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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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군인, 前 관료, 前 정치인.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있던 시절, 그의 비서실장으로 지냈으며, 12.12 군사 반란의 실무자로서 반란을 기획하고 설계하였다.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전두환의 최측근으로써 청와대의 실세로 지냈다. 제5공화국 초기에는 허삼수, 허문도 등과 함께 '쓰리 허'라 불리며,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결국엔 전두환의 눈 밖에 나면서 좌천되었다.[2]
2. 생애
1937년 경상북도 영일군 장기면 계원리(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계원리)#에서 태어났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중학교, 포항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17기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동기 김진영, 허삼수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으며 허삼수와는 단짝이었다. 1979년 10.26 사태와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대령)이었다. 말하자면 독재 정권의 개국공신인 셈으로 1980년 9월 준장 진급 및 동시 예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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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비서실의 '비서실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대통령비서실 직제에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직책은 없었다. 말하자면 전두환이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비서실 보좌관이라는 없던 직제를 일부러 만들어 허화평을 임명한 것이다. 제5공화국 초기 허화평의 위상과 권력이 얼마큼 컸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청와대의 다른 보좌진들은 별도의 건물에서 지내는데, 허화평은 청와대 본관에서 전두환과 함께 근무했다. 한 마디로 혼자서 실질적인 청와대 핵심 기획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직급만 차관급이었지, 실질적으로는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 급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의 허화평은 사실상 전두환 정권의 2인자나 다름없었으며, 반란의 실무자로서 박정희를 보좌하여 2인자가 된 김종필과 비슷하다. 허삼수, 허문도 등과 '쓰리 허'로 불리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허화평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이 대두되자 1981년 12월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제1수석비서관으로 좌천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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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좌천되었다는 평가를 받던 수석비서관 시절 간담회에서의 모습으로[4] 좌천된 상태에서도 저 정도의 위상이라면 실세로서 잘나가던 시절에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견제 기회로 인식하고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쓰리 허가 너무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생각하던 전두환의 눈 밖으로 완전히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82년 5월 대구직할시장으로 가있으라는 사실상의 좌천성 인사를 받게 되지만, 이를 아예 무시하며, 전두환이 그럼 국세청장을 맡으라고 하지만, 이 역시 거부하고 1982년 12월 정무제1수석비서관에서 사임하게 된다. 이 때 공백이 된 대구직할시장 자리에는 이상희[5] , 국세청장 자리에는 하나회 출신 안무혁이 앉게 된다. 사실, 대구시장과 국세청장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요직이다.[6] 하지만 허화평은 청와대 밖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듯 하다.
이후 허삼수와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헤리티지재단의 연구원으로 있다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국책 연구소인 현대사회연구소장에 부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2년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제14대 대통령 선거 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으나, 1995년 김영삼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법 처리 조치로 기소되었다. 이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옥 중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가 이후 사면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18년 KBS가 제작한 서울올림픽 개최 30주년을 기념해 만든 다큐멘터리 88/18에 출연해 올림픽 유치 배경 등을 술회했는데 이 때 했던 말이 잠깐 화제가 됐다.
'''"언제 대한민국이 준비해놓고 뭐 제대로 한 일이 있나요? 우리는 해놓고 봤다고. 우리는 그것 밖에 길이 없는 나라야"'''
3. 대중매체에서
- 2005년 방영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이진우가 허화평을 연기했는데 제5공화국 내 개혁가 컨셉으로 나와서 그런지 허화평 본인이 '실제 자신보다 더 멋지게 나왔다'면서 극찬했다고 하며 이것과는 별개로 드라마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7] 사실 멋지게 그려졌다고는 하나 제작진이 허화평을 평가하는 관점은 '독재자의 하수인인 주제에 몇 가지 혁신적인 주장을 했다고 개혁가로 포장되다니 어이가 없다'에 가까우며 제21화에서 내레이션으로 '그들만의 개혁'이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비판했다. 그 외에도 허화평이 금융실명제에 반대하자 이학봉이 김재익에게 "우습네요. 그렇게 개혁 개혁 노래 부르더니."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고 결정적으로 허화평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에 나오는 김영삼과 상도동계 측근들과의 대화 씬에서 이와 같은 내용으로 허화평을 평가하는데 이는 제작진이 사실상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지막에는 청와대에서 완전히 나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이원조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는데 "당신을 잊지 않겠소, 영원히"라고 영어로 전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이원조가 전두환에게 허화평 숙청을 건의했기 때문.
