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통제

 


1. 개요
2. 실제 사례
3. 필요성
3.1. 역사적 사료
4. 역사
5. 각국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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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몸으로 의장대를 사열하는 카르메 차콘 스페인 국방장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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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출신[2] 미국 국방장관 척 헤이글

1. 개요


Even when there is a necessity of military power, within the land,...a wise and prudent people will always have a watchful & jealous eye over it.

비록 이 땅에, 군사력이 필요할 때라도,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들은 항상 조심스럽고 질책하는 눈으로 군대를 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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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애덤스, Signer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1768년.

'''문민통제'''()는 군대에 대한 문민(文民) 혹은 시민(Civilian)의 통제를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운영 과정에 군인의 개입을 배제하고 민간인(문민)이 국군의 통수권을 가진다는 원칙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아주 중요한 원칙이다.
신생국이나 개발도상국일수록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 군대의 정치개입 위험성이 높으며 민주주의가 잘 돌아가는 나라일수록 문민통제가 잘 이루어진다. 문민통제는 일단 통수권자인 정부수반에 의해 드러나긴 하지만 그 핵심은 '''국민'''이 군을 통솔하고 군은 이에 복(服)하는 데에 있다.[3] 문민지배, 또는 문민우위(Civilian Supremacy)라고 하기도 한다. 문민통제의 요점은 안보를 다른 곳이 아니라 국가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2. 실제 사례


'문민통제 원칙을 적용하더라도 민간인 국가원수의 군통수권은 선언적인 것으로서 실제 군사행동 실무는 군인들이 맡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각 군이 수립하고 실시하는 세부 전략, 작전, 전술 그리고 이에 따른 군사행동 하나하나 전부 민간 국가원수의 지시에 따르는 거냐?'는 의문을 품는 경우가 있는데 문민통제 원칙은 명목상의 선언적인 것이 아니라 군사 행동의 모든 차원에서 실제로 그렇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다음의 기사를 보자.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은 5일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이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시험 발사를 선언한 데 대해 이례적으로 북한 지도부를 겨냥한 한미 연합 탄도 미사일 사격 훈련을 지시하는 등 강도 높은 경고를 보내고 있다. 전날(4일) 문 대통령의 지시에 이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동의로 한미 미사일 부대는 5일 북한의 ICBM 시험 발사에 대응해 동해안에서 한미 연합 무력시위를 실시했다.

▶ 文대통령, 이례적 미사일 발사로 北에 '레드라인' 경고 (뉴시스 2017년 7월 5일) link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은 가나해역에서 피납된 마린711호 사건에 관해 보고를 받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에게 청해부대를 피납 해역으로 급파하여 피납된 우리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고 1일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서면 브리핑을 통해 밝혔다. 이어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합참은 동일 오전 9시 오만 살랄라항 앞바다에서 임무수행 중이던 문무대왕함을 피납 해역으로 이동하도록 긴급지시했다”며 “문무대왕함은 현재 탄자니아 인근 해역을 통과하고 있으며 4월 16일경 사고 해역에 도착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 가나해역서 우리 선원 피랍에 문재인 대통령 ‘문무대왕함’ 출동 긴급지시 (쿠키뉴스 2018년 4월 1일) link

문민 국가원수가 '특정한 군사행동(작전)을 명령'하고 그에 따라 군사행동이 실시되는 사례들이다. 위의 사례에서 한미 연합 미사일 발사 훈련은 사전에 군에서 준비한 계획을 대통령이 승인한 것이 아니라, 돌발사태(북한의 도발)에 대응하여 국가원수가 직접 명령한 것이다. 또한 청해부대의 가나 해역 출동도 문민 국가원수가 지시하여 이루어진 사항이다. 이때는 심지어 사안의 긴급성을 고려하여 '''국방부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군에 출동 명령'''을 내리는 방식이 되기도 했다.
즉, 문민 통제는 원칙적으로 '''개별적인 작전과 전술 행동 하나하나까지 전부 문민 국가원수가 명령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정보 통신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는 최전선에서 이뤄지는 특정 작전의 진행 자체를 실시간으로 (수천킬로 후방에 있는) 문민 국가원수의 통제하에 두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 같은 경우 오사마 빈 라덴 사살(넵튠 스피어 작전)이나 알 바그다디 제거 같은 초 중요 작전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실시간으로 작전 현장을 지도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 군의 최고 수뇌부에는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이 없다. 군 최선임자들은 '참모총장' 즉 '참모들의 장'에 불과하여, 일선의 군 지휘관들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으며, 문민 국가원수에게 조언하는 위치에 불과하다. 크고 작은 모든 명령은 문민 국가원수가 직접 내리고 이 명령이 일선 지휘관들에게 바로 전달되는 구조이다. 또한 비군인출신 국방부 장관이 군대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억누를 수도 있다. 이 대표적인 사례가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 당시 미군 합참의장의 승인까지 통과한 노스우즈 작전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미 군부는 전쟁을 하고 싶어서 안달 나 있었다. 노스우즈 작전이 가장 대표적이었고,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도 군부는 일관되게 전쟁, 전쟁, 전쟁이었다.[4]

3. 필요성


군(軍)이 스스로 인사와 행정을 결정하는 폐쇄적인 집단이 되면 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 세력'이 된다.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군은 가장 강력한 권력의 근원이다. 문민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군은 무력을 가진 독자적 정치세력이 되어 실질적으로 정부를 능가하는 위상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여차하면 정부를 무력으로 엎어버릴 수도 있는 '군부'가 된다. 문민통제가 부실하다면 민주주의에 기반한 민간정부는 군부와 대립 시 대응할 무력이 없다 보니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하다.

전쟁정치의 연장이다.

