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선군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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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운현궁의 역대 주인'''
2대
흥친왕 이희

'''3대
영선군 이준용
'''

4대
이우




<colcolor=#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5대손 | 운현궁 2대 사손
영선군 이준용
永宣君 李埈鎔'''
[image]영선군 영정[1]
'''군호'''
영선군(永宣君)
'''성명'''
이준용(李埈鎔) → 이준(李埈)
'''자'''
경극(景極)
'''호'''
석정(石庭), 송정(松亭)
'''출생'''
1870년 7월 23일
'''사망'''
1917년 3월 22일 (향년 46세)
1. 개요
2. 생애
2.1. 가족들에 대한 원망
2.2. 사망
3. 가족과 후손
4. 매체에서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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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대한제국황족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고종의 친조카이면서 동시에 고종의 강력한 정적이었다.

2. 생애


1870년(고종 7년) 7월 23일,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장남 이재면과 첫 부인 남양 홍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밑으로 동생 이문용(李𪣢[土+汶]鎔)이 있었지만 20세에 요절하여 사실상 독자였다.[2]
이래도 예 저래도 예 하는 아버지 이재면이나 고종과는 다르게 호탕하고 활달하며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마음에 들어 해서 이준용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한다. 죽기 직전에 흥선대원군이 사이가 틀어진 아들 고종을 찾았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전에 "준용이는 어디 갔느냐." 하며 이준용도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3]
15살 때인 고종 21년(1884) 개화파 내각에 의해 관직에 오른 뒤 다음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규장각과 예문관에서 여러 벼슬을 지냈다.
1874년(고종 11년) 권좌에서 축출당한 흥선대원군은 1881년(고종 18년) 이복삼촌 이재선을, 1885년(고종 22년) 아버지 이재면을 왕으로 앉히고 다시 섭정을 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자, 이후에는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노력했다. 청나라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왜 영선군이 왕이 되어야 하는가를 꾸준히 설득했지만 청나라일본 모두 쌩깠다. 그럴 경우 100% 흥선대원군이 섭정으로 집권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외세를 빌린 왕실 쿠데타를 지원해봤자 상대에게 빌미를 줄 뿐이기도 하고.
이준용은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나 유길준보다는 덜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삼촌 고종의 눈밖에 나서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조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하였다고 한다. 1899년(광무 3년)에는 흥선대원군도 사망한 이후였지만, 여전히 존재했던 흥선대원군의 파벌에 의해서 영선군을 추대하는 '''쿠데타 시도만 3건이 발각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고종에게 이준용 입국을 허락을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고종은 끈질기게 거부했다고 한다. 오히려 1904년(광무 8년)에도 일본에 있던 반역자 14인[4]을 송환하라고 요청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고종 강제 퇴위 직전인 1907년(광무 11년) 7월 중순에야 거의 밀입국 형태로 귀국했다. 정식 귀국 허가가 나온 것은 고종 퇴위 이후였다.[5]
1907년 9월 12일 내려진 영선군 봉작 교지.
귀국 후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졌다. 대한제국 수립 10년 만에 비로소 정식 황족 작위를 겨우 받았음은 그가 얼만큼 위험하게 여겨지고 냉대당했는지를 보여준다.[6] 이후 보국숭록대부에 승진, 주차 일본 대사를 지낸 뒤 대한제국 육군 참장이 되었고, 그해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요시히토 황태자순종황제, 영친왕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맞이했다.
뒷 줄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영선군 이준용.
앞 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순종황제 이척, 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 이은.
이후 영선군은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고 희망을 잠시 품었고, 1909년(융희 3년) 이근택 등과 합세해 이완용을 몰아낸 다음에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당연히 일본을 밀어내는 것은 아니고, 당시 상황을 용인하는 상황에서의 내부 권력 싸움. 핵심은 '이완용 다음 영선군 자신이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것'이었다. 영선군이 연관된 쿠데타 시도만 이 것으로 '''4번째이다'''(1899년의 시도들은 하나로 취급). 하지만, 점점 드러나는 일제의 침략 행위들로 모든 게 다 헛 것임을 알면서 좌절하더니 이후 '''친일파로 전향'''했다. 초기에는 반일주의자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빠르면 을미사변 이전, 늦어도 일본 망명 시기에는 친일파로 전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106인 명단에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과 함께 포함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서 조선 왕족들은 신분상 일제의 감시와 영향력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받아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면 명단에서 제외되었지만, '''그 특별한 사례가 영선군 가계'''이다.
1909년(융희 3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 친일 단체인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아, 한국의 건국 시조인 단군일본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에 부속되는 구도[7]로 향후 세워질 조선신사(조선신궁) 같은 신궁급 신사에 함께 배치하여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 바 있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에는 조칙에 따라 아버지 이재면이 이희 공(李熹公)[8]에 봉해졌는데, 이재면이 곧 사망하자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공위를 계승하여 이준 공(李埈公)으로 불렸다. 1912년 일본 정부에게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2.1. 가족들에 대한 원망