(뒤쪽은 차광수가 연기한 허삼수)
- 위에서 언급된 전두환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했었다는 부분이 반영되어서인지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는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으로 패러디되었다. #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여담
-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 키가 매우 작은 편이었다. 160cm 조금 넘는 정도.
- 5촌 조카로 허명환이 있다.
- 군사 정권의 인사답게 민주화 운동에 시종일관 부정적인 논조여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월간조선》은 2012년 3월호와 4월호에 걸쳐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과 심층 인터뷰를 했는데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은 "5.18 민주화운동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당시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 지령이 급증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암호 지령이 급증한게 사실이라 해도 북한이 5.18 민주화운동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당연히 북한 간첩을 통해 남한 상황을 체크해 볼 것이 아니겠는가? 만에 하나 북한 개입이 사실이라면 왜 본인이 재판받을 때는 말하지 않다가 한참 지난 2012년이 되어서야 발설한 것인지에 대한 부분도 고려해보면 회고의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
-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요동치던 당시 허화평은 TV조선의 단독 인터뷰에 응했다. 이 자리에서 허화평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의 정신적 포로라고 증언하면서 이 같은 사건으로 한국의 정치적 후진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왜 최태민을 잡아넣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반문에 허화평은 이전 정권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놔뒀다는 식으로 발언했다. 제5공화국의 1번째 과업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청산하는 일이었음에도# 파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제대로 수사해 청산하지 않고 놔둔 셈. 허화평은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와 비리의 온상이 '새마음봉사단'이라고 보았다. 허나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 달라는 수준에서 처리하고 묻어버린 것이 수십년 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잘못된 판단을 한 셈이 되었다.
- 제5공화국 시절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매체에 노출되는 빈도가 매우 적은데 반해 허화평은 방송 등 언론 노출 빈도가 높은 편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쾌도난마에 출연해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을 강도높게 비판한 바 있다.[11] 또한 대한민국은 권력의 문고리만 잡으면 출세할 수 있는 나라라며 제왕적 대통령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제5공화국 정치인답지 않게 나름의 정치 철학과 논리를 가지고 있는 편이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구속 기소되었을 때도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나는데 법정에서 다른 피고인들은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는 와중에도 허화평만은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1996년 총선에서 무려 옥 중 당선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하면서 국회의원직 상실. 이후에도 보수 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종편 채널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데 말빨이 기가 막혀서 진보 성향 PD나 패널들이 애를 먹는다고 하는데 앞서 언급했던 88/18 다큐멘터리에서도 1989년 제5공화국 청문회 당시의 당당한 태도라든가 팔순이 훌쩍 넘은 2018년 시점에서의 유머 섞인 자기 소신을 보여주는걸 보면 과연 명불허전.
[1] 1997년 12.12군사반란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아 의원직 상실[2] 박정희 정권과 비교해보면 쿠데타의 공신으로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하다가 토사구팽당한 김형욱과 비슷한 사례. 다만 허화평은 김형욱과 달리 공직에서는 몰라도 사적으로는 전두환과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는 점에는 차이가 있다.[3] 이후로 대통령비서실장은 1982년 1월부터 이범석이 새로 도맡기도 하였다.[4] 첫 번째 사진에서 허화평 오른쪽에 위치한 인물이 바로 노태우의 오른팔로 활약한 박철언인데 제5공화국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재직했다.[5] 이상희 대구직할시장이 대구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을 고려하면 대구 입장에서는 결과론적으로 다행.[6] 직할시(지금은 광역시)의 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으며, 누군가에게는 꿈의 자리가 될 법한 자리이며, 국세청장 자리는 말이 필요없는 요직 중의 요직이다. 박정희도 국세청장 자리에 최측근인 이낙선을 임명했다.[7] 마지막 화가 끝나고 나오는 정정보도에서 허화평과 허삼수의 지분은 압도적으로 많다.[8] 1992년 민주자유당 입당[9] '''옥중출마 당선'''[10] 1997년 의원직 상실
(12.12 군사반란 재판)[11] 당시 정무수석이던 조윤선이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자 "정무수석쯤 되면 대통령이 안 만나 주더라도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된다."고 일갈했고 새누리당에 대해서도 "본인들이 앞장서서 이 정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지 '친박'이니 '비박'이니 싸우기만 하면 안 된다."며 비판했다.
(12.12 군사반란 재판)[11] 당시 정무수석이던 조윤선이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자 "정무수석쯤 되면 대통령이 안 만나 주더라도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된다."고 일갈했고 새누리당에 대해서도 "본인들이 앞장서서 이 정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지 '친박'이니 '비박'이니 싸우기만 하면 안 된다."며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