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고등학교 야구부

 



[image]
'''인천고등학교 야구부'''
(Incheon High School)
'''창단'''
1905년 or 1917년
'''소속 리그'''
인천·강원권
'''감독'''
계기범
'''연고구단'''
SK 와이번스
'''우승 기록'''[1]
6회

'''대회'''
'''우승'''
'''준우승'''
'''4강'''
'''대통령배'''
1회(2004)
1회(1985)
6회(1973, 78, 79, 94, 2003, 17)
'''청룡기'''
2회(1953, 54)
3회(1955, 57, 58)
1회(1985)
'''황금사자기'''
2회(1954, 89)
3회(1955, 77, 79)
-
'''봉황대기'''
1회(2020)
2회(1979, 96)
2회(1976, 90)
'''협회장기'''
-
-
-
'''한국야구100주년 기념 최우수고교 야구대회''' [2] [3]
1회 (2005)
-
-
'''1953년, 1954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대구상업중등학교[4]

'''인천고등학교'''

동산고등학교
<color=#373a3c> '''1954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경남중등학교[5]

'''인천고등학교'''

경남고등학교
<color=#373a3c> '''1989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동산고등학교

'''인천고등학교'''

충암고등학교
'''2004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대구고등학교

'''인천고등학교'''

동성고등학교
'''2020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휘문고등학교

'''인천고등학교'''

2021년 우승팀
1. 연혁
2. 최근 근황
3. 단체 응원
4. 지역 학교와의 라이벌리
5. 출신 선수[6]


