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휘

 



<colbgcolor=#0B0B3B><colcolor=#ffde09>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민영휘
閔泳徽 | Min Yeong-hwi'''
'''이름'''
민영휘 (閔泳徽)
'''본명'''
민영준 (閔泳駿)
'''자'''
군팔 (君八)
'''본관'''
여흥 민씨 (驪興)
'''호'''
하정 (荷汀)
'''출생'''
1852년 5월 15일
경기도 광주군
(현 경기도 광주시)
'''사망'''
1935년 12월 30일 (향년 83세)
경성 관훈동
'''직업'''
정치가
'''종교'''
유교(성리학)
불교
'''작위'''
조선귀족 자작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반
2.2. 친일 행각
3. 논란
3.1. 남이섬 논란
4. 가족 관계
5. 여담
6. 둘러보기

'''민영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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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영휘(閔泳徽, 1852 - 1935)는 조선 후기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여흥 민씨가 주축이 된 수구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자 일제강점기 시기의 최고 갑부이다. 광주군에서 민두호의 아들로 태어나 명성황후의 친척, 민씨 가문의 인물로 권력을 누렸고 본래는 친청파였으나 친일파로 변절해 조선의 국권피탈에 앞장서 매국노가 된 인물이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1852년 광주군 출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이다.
명성황후의 친척 조카이다.
1877년(고종 14년) 별시(別試)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한 뒤 검열을 지내고 주서(主書)·겸설서·정언(正言)·부수찬을 거쳐서 동지경연사·지돈령부사 등으로 승진을 거듭하며 화려한 관력을 쌓게 되었다. 민영휘는 명성황후와의 촌수는 상대적으로 먼 편이었지만 여흥 민씨의 대표급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이 많이 집중되어, 임오군란 때는 가옥이 부서지기도 했다.

청병차병에 대한 결정을 보지 못하자 고종은 비밀리에 성기운을 원세개에게 보내 상담하면서 '''청병차병을 암암리에 결정했다. 결국 청병차병은 왕권을 유지하려는 고종과 정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민씨세력의 실권자 민영준, 그리고 외압세력의 대표 원세개 사이에서 담합이 이루어져 결정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473쪽

관료 시절에도 평판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인 듯 하다. 동학농민전쟁 때는 그와 친하던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정권유지를 위해서라면 청나라의 속국이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다른 대신들은 대화로 풀자면서 원병요청을 반대했는데 민영준은 끝까지 원병을 요청하는데 앞장섰으며 또한 위안스카이고종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청군 파병을 강행하였다.[1] 결국 한반도가 청일전쟁의 불씨에 휩싸이게 된 원인도 그로 인해 조선이 일제식민지가 된 원인도 따지고보면 민영준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그 후 민씨 정권이 실각하며 지석영이 그를 탄핵하기도 했다.[2] 그러자 고종이 진령군은 제거하고 민영휘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했다고 답했다. 민영휘는 죽지 않았고 단지 위리안치로 끝났다. 그는 탐관오리로 유배되었다가 청나라로 도주했다. 이듬해 귀국해 대한제국 수립에 도움을 주었다. 이후 정치권에서 물러나 1906년 휘문중학교·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했다.

2.2. 친일 행각


조선의 국권피탈에 앞장서 1910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자신이 모은 재물로 갑부가 되어 부귀를 누리다가 1935년에 사망했다.

3. 논란



3.1. 남이섬 논란


민영휘의 후손이 21세기에도 '주식회사남이섬'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저 그런 강원도 관광지 중 하나였던 남이섬겨울연가 드라마 한 편으로 그야말로 대박이 났었는데, 2015년 인터넷발 루머가 남이섬의 이미지에 큰 악재가 되었다. 친일파가 친일 행각 및 수탈로 마련한 자금으로 남이섬을 구입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고, 그 돈으로 후손은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주식회사남이섬은 한 언론사를 상대로 친일 문구를 빼라는 소송을 걸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원고 승소하여 공식적으로 친일 행각과는 관련이 없음을 법적으로 확인했다. 이유인즉슨 민영휘가 친일인명등재사전에 기록되었고 친일파로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손자인 민병도가 이 사전에 기록되어있지 않으며 남이섬 자체는 65년도에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하였던 민병도가 퇴직금 등을 모아 사적으로 구입한 섬을 개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지, 남이섬을 증여 혹은 상속받지 않았기에 친일 행적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판결이다. 또한 구입 당시의 금액 자체도 2018년 기준 약 6억원으로, 25년간 금융업에 종사한 민병도가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이었으므로 자금의 출처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또한 민씨 후손들이 미국 LA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모두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 가족 관계


  • 아들: 대식, 형식, 규식
  • 손자: 병주, 병유, 병도
  • 증손자: 인기, 욱기, 덕기, 웅기
  • 고손자: 경현

5. 여담


  •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8·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17∼73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 친일인명사전 제작에 참여했던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한철호 교수는 2019년 11월에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하여 친일파중에 가장 싫어하는 인물로 이완용도, 송병준도 아닌 민영휘를 꼽았다.# 일본에서 한일 합방 기념으로 제작한 위 합성사진을 보면 절반으로 갈라서 좌측은 일본인, 오른쪽인 조선인들이다. 이완용(2번째 줄 가운데)보다도 상석에 있는 민영휘(맨 윗줄 가장 오른쪽)를 볼 수 있다. 그 옆은 고종과 순종이다. 친일활동으로 인한 그의 위세를 알 수있다. 민영휘는 친일파 활동과 부정부패로 모은 재산이 조선 최고 수준이었으며 이완용의 재산 300만원의 20배인 6,000만원(현재 가치로 1조 2천억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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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대의 야사들을 모은 매천야록에 따르면 민영환이 자결한 직후, 민영휘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자 한 향병(鄕兵)이 "당신의 성도 민씨가 아니오? 그런데 어떤 민씨는 죽고 어떤 민씨는 살아있는가?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시오?"라며 격렬하게 항의하고, 이에 민영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떠났다고 한다. 현대로 비유하면 일개 병사가 고위층 인사에게 손가락질하며 독설을 퍼부었는데도 대응하지도 못하고 도망간 격.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나 이미 당시에 민영휘에 대한 대중들의 여론이 매우 나빴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6. 둘러보기




[1] 재밌는 것은 위안스카이가 당시 청나라에 보낸 보고서에 '''"민영준(민영휘) 그 XX는 탐욕스럽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XX"'''라고 디스했다. 오죽했으면 조선에 내정간섭을 일삼던 위안스카이조차 혀를 내둘렀으니 말 다한 셈.[2] "민영준은 원병을 불러들이게 하고는 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간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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