- 클라우제비츠 [5]

또한 폐쇄적이고 권력화된 군은 투명하고 객관적인 인사와 여러 검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내부의 파벌에 따라서 정책과 인사가 좌우되는데, 자연스럽게 파벌 간의 대립이 강해지며 무능똥별들이 상층부로 올라가 부패가 극심해진다. 또한 군 조직과 병사의 사유(私有)화가 이뤄져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무력기반이 된다면, 그 본연의 목적인 국가안보(國家安保) 보장기능은 크게 떨어지게 된다. 나아가 견제 받지 못한 군은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되어 개인의 인권, 사회의 공동가치, 과장되게 말하면 인류의 번영을 위협할 수 있는 오히려 의 근원이 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6][7] 결국 군(軍)은 그 속성상 전쟁을 야기할 수 있고, 그 끝은 군인 자신의 패전과 죽음을 넘어 최악의 경우 해당 국가민족멸망까지 불러 올 수 있다.

La guerre! C'est une chose trop grave pour la confier à des militaires.

전쟁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군인들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다.

-조르주 클레망소

또한 군(軍)의 전략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도 군 통수권은 민간정부가 쥐고 있는 것이 효율적이다. 전략적 우위를 잡기 위한 정치·외교적인 능력이나 전쟁을 이끌어 갈 물자 생산과 인력 확충을 위한 내정에는 민간정부가 더 능숙하기 때문이다. 문민통제가 잘 안되어 큰 계획 없이 근시안적인 전략을 고수하던 일본제국의 군부가 전쟁을 어떻게 말아먹는지 잘 보여준다.[8] 2021년 미얀마 쿠데타도 문민통제가 없는 군대의 현실 중 하나다. 군부에서 의회 의석도 차지하는데, 총선에서 지자, 쿠데타를 일으킨다. 심지어 쿠데타가 헌법에 군부의 권리로 못박혀 있다.

3.1. 역사적 사료


과거 정치인이 군인을 겸하는 사회였던 고대 로마조차도 공화정이 잘 굴러가던 시절에도 엄연히 순수 군인으로서 최고위직은 1개 군단(레기온)[9]만을 지휘하는 군단장이었고 이를 초과하여 복수의 군단을 지휘통제하는 이른바 "장군"이 되려면 민간 관직인 한해 2명씩 선출되는 집정관이나 8명 선출되는 법무관의 직위를 가져야만 했다. 대규모 전쟁으로 사령관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터져도 법무관이나 집정관을 경험한 정치인에게 '전직 집정관/법무관' 지위를 주어 편법적으로 군단 지휘권을 줬을 정도로 군 통제에 엄격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설립한 후 본국 이탈리아에서의 유일한 무력집단인 프라이토리아니를 창설했지만, 그 본인도 '통제 받지 않은 군'이 얼마나 위험한지 내전들을 통해 알고 있었던 바, 가급적이면 원로원이 반대하기 어려운 판을 짜놓고, 프라이토리아니는 은근한 위협으로만 써먹었을 뿐,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하지 못하게 조정해놓았다. 하지만 후임인 티베리우스 황제가 프라이토리아니가 정치에 개입하는 선례를 만들어버렸고,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해체하기 전까지 아주 화려한 황제 교체 신공을 선보인다.
제국주의 시대 문민통제를 받지 않는 군이 폭주하는 것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가 프로이센이며, 정확하게 그 테크를 밟아나가다가 제대로 멸망한 사례로 일본 제국도 있다. 오늘날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육군대신/해군대신은 현역 장성들만 맡을 수 있다는 제도를 악용해서 민간인 출신 총리들을 맘대로 가지고 놀았고[10] 엄청난 군비 확장과 대외 전쟁을 벌여 수 많은 사람을 죽게 하였다.
현재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문민통제가 강력하기에 정보공개 차원에서 국방부나 방위성 사이트에 무기 획득 계획 등을 면밀하게 공개하며, 인사 문제도 투명하게 공개한다. 이것은 미군/인사명령이나 방위성/인사발령 항목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며, F-35처럼 대량의 공개된 정보 때문에 도리어 문제가 된 사례까지 존재한다. 영미권의 정치학 도서에서는 ''''군대는 국가를 지키는 중요한 힘인 동시에 여차하면 민주주의 정부를 전복할 위험성이 있는 잠재적인 사고뭉치''''라는 뉘앙스를 전제로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4. 역사