1. 연혁


1905년 [7]에 창단해서 전신인 인천공립상업학교(인상) 가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갑자원, 고시엔)에도 출전했을 정도로 일제시대 한국 야구를 선도했던 팀 중 하나였다. 특히 50년대 인천고감독으로 인천고의 전성시대를 연 김선웅(인천고 36회) 선생은 1936년 갑자원(고시엔) 대표로 출전하기도 한다.
인천상업은 1936,38,39년에 갑자원 본선에 진출했으며 36년에 김선웅, 장영식 선생 2명이 선수로 출전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해방 후에도 이어져 인천공립상업중학교 시절에는 신현철, 김재은 등을 중심으로 전국대회에 진출하였으나 동산중의 박현식에 번번히 밀려 우승권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전후 1950년대 인천야구의 전성 시대에 그대로 폭발하게 되었다. [8]
인고100년사에서는 그 공을 교장 이인관, 이병규 선생, 감독인 김선웅 선생, 야구부장 김두한 선생에게 돌리며 기리고 있다.
1952년 유일무이한 전국대회였던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달성하고 인천이 배출한 전설의 국가대표 에이스 서동준을 앞세워 1953년 쌍룡기(화랑기) [9], 청룡기, 전국체육대회 우승에 성공하며 '''전관왕''' [10] 의 위업을 달성하며 인천고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1954년에는 '''청룡기와 황금사자기, 전국체전을 모두 석권'''하면서 전국 제일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부산에서 열린 쌍룡기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 아쉬울 정도의 성적이었다.[11]
1955년에는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에서 모두 우승에 도전하지만, 1955년 청룡기에서는 인천이 낳은 또다른 전설 신인식동산고에게 패하면서 무릎을 꿇었고, 황금사자기에서는 경남고에 지면서 모두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다행히 부산 쌍룡기를 우승하며 2년만에 우승을 되찾았다. 다만 1955년을 기점으로 동산고의 전성기가 열려 동산고의 청룡기 3연패를 지켜봐야 했다.[12]
이 기간 53회 주세현, 진원주, 서동준, 김광택, 54회 김영복 [13], 조영한, 진호영, 김홍기, 55회 김진영,이기상, 김일겸 등이 활약하였다.
인천 야구로서는 53년부터 57년까지 청룡기 5연패(인천고 2연패, 동산고 3연패)를 하며 전국 최강의 위용을 자랑했으나 인천고 입장에서는 53,54 2연패 이후 55년과 58년에 '''청룡기 준우승'''에 그쳤다. 1956년에도 부산 쌍룡기 (화랑기)에서 동산을 만나 준우승에 머물렀다.[14]
1957년에도 청룡기에서는 인고의 3연패를 저지했던 동산을 만나 3연패를 저지하는 입장으로 나섰으나 또다시 '''준우승''', 결국 동산의 3연패를 지켜봐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인고는 2번의 청룡기 준우승(55,57)에 그치며 분루를 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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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균
이후 암흑의 60년대를 지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기지개를 피던 인고는 71년 대통령배 8강을 거쳐 한국야구 역사상 컨트롤 아티스트 중의 1명으로 꼽히는 임호균이 활약하면서 72년 대통령배,황금사자기 8강, 73년 '''대통령배 4강''' [15], 청룡기 8강 [16] 까지 진출했다. 74년은 봉황대기 16강에 그치며 시즌 아웃. [17]
