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아이스
1. 개요
미국의 래퍼 겸 배우로 본명은 로버트 매슈 밴 윙클(Robert Matthew Van Winkle)이다.
2. 상세
1990년 데뷔 앨범인 'To the Extreme'의 성공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이 앨범의 최고 히트곡 'Ice Ice Baby'[1] 는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르긴 했으나 퀸의 Under Pressure를 '''무단 샘플링'''한 것으로 오랫동안 법적분쟁에 시달리다가 수익 대부분을 퀸에 넘겨야 했다. 허가받지 않은 무단샘플링이니 당연하지만.[2]
이후 앨범도 망하고, 출연한 영화도 망하고, 돈은 돈대로 떨어져가고 마약에 자살시도 등 막장 행보를 거듭하며 곧 잊혀질 래퍼로 기억되는 듯 했지만, 1994년경 부터 음악 스타일을 바꾸며 서서히 살아나는 조짐을 보였으며, 이후에도 전성기 시절만큼의 인기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인기는 있다.
현재는 주택 리노베이션 전문업자로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싼 매물을 사들인 후 집을 뜯어고쳐 좋은 가격으로 되파는 업체의 오너라고.
이 사람이 한창 잘 나갈 때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Cool as Ice'(한국명: 사랑과 음악)이다. 바로 위에서 서술한 망한 영화. 바닐라 아이스가 한 시골 마을로 와서 그곳에 사는 여성을 꼬시고 여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스토리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바닐라 아이스를 추켜올려주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닐라 아이스의 랩, 그리고 그의 동료들과의 춤, 오토바이 묘기, 광고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에게 온갖 비판을 받았고, 바닐라 아이스는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에서 최악의 신인상을 받았다.
본인의 실력과는 전혀 별개로, 힙합 장르가 주류 문화에 합류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바닐라 아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아래 내용을 한번 읽어보자.
3. 바닐라 아이스와 힙합 시장의 확장
힙합의 태동기는 1970년대이며 80~90년대에는 이미 수많은 실력파 힙합 아티스트들이 주로 뉴욕을 무대로 횔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활동은 클럽 등을 위주로 하는 "씬(scene)"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지상파 방송을 비롯한 주류 문화권에서는 힙합이라는 음악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바닐라의 데뷔는 90년대 초로, 당시는 런-D.M.C., 비스티 보이즈, N.W.A등의 소수의 유명 힙합 아티스트들이 겨우 주류 매체에 이름을 알리는 정도였고, 미국 주류사회는 아직도 흑인 음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흑인 래퍼들의 음악은 방송을 타기는 커녕 음반 입수조차 어려운 상황으로, 본격적인 음반 전문점이 아니면 (예를 들어 월마트나 타겟같은 대규모 소매점 등에서는) 입수할 수가 없었다. 아직 인터넷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으며, 아이튠즈같은 온라인 음원 서비스나 유튜브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는 아직 꿈도 못 꾸던 시대임은 물론이다.
