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영
1. 개요
조선과 대한제국의 (한)의사(醫士), 문관, 정치인, 교육자, 저술가.
2. 생애
1855년 서울 낙원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한의사 박영선에게 한문과 한의학을 배웠다. 이후 일본을 통해 종두법을 배운 박영선이 지석영에게 종두법을 소개해주었다.
1883년(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1887년 정4품 벼슬의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등을 역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시련이 닥치는데 국가의 각 분야 실정을 지적하다 조정의 미움을 받아 5년간 전라도 강진 신지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우두법 보급에 힘썼을 뿐 아니라 지적인 도약을 이루어냈다. 1891년 서양 의학에 의거한 위생학서이자 예방의학서인 '신학신설'을 한글로 간행한 것이다. 복직 이후 갑오개혁 때는 개화파 지식인의 일원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 동래부사 등을 지냈고 그가 두각을 보인 것은 대한제국 시기였는데 그는 의학교에 복귀하여 천연두 퇴치에 노력하였다.
지석영의 근대 의료 수용에 대한 열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1898년 관립의학교 설립을 청원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인 관립의학교가 세워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오가타 고안이 그랬던 것처럼 관립의학교 초대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지석영은 1899년 3월 28일부터 일제가 관립의학교를 대한의원으로 통폐합한 1907년 3월 15일까지 8년 동안 교장으로서 관립의학교를 이끌며 36명의 근대식 의사를 배출했다. 관립의학교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의전이 되고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된다.
관립의학교 교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한글 보급에 보다 힘을 기울였다. 1908년 2월 국문학자 주시경 등과 함께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임명되어 한글 표기법을 정립하였으며 1909년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여 한자의 해석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래도 평생의 과업은 놓을 수 없었던지 1914년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 진료소를 차려 80년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대외 활동이 거의 없이 진료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친일 논란이 불거진 상태이며 아이러니하게도 1906년 민영환의 추도사를 읽기도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를 읽고 불과 15일 뒤에는 이재명 의사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마음이 흔들려 변절했다가 다시 돌아왔을 수도 있고 일본을 속이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으며 진실은 저 너머에.
3. 종두법소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앗아간 감염병은 무엇일까? 그 충격의 정도만 보면 중세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 1차 세계대전보다 치명적이었던 ‘스페인 독감’을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두 감염병 모두 두창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오죽했으면 우리 조상들은 ‘마마’라는 극존칭어를 붙이고 ‘배송굿’까지 했을까.
때문에 제너(Edward Jenner)가 이를 퇴치할 수 있는 우두법을 개발한 것은 의학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단지 의학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정작 기본 원리나 발견 과정 자체에서는 근대적인 면모를 찾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여겨졌으며,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서구문물 수용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1876년 일본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박영선이 동행하였는데 이때 박영선은 일본에서 시행중인 종두법을 접하게 되었고 서양의학의 우두를 통해 종두법을 소개한 종두귀감이라는 책을 가져와서 제자에게 소개하였는데 그중 한명이 지석영이다. 이후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 해군 소속의 현대식 병원인 제생의원에서 해군 군의관인 마쓰마에와 도쓰카에게 종두법을 배웠다.[1] 부산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서울로 가는 길에 충주에 있는 처가에 들러 어린 처남에게 처음 종두법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1880년에는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우두 제조법을 배워서 서울에 종두장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종두 접종을 시작하였다.
이전 까지 조선에서 예방접종을 시도해왔다고 알려진건 우두 접종이 아니라 천연두 걸린 사람의 딱지나 고름을 가루로 만들어서 접촉하게 하는 인두법이다. 이는 실제 병에 걸릴 위험이 높았고, 효과도 떨어졌다. 또한 그시절까지 천연두와 홍역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마마신이라고 통칭하여 불렀다. 당시 천연두의 어마어마한 사망률[2] 은 질환을 신처럼 모시고 추앙 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마마신께서 일단 들어오시면 (=천연두에 걸리면) 그저 굽신굽신 비위 맞춰서 곱게 나가시기만을 빌 수밖에 없었다. 마마신 비위를 맞추기 위해 환자가 있는 집안은 제사도 못 지냈다고 한다. 마마신님께서는 질투가 많아 자기 말고 다른 귀신 들어오는 걸 매우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천연두의 주치료 방법은 무당의 굿이었다
많은 연구와 전 세계 보급으로 마침내 1979년 WHO(세계보건기구)는 천연두 박멸을 선언하였다.
