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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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閔謙鎬
1838~1882년
조선 말기의 외척, 권신이자 탐관오리로, 명성황후와의 친분을 믿고 간신이자 탐관오리으로 활동하다 임오군란 때 살해된 인물.
조선판 군납비리를 자행해 임오군란의 시발점이 되었고 자신의 가문을 믿고 온갖 비리와 탐욕을 부렸으며 그로 인해 시작된 임오군란 이후 조선왕조는 파국으로 치닫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2. 상세
조선 후기의 척신(戚臣)이자 간신(奸臣)으로 윤원형과 비교할만한 악질이다. 민씨 세도가의 일원이며 본관은 여흥 민씨다. 또한 명성황후의 친척 오빠이며 명성 황후와도 친분이 두터운 편이었다. 별기군 창설 이후 구식 군을 차별하며 13개월 이상 봉급을 미루고 그나마 준 봉급은 쌀에 겨, 모래 등을 섞어 주는 등의 짓을 해 임오군란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고 임오군란 당시 내시로 변장하고 수염을 손으로 가려서 도망가려 했으나 수염을 깍지 않은 탓에 발각되어 구식 군인들에 의해 궁궐에서 처참하게 참살당했다.
3. 생애
1838년 판돈령부사 민치구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 명성 황후의 시어머니인 부대 부인 민씨와는 남매 사이로 누님 관계이며 흥선대원군과는 매형 사이이다. 고종과는 외삼촌과 외조카 사이로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왕의 외삼촌으로 승격되었다.
흥선 대원군과 명성 황후의 갈등면에서는 명성 황후를 지지하였으며 정치적, 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1874년 흥선군이 축출되면서 명성 황후의 후방 지원과 고종의 신임을 얻어 한성부 좌윤을 지냈고 홍문관 부제학,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으며 지충추지사, 금위대장, 지삼군부사, 무위도통사, 무위소제조, 어영대장을 역임하였다.
1880년 말에는 군무사 경리당상이 되었고 1881년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초빙하여 교관으로 임명하여 별기군을 창설하는데 기여하였다.
3.1. 임오군란
군란이 일어난 1882년에는 선혜청 당상을 지냈는데 이 때 별기군에 대한 지나친 애정과 비중을 둔 나머지 성격이 오만해져서 구식 군대에 속하는 무위영과 장어영을 단순히 무시하는 태도를 넘어서 구식군대 군인들의 봉급까지 횡령하였다. 이 당시 구식 군인들은 무려 13개월 동안이나 제대로 된 봉급을 받지 못했고 그 후에 나온 한달치 봉급은 썩은 쌀에 겨, 모래가 섞여 있었으니 당시 구식 군인들의 분노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구식 군대 군인들은 항의를 하지만 민겸호의 부하들이 이들을 모욕했고, 그 역시도 사태 수습에 나서기는 커녕 심지어 군인들을 붙잡아 매질하며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결국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민겸호는 성난 군인들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가족들을 피신시켰고 자신도 도피를 시도하였다. 한편 구식 군대 군인들은 흥인군을 때려죽인 뒤, 비어있던 민겸호의 집을 점령하였고 그의 집 창고의 많은 재물들을 모두 태웠다. 황현에 따르면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 불꽃에서는 오색이 나타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가 타면서 나오는 향기는 수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라고 한다. 구식 군대 군인들이 친민씨 척신들을 참살하게 되는 가운데 그는 지나친 강경 진압을 주도하였다가 실패하자 수염을 가린 채 내시로 변장해 도주하려고 했으나 수염을 깎지 않아 구식 군대들에게 발각되어 난병에게 붙잡혔다. 그는 구식 군대를 홀대하고 명성황후를 지지하였다는 이유로 전임 선혜청 당상이었던 지중추부사 김보현과 함께 창덕궁 중희당에서 참살당했다. 향년 44세.
살해당하기 직전 흥선대원군을 본 민겸호는 "대원위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애걸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이까."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때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붙들려 계단으로 내동댕이 쳐진 다음 계단 아래에서 총칼로 난자당해 사망했고 시체는 이들에게 난도질 당하였다.
3.2. 사후
그의 시체는 김보현의 시체와 함께 구식 군대의 발길질로 걷어차이게 되어서 개천에 버려졌는데, 매천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때 큰 비가 내려서 물에 개천이 가득찼으며 날씨까지 흐리고 더웠다. 이런 시기에 시체가 개천에 수일 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살이 물에 불려서 하얗고 흐느적거렸는데, 고기를 썰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이후 시신은 수습되었고 그해 8월에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뒤 이듬해 6월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4. 평가
민씨 세도가의 일원으로서 탐관오리 짓에 간신 짓을 일삼고 산 것을 보면 평가가 좋을 수 없다. 그리고 국가를 수호하는 군인들 봉급에다 썩은쌀와 모래, 겨를 섞은 놈이다. 앞에 비교대상인 윤원형보다 더한 악질이며 나라멸망의 시발점이 된 자이다. 윤원형도 간신배 짓을 하긴 했지만 그 놈은 적어도 군인들 봉급을 손대는 매국행위는 안했다. 민겸호는 조선판 군납비리를 자행한 악질이다. 그리고 군납비리 저지른 놈들은 고대부터 사형에 처하는게 원칙이었다. 게다가 얼마나 평판이 나빳던지 그가 비참하게 죽어서 개천에 시체가 버려진 것을 사람들이 보고는 탐욕스러운 자의 말로라며 하나같이 고소하게 여겼을 정도였다.
5. 대중매체에서
- KBS 드라마 대원군: 송재호
-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정호근
-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 서영진
- KBS 드라마 명성황후: 김성환[2]
- KBS 드라마 객주 2015: 임호
6. 가족관계
민겸호의 아들인 민영환은 후에 애국지사로서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을사늑약을 막으려다 실패한 뒤 순국하였다. [3]
[1] 임오군란 문서 참조[2] 명성황후를 미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드라마인 명성황후에서도 민겸호만큼은 악하게 묘사했을 정도로 평가가 나쁘다.[3] 민영환 역시도 탐관 오리로 유명하였다. 하지만 을사조약을 막으려다 실패하고 순국한 점에 있어서는 아버지 민겸호와 확실히 비교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