과거에는 이나 귀족 등의 정치인이 군인을 겸임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이 시점에서도 조차 '''군인'''이 정치인을 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생업이 순수하게 유목과 수렵에 달려 있던 지역이었다면 모를까, 농경사회가 되면서 단순히 무력만으론 사회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고대시기엔 종교지도자를 통한 문민통제가 이루어지다- 기술이 발달하고 각 분야가 고도화되면서 직업군인의 분리 필요성이 급증하게 되었다.
영미권에선 민주주의의 원칙하에서 국민의 대표인 정치인이 군부를 통제하는 것을 말하는 의미가 강해지기도 한다. 영국에선 국회와 왕의 싸움,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 등으로 상비군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고 군사정책이 내각으로 넘어오고 인사권 등은 국왕에게 남았다. 그러나 19세기를 거치면서 군 인사권도 정치인들에 의한 통제로 넘어오게 된다. 미국의 경우엔 국가 창립 시기부터 강력한 상비군을 만들지 않았고 통수권은 민간 정치인에게 위임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그때문에 선거에 의해 선출된 미국 대통령이 전쟁을 지도했으며 장군들은 대통령의 참모였다. 다만 해외에서 전투를 치르는 파병 미군의 경우엔 본국의 통제를 무시한 사례가 꽤 있다. 물론 그러던 이들은 대부분 훅 갔다. 예로는 더글러스 맥아더[11], 가깝게는 스탠리 매크리스털[12]이 있다.
중국의 경우, 당나라환관을 감국으로 사용하여 오늘날의 문민통제와 비슷한 정책을 실시했다. 송나라에서 문관을 군관보다 우위에 놓은 것도 문민통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또한 프랑스 혁명 시기의 파견의원이나 공산권 국가의 정치장교 역시 극단적인 문민통제의 예로 들 수 있다. 쿠데타를 염려하여 군을 철저하게 제어한 것인데, 이렇게 까지 극단적으로 가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특히 송나라의 경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과거 고려의 경우 송의 제도를 따라 무신은 정3품 상장군까지만 승진할 수 있도록 하고, 실제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문관인 정2품 평장사를 상원수로 임명하여 총사령관직을 맡겨 무신의 최고위인 상장군이 부원수로서 상원수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당장 귀주대첩의 강감찬과 여진정벌의 윤관 모두 문관 출신이다. 흔히 무신정변이 그로 인한 무신 홀대로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문민통제 기반의 문무 군형이 인종 대부터 이리저리 뒤흔들리면서 혼란이 쌓인 결과에 가까웠다고 한다.
이건 조선도 마찬가지라 4군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역시 문신이었고, 현대의 국방부 장관직에 해당하는 병조판서 역시 문신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무신으로서의 최고위직은 육군도원수(정2품)와 수군의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이며, 그나마 도원수는 임시 관직에 가까웠고 문신도 재직이 가능했다. 하지만 고려와 달리 품계 자체는 문/무신이 동일하게 받을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만 해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재직시절에 품계는 판서와 동일한 정2품 상계 정헌대부였으며, 전사 이후에는 영의정과 동일 품계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를 추서받았다. 또한 도체찰사, 체찰사라는 관직이 있어 왕의 명을 받아서 할당된 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여 다스렸고, 정승, 즉 문신 최고위직이 겸임했다.

5. 각국의 사례



5.1. 대한민국




5.2. 미국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혹은 "전쟁에는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더글러스 맥아더[13]

미국은 건국부터 문민통제를 했고 굉장히 중요시한다. 그 때문에 국방장관에 군인 출신이 앉으려면 전역 후 7년이 지나야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현역 장성 출신 국방장관은 조지 C. 마셜 원수와 제임스 매티스 대장 밖에 없다. 정확히는 1947년 이전엔 미국 국방부처럼 통합된 개념이 아니라 육군성, 해군성 등에 육군장관, 해군장관 등이 따로 있었으며 1947년에서야 국방부가 생겼고 국방장관도 생겼다. 미국 법률은 과거 10년간 현역 군인이 아니었던 자만을 국방장관(과 3군장관)으로 임명할 수 있게 하는데 3대 국방장관인 조지 C. 마셜 육군원수[14]국무장관을 거쳤던 경험과 당시 국방부가 '제독들의 반란'이라 기록된 해군과 공군의 집안싸움, 소련의 핵개발, 한국전쟁 발발 등 심하게 몸살을 앓던 시기라서 특례로 인정되었다. 마셜 이후엔 장성 출신이 국방장관이 된 케이스는 제임스 매티스 대장 외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출신들이 장관에 임명된 경우는 많은데, 이들은 위관에서 영관급 장교 선에서 군생활을 마친 이들이 대부분이며 급기야 척 헤이글의 경우는 '''병사''' 출신으로서 국방장관까지 오르는 초유의 기록이 나왔다.
다만 이것도 약간의 허점이 있는데, 예비군 신분으로 있다가 퇴역하고 국방장관 되는 건 가능하다.[15] 오늘날에는 조지 워커 부시 행정부에서의 인상이 짙은 도널드 럼즈펠드의 사례가 대표적인데, 젊은시절인 1975년(...)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역대 최연소 국방장관을 지냈던 인물이기도 한 럼즈펠드는 해군 항공대 예비군 조종장교로서 빠른 진급을 하여 대령까지 올랐지만 계급은 대령이지만 문민통제 걸리는 건 아니라구요 논리로 퇴역과 동시에 국방장관에 오르는 게 가능했다. 또한 육해공 3군장관이 공석이 될 경우 그 직무대행을 3군부 차장이 아닌 각군 참모총장이 맡는 것도 가능은 하다. 대표적인 예가 테일후크 스캔들 당시 해군참모총장 프랭크 켈소 제독으로, 테일후크 스캔들 당시 해군장관이 잇따라 경질되면서 하도 인물이 없다보니 잠깐 동안 해군장관 직무대행을 하기도 했다.
존 F 케네디 시절 국방장관으로 지명된 로버트 맥나마라 또한 예비역 공군 중령 출신인데 사실상 비전투자원인 분석자원으로 분류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16]. 어쨋든 군인이라고 보기에는 아주 힘든 맥나마라도 국방장관으로 등용이 되었다. 국방장관으로 취임하기 직전의 직업은 자동차 회사인 포드의 경영자였다. 그리고 맥나마라 국방장관 시절에 쿠바 미사일 위기베트남 전쟁과 같은 매우 굵직한 냉전 전쟁이 치루어진다. 맥나마라는 베트남전쟁 참전은 막지 못했지만, 맥나마라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몇 안 되는 비둘기파로 케네디를 지원해서 3차 대전 발발 위기를 넘겼고, 그 이전부터 노스우즈 작전으로 대표되는 전쟁광 군부의 광기를 억누르는 역할을 했다. 특히 후자는 문민통제가 왜 필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맥나마라는 이후 세계은행의 초대 총재로 간다.
미국의 문민통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군 최선임인 합참의장이나 각 군 최선임인 육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 공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주방위군총감 등에게 군령권이나 군정권이 없다는 것에 알 수 있다. 한국에선 각 군 참모총장이 갖는 군정권을 문민인 각 군장관이 지니며 합참의장이 지닌 군령권은 문민인 국방장관이 갖고 있다. 통합군사령관이 작전권을 갖고는 있지만 군 전체가 아닌 지역별로 구성된 통합군의 작전권이며 통합군의 특성상 육해공 별로 하위 지휘관을 따로 두게 된다. 통합군사령관은 이를 조율해야 한다. 이런 복잡화된 구조와 문민들이 상위를 차지하는 조직 구성 덕분에 미국은 정치장교 없이도 군을 통제하고 있다.
빡빡하다 싶을 정도로 문민통제가 이뤄지고 군인들의 의견이 국회나 백악관까지 반영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군인들의 불만이 있기도 하다. 스탠리 매크리스털ISAF 사령관은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문민 출신 정책입안자를 모욕하는 발언을 해 경질되었다. 오바마 까기 좋아하는 공화당에서도 일절 실드쳐주지 않았고 매크리스털 장군도 본인이 선을 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깨끗하게 물러났다.
국방장관과 3군장관에 대해서 이런 빡센 문민통제가 가해지는데 미국 대통령이야 오죽하랴. 물론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전쟁영웅도 얼마든지 국민의 지지를 받아 선출될 수 있는 국가원수라서 국방장관과 일대일로 대응하기는 힘들다. 가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까지 직업군인 출신이 아닌 대통령은 빌 클린턴버락 오바마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육군(아이젠하워, 레이건)이나 해군(존 F. 케네디, 지미 카터 등), 혹은 주방위군 공군 장교(조지 워커 부시)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현역 군인으로서 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되더라도 임기 시작 전까지는 퇴역을 해야 한다. 역사상 한번 뿐인 사례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종신계급'''인 육군원수로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8년 임기 동안에는 군복을 벗고 민간인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퇴임 후에 원수 계급을 회복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중엔 이러한 문민통제가 다소 느슨해졌다. 정치적으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이 반트럼프적 행보를 보인 반면, 군부는 트럼프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보여왔는데, 이러한 배경이 영향에 미쳤는지 트럼프 정부의 인선에서 대규모의 군부 출신 인사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2016년 12월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2013년에 퇴역하여 퇴역후 만 3년밖에 되지 않은 제임스 매티스 예비역 해병대 대장을 국방장관으로 지명했음을 선언하며, 1950년 이래로 67년만에 군부출신 국방장관 임명을 예고했다.[17] 게다가 역시 퇴역 해병대 대장인 존 켈리를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퇴역 육군중장인 마이클 플린[18]을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한 것을 감안하면 트럼프 정권하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후 2018년 12월 대통령과의 관계악화로 인해 제임스 매티스는 사임했다. 민간 출신의 인물인 마크 에스퍼가 국방장관으로 재임하다가 트럼프 재선 실패 이후 해임했다.

