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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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및 언론인.
아래의 내용은 김삼웅의 장준하 평전을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다.
2. 생애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장석인(張錫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이북 지역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년을 다니고, 부친이 선천의 신성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하게 되어 신성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신앙에 따라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였으나[1]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일제에 의해 폐교되자, 도일하여 토요대학 예과를 거쳐 장로회 계통인 일본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였다. 일본신학교에 유학가기 위한 돈이 모자라 정주군 신안소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학생 시절 일제에 저항하라는 교장 선생님이 일본 순사들한테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잡혀가자 격분하여 "일본어로 된 교과서로 배울 수 없다"며 '일본어 교과서 찢기 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장준하의 친구가 시인 윤동주와 목사 문익환이었다.[2]
그 후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에 자원 입대의 형식으로 강제 징병되었다.[4] 학도병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 말만 자원 입대일 뿐 강제 징집으로 인해 억울하게 전쟁터로 끌려간 것이다. 이후 학도병 출신끼리 모여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면서 활발히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장준하는 지원하면서 이미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어 관동군의 츠카다 부대에 징집되었다. 츠카다 부대에 있을 때 엄지손가락이 부어오른 적이 있었는데 일본군 군의관이 "마취제가 없는데 참을 수 있겠나?"라고 하자 괜찮다고 하였고 군의관이 메스로 생살을 베는데 비명 소리 1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군의관이 돌팔이라서 엉뚱한 곳으로 3번 이상을 쨌다고 한다.[5]
1944년 김준엽 등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탈출해 장장 7개월간 2,500km 중국 대륙 6,000리를 걸어서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진포선 철도라는 곳에서는 일본군의 검문에 걸리지 않기 위해 중국 농부와 상인으로 위장하고 며칠간 연습한 후 무사 통과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군 중앙군 준위를 거쳐 한국광복군을 찾아갔다. 1945년 53명의 동지들과 걸어서 파촉령의 험준한 겨울 산을 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김구 주석을 만났는데 그를 받아준 사람은 한국광복군의 장군인 백파 김학규. 1945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거의 끝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혹자들은 "장준하가 독립운동가로서 한 일은 OSS에서 서류를 번역한게 전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포기하거나 일제에 빌붙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6] 한국광복군에서 최종 계급은 대위였다고 하며 파벌 싸움으로 인해 임시정부가 약해지자 이범석의 권유에 따라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얼마 못가 원자폭탄에 의한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자주적 해방은 물거품이 된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활동했으며 처음에는 김구의 비서로 활동[7] 하다가 이범석의 족청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반공주의자 이범석의 노선조차도 '좌파적 색채가 난다'면서 바로 때려치웠다고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다시 김구의 비서로 활동했고 제1공화국에서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무과장, 사무국장을 지내고 《사상계》를 창간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장준하와 사상계 직원들이 같이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제2공화국에서는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제2대 국토건설단 단장 등을 지냈다.
1961년 당시 육군 소장이였던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가 약속했던 조속한 민정 이양을 할 의도가 없음을 알게 된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1962년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박정희의 독재 행위를 막기 위해 윤보선을 야당 통합 후보로 만드는 활동을 벌이며 비판적인 언론 활동을 했는데 이 때 낸 잡지는 독립군 시절 중국에서 동지들과 잡지를 만들던 노하우를 살려 만든 것이다. 이후 사상계를 계속 펴내며 박정희 반대 운동을 했지만 정치계에서는 유진산의 행보로 인해 야당이 박살나고 언론계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온갖 방해로 인해 사상계를 펴낼 수 없게 되자 결국 정치인이 되기로 한다. 이 때 국회의원 선거 활동을 위해 유세를 하면서 박정희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것과 박정희 정권 시절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박정희가 밀수 왕초"라며 박정희가 사카린 밀수 사건의 배후임을 주장한 것이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발언으로 남아 있으며 1967년부터는 제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던 중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에서 의문사하였고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실족사로 발표했다. 아직까지 고인의 사망에 관한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3. 죽음에 관한 의혹
당시 정권이 장준하를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정권이 고인이 계획했던 '유신개헌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고인을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신개헌운동'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미 고인이 된 법정스님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증언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기사를 참조할 것.
