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령군

 

1. 개요
2. 역사
3. 드라마


1. 개요


眞靈君
생몰년도 미상[1]
조선시대 말기의 무속인. 진령군이라는 벼슬명과 여성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출생연도나 출신지역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완전히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군호라는 엄청난 벼슬을 받은데다가 그리 오랜 옛날도 아닌 조선 말기를 살았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를 추적할 수 있는 어떠한 자료도 알려진 바 없는 사람. 야사에 따르면 본명이 박창렬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씨 성을 가졌지만 이름을 버린 무당이라 하기도 하는 등 이름에 대하여 몇 가지 추측이 존재하긴 하나 어떤 것도 뚜렷한 정설로 채택된 적은 없다.
2016년 10월에 터진 대한민국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새삼스레 주목을 받게 된 인물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에게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있었고, 고려김치양[2]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진령군이 있었다. 최순실의 대선배격 존재.

2. 역사


1882년 임오군란 때 성난 군사들에게 죽을 뻔한 왕비(명성황후)가 간신히 충주 장호원까지 도망갔다 50여 일만에 환궁하니 백성들은 놀랐다. 그런데 왕비는 한 여인을 데리고 와 진령군이란 작호를 받게 해 주었으니 이는 7종 천민으로 취급받던 무당에게 군봉을 내린 것으로, 여자가 당호(堂號)를 받지 않고 군호(君號)를 받은 것은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진령군이 이토록 파격적인 출세를 한 계기는 왕비가 죽음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 지낼 때 점을 쳐 주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숨어 지내기 하도 갑갑하여 민응식이 불러온 무당이 진령군이었는데 자칭 관우의 딸이라 하였다 한다. 이때 진령군은 명성황후가 자신과 만난 날로부터 50일 이내에 환궁할 것이라며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줬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그녀가 예언한 그 날짜에 환궁하게 되자 명성황후를 따라 나선 것이다.
그 후 그녀는 대궐로 들어가 살며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날마다 왕실을 위해 산천 기도는 물론이요, 굿판과 제사는 쉴 날이 없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임금께 아뢰어 봉군의 은전, 즉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이렇게 신분상승을 한 그녀는 양반을 벼슬에 임명하고 내쫓는 것도 마음대로일 만큼 권세를 휘둘렀다. 진령군에게는 김창렬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당상관의 관복을 입고 다니며 실세 노릇을 하자 조정의 고위 관료들 중 몇몇은 진령군과 의남매를 맺거나 의자(義子)가 되기까지 했다.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친다고 굿판을 벌이고 금강산 1만 2천 봉에 쌀 한 섬과 돈 천 냥, 무명 한 필씩을 얹은 것도 이때 일이다. 그로 인해 국고가 탕진되고 있어도 명성황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령군만 믿었다. 게다가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억만금을 벌었는데, 왕과 왕비는 여기 자주 찾아와 점도 치고 굿도 벌였다.
진령군의 세도가 세상을 흔든지도 어느덧 11년. 대담무쌍하게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통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선비가 있었으니 사간원 정언 안효제였다. 고종은 대노하여 그를 추자도로 귀양 보냈다. 3년 뒤 안효제는 귀양이 풀렸고 다시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한 후 낙향했다. 이후로 강직한 선비들이 앞다투어 그녀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도승지가 감히 고종에게 올리지 못하고 쌓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던 진령군의 영화도 드디어 망할 날이 왔으니 그때는 고종 31년(1894년)이었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개화파 새 정부는 진령군을 잡아 들여 옥에 가두었다가 진령군이 모아 놓은 억만금을 모두 몰수한 뒤 풀어 주었다. 그녀는 북묘인 관우 사당에서도 쫒겨나 삼청골 오막살이에서 숨죽이고 근근이 살다가 이듬해 8월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 손에 강력한 후원자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 충격인지 따라 죽었다...는 것이 맹꽁이 서당의 서술이다. 왕비 사후 모든 권력과 재물을 잃게 되었고, 도승지가 그 동안 쌓아 두고 있었던 상소문들이 한꺼번에 올라감과 동시에 지석영이 진령군을 주륙하여 머리를 도성에 매달 것을 청한 상소문[3]까지 올라가 신변의 안위마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는데, 조선왕조실록 기준으로 진령군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정확하게 기록된 바가 없다. 진령군에 대해 다루고 있는 마지막 기사는 엉뚱하게도 고종 41년에 당시 법부대신 이하영이 이유인 등을 처벌할 것을 아뢰면서 안효제의 예를 든 것이다. 야사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지석영의 탄핵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야사를 채택했으나 이는 근거 부족으로 진작에 탈락된 카더라이고, 대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지방의 벽촌으로 숨어들어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하고 있다. 사망연도가 1896년이라고 알려진 것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채택한 사형설의 영향이 큰데, 사실 해당 연도는 행방불명된 날짜를 가지고 추정한 날짜일 뿐이며, 사형설과 직접 연관된 것도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생몰년도 미상'으로 본다.
2016~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진령군도 자주 언급된다. 무당이 국가 최고 권력자와 결탁해서 실세 노릇을 했다는 유사점이 있다.

3. 드라마


  • KBS1찬란한 여명》에도 등장한다. 배역은 김경아라는 배우가 맡았다.[4] 이 드라마에선 효옥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본래는 춘선이라는 기명을 가진 평양의 관기로, 7살 때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곤장을 맞아 죽고, 기적에 오르게 되었다. 천주교를 믿고 있었고, 개화사상에도 눈을 떴는데, 그로 인해 박규수의 추천으로 유홍기의 문도가 되어 개화파의 인물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그 과정에서 이 드라마 초 - 중반부 주인공 급이라 할 수 있는 이동인과의 로맨스도 있게 된다.

    민자영에게 개화 사상을 심어주기 위해 무당으로 민자영에게 접근하였다. 그러다가 역사대로 임오군란 때에 공(?)을 세워 진령군에 책봉된다. 이로 인해 스승인 유홍기에게 책망을 듣게 되고, 김옥균, 박영효 등의 2세대 개화파들과도 척을 지게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타락하여 역사대로 매관매직 등의 여러 악행들을 일삼는다. 갑신정변 이후에는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최후엔 갑오개혁 이후 흥선대원군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고용하여 운현궁으로 침투시켰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이에 단단히 빡친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참수당하게 된다. 참수형이 집행되기 전에 백성들에게 을 맞는다.
  • KBS2명성황후》 103화에도 명성황후(최명길 분)가 무당(이름은 나오지 않는다)을 불러 궁에서 굿판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본 공사 이노우에(박근형 분)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비자금으로 쓰려는 것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으로 굿판을 벌이는 것으로 나온다. 이 무당과 이야기가 진령군을 모티브로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뮤지컬 명성황후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해 고심하던 명성황후가 진령군을 불러오라며 임신을 비는 '수태굿'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고증오류. 차남인 순종이 태어난 것이 이미 1874년 일인데, 명성황후가 진령군을 만난 것은 1882년의 일이기 때문.

[1] 사망연도가 1896년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 있지 않은 '추정상의 연도'이다.[2] 이전에는 신돈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으나 신돈은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하며 무작정 김치양, 진령군, 라스푸틴, 최순실과 같은 선상에 놓기엔 어려운 점들이 있다. [3] 해당 상소문은 지석영이 살아생전 표현했던 의사표현 중 가장 격렬한 수위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4] 해당 배우는 후일 왕희지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게 되는 배우이다. MBC 드라마 아현동 마님에서 주연을 맡았던 적이 있으나 드라마 내용과 본인 연기력이 혹평을 받으면서 이후로 뚜렷한 연기 활동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