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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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高因厚)의 후손이다.[1]
2. 생애
1935년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상림리 상석교마을 출생.# 장세동과 마찬가지로, 영남 출신들 위주의 신군부에서 호남 출신이었던 드문 케이스. 전주사범학교, 육군사관학교 15기. 동기인 민병돈, 이진삼, 김상구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소속으로 반란에 직접 가담했다. 역시 하나회 멤버인 당시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준장과 함께 경호실 병력들을 이끌고 무단으로 출동하여 육군본부 헌병 경호대장 구정길 중령[2] 예하의 헌병 병력을 강제로 제압하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머물된 국무총리공관을 접수했다.
이 공로에 힘입어 전두환 정권 때 15기의 선두주자로서 승승장구했으며 군사 정권에서 요직 중에 요직인 수도경비사령관,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을 모두 역임했다.[3] 5공화국 내내 승승장구한 전두환계 군맥에 속했으나, 같은 전두환계이자 육사 동기 민병돈 특전사령관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 때 전두환이 내린 군 유혈 진압 명령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전두환은 퇴임 직전, 퇴임 이후 자신의 세 확보를 위한 조치 중 하나로 고명승을 대장 진급시키며 (육사 15기 최초로 대장에 올랐다. ) 군사 정권의 요직인 제3야전군사령관에 임명했다.[4] 전두환은 그 외에도 군사정권의 핵심 요직들에 자신의 직계 군맥들(박희도 참모총장 유임, 최세창 합참의장 임명, 고명승 3군사령관 임명, 최평욱 기무사령관 임명, 김진영 수경사령관 임명)을 깔아놓고 노태우에게 이임했다.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전두환의 태도에 노태우가 분노했을 것은 당연지사였고 노태우는 취임 후 첫 정기인사에서 박희도를 경질하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이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군맥(9.9 군맥)으로 채워넣는다. 전두환의 직계 고명승은 경질되지 않고 3군사령관으로서 2년 임기를 채웠지만 이후 영전하지 못했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꿈을 이루지 못했으며 3군사령관을 끝으로 전역하였다. 5공 내내 선두주자였던 그가 전역한 후 6개월 뒤, 5공 내내 한직을 멤돌았으나 6공에서 승승장구한 노태우계 군맥의 직계인 육사 동기 이진삼이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5]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전라북도 부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희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김진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허화평, 허삼수, 정호용, 권정달 등 다수의 쿠데타 가담자들이 6공화국에서도 최소 1번 국회의원에 당선된 반면 하나회에서도 몇 안되는 호남출신인 고명승은 신군부와 5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컸던 고향의 분노를 이겨내지 못했다.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음에도 당시 다른 가담자들과 달리 기소되지 않아서 논란이 되었다. 한편 이 때 그의 비서를 지낸 김종규는 이후 민선3기, 민선6기 무소속 부안군수를 재임하였다.
색깔론을 떨쳐버리기 위해 군출신을 영입하려던 DJ측이 지연(호남출신)을 연고로 여러번 영입하려고 했으나, 전두환과의 의리를 지켜 DJ 진영에 가담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전두환의 충신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전두환 자체가 흑역사이기 때문에..
한편 아내가 척수경막증으로 장애를 갖게 되었고, 병수발하면서 쓴 에세이 "휠체어에 사랑을 싣고"라는 수기가 1990년에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별하고 만다.[6] 그의 육사동기들도 아내와 사별한 인물들이 많다.[7]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1] 엄밀히 말하면 고경명 차남 고인후(高因厚)-고인후 3남 유계(柳溪) 고부즙(高傅楫)-고부즙의 적장손 고세형(高世亨)-고세형 3남 고응익(高應翼)의 후손.#[2] 진압군 측 장성인 김진기 헌병감 직속 부하[3] 수경사령관과 기무사령관은 군사 정권에서 실세 자리이기 때문에 두 자리를 모두 역임하는 건 실세 of 실세라는 뜻[4] 3군사령관은 야전군사령군 중 수도권을 방위하며 군사정권의 기반이 되는 핵심 요직이다.[5] 같은 하나회였지만 노태우계였기 때문에 5공 내내 소외되었던 이진삼은 동기인 고명승보다 중장은 1년, 대장은 1년 반이 늦었지만 마지막에 참모총장이 되며 역전한다.[6] 91년 12월 23일 향년 53세[7] 민병돈, 이진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