5.3. 일본


문민통제를 지키지 못해 군부의 폭주를 저지하지 못했던 국가 중의 하나다. 일본제국 시절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을 받아 군국주의가 되었고 육,해군은 현직 장성이 아닌 민간인은 임명도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군 업무 일체에 관여조차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를 무기로 군부내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일이 예사였고, 현직 육군대장이 육군대신과 내무대신, 총리대신까지 싹 쓸어먹는 막장의 최종테크를 타는 상황이 태평양전쟁 패전 전까지 이어졌다.
일본의 경우 군대를 신성화하여 군대가 사회 전반을 이끌게 되는 일본식 군부 통치 시스템이 군국주의의 근원 중 하나가 되어 특히 큰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러한 군부 통치는 결과적으로 전체주의가 일본의 무사도(사무라이)와 결합하여 군국주의로 바뀌는 결과를 만들었다. 1930년대 일본은 철저한 병영 사회였고, 군대는 신성화되었으며 민간이 군대를 따라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흘러갔다. 그 결과는 군대를 신성화하여 군대가 사회 전반을 이끌게 되는 일본식 군부 통치 시스템의 성립이었다. 이리하여 민간 정부폭주하는 군대를 못 제어해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불러왔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의 구 일본군독일군과 함께 문민통제를 제대로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에는 일본의 역대 방위청 장관 및 2007년 방위성 승격 후의 역대 방위대신 11명 중 10명은[19] 모두 민간인 신분인 현직 중의원 국회의원이다. 노다 요시히코 내각 때 방위대신 모리모토 사토시가 3등공좌(공군 소령) 출신이긴 한데 전역한지 30년이 넘은 후였다. 방위청 장관 때 2등육위(육군 중위) 출신인 나카타니 겐이 방위청 장관을 맡은 적이 있긴 한데 전역 후 10년이 지난 후였다.[20] 일본에선 이 정도로 군물 뺀 인물들이 될 때도 문민통제 위반 아니냐며 반발이 일어났다.
방위성의 최상부는 의원들이 맡게 된다. 방위대신, 방위부대신, 대신정무관 2인 등 방위성 최상부는 중의원 의원들이 겸직하며 실무를 맡는 사무차관은 방위성 출신 승진자가 맡는데 사무차관이 통합막료장과 동급이다. 즉 제복군인 최선임이 방위성에서 서열상 다섯번째나 여섯번째가 된다.[21] 하지만 2015년 이 원칙도 무효화될 위기에 처했다. 야마구치대의 코케츠 아츠시(纐纈厚) 교수는 <도쿄신문>에 “문민 통제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할 무서운 개악”이라며 “역사의 교훈을 모두 부정하는 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기사 방위성에서 방위대신이 각 막료장들을 지휘할 때 관방장과 국장이 보좌하도록 되어 있어 문관우위였는데 이를 문관과 무관이 대등하도록 바꾸고 특히 부대운용에서 본래 방위성 운용기획국이 맡던 것을 통합막료장이 직접 하도록 바꾼다는 게 골자다.
미국식 문민통제를 따라[22] 유지되던 문민 우위가 흔들리고 있는 모양새. 결국 6월 10일, 위와 같은 내용이 담긴 방위성설치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23] 이후 이나다 도모미 전 방위대신은 극우 헤이트스피치, 자위대의 정치개입 및 파병 자위대의 PKO 일지 은폐 등 문제가 될 만한 발언과 행적을 보여 문민통제 약화의 대표적 실패사례로 꼽히게 되었다.
결국 2017년 8월에 제12대 방위대신이었던 오노데라 이쓰노리로 교체했다.