게다가 가사가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판단되는 곡이 수록된 음반에는 "Parental Advisory"라는 경고 라벨을 붙이는 정책이 90년대에 막 만들어졌는데, 본격적인 랩 앨범은 거의 전부 이 딱지가 달려있었으며 예외라면 의도적으로 순화된 랩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 즉 MC 해머, 윌 스미스[3][4] 그리고 이 바닐라 아이스 정도였다. 월마트 같은 쇼핑몰에서는 당시 PA 딱지가 붙은 음반을 아예 취급하지 않았기에, 동네에 타워레코드 같은 전문 음반점이 없는 마을의 경우 랩을 들으려면 사실상 이 세 아티스트들의 앨범 중에서 골라야 하는 실정이었고, 바닐라 아이스는 그 중에서도 대부분의 백인 청소년들이 (부모들의 반대 때문에) 구매할 수 있는 유일한 랩 앨범이었다.[5]
그러니 바닐라의 음악은 당시 백인 청소년들이 들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랩송이었으며, 때문에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는 빌보드 차트 1위에 랭크한 최초의 힙합 음악이라는 영예를 거머쥐었고 바닐라는 음반 판매로 엄청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빌보드 1위에 힙합 송이 랭크하자 백인들을 비롯한 일반 대중도 힙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 점점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이 메인스트림에 합류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바닐라를 "오늘날의 힙합이 있게 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한때 힙합의 양대 산맥 중 하나였던 데스 로 레코드를 설립한 사람은 슈그 나이트인데, 음반사 오너가 되기 전에는 슈그 나이트는 래퍼이기도 했지만 몇몇 힙합 아티스트들의 매니저도 맡아 하고 있었다. 슈그의 클라이언트 중에는 마리오 존슨(예명 "초콜렛")이라는 래퍼가 있었는데, 사실 바닐라의 최고 히트곡인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는 초콜렛이 만든 곡이었다(곡을 써서 바닐라에게 줬다고 한다). 그런데 바닐라의 앨범에는 존슨의 이름이 전혀 들어있지 않으며, 존슨이 이 곡으로 받은 로열티는 한푼도 없었다. 당연히 존슨은 매니저인 슈그에게 하소연을 했고, 슈그 나이트는 바닐라가 기거하는 호텔로 마리오를 대동하고 찾아가서는 정당한 보수를 존슨에게 지불하던가, 아니면 15층 아래로 떨어지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6]
바닐라 아이스는 슈그에게 4백만 달러를 로열티로 지급했고, 슈그는 이 돈으로[7] 닥터 드레와 함께 데스 로 레코드사를 차렸다. 데스 로 라벨은 오늘날 힙합에 큰 족적을 남긴 거물 아티스트들을 다수 배출했고(딱 세 명만 들자면 닥터 드레, 투팍, 스눕 독이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지?), 웨스트 코스트 힙합과 G-Funk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데스 로 레코드의 시작은 바닐라가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로 벌어들인 돈으로 한 것이니, 바닐라는 의도치 않게 현대 힙합의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여담으로, 슈그의 데스 로 레코드는 LA가 본거지였으며, 자연히 당시 힙합의 본가였던 뉴욕의 배드 보이 레코드와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서부 해안(LA, 데스 로)과 동부 해안(뉴욕, 배드 보이) 사이의 이 마찰은 점점 그 강도가 높아져 팬들, 심지어 아티스트들이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며 "적"에게 총을 난사하는 소위 "드라이브 바이"가 빈번히 자행되었고, 서부 진영의 투팍과 동부 진영의 노토리어스 B.I.G.가 각각 살해당하며 절정에 달하였다. 이를 소위 미국 동부 해안(이스트 사이드)과 서부 해안(웨스트 사이드)간의 라이벌 관계라 부르며, 이는 현대 미국 힙합 씬의 큰 특징이다. 그런데 바닐라 아이스가 슈그 나이트에게 4백만이라는 거금을 주지 않았다면 데스 로 라벨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슈그가 투팍의 보석금을 내주고 감옥에서 꺼내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니, 어찌 보면 이 또한 바닐라 아이스 때문이라 할 수 있을지도.