4. 한의사 논쟁
한의계를 비롯해서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지석영을 한의사로 분류한다. 그 근거는 지석영 선생에게 한의학을 가르쳐준 스승이 지석영의 부친의 친구인 한의사인 박영선[3] 선생이었고, 당시 지석영의 면허가 '의생'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석영은 전통 의사(현재의 한의사)들의 학술 단체인 '''동'''서 의학연구회[4] 에서 회장을 지낸 경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한의학자로서 소양을 갖췄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스승인 박영선은 일본에 수신사로 갈 정도로 명망과 실력이 있는 유의였고, 지석영의 부탁으로 일본의 종두법의 실황을 조사해 주기도 하였다. 지석영이 활동하던 19세기 말에는 한중일을 막론하고 전통 의사(한의사)들이 서양 의학의 생리와 병리 지식을 흡수하는 경향이 나타났고[5] , 지석영도 전통 의사로서 종두법을 비롯한 서양 의학을 익힌 인물이었던 것이다.
반면 지석영이 한의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기도 한다. 모든 한의사가 의생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의생이 한의사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인 논리 오류라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의생 등록 신청을 할 수 있는 기준은 '(1) 의업에 종사한 지 2년이 경과한 자' 혹은 '(2) 3년 이상 한의학을 공부한 자'로써 한의사만이 의생이 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으며, 의생이 모두 한의사였다는 논리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박은 시대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의생 규칙의 '의업'이라는 단어 만을 해석한 오류다. 1910년대 당시에는 의학교에서 서양 의학을 배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6] 의업이라 함은 전통 의학(한의학)을 말했고, 의생의 100%가 오늘날의 한의사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지석영은 현재 대한한의사협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선의생회'의 회장(의생 면허 6번)까지 역임한 당대 의생의 대표격이다.
실제 해방 후 국민 의료법이 조선 의료령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본법 시행 당시에 현존한 의생은 이를 한의사로 개칭한다'고 하였고,
물론 그가 서양 의학을 교육하던 대한의원 의육부의 학감, 학생감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맡은 직책은 행정직에 가까웠고 실제 서양 의학을 가르치던 교원들은 거의 전부가 일본인이었다. 당대 조선인 중 서의(西醫)라고 할만한 사람은 없는 수준이었기에, 서양 의학에 조예가 깊고 명성이 있었던 지석영이 직책을 맡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 한의와 서의 중 어디에 가깝냐와는 별도로) 자연스러웠다.실제 해방 후 국민 의료법이 조선 의료령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본법 시행 당시에 현존한 의생은 이를 한의사로 개칭한다'고 하였고,
의생의 명칭은 한의사로 바뀌었다.
5. 기타
신정국문과 같은 국어 개혁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국문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정약용이 편찬한 아학편에 영어를 추가했다.
그의 종손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주치의를 맡았던 지홍창 박사(1981년 작고)가 있다.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재조명받은 진령군 관련해서 그 운명에 쐐기를 꽂는 상소문을 올린 것으로도 뒤늦게 알려졌는데,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한다던가 죄인을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매야 한다는 등 살면서 가장 격렬한 수위의 단어들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종손이 박정희의 주치의도 했다는 점에서 이하영 - 이종찬 가문처럼 종교를 통한 권력 개입이란 막장 사건에 엄청난 악연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1] 제생의원은 개항과 함께 부산에 첫 상륙한 현대의료기관. 미래의 전진기지 확보를 위한 수단이었기에 나중에 육군이 상륙하자 모두 병참기지로 바뀌었고, 병원 건물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2] 세계보건기구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20세기에만 천연두 사망자가 약''' 5억명'''에 달했다.[3] 다만 지석영과 박선영은 의과 급제자가 아닌 대과 급제자 였다. 즉, 유학자이면서 동시에 한의학을 공부한 유의(儒醫)라고 할 수 있다.[4] 대한한의사협회 홈페이지의 협회 연혁에는 1910년 동서의학연구회 설립을 한의계의 역사로 표기하고 있다.[5] 중국의 당종해(唐宗海) 등 중서회통학파가 대표적이다.[6] 이들은 별도의 의사 규칙을 통해 의사 면허를 교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