임호균 졸업 이후 인호봉,김진우,양승관, 김상기 등 후에 청소년대표, 국가대표의 주축이 되는 황금세대가 입학하면서 76년~80년에 이르는 인고야구 부흥기를 열게된다. [18] 이들을 주축으로 75년과 76년 황금사자기 8강, 76년 '''봉황대기 4강''' [19] 에 진출하였으며 김상기, 최계훈 원투퍼치가 가동된 197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중앙무대를 계속 노크한다. 1977년은 '''황금사자기 준우승''' [20] , (최계훈의 준우승 징크스 시작) [21]. 1978년에는 '''대통령배 4강''', 전국체전 우승.
1979년은 당시 고교 제일의 에이스로 불리던 최계훈 [22] 을 앞세워 정상에 계속 도전했지만 '''대통령배 4강'''과 대붕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전국체전을 '''모두 준우승'''하는 그야말로 콩라인의 전설을 쓰고 말았다.[23]
1980년에는 대통령배, 황금사자기 8강, '''대붕기 준우승''' [24], 1981년은 대통령배 8강 [25], 1982년은 '''황금사자기 4강''', 대통령배와 청룡기는 8강, 1983년은 대통령배,황금사자기 8강을 거두었다
1985년에는 탁명렬 [26], 김경기 [27] 의 활약에 더불어 '''대통령배 준우승''', '''청룡기 4강'''에 이른다.
1986년,88년 봉황대기 16강에 머물던 인천고가 다시 정상을 차지한 것은 1989년으로 에이스 허호석[28]최상덕, 박종일 [29] 을 앞세워 '''황금사자기 우승'''에 성공했다. 사실 1989년 인천고는 봉황대기에서 초반 탈락할 정도로 그리 강한 팀은 아니었지만, 동산고가 인천 지역 대표가 아니라 1988년 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황금사자기에 출전해서 인천 지역 대표로 운 좋게 나간 것이었다. [30] 그런데 극적으로 우승에 성공하며 35년만에 전국대회 정상에 복귀했다.
1990년에는 봉황대기 4강 [31], 91년은 대통령배8강, 93년에는 대통령배,청룡기, 봉황대기 8강에 그쳤으며 1994년에는 박진만의 활약과 함께 '''대통령배 4강''', 1995년에는 청룡기8강, 전국체전 우승을 거둔다.
1996년 이근용[32] 과 2학년 김수경 [33] 을 앞세워 봉황대기 결승에 올랐지만 정대현군산상고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었다. 1998년 황금사자기 8강. 2002년 청룡기 8강.
이후 2000년대 초반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하며 고교무대의 정상에 다시 도전하게 된다. 2003년 대통령배 4강, 봉황대기 8강을 시작으로 2004년 2학년 배터리 김성훈-이재원을 앞세워 야구부 창단 첫 '''대통령배 우승'''에 성공하였다. 여세를 몰아 투수 3인방(김성훈-김용태-김영롱)과 포수 이재원, 내야수 김남형, 외야수 이명기 등 정말 강력한 전력을 구축했고, 2005년 '''한국야구 100주년 기념 최우수 고교야구 대회'''에서 '''우승'''하며, 2005년을 인천고의 해로 만드는가 싶었다. [34]
[image]
[35]
하지만, 대통령배 8강에서 대회 준우승팀 신일고에게 패배,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황금사자기에서 김광현 한 사람에게 무너지면서 안산공고에게 지며 1회전 탈락하고 만다. 최후의 기회였던 봉황대기에서 대회 우승팀 유신고에게 지면서 인천고 최고의 전성기가 될 것 같았던 2005년이 대통령배,봉황대기 8강의 성적으로 다소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다.
2006년은 대통령배,청룡기 8강
2007년, 2008년 미추홀기 우승, 2008년 대붕기 우승.
이후 2009년 부터 2013년까지는 전국대회 성적이 전무했으며 2006년부터 2016년까지 무로 11년간 전국대회 4강권에 들지 못했다.
2014년 청룡기 8강, 2017년 청룡기 4강 [36]