4. 기타
바닐라아이스 이후 가장 성공한 백인래퍼 에미넴이 무지무지하게 싫어한다. [8] 자기 갈 길을 망쳐놨다고 언급할 정도로… 에미넴의 자전적 영화 8 마일에서 보면 랩배틀에서 흑인래퍼들이 에미넴을 '바닐라아이스 흉내내는 흰둥이병신'식으로 까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에미넴이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바닐라 아이스도 에미넴 초창기 'My Name Is'로 활동할 적에 에미넴을 상당히 마땅치 않아하는 식의 인터뷰를 했었다. '에미넴이 나를 따라잡으려면 10억만장의 앨범은 더 팔아야할 것이다. 나를 절대 못 따라잡을 것' 또 에미넴이 엄마를 디스하는 것에 대해서도 안 좋게 언급을 했었다. 에미넴이 'Ice Ice Baby'를 확실하게 뛰어넘는 곡들을 많이 발표하며 최고의 MC가 되자, 인터뷰에서 '자신이 에미넴을 위해 길을 터줬다. 감사해야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에미넴은 이런 바닐라 아이스의 인터뷰에 대해서는 딱히 반응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서로 약간 못마땅해하는 경향이 있다. [9]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사실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고 교육도 잘 받은 평범한 백인"인 것이 밝혀져 묻혔다는 설도 있으나 루머인지 아닌지는 불명.[10]
4.1. 바닐라 아이스에서 이름을 따온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등장인물
자세한 사항은 바닐라 아이스(죠죠의 기묘한 모험)문서 참조.
[1] 댄스 댄스 레볼루션 X2에 실리기도 했다.[2]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처음엔 가볍게 넘어갔지만 차트 1위를 달성하자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특급 변호인들을 대응해 법적 소송을 걸었다. 그 결과, 도용이 인정되어 해당 곡의 수익 대다수를 퀸에게 넘기게 된것이다.[3] 윌 스미스는 오늘날엔 영화배우로 훨씬 유명하지만 본래 직업은 래퍼였으며, DJ 재지 제프(DJ Jazzy Jeff)와 함께 '프레시 프린스'라는 예명을 달고 활동했다. 사실 스미스는 연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래퍼로 번 돈을 마구 낭비한 후 세금낼 돈이 없자(소득세만 280만 달러였다) TV 시트콤에 출연을 하기 시작하면서 연기자로서도 알려지기 시작해 지금은 배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여담으로 첫 출연한 시트콤의 제목도 "벨에어의 프레시 프린스"였다.[4] 윌 스미스의 온건한 랩 가사는 당시 정통파 래퍼들에게 비아냥을 들었으며, 일례로 에미넴은 The Real Slim Shady에서 2절 초반부에 '윌 스미스는 판을 팔아야겠답시고 욕도 안 하지'라며 디스했다.[5] 현대를 살아가는 위키러께서는 흑인 아티스트의 앨범을 백인 청소년이 구매할 수 없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음악의 흑백구분은 매우 엄격했다. 일례로 MTV는 흑인 아티스트의 음악 비디오를 전혀 방송해주지 않았으며, 1983년에 마이클 잭슨의 폭발적 인기로 인해 마침내 MTV에서도 "빌리 진"과 "빗 잇"을 방송하자 백인들의 엄청난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6] 슈그의 말로는 바닐라의 발목을 붙들고 발코니에서 거꾸로 대롱대롱 흔들었다고 하는데, 존슨과 바닐라의 말로는 그냥 협박만 했다고 한다. 사실 슈그는 전직 미식축구 프로선수였으므로 실제로 사람을 거꾸로 잡고 흔들 힘은 있었겠지만...[7] "왜 쵸콜렛한테 준 돈으로 슈그 나이트가 회사를 차려?"라는 의문을 갖는다면 당신은 슈그 나이트보다 훨씬 선량한 사람이다. 투팍 항목을 읽어보면 슈그 나이트가 어떤 인간인지 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8] 사실 에미넴은 너무 거대한 스타가 되었고 실력적으로도 역대 탑급 MC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에미넴과 바닐라 아이스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비교 자체가 무안해질 정도. [9] 여담으로 에미넴은 언더그라운드 활동 당시 불알친구였던 프루프와 함께 바닐라 아이스와 MC 해머 역할을 맡아 서로 디스질을 하는 컨셉의 데모 테이프를 만든 적이 있다. 사실은 이 둘로 대표 되는 팝 스타일로 변질된 힙합 씬 자체를 디스하는 것에 가깝다.[10]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에서 랩이 백인들에게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예시로 이 설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