운현궁에서 친척들과 함께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영선군 이준용,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영선군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계속 위기에 빠지게 한 가족들을 상당히 미워하였다. 특히 일본 망명 생활 중 여러 번 암살당할 뻔했음에도 가족들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자 감정은 더욱 격해져 차가운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에게 사면받고 귀국한 직후 흥선대원군 내외의 사당을 찾아가긴 했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 흥친왕이 죽을 때도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무루공자(無淚公子)', 즉 눈물없는 사나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한다. 이 일로 그의 5촌 당숙[9]완순군 이재완에게 질책까지 받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식으로서 너무 불효하는 것 아니냐고.

2.2. 사망


'''나이든 때의 모습'''
저런 상황에서 건강을 제대로 돌볼 리 없었다. 나중에는 콩팥심장이 망가졌는데, 계속된 피신 등으로 치료 시기를 놓쳐 평생 고생했으며 결국 1917년 3월 22일 운현궁에서 향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가족과 후손


[image]
영선군 군부인 광산 김씨
남양 홍씨와 결혼했으나 사별하고 두 번째로 광산 김씨와 결혼했지만 두 부인 사이에서 모두 자식이 없었다. 1916년 소실 전순혁과 사이에서 딸 이진완(李辰琬)을 낳았다.[10]
하지만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의친왕의 차남 이우양자로 입적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영선군의 부인이 고종에게 운현궁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고 하소연하자 고종이 이우의 손을 잡고 양자로 선택했다고 한다. 어쨌든 《순종실록부록》에는 "태왕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강 공의 아들을 이준 공의 대를 이을 아들로 삼다."라고 되했다. 이 후의 가계는 이우#s-1 항목 참조.

4. 매체에서


  • 이환지[11] - 1982년 KBS풍운
  • 안승민 - 2002년 KBS 《명성황후》 : 실제와는 다르게 상당히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마른 체격으로 나온다.

5. 여담


  • 영선군은 한국이 문명진보의 영역으로 나가려면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자신의 교육론을 직접 실천에 옮겨 1908년(융희 2년)에 종친, 외척 자제의 일본 유학을 건의하여 실행했다. 그 뒤에도 해외 유학과 견문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일반 양반가와 평민의 자제들에게도 해외 유학 지원을 구상하였으며 1908년 봄에 이지용, 이재극 등과 함께 한성부 북부 계동에 황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돈명학교(敦明學敎)를 설립하였다.[12][13] 당시 나중에 자신의 토지를 저당잡히면서까지 학교를 부흥시키려 했다고 한다. 또한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예전의 전통적 교육 기관이 아닌 근대적 인재들을 길러낼 사범 학교를 세워 교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몸이 뚱뚱하면서도 걷지 않고 하인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고 다닌 이준용을 두고 윤치호는 양돼지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1] 영정 속 얼굴이 이전의 조선식 초상화 기법과는 다르게 그려졌다. 얼굴을 보면 확실히 사촌간인 순종, 영친왕, 조남승과 닮았다.[2] 이문용의 후계는 큰할아버지 흥완군의 양증손자 이해명(실제로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12대손)이 입양되어 이었다.[3] 흥선대원군이 죽을 무렵에 이준용은 일본에 있었다.[4]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조희연, 장박, 이범래,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5] 박영효도 정확하게 같은 형태로 귀국했다. 일단 밀입국하고, 고종 퇴위가 확인된 다음에 정식 귀국의 형태를 밟았다.[6] 사실 이준용은 족보 상 장조(사도세자)의 5대손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황족 작위를 받을 수 없다. 아마 대원군 봉사손 세습제 차원이거나 아니면 황실과 실질적으로 가까운 친척이라 수여한 듯 하다. 그래도 기왕 줄 거면 좀 더 일찍 줄 수도 있었는데, 제국 선포 10년 뒤에야 준 것은 앞에서 설명한 이유가 맞을 것이다.[7] 이에 대해서는 조선신궁 참조.[8] 이재면은 흥친왕으로 책봉되면서 이름을 이희로 고쳤다.[9] 영선군의 큰할아버지 흥완군의 아들.[10] 이진완은 후에 윤보선의 동생 윤원선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뒀다. 1997년 82세로 사망.[11] 야인시대에서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가네야마로 나왔다.[12] 처음에는 황족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했다가 점차 문호를 개방하여 나중에는 평민, 민간인들까지 입학을 허가해 100여 명 정도가 공부하게 되었다. 설립 당시 순종이 거금 수천 원을 하사하기도 했다.[13] 명목상 주인은 6촌 동생인 계동궁의 종주 이기용이고 실질적으로 운영한 사람은 신소설의 선구자이자 조카 뻘되는 먼 친척인 이해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