2. 최근 근황


2019년 고교야구 주말리그 권역우승을 차지하였으나 협회장기 8강, 봉황대기 16강에 그쳤다.
2020년은 24년만에 봉황대기 결승전에 올라 과거 1985년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우승기를 넘긴 서울고를 상대로 창단 첫 '''봉황대기 우승'''을 달성했다.[37]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를 최소 1회씩 모두 우승한 11번째 학교가 됐다.[38]

3. 단체 응원


인천고등학교의 전통 중의 하나가 야구부가 전국대회 8강에 진출하면 단체를 응원가는 것이었다. 가령 16강은 케바케, 8강은 1,2학년, 4강부터는 전교생, 결승전은 총동문회 출동 등. 과거 인천고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응원부의 주도 아래 응원연습을 했다. 1997년까지 있었던 인천시 인문계 고교 체육대회 그리고 이후의 인제전 응원을 위해서도 인고 학생의 응원방법 숙지는 필수였다.
과거에는 3월에 대통령배, 4월에 청룡기, 6~7월에 대붕기, 무등기, 화랑대기, 8월에 봉황대기, 9월에 황금사자기 순으로 개최되었는데 전력이 약하던 시절에는 인천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39] 모든 재학생들은 8월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당시 봉황대기가 유일하게 지역예선이 없는 대회였기에 8월 방학 자율학습을 합법적(?)으로 땡땡이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평준화 이후에도 인천시 학력 1위를 고수하다가 특수목적고와 신흥 명문의 잇단 등장으로 인해 인천고의 대학 진학 실적이 감소하자 전국대회 4강부터만 구경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우승을 했던 2004년 이후로 진출을 하지 못해서 전통이 무색해지고 있다. 그나마 미추홀기가 있던 시절에는 우승을 하면서 그 시기에 학교에서도 단체로 숭의야구장에 응원을 나갔던 적이 있긴 하지만, 주말리그 이후에는 그저 안습. 이제 야구장 가는 일이 거의 없이 그대로 졸업하고 있다.(...)