5.4. 공산국가


'문민통제'라고 하여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더 확고하게 적용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문민통제에 대해서는 사실 공산권이 서방세계보다 더 확고하다고 볼 수 있다. 문민과 군부 위에 '''공산당이라는 절대 권력이 있기 때문'''. 대부분의 공산국가 군대는 인민군의 형태로 당에 예속된 무장집단이다.
소련을 비롯하여 냉전시대 기준으로 3세계가 아닌 2세계에 해당했던 안정된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우 군부의 세력이 약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군사쿠데타"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성공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시도 사례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91년 소련 붕괴 직전에 일어났던 쿠데타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사건으로 군부 쿠데타가 아니다. 물론 제3세계이면서 사회주의를 채택했던 후진국들의 경우에는 (자본주의를 채택했던 다른 후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쿠데타가 빈발했지만 이거는 쿠데타 일으킨 군인들이 좌익이었던거라서 경우 자체가 다르다.
동독에서는 독일통일이라는 격변이 일어나는데도 동독 군부는 지나쳐 보일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오히려 통일운동 초창기에 동독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매우 격심해져서 동독 정부가 군 투입까지 고려했으나, 동독군의 야전부대 장병의 분위기가 '인민의 군대가 어떻게 인민을 공격한단 말인가?'라며 암묵적으로 반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 때문에 동독 정부는 군 투입을 포기했다.[24] 동독 군부는 동독 시민들의 통일 시위와 민간 정부의 통일 절차 진행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동독군이 공식 해체되는 그날까지도 반발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근무했다. 동독 외에도 동유럽 혁명 당시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각 국가의 정규군 역시 시민들의 혁명에 관여하지 않았고 혁명 이후 순순히 민주 정부의 통제를 받아들였다. 예외라면 국가 자체가 공중분해가 되어버린 유고슬라비아와, 차별을 참지 못하고 정규군이 아예 시민들의 편이 되어버린 루마니아 정도.
또한 민간인이라고 볼 수 있는 정치위원(정치장교) 출신자를 제외하고는 순수 직업 군인이 국가 원수 직에 오른 사례도 찾아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미국은 문민통제가 확고하다고 볼 수 있지만 출신 성분으로 따지자면 트루먼부터 지미 카터까지 무려 7명 연속으로 직업 군인 출신 대통령을 배출했던 반면, 역대 소련 서기장(국가원수)은 블라디미르 레닌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까지 전원이 쌩 민간인 내지는 이 정치위원 출신이다.[25] 이러한 공산주의 특유의 문민통제는 역시 '''정치장교 제도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소련뿐 아니라 정치장교 제도가 존재하는 체제가 안정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모두 나타나는 특성이다.'''
북한도 이 점에서는 정치장교 제도의 덕을 보았다. 하지만 그 후 선군정치로 나서면서 그냥 군사국가화되어버렸다. 군대는 꽉 잡고 있으면서 따지고 보면 신분 자체로는 민간에 더 가까운 당이 김씨 삼대 돼지들이 벗어내는 내외부적 여건으로 인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나라 전체를 병영국가로 만들어버린 그 자체로서 정치 체제 사상 상당히 특이한 경우다.

5.5. 스페인중남미


스페인군 또한 역사적으로 문민통제가 안되고 쿠데타를 밥먹듯이 해왔던 군대로 악명이 높았다[26]. 프란시스코 프랑코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부터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라 하여 정부에 불만을 가진 군인들이 공개적으로 (...) '''우리 쿠데타 한다 발표부터 먼저하고 정부를 뒤엎어버리는''' 요상한 형태의 쿠데타가 아예 하나의 정치적 전통으로 자리 잡았을 정도. 프랑코 이전부터 1932년에도 공화국 정부에 대한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고, 그 스페인 제2공화국 자체도 자유주의자, 공화파 군인들의 쿠데타로 성립된 정부고, 그 이전 부르봉 왕정 마지막은 왕실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 정치를 하다 실각당한 미겔 프리모 디 리베라였고, 또 그 이전 스페인 제1공화국도 쿠데타로 시작해 쿠데타로 끝났고, 또 그 이전 1854년 레오폴도 오도넬과 발도메로 에스파르테로의 쿠데타에 끝이 없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터진 쿠데타는 1981년의 23-F 사건으로 프랑코 사후 민주화 과정에 불만을 가진 군부 강경파들이 국회를 점거했으나 실패한 이후 아직까지 스페인에서 쿠데타가 재발한 적은 없다. 그러나 2017년을 뜨겁게 달군 카탈루냐 독립운동에 대해서 예전부터 공공연하게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협박성 발언을 쏟아 내는 등 아직까지도 유럽연합 국가 치고 프랑코 시절의 정치성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고 비판받고 있다.
스페인 군부의 엘리트주의적, 권위주의적 정치성은 또 라틴아메리카의 군인들이 아주 잘 물려받아 중남미 또한 문민통제란 개념이 죽으러 가는 곳으로 악명 높다. 중남미권은 당장 독립 투쟁을 주도한 세력들이 시몬 볼리바르호세 데 산 마르틴 같은 지도자들이 죄다 군인 출신이라 처음부터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호르헤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의 군부 독재자들에게 지긋지긋하게 시달린 아르헨티나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같은 군부 독재자에게 지독하게 시달린 바 있는 칠레 등은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꺼리는 편이다.
쿠바의 경우에는 성격이 애매한 편. 쿠바 역시 명색이 공산주의 국가여서 정치장교 제도를 통해 군부를 통제했지만, 동시에 다른 중남미권 국가처럼 피델/라울 카스트로 형제 본인들이 게릴라 군인 출신이어서 군부의 영향력이 상당하다. 통일연구원의 쿠바 정치 제도에 대한 분석 중 일부.
남미는 역사적으로나 현재에도 정치적 위기가 군부의 정치 개입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지내고 있다.#

