하나회 실세들이 독점했다.[7] 이 코스를 먼저 노태우가 밟았는데 9사단장 - 수경사령관 - 보안사령관 순.[8] 제2작전사령관은 군사령관 중 제일 한직이라 의외로 보이지만 그의 진급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맡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장으로 진급해야 되는데 빈 자리가 2군 사령관 밖에 없었던 것. 3군 사령관 최세창(하나회 13기)의 임기가 1년 반, 1군 사령관 안필준(하나회 12기)의 임기가 1년이나 남아 있어서 1년을 더 기다리느니 2군사령관으로 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중장 진급 때부터 14기 선두주자로써 13기 선두주자를 1년차로 추격하기 시작했던 이종구는 대장 진급 때는 13기 선두주자를 불과 6개월차로 추격하고 있었다. 공석이 발생해야 진급할 수 있는 대장 계급이라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1년 이상 텀을 두는 것이 기본인데 반란 공신이자 전두환의 총애를 받아 13기 선두주자로 가파르게 달리던 최세창만이 이종구 바로 앞에 있었다. 11기 선두주자 정호용과 12기 선두주자 박희도의 간격이 2년, 박희도와 최세창의 간격이 또 2년인데 이종구는 불과 최세창과 6개월차였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동기생들 중 그 누구도 이종구를 따라오지 못했는데 이미 소장, 중장 때부터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14기 2번째 대장 민경배가 이종구 진급 2년 후에야 대장으로 진급했다.[9] 군사 정권에서 최고 실세 보직인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을 모두 역임한 인물은 한국군 역사상 이종구가 유일하며 지나친 권력을 갖게 될 것에 대한 견제를 위한 암묵적인 방침인데 이것을 깨뜨린 유일한 인물이다. 선배 노태우가 수경사령관, 기무사령관까지는 모두 지냈는데 육군참모총장까지 맡을 경우 너무 힘이 쏠릴 것을 염려한 전두환계의 견제를 받아 반강제로 예편한 바 있다.[10] 하지만 최세창도 나중에는 노태우에게 부름을 받아서 국방부 장관으로 금의환향한다.[11] 전두환의 직계였지만 노태우의 경북고등학교 후배였던 이종구는 노태우에게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노태우는 마찬가지로 전두환계 하나회 군맥의 중간 보스인 김진영도 끝내 버리지 못했다.[12] 그러나 후방에 군단을 2개씩이나 두는 것은 실용성이 적다는 비판을 받았고 2000년대 이후 국방 개혁의 일환으로 제9군단제11군단은 해체되었다.[13] 전두환계 군맥 중 노태우에게 굽히지 않았던 박희도는 육군참모총장 임기를 끝내지도 못하고 중도 경질되었고 이후로는 정치권에도 들어오지 못하며 완전히 잊혀진 신세가 되고 만다. 특전사령관 직에서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좌천된 이후에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온 노태우를 대놓고 엿먹인 민병돈은 이 사건의 여파로 초기에 숙청당했다. 하지만 이종구는 전두환 라인이었음에도 경북고등학교 인맥으로 노태우와도 얽힌 덕분에 숙청을 면했다.[14] 노태우의 9공수여단장, 9사단장 시절 직계 부하들이다.[15] 예를 들어 하나회 15기의 선두주자는 전두환계 고명승이었는데 이진삼은 1차 진급한 고명승보다 대장을 1년 반이나 늦게 단 4차 진급자였지만 노태우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고명승이 예편하고 반년이 지나서 육군참모총장을 차지했다.[16] 당시에는 국방부 장관보다는 육군참모총장의 권한이 훨씬 컸고 군의 최고 실세는 육군참모총장이었다. 하지만 이종구는 국방부 장관이 된 후 국방 개혁의 흐름을 틈타 장관의 권한을 확대하고 육군참모총장 위에 서려했다. 이진삼과 이종구는 여러모로 악연이었는데 육군참모총장 시절 육군참모차장으로 이진삼을 휘하에 둔 이종구로서는 이진삼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도 있었다. 1988년 오홍근 테러사건 당시 책임자였던 이진삼의 동생인 이진백 정보사령관(갑종)의 군복을 국민 여론을 구실로 벗긴 장본인이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구였다.[17] 둘이 싸운게 나름 유명해서 훗날 이진삼이 기자들한테 '내가 이종구씨랑 사이 안 좋은거 다들 알잖아요?'라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