4. 지역 학교와의 라이벌리



4.1. vs 동산고등학교


인천고 야구부가 인천에서 최초로 학생 야구단을 창단했고 해방 직후 동산고가 인천에서 두 번째로 학생 야구단을 창단했다. 두 학교는 60년이 넘는 세월을 서로 공존했고 1982년 제물포고가 팀을 창단하기 전까지는 인천에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유이한 야구부였기 때문에 강력한 지역 라이벌로 성장했다.
특히 1950년대 고교야구 초창기 시절에는 두 학교가 한국 고교야구의 중심이었다. 1953년부터 인천고가 청룡기 2연패를 먼저 했고, 1955년 인천고의 3연패 시도를 동산고가 저지했다. 동산고는 1955년부터 청룡기에서 3연속 우승하면서 청룡기를 영구보존하게 됐다. 인천고 입장에서는 청룡기를 영구보존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었지만 하필이면 지역 라이벌인 동산고가 이를 저지하고 청룡기를 영구보존했기 때문에 동산고가 불구대천의 원쑤가 된 셈.
이후에도 라이벌 의식은 강해졌다. 특히 메이저 전국대회에 인천 대표(1981년 직할시 승격 이전에는 경기도 대표)로 참가하려면 지역예선을 거쳐야 하는데 지역예선에서 맞붙는 팀은 항상 인천고와 동산고였다.[40] 이러한 환경 탓에 ''''너를 이겨야 내가 산다''''는 강력한 라이벌리가 형성됐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다.
라이벌리의 정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꽤 어두운 흑역사도 있었다. 1975년 5월 23일 숭의야구장에서 열린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경기도 예선에서 두 학교가 맞붙었는데 경기 도중 집단 난투극이 일어났다.
사연인즉슨... 이날 경기는 6회까지 동산고가 인천고에 7대0으로 크게 앞서다가 6회말 인천고가 7점을 따라잡으며 7대7 동점을 이뤘다. 그러자 동산고는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을 노리기 위해 지연 작전으로 경기를 끌고 갔다. 당시는 일몰 이후에는 경기를 중단하고 다음날 경기를 재개하는 서스펜디드 게임이 빈번했던 시절이었다.[41]
동산고의 지연 작전은 이러하다. 투수가 1루수를 향해 무제한 견제구(...)를 던지는가 하면, 야수들이 번갈아서 타임을 걸고 스파이크 끈을 풀었다 다시 매기도 했고, 포수가 난데없이 덕아웃으로 들어가서 프로텍터를 고쳐 입기도(...) 했다.
동산고의 지연 작전에 빡친 인천고 응원단은 그라운드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고 일부는 유리병과 돌을 그라운드로 던졌다. 문제는 당시 심판들인데 동산고의 이러한 지연 작전에 구두 경고만 보냈을 뿐 제지를 하지 않았다. 결국 '''인천고의 한 재학생이 동산고 선수들을 향해 욕을 퍼부으며 그라운드로 난입'''(...)했고 동산고 선수들은 이 학생을 집단 구타했다. 그러자 학우의 구타에 빡친 인천고 응원단이 그라운드로 뛰어들었고 이에 질세라 동산고 응원단도 난입해 집단 패싸움이 벌어졌다. 중앙 일간지에 기사도 났다.당시 인천고 재학생이셨던 분의 증언도 있다. 7분 55초부터 들어보자.
결국 이 싸움의 여파로 두 학교는 청룡기 대회 출전을 포기했고 이 해의 청룡기 대회는 경기도 대표가 출전하지 않은 채 열렸다. 1975년 5월 30일 동아일보 기사 '인천야구 자성의 금족령'
이후에도 인천고와 동산고는 암묵적으로 강력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으며 숭의야구장에서 전국대회 지역예선이 열리던 날에는 양교 모두 1, 2학년 학생들을 응원단으로 총동원해 응원전을 펼치기도 한다. 특히 지역예선은 재학생은 물론 나이 지긋한 선배 졸업생들도 와서 응원을 하곤 했다.

4.2. vs 제물포고등학교


인천고와 제물포고는 지역 최고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다. 운동부 때문에 생긴 라이벌이 아니라 학교 자체 간의 자존심 싸움이다.[42]
원래 제물포고의 뿌리는 일제시대 부터 있던 인천중학교다. [43][44] 더불어 당시 인고는 인천상업학교로서 전국 탑클래스의 상업학교로 있다가 한국동란 중 학제개편과 더불어 인천고등학교로 개편되었고 인중은 제물포고, 인중으로 분리가 되었다. 당시에는 중고교 병설 시스템이었던 관계로 인고도 병설중학교를 만드는 데 이것이 상인천 중학교이다. 이는 당시 인고가 배다리, 현재의 정보산업고 자리에 있었는데 동인천을 상인천, 인천역을 하인천으로 부르던 까닭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1981년 이전까지 인천은 경기도 소속으로 제고와 인고는 도내 1,2위를 다투는 명문고로 한 때 "누가 서울대를 더 많이 보냈느냐?"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2년 제물포고가 인천고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으로 야구부를 창단했다. 자연스럽게 자존심 싸움의 현장은 야구장으로 넘어왔다. 문제는 신생팀인 제물포고의 실력이 인천고에 한참 못미쳤다는 점. 일제 강점기 때부터 야구부를 운영한 학교와 1980년대에 창단한 학교가 비교의 대상이 될 리는 없었다. 그래도 인천의 진짜 명문이 누구냐를 두고 벌이는 자존심 싸움이었던지라 양 교는 치열하게 경쟁했다. 물론 10번 경기를 하면 8~9번은 인천고가 이기는 형국. 그것도 콜드게임(...).
두 학교 대결의 백미는 1991년부터 시작된 양교 정기전. 매년 5~6월에 열리는 인천고-제물포고 정기전은 야구, 배구, 농구 등의 종목에서 우열을 가리고 있다. 이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단연 야구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인천고가 제물포고에 한참 앞섰지만 제물포고 동문회가 야구부에 공격적인 후원을 단행하면서 제물포고의 성적이 많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 정기전은 2014년 이후로 단 한번도 열리지 않고 있다.

