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섭
1. 서흥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섭
박영섭은 1922년 11월 30일 황해도 서흥군 소사면 방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황주 농업학교에 재학하다가 1936년 2학년 때 중퇴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1939년 산시성 타위위안에서 김천성(金天成)과 교유하면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 독립투쟁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또한 백정현(白正鉉) 등과 함께 독립군의 초모, 대적선전, 정보수집 등을 수행했다.
이후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 총대학원대 한청반을 제1기로 졸업한 그는 1941년 10월 황푸군관학교 제7분교 보병 8기로 입학, 1944년 3월에 졸업하였으며, 바로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어 OSS훈련에 가담해 정보, 파괴반에서 장준하, 김준엽, 선우기와 함께 훈련을 이수해 국내 진공을 준비하다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6.25 전쟁에 참전해 부상했고, 61년 국군 준장 진급 후 예편하였으며 1962년 5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섭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1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홍원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섭
박영섭은 1880년 11월 16일 함경남도 홍원군 용천면 중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초 맹시정 등 풍산지역 교인들과 함께, 강희준(姜熙俊)으로부터 3월 1일부터 서울에서 손병희가 주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3월 13일 하지경리 전도교실에서 풍산 시위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전해들었다.
거사 예정일인 3월 14일, 맹시정은 하지경리의 불암에서 군중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는 노원 방면에서 오는 많은 행인들을 이끌고 풍산 천도교구당으로 갔다. 그 곳에는 이미 교구장인 주병남(朱炳南)과 주의락(朱義洛) 등의 천도교 지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군중이 1,000명을 넘었다. 신도들은 교당 안에 들어가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 다음 김창선(金昌善) 등이 연설을 들었다.
연설이 끝나자 교당 내외의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높이 흔들었다. 급히 출동한 경찰은 교당 안에 들어와 이들을 내쫓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며 헌병분견소 앞까지 이르렀다. 헌병의 총격으로 군중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시위 후 박영섭은 3월 29일 20명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고 7월 1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벌금 30원을 받았다. 그는 공소했으나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했으나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정부는 2012년 박영섭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동래구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섭
박영섭은 1919년 2월 18일 경상남도 동래군 명륜당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수재들만 모인다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1939년 7월 5학년 재학 중 일본인 교사의 한인 학생 차별대우에 반발해 일본인 교사 습격을 주도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그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으며, 동래일신여학교 출신의 한갑석과 결혼했다. 한갑석은 부산 최초의 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한흥교의 딸이었다.
8.15 광복 후, 박영섭은 1945년 10월 처가가 있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서 대동의원(大同醫院)을 개원하였다. 병원 이름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장인 한흥교가 고향에 돌아와 1917년 개업해 운영했던 대동의원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는 대동의원을 개원하며 “독립을 이루었지만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주민들에게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누구나 같은 수준의 의료 혜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각종 질병과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술을 펼쳐나갔다.
특히 6.25 전쟁 당시에는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면서 전상자와 외상환자가 넘쳐나자 병원 명칭을 대동외과병원으로 변경하고 부상병들을 치료해 많은 생명을 구해냈다. 1960년대 열악했던 의료 환경에서 부산을 대표하는 병원으로 대동병원의 성장을 이끌던 그는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하고 1967년 자신의 호를 딴 학교법인 ‘화봉학원’과 독립유공자였던 장인 한흥교의 호를 딴 ‘동해중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1970년에는 간호 인력 양성을 위해 '대동간호학교'를 설립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영섭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해 동래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정계에서 채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1975년 2월 28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박영섭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