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윤

 

朴錫胤
1898년[1] 10월 26일 ~ 1950년 10월 20일
1. 소개
2. 생애
2.1. 야구인으로서
2.3. 해방 이후
3. 여담


1. 소개


일제강점기 때의 야구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함양(咸陽).

2. 생애



2.1. 야구인으로서


박석윤은 1898년 10월 26일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현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2]에서 아버지 박진규(朴鎭圭)와 어머니 조씨(曺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성부 종로.
1911년 창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성부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개월 만에 중퇴하였다. 곧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관립제1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다음 해인 1912년 조세이(城西)중학교로 전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그해 6월 교토제3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6월 졸업하였으며,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1922년 3월 졸업하였다.
그는 야구 엘리트 인재로서 동경제국대학 재학 당시 야구로써 출중한 재능을 보여 도쿄유학생 반도야구단 주장 자격으로 제 4차도쿄유학생모국방문경기(1917년), 제 5차 도쿄유학생모국방문경기(1920년), 제 6차 도쿄유학생모국방문경기(1921년)에 참여해 전라북도 전주군을 방문하기도 했다. 주 포지션은 투수.
한편, 그는 도쿄 유학 시절 재일본 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의 평의원이었으며, 박열이 소속한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회(黑友會)에도 관여하였고 당시 일본인 사회주의자였던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콘도 겐조(近藤憲三),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이쿠타 쵸코(生田長江) 등과 교유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주의 사상단체였던 코스모구락부 부원으로서 사회주의 선전에 가담하기도 했다.
특히, 1921년 7월 동경 유학생 학우회의 야구부 순회시합의 일원으로서 전주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불온한 연설을 하여 전주경찰서에 소위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으로 구류 20일 처분을 받은 적도 있었다.

1922년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그해 제 3회 전조선야구대회에 중앙체육단 소속으로 뛰기도 했으며, 그해 12월 8일에 일본을 방문했던 미국 프로야구 올스타(Pacific Coast League)[3]를 초청하기 위해 이원용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협상을 펼쳐 방한 경기를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1923년 제4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도 중앙체육단 소속으로 활동하던 그는 휘문고보 야구부의 감독으로 재직하게 되는데 이때 휘문고보를 이끌고 제3회 조선중등학교대회 겸 제9회 전국중등우승대회 조선예선전에 참가, 경성중학교, 인천상업, 선린상업, 대전중, 용산중, 부산상업, 부산중들과 함게 참여, 경성중학교와의 결승전에서 10:1로 대승을 거두며 고시엔 본선 진출을 이뤄냈다. 고시엔 본선에서는 아쉽게 8강에서 머물렀지만 이해 휘문고는 '''순수 조선인 야구부 유일의 고시엔 8강 진출'''이라는 대업을 이뤄 냈다.
그후 1924년에 하와이원정대의 일원으로 하와이 원정 경기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후로도 꾸준히 야구 대항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0년 9월 30일 조선야구심판협회가 창설 당시 위원으로도 참여했으며 해방이후인 1946년에 박석윤은 조선야구협회 창립 고문으로도 참가했다.
이렇듯 야구계 전반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왜 흑역사로 평가 받냐면 친일반민족행위자 이기 때문이다.

2.2.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유학생활을 마친후 조선총독부와 연을 맺고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직책을 맡았으며 재외연구원 재직시절 조선 총독부의 후원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다. 귀국후인 193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부사장에 올랐으며 언론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1932년,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서로의 독립을 위해 규합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이를 와해시키기 위해 만주국에 민생단을 설립을 주도했고, 이 선택은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조선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일조하게 된다. 그후 만주국 외교관이 되어 1939년 2월 만주국의 주폴란드 총영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던 간도협조회의 와해를 위해 움직였다.
만주국 훈4위 경운장(景雲章)을 받고, 만주국 협화회 중앙본부 위원까지 올랐다.

2.3. 해방 이후


광복 직전 조선총독부를 대리하여 여운형을 찾아가 행정권 인수를 권유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6년 3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평양 인근의 양덕온천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체포, 건강을 이유로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47년 2월 24일 평양 인민교화소에 다시 구류되었고 4월 19일 북한 최고재판소에 친일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1948년 1월 22일에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이에 불복하고 항소를 했지만 기각당하며 1948년 6월 9일에 사형이 확정, 1950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3. 여담


  • 야구 가족이기도 한데 동생인 박석기(朴錫驥)[4]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 이런 친일 행각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데 1924년에 하와이원정단에 합류해 하와이를 방문했을때 그곳의 동포들이 박석윤을 모래사장에 무릎끓고 옆에 칼을 꽂아 자결하라고 일침을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 이때 그의 동생이었던 박석기가 그 칼을 집어들어 그 자리에서 자신의 가슴을 X자로 그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기며 그의 결백을 주장해 풀려났다고 한다.

[1]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1897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인근의 유곡리·해곡리와 함께 함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무길박석우도 이 마을 출신이다.[3] 트리플 A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4] 1900년 ~ 1953년. 대한민국의 거문고 산조의 대가. 전무형문화재 제16호 기능보유자인 한갑득에게 사사하기도 했다. 그의 형과는 달리 일제강점기 시절에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유유자적 살아가다가 조선의 판소리계를 위해 헌신 하기도 했다. 그의 자식인 박윤초도 판소리를 배워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