5. 출신 선수[45]


'''이름'''
'''포지션'''
'''프로입단'''
'''경력'''
'''김진영'''
유격수
-
육군 경리단-교통부-철도청
김무관
내야수,외야수
1982년 원년 멤버
건국대-삼미/청보(1982~1985)
이철성
내야수
1982년 원년 멤버
인하대-한국전력-삼미/청보(1982~1986)
'''임호균'''
투수
1983년 1차 지명
동아대-한국전력-삼미(1983)-롯데(1984~1986)-청보/태평양(1987~1990)
김진우
포수
1983년 1차 지명
인하대-삼미/청보/태평양(1983~1988)-MBC(1989)
'''양승관'''
외야수
1982년 원년 멤버
인하대-포항제철-삼미/청보/태평양(1982~1989)-LG(1990)
인호봉
투수
1982년 원년 멤버
한국전력-삼미(1982~1985)
최계훈
투수
1984년 1차 지명
인하대-삼미/청보/태평양(1984~1986, 1990)
'''김동기'''
포수
1986년 1차 지명
인하대-청보/태평양/현대(1986~1996)
'''김경기'''
내야수
1990년 1차 지명
고려대-태평양/현대(1990~2000)-SK(2000~2001)
권명철
투수
1992년 2차 1라운드
인하대-OB(1992~1998)-해태(1999)-SK(2000~2002)-두산(2003~2004)
'''장원진'''
내야수
1992년 2차 4라운드
인하대-OB/두산(1992~2008)
계기범
외야수
1993년 신고선수 입단
홍익대-태평양/현대(1993~1997)
'''김홍집'''
투수
1993년 1차 지명
단국대-태평양/현대(1993~2001)-한화(2002~2003)
'''최상덕'''
투수
1994년 1차 지명
홍익대-태평양(1994~1995)-해태/KIA(1996~2005)-LG(2006)-SK(2007~2008)
-한화(2009)
서한규
내야수
1998년 2차 2라운드
홍익대-상무-롯데(1998~2002)-현대(2002~2007)
'''정경배'''
내야수
1996년 2차 6라운드
홍익대-삼성(1996~2001)-SK(2002~2009)
'''최원호'''
투수
1996년 1차 지명
단국대-현대(1996~1999)-LG(2000~2010)
김우석
내야수
2002년 2차 1라운드
홍익대-포스틸(1998~1999)-상무(2000~2001)-LG(2002~2007)-삼성(2008)
윤재국
외야수
1998년 2차 1라운드
경남대-쌍방울(1998~1999)-SK(2000~2002)-롯데(2002~2003)-두산(2004~2007)
-한화(2008~2009)-SK(2009)
'''박진만'''
내야수
1996년 고졸우선 지명
현대(1996~2004)-삼성(2005~2010)-SK(2011~2015)
'''김수경'''
투수
1998년 고졸 우선지명
현대(1998~2007)-넥센(2008~2012)-고양 원더스(2014)
정재복
투수
1999년 2차 6라운드
인하대-LG(2003~2013)-넥센(2014~2015)
김광수
투수
2000년 2차 2라운드
LG(2000~2011)-한화(2011~2015)-KIA(2015~2017)
이한진
투수
2002년 1차 10라운드
건국대-SK(2006~2015)
김성훈
투수
2006년 2차 1라운드
SK(2006~2007)-삼성(2011)-한화(2014)
'''이명기'''
외야수
2006년 2차 6라운드
SK(2006~2017)-KIA(2017~2019)-NC(2019~)
'''이재원'''
포수
2006년 1차 지명
SK(2006~)
김남형
외야수
2007년 2차 3라운드
현대(2007)-넥센(2008~2014)
명재철
투수
2011년 신고선수 입단
한양대-삼성(2011~2012)-한화(2013)
박윤
내야수, 외야수
2007년 2차 5라운드
SK(2007~2015)-넥센(2016~2017)
국해성
외야수
2008년 신고선수 입단
두산(2008~)
'''김재환'''
포수[46]
2008년 2차 1라운드
두산(2008~)
'''최금강'''
투수
2012년 신고선수 입단
인하대-NC(2012~)
강지광
투수
2009년 2차 3라운드
LG(2009~2013)-넥센(2014~2017)-SK(2018~)
허정협
외야수
2015년 육성선수 입단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넥센/키움(2015~)
김훈영
내야수
2013년 신고선수 입단
강릉영동대-LG(2013~2017)
'''박민호'''
투수
2014년 2차 3라운드
인하대-SK(2014~)
양원혁
내야수
2014년 육성선수 입단
인하대-LG(2014~2019)
이창진
내야수[47]
2014년 2차 6라운드
건국대-롯데(2014~2015)-kt(2015~2018)-KIA(2018~)
'''문경찬'''
투수
2015년 2차 2라운드
건국대-KIA(2015~2020)-NC(2020~)
윤대경
투수
2013년 2차 7라운드
삼성(2013~2018)-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48](2019)-한화(2019~)
장시윤
내야수
2013년 7라운드
넥센(2013~2017)-LG(2018~2019)
박한길
투수
2014년 2차 4라운드
한화(2014~2015)-롯데(2016~2020)
김윤환
투수
2014년 2차 10라운드
넥센(2014~2017)
정동욱
포수
2018년 2차 10라운드
원광대-넥센/키움(2018~)
백승현
내야수
2015년 2차 3라운드
LG(2015~)
신민재
내야수
2014년 육성선수 입단
두산(2015~2017)-LG(2018~)
하성진
내야수
2016년 2차 5라운드
SK(2016~)
권혁찬
내야수
2021년 2차 10라운드
홍익대-SK(2021~)
오윤성
투수
2017년 2차 4라운드
넥센/키움(2017~)
이정범
외야수
2017년 2차 5라운드
SK(2017~)
공민규
내야수
2018년 2차 8라운드
삼성(2018~)
'''정은원'''
내야수
2018년 2차 3라운드
한화(2018~)
백승건
투수
2019년 1차지명
SK(2019~)
이해승
내야수
2019년 2차 8라운드
삼성(2019~)
임형원
투수
2020년 2차 4라운드
NC(2020~)
박시후
투수
2020년 2차 10라운드
SK(2020~)
강현구
외야수
2021년 2차 3라운드
두산(2021~)
장규현
포수
2021년 2차 4라운드
한화(2021~)
조성현
투수
2021년 2차 7라운드
NC(2021~)
한재승
투수
2021년 2차 4라운드
NC(2021~)