5.6. 중화권


중국은 현직 인민해방군 상장국방장관을 맡는다... 그치만 당이 군을 확실하게 집어잡는다는 점에서 문민통제가 이뤄진다고 말하려면 할 수 있긴 하다. 중화민국군이 당군에서 국민군으로 편성되면서 당의 통제가 약화된 것과 달리 중국 공산당인민해방군을 확실히 통제한다. 정치장교의 파워 덕분. 애초에 인민해방군은 그 근본이 '''국군이 아닌 당군'''이라서 중국 공산당의 소유물이다.
중화민국군은 나라의 근본 자체가 군인의 집권에서 시작된 만큼 문민 통제에 있어서 엄격하다 할 수 없지만, 대만 정착 이후에는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 현직 중장이 국방차관을 맡는 일이 종종 있고 대장 출신이 전역하고 바로 국방장관이 되는 일이 빈번하다. 2013년 8월 8일~2015년 1월 30일 중화민국 제30대 국방부장을 역임한 옌밍(嚴明)은 취임 하루 전까지 제22대 중화민국 참모총장(합참의장)이었고(2013년 1월 16일~2013년 8월 7일) 그전엔 중화민국 제 4대 공군 사령관이었다(2010년 1월~2013년 1월 15일). 거기다 옌밍이 국방부장으로 취임한 이후 참모총장으로 지명된 가오광치(高廣圻)는 아예 옌밍 퇴임 이후 국방부장으로 취임했다. 다만 차이잉원 취임 이후 새로 임명된 펑스콴은 2006년에 제대 후 10년 후인 2016년에 국방장관이 된 사례라 조금 다르다.
싱가포르군의 경우에는 문민통제가 되는 편이다. 싱가포르 초대 국방장관인 고켕쉬(Goh Keng Swee, 吳慶瑞)는 싱가포르 의용군 부사관 출신이나 일제가 싱가포르를 침략하던 시절에 잠시 복무한 것이며 1943년 전역한 뒤 1965년에 국방장관이 됐으며 2003년부터 2011년까지 국방장관을 지낸 티오치히안(Teo Chee Hean, 張志賢)은 싱가포르 해군 제독으로 소장 출신이긴 하나 1992년에 전역한 뒤 정치인 생활을 거치고 11년이나 민간인 생활을 한 뒤에 취임했다. 그 외의 국방장관은 정치인들 출신이다.

5.7. 독일


독일군미군대한민국 국군의 절충형이다. 각 군은 참모총장이 지휘하고 그 위로 합참의장이 있다. 이런 점은 대한민국 국군과 비슷하다. 다만 이들은 각 군 참모총장의 계급이 중장이며 대장은 합참의장 혼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방장관은 '''민간인'''으로만 임명하며 군복무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임명된다. 이런 점은 미군과 비슷하다. 그리고 군 통수권은 대통령이나 총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국방장관에게 있다. 전시가 되어야 군통수권이 총리에게 이양된다. 현재 국방장관으로 부임해 있는 사람은 군 복무를 1초도 한 적이 없으며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장관과 노동부 장관을 거쳐 국방장관이 되었다. 또한 독일에서는 문민통제와 경험을 중요시해서 국방장관을 '''타부서의 장관을 했던 적이 있는 사람'''으로 임명한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국방장관에 으로 재임했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은 맨 처음 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장관을 역임한 뒤 그 다음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고, 그 두 번의 장관 경력을 바탕으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가끔 나치독일의 히틀러에 대한 잘못된 인식[27]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당시 독일군이 문민통제를 받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히틀러는 정치인이지 군인이 아니다. 상병출신이기는 하지만 일개 사병이었지 장교를 한 적이 없으며, 지휘관을 한 적도 없다. 그런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작전을 총괄했고, 독일국방군은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나치독일은 공산국가와 비슷하게 나치당이 통제하는 사회였고, 독일국방군은 나치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거기에 히틀러는 독일국방군이 배신할까봐 두려워 친위대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독일국방군은 철저히 문민통제를 받은 군대였다는 것이다. 군부가 주도한 적도 없으며, 군부가 중심이 된 적도 없었다.
물론 독일도 일본군처럼 군국주의로 흘러간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경우 군대를 신성화하여 군대가 사회 전반을 이끌게 되는 일본식 군부 통치 시스템이 군국주의의 근원 중 하나가 되어 문제를 일으켰다면, 독일의 경우에는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내려온 군 중심문화의 영향이 크다. 참고로 프로이센 이후 내려온 정치와 군대의 분리 및 상호 불가침(요약하자면 군대는 정치에 대해 개입하지 않고 정치 역시 군대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정치에 귀속되지 않는 군대'를 만들고자 했었던 국가적 전통은 최고통수권자의 말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미, 즉 정치적 중립성을 의미한다.
또한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국방군은 정치에 주도세력이거 정치적 핵심이 된 적은 없다. 오로지 히틀러의 수족으로 활동했다. 히틀러도 자신이 군부에 속한 것이 아니었기에 친위대를 창설하여 국방군을 감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국방군 무오설이 나올 수 있는 이유도, 독일은 군부가 핵심세력이 아니었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는 전쟁 내내 모든 작전을 주도했으며, 자신의 명령과 허가 없는 철수를 하는 경우 독일군 장성들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분노를 표했으며 독일군 장성들은 이에 대해 사과해야 했다. 파울루스가 누구의 명령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 철수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자.

