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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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신자(朴信子)
'''생년월일'''
1941년 12월 26일 (82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출신학교'''
서울수송초 - 숙명여중 - 숙명여고
'''가족관계'''
조카 박정은
'''신체'''
176cm
'''포지션'''
센터
'''소속팀'''
상업은행 (1960~1967)
'''지도자'''
신용보증기금 여자농구단 감독 (1983~1986)
'''수상내역'''
1967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은메달
1. 소개
2. 선수 시절
3. 은퇴 후
4. 여담
5. 관련 문서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한국 여자농구의 전설'''. 뭐라 수식어를 붙여도 부족한 인물. 한국 여자농구계의 대모(代母) 윤덕주부터 시작해 박찬숙을 거쳐 정은순으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 농구계의 최고 센터 계보에 있는 선수. 현역 시절 별명이 '''한국 농구의 여왕'''인데, 그 수식어 그 자체였던 인물이다.
키는 당시로도 결코 센터로서 크다고 할 수 없는 겨우 176cm. 그럼에도 센터로서의 기본기에 충실했고 리바운드 이후 패스로 팀 전체를 속공으로 이끄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nba mania 회원(닉네임 Damon Bailey)의 글. 당시 여자농구계의 상황과 박신자의 업적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명문이다.

2. 선수 시절


서울 숙명여자고등학교 시절부터 한국 여자 농구 최고의 인재 소리를 듣다가 現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전신이 되는 상업은행 농구팀에 입단, 당시 여자농구 최강이던 한국은행을 제치고 상업은행 최강 시대를 열었다. 그 중심에 있던 박신자는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엄청난 각광을 받았다.
1964년 세계 선수권에는 국가대표팀이 아니라 상업은행 팀이 출전했는데,[1] 대회에 전체 성적은 8위에 그쳤음에도 박신자는 대회 베스트 5에 뽑힐 정도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박신자는 1965년 무렵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은퇴를 번복하고 선수 생활을 계속했고,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FIBA 세계선수권대회에도 한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 최소 190cm대인 외국팀의 센터들과 대결하며 '''한국팀을 준우승으로 이끄는 전설을 만든다'''. 준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회 MVP는 박신자였다. 이 세계대회 준우승은 당시까지 한국 구기 스포츠가 세계 대회에서 거둔 성적 중 가장 높은 성적. 우승이 아니었음에도 대회가 끝나고 귀국하자 20km에 걸쳐 카퍼레이드가 펼쳐지고 환영대회에 3만 인파가 몰려들었다.
1967년 세계 대회를 끝으로 박신자는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경기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7000명의 관중이 몰렸다. 박신자가 있는 동안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은 여자농구였으나 박신자가 은퇴한 이후 여자 농구의 인기는 급락했다 한다. 그야말로 '여자농구 = 박신자'였던 셈.

3. 은퇴 후


1980년대 초에 신용보증기금 여자농구단의 감독으로 농구계에 돌아오나 이 때는 고생을 꽤나 했다. 감독이 같은 여자라고 선수들이 감독을 따르지 않는 것도 문제였고, 심판들도 여자 감독이라고 꽤나 무시를 했다고 하니. 3년간 감독으로 활동한 후, 19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일했다. 그 밖에 1979년 FIBA 세계선수권 대회의 행정위원으로, 대한농구협회와 아시아농구연맹(ABC)의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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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WKBL에서 2군리그 컵대회로 그녀의 이름을 건 '''박신자컵 서머리그'''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우승팀과 MVP의 트로피는 과거 여자농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을 입은 현재 그녀의 모습을 딴 피규어를 수여한다. 여느 트로피에 비해 독특한 모양인지라 이에 대한 호평까지 더하고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근황 인터뷰.

4. 여담


  •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99년에 미국 테네시 녹스빌에 있는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의 25인으로 헌액됐다.
  • 주한미군 문관과 결혼해서 은퇴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석사 학위를 땄다. 현재는 막내 아들이 살고 있는 하와이에 계신다고.
  • 삼성에서 선수생활을 하였으며, 은퇴 후 해당 팀에서 코치를 지냈던 박정은이 바로 박신자의 조카다.[2]

5. 관련 문서


[1]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상 대표팀 파견은 엄두를 낼 수 없던 시기였다. 우연히 상업은행 팀이 국가 이미지 홍보 차원에서(5.16 군사정변 직후다.) 남미 친선 시합에 갔다가 페루에서 열린 대회에 그대로 참가하게 되었다. 원래 나오기로 했던 팀이 못 오면서 대타로 나갔다고.[2] 박정은삼성생명에서 은퇴하면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