[1] 4대 메이저 + 협회장기[2] 한국 야구 100년사를 통해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명문팀들이 참가했던 대회로서 04년 말 기준 고교야구 중앙 전국대회 최다 우승팀 순서로 초청하였다. 당시 기준 최다 우승교(20회)인 경북고를 비롯해 경남고(14회), 부산고(12회), 신일고, 광주일고(이상 11회), 상원고(구 대구상고), 군산상고 (이상 10회), 선린인터넷고, 천안북일고, 동산고(이상 8회), 덕수정보산업고(6회) 등 11개 팀과 협회에서 우승횟수와 전통을 고려해 선발한 3개팀 동성고(구 광주상고)와 서울고, 인천고(이상 5회) 이상 총 14개팀이 자웅을 겨루었다. 와일드카드 (협회 선정) 3개교 중의 하나인 인천고는 막강한 동문회의 위력으로 참석했더라는 일화가 있다. [3] 어느 학교도 가져갈 수 없는 유일한 타이틀이다. 엄청난 영광인셈. 그것을 인천고가 해낸 것이다.[4] 1950년 우승팀으로 1951년과 1952년 대회는 한국전쟁으로 미개최[5] 1949년 우승팀으로 1950년~1953년 대회는 한국전쟁으로 미개최[6] 나무위키에 등록된 선수 한정. 졸업 연도 순.[7] 학교 측 주장, 인고100년사에 따르면 학교에서 야구활동을 한 학생의 일기가 있다고 한다 [8] 당시 인천고 교장선생님이 훗날 충암고를 설립한 충암 이인관 선생이다. [9] 당시 부산의 쌍룡기는 메이저 대회의 위상이었다.[10] 1953년에는 황금사자기가 열리지 않음[11] 서동준은 1954년 고3의 신분으로 한국 최초의 야구국가대표로 최연소로 선발되었다. [12] 동산고는은 55년 청룡기 우승을 제외하고는 1회전 탈락 및 예선 탈락이었다.[13] 삼성라이온스 김한수 부친 [14] 동산은 56년 전관왕 - 청룡기, 쌍룡기, 전국체전, 전국4도시대항 대회 / 황금사자기는 열리지 않았다.[15] 70-80년대에는 4강제도가 있어서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전국대회 4강이 필수조건이었다 [16] 황금사자기,봉황대기 16강[17] 임호균은 74년에 노히트노런만 2번을 기록하는데 팀 전력이 약해 전국대회 우승권과는 멀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한바 있다 [18] 비록 대부분 준우승, 4강에 그치지만[19] 봉황대기 우수투수 인호봉[20] 감투상 김경남[21] 대통령배 8강[22] 봉황기 우수투수상, 황금사자기 감투상[23] 전국체전 결승전은 연장전 무승부 후 추첨으로 패했다.[24] 2년 연속[25] 봉황대기 16강[26] 대통령배 감투상[27] 이영민 타격상 수상[28] 동국대 - 한일은행, 황금사자기 우수투수상[29] 대회 최우수선수상[30] 당시 동산고의 에이스는 초고교급 투수 위재영[31] 우수투수상 김용범 [32] 현대 97년 지명, 봉황기 우수투수상[33] 봉황기 감투상[34] 2005년 한국야구 100주년 기념대회는 2005년 첫 전국대회 였으며 매년 첫번째로 개최됐던 대통령배가 두번째로 밀려서 개최됐다. 대통령배는 특유의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많이 띄었는데 2005년은 100주년 기념대회가 그 포지션을 가져가서 그런지, 참가 고교팀의 전력들이 좋았고 모두 최선을 다해 게임을 뛰었다.[35] 2005년 한국야구 100주년 기념대회 우승 후의 사진이다. 당시 상대팀이 부산고였는데 사진에서 보듯 부산고의 라인업도 화려했다. 그 당시 1번타자 '''손광민'''이 바로 오늘의 손아섭. 손용석도 라인업에 있다.[36] 2005년 이후 전국대회 4강권은 처음이었다.[37] 최계훈, 이근용, 김수경이 달성하지 못한 봉황대기 우승을 후배들이 41년, 24년이 지나 이루었다. [38] 덕수고, 서울고, 휘문고, 경북고, 대구상원고, 광주일고, 광주동성고, 북일고, 군산상고, 동산고, 인천고. 최초의 그랜드슬램 달성은 1970년대 최강팀이던 경북고가 1971년에 기록했다.[39] 동산고등학교가 인천의 맹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40]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인천고등학교와 인천체육고등학교가 야구부를 창단했지만 이 팀들의 실력은 두 학교에 절대적으로 밀렸다. 결국 동인천고와 인천체고의 야구부는 얼마 못 가 해체됐다.[41] 숭의야구장에 야간 조명 시설이 설치된 것은 프로야구가 창설되던 1982년이었다. 물론 프로야구만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숭의야구장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보조경기장이었다. 결국 세계대회 개최를 위해 조명탑을 세운 셈이다.[42] 물론 두 학교 모두 관립과 인천부립으로 설립됐기 때문에 현재도 공립 학교다.[43] 당시 중학교는 6년제 학제로 지금의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포함하였다.[44] 현재 인천 연수동에 있는 그 인천중학교다. 폐교 전에는 제물포고와 같이 있었다.[45] 나무위키에 등록된 선수 한정. 졸업 연도 순.[46] 이후 외야수로 전향.[47] 이후 외야수로 전향.[48] 일본의 독립 리그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소속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