5.8. 이집트


이집트군은 인사를 자체적으로 하는 것은 물론 예산마저도 비공개로 운영하여 거의 완전히 민간 정부에서 독립되어 있다. 군 장성들은 군 유지 자금 확보를 명분으로 각종 사업 시설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그 내역이 비공개이다. 군의 지배 하에 있는 경제가 이집트 경제의 약 40%를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구조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아주 편한 구조'''이다.[28] 실제로 30년간 장기집권하던 군부 출신 독재자 무바라크민주화 시위로 몰아낸지 고작 1년 만에 군부의 엘시시가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군부독재가 들어섰다.

5.9. 기타


태국군미얀마군, 북한군, 피지군 등이 문민통제가 안 되는 군대로 손꼽힌다.
북한군은 보위부, 군, 정치장교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국가원수까지 모두가 제복군인인지라 문민통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선군정치 따위를 내세운 이상 문민통제와는 극과 극으로 멀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 공화국 원수의 계급장이 존재하는 판이다. 태국군도 툭하면 쿠데타를 일으켜서 민간 정부를 뒤엎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새 정부를 꾸리는 경우가 많다.
미얀마군은 대통령과 총리에게 군통수권이 없다. 이는 2021년 미얀마 쿠데타의 빌미가 되었다.
인도군도 예상 외로 문민통제가 잘 되는 편이다. 다른 많은 수의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인도는 독립 후에 군사 쿠데타를 겪지 않았다.[29]
이스라엘에서는 2006년 5월 4일 내각 개편과 함께 처음으로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이 나왔다. 대한민국 만큼이나 하드코어 난이도 안보상황인 이스라엘도 군 장성 출신 사람들이 국방장관을 맡는게 관례였으나 올메르트 총리가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밀어붙여 기용한 것이다. 기용된 사람은 아미르 페레츠 노동당 당수로 노동운동가 출신이었다. 그런데 2015년 8월 현재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모셰 야알론으로 참모총장 출신이다. 결국 다시 회귀한 셈이다.
터키는 아예 문민통제가 뭥미?하는 나라의 대명사였다. 터키군은 케말 파샤 이후 군부의 힘이 상당히 강해서 숱하게 세속주의의 회복을 명목으로 민간정부를 뒤엎는 쿠데타를 행했다. 그나마 1960년과 1980년엔 아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직접 장악하고 국민들을 숙청했으며 그외에도 군부에 친화적인 민간 정치인들로 정부를 꾸리고 복귀하는 형태라서 군부의 정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 이 때문에 다른 유럽국가에선 사실상 터키가 군부 독재 국가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2000년대 이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주도로 군부를 숙청하고 문민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터키의 세속주의 및 민주주의를 훼손하는게 아니냐는 논란도 조금 있다.
태국군은 아예 이 방면의 레전드. 태국 국민들은 아예 반쯤 해탈한 심정으로 쿠데타는 태국의 전통이라고(...) 자조할 정도다. 다만 군부도 국왕 앞에서는 힘을 못 쓰기에, '''쿠데타는 국왕의 승인 하에 이루어져야 하며, 국왕이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두어야한다.''' 실제로 국왕의 제지에 의해 쿠데타가 좌절된 적이 몇 번 있다. 그리고 국왕은 아예 쿠데타의 대상 외인데, 태국에서는 국왕의 위상이 대단하기에 왕궁에서 총질이라도 했다간 즉시 국민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국민들은 군부는 욕하면서도 왕은 정말이지 맹목적으로 따르는 수준이라,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북한김일성 우상화와 비교했을 정도다. 이쯤 되면 사실상 '''전제통제'''라고 봐야'''했'''다. 그러나 정치력이 대왕급인 라마 9세가 승하하고, 와치랄롱꼰이 왕위에 오르자 우려했던 대로 개인 처신을 개판으로 하는 바람에...
현재는 없어진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군대인 베트남 공화국군도 문민통제가 잘 되지 않았으며, 이는 연이은 쿠데타와 정치 혼란으로 번져 패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법학박사 출신으로 이전에는 주택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국방장관을 맡았다. 국방장관이라는 중책을 수행하면서 임신한 상태로 아프가니스탄도 다녀오고 버라이어티한 행보를 이어가더니 무사히 아들도 낳았다. 2017년 4월 9일 46세에 지병이었던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였다.[2]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예비역 병장이 국방장관이 된 셈이다.[3] 문민이라고 번역해 놓긴 했지만 civil이라는 어근의 뜻을 생각해 본다면 '시민통제'라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4] 사태가 해결된 이후에 군부 상당수는 자기들은 전쟁을 반대한 비둘기파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을 피그만 침공으로 겪었던 케네디는 '''해당 회의를 비밀 녹음했다'''. 이 녹음속에서 케네디와 맥나마라 두 민간 출신 인사들을 제외한 EXCOMM 회의 속 인사들은 모두 매파에 가까웠다. 특히 군부 쪽 인사들은 어떻게든 전쟁을 원하는 자기 의사를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이쪽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인물이 커티스 르메이.[5] “전쟁론”을 통하여 “전쟁은 기타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라고 정의함으로써 군의 문민통제 원칙을 제시.[6] 농담처럼 써져 있지만 나치독일이나 일본제국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실례가 존재하며, 21세기에 강대국 사이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경우 진짜로 세계멸망에 버금가는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 [7] 실제로 문민통제가 있었기에 쿠바 미사일 위기당시 날뛰던 군부를 통제하고 핵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8] 나치독일의 경우 문민통제가 이루어져있었지만, 프로이센의 때를 완전히 벗기지는 못했고, 무엇보다 군통수권자인 아돌프 히틀러가 희대의 멍청이라서 연합군이 암살을 포기할 정도였다. 왜냐면 히틀러 대신 다른 사람이 군권을 쥐면 전황이 더 어려워질까봐.[9] 약 5000~6000명[10] 2차대전 이전의 일본은 총리가 다른 대신(장관)들과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리가 내각을 구성해 천황의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국정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한 부서의 대신(=장관)이 사퇴하게 되고, 이 빈자리를 메울 수 없으면 그 총리의 내각은 총사퇴해야한다. 헌데 육군성/해군성(=국방부)의 장관이 총리의 뜻에 반하는 의미에서 사퇴했는데, 법에 따라 육해군성 대신은 현역 군인만 맡을 수 있다면 군이 한통속으로 짜고 아무도 대신직을 맡지 않아 총리와 내각을 뒤집어 엎을 수 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육해군성 대신은 물론 총리까지 군 출신 인사가 채우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일본은 군국주의의 파멸가도를 달렸다.[11] 맥아더가 몰락한 이유로 중공군의 참전을 무시하는 등의 심각한 군사적 실책을 꼽기 쉬운데, 실제로는 유엔군 사령관이라는 군인으로서 민간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문민통제에 위협을 가한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오죽하면 맥아더 때문에 당시 미국의 군부와 민간 정부의 관계는 역사상 최악으로 치닫았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이다.[12] 미국에 징병제를 도입하자는 희대의 미치광이이다. 징병제도 징병제 나름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징병제를 도입하자는 건 곧 민간인으로 구성된 '''육군청장, 해군청장, 공군청장의 모가지를 썰자는 소리'''이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징병제 도입이 미친짓인 것이다.[13] 6.25 확전(擴戰)을 반대한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인해 해임, 전역했다.[14] 5성 장군. 전시에만 생기는 계급이며 보직 없이 은퇴하더라도 전역 혹은 퇴역하는 것이 아닌 종신 계급이다.[15] 미국의 예비역은 퇴역한 민간인과는 다른, 한국으로 치면 상근예비역 성격도 있는 신분이기 때문.[16] 맥나마라는 2차대전 때문에 군인이 되었고, 보급과 병참 관리에서 활약해서 훈장까지 받는다.[17]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제임스 매티스 자신의 국방, 안보에 대한 견해는 트럼프나 트럼프 행정부 주류보다 더 온건한 편이다.[18] 미국 공화당 성향의 사람 같지만 정작 소속 정당은 미국 민주당이다.[19] 2007년에 방위청 장관(청장)에서 대신(장관)급으로 승격. 단 방위청 시절에도 방위청 장관은 다른 부처 대신과 동급으로 중의원 현직 국회의원이 맡았다.[20] 1985년에 제대하고 2001년에 방위청장관 취임. 그는 2014년에 다시 방위대신으로 취임했다.[21] 한국군은 두 번째, 미군은 다섯 번째이다.[22] 제복군인에서 합참의장을 제외하면 모두 5대 차관보다 아래이며, 국방부장관, 육군청장, 해군청장, 공군청장이 모두 제복군인보다 우위.[23] 日 ‘군사대국’에 또 한 걸음…무기전담조직 신설, 자위대 ‘문민’ 통제 폐기[24] 다만 이러한 분위기가 유지될수 있던것은 당시 동독 지도부가 호네커를 비롯한 강경파와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강경파가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것이 있으며, 설령 인민군으로 진압하지 않아도 과거 헝가리 봉기프라하의 봄처럼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통해 진압할수 있었다. 당시 동독 주둔 총사령관인 보리스 스트네코프는 강경한 매파였으며,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여 내정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동독 정부가 요청하면 소련군이 출동하여 진압할수 있었지만, 호네커가 실각되고 온건파인 에곤 크렌츠가 집권하면서 이러한 시도는 실행되지 않았다.[25] 예외적으로 유리 안드로포프는 대조국전쟁기 파르티잔으로 나치와 싸웠고 이후 KGB의 주석으로서 장성까지 올랐으며 스탈린도 2차 대전 직후 대원수 직함을 달았다. 다만 스탈린은 군인이 통치자가 된 게 아니고 통치자가 군 계급을 받은 거라서 좀 성격이 많이 다르다.[26] 그리고 카르메 차콘의 국방장관 임명 또한 제2공화국 시절 집권 여당이었으며, 프랑코 시절 대표적인 반정부 야권 세력 중 하나였던 사회노동당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정권 시절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스페인 정부 입장에서는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여당과 필연적으로 사이가 험악할 수 밖에 없었던 군부를 사파테로 정부가 추진했던 동성결혼 합법화, 대마초 비범죄화, ETA와의 평화 협정, 스페인 내전 과거사 정리를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 자유주의적 정책을 통해 길들이려고 했던 일환이다[27] 주로 군부독재자라는 인식이다. 이는 일본만화의 영향이기도 하다. 일본에 있어서 독일관련 작품은 군부독재자처럼 그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군부독재자가 아니라 나치당이라는 당을 통해 국가를 통치했다. 괜히 스탈린과 히틀러가 같은녀석이라고 하는게 아니다.[28] 이집트군의 폐쇄성은 절대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닌 게, 군이 독립되어 가지는 이권이 워낙 어마무시하다보니 '''가만히 있어도 돈과 권력이 차고넘치는데 굳이 위험한 쿠데타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29] 1984년 당시 전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가 같은 해에 있었던 황금사원의 시크교도 반란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크교도 경호원에게 말 그대로 '''벌집'''이 되어 죽은 적이 있긴 하다. 대신에 여기는 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개 경호원의 개인적인 종교적 원한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