KBS 인물현대사.E27.장준하 2부-거사와 죽음의 진실(57:26) 동영상
1993년 3월 결성된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는 장준하의 사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 추락 지점이 경사 75도의 가파른 암벽이어서 장비 없이는 내려갈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이 발견된 암벽은 경사도를 볼 때 굴러떨어지는 물체가 멈출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에는 외상이나 골절이 전혀 없고, 휴대한 보온병[8] 과 안경이 깨지지 않았다.
- 당시 시신을 검안한 조철구에 따르면, 오른쪽 귀 뒤에 가로 세로 2cm 가량의 흉기로 찍힌 자국이 있고, 또 팔과 엉덩이에 치료 목적이라고 볼 수 없는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 어깨 안쪽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9]
- 문국진 박사의 법의학적 소견에 따르면, 우측 귀의 함몰된 작은 상처가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해서 생긴 것이라고 밝혔다.
- 사고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의 증언이 명확하지 않다. 증언을 계속적으로 번복하였다.
- 김용환은 1967년에 장준하가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 장준하 선거캠프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준하가 낙선하자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1975년 8월 17일 장준하가 등산하는 날에 홀연히 나타나 동행하고선 그대로 목격자가 된 것이다.
- 1993년 민주당에서 한광옥 최고위원을 위원장으로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진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8월 20일 2차 답사때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과 함께 사고 현장을 답사하였는데 김용환은 산행입구를 찾지 못했고, 산악회 일행이 점심 먹었던 장소도 찾지 못했으며, 뛰어넘었다는 2개의 능선과 계곡도 없었고 계곡으로 내려가는 하산길도 찾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추락했다고 알려진 14m 70cm 지점이 아닌 엉뚱하게도 훨씬 높은 75m 지점에서 추락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당시 의정부지청 검사였던 서돈양은 김용환이 장준하 선생의 시계를 차고 있어서 머리를 쥐어박았다고 진술했다.
-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 중 한 명이었던 고상만 씨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사건 당일에 장준하의 가족에게 장준하의 사고소식을 알린 전화가 걸려왔는데 중정문서를 확인해본 결과 김용환이 걸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그 일대에서 전화라곤 행정용 전화인 마을 이장의 전화 밖에 없었다는 것. 마을 이장은 자신의 전화가 행정용 전화였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김용환의 행적이 이래저래 수상하다는 점도 의혹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정리하면 모든 정황을 따져봤을 때 장 선생의 죽음 30분 전과 12시간 후의 이 사람의 행적이 불명이다.
- 고상만 씨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과 관련된 엄청난 양의 조사기록물이 국가기록원에 있는데 약 70년간 그러니까 2074년까지 비공개로 처리되었다. 국가기밀이라도 30년 후면 해금된다는 점을 봤을 때, 여러모로 74년까지 의혹을 늘릴 생각이라는 무리수로밖에 안 보인다.
-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지금은 말할 수 없다."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 몇몇 문제제기를 한 프로그램, 심지어 종편방송인 JTBC에서도 김용환을 찾아가서 취재를 요청했으나, "기존의 내 설명대로라면 문제제기된 부분은 모두 해소된다"고 발언하며 추가적인 인터뷰는 거부하는 중이다.[10]
고인의 유족들은 수사 방식이나 성과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11] , 일부러 관을 꺼내 유골을 검시해야한다는 점에 부담을 느끼기도 하여 그동안은 모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들(1993, 2002, 2004)에 응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앞선 조사들은 유골의 검시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등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조사들이었다.
그러나 2012년 8월15일,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경기도 파주시에 조성될 '장준하 공원'으로 묘지를 이장하는 김에[12] 드디어 사망 후 처음으로 유골을 검시하였는데. 그 결과 '''머리뼈에 직경 6cm짜리 동글동글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것만으론 타살 여부를 밝히기 힘드나, 다른 신체부위에서 추락 시 발견되는 골절이 한 군데도 발견되지 않아 타살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를 토대로 유족인 장남 장호권은[13] 국가에 진상조사를 요구하였으며, 정부가 진상조사에 나서지 않을 경우 직접 과학적 분석을 의뢰할 것임을 밝혔다. 검시의 자세한 내용과 유족의 주장은 여기를 참조할 것. 나는 꼼수다 봉주 19회에 장남인 장호권 씨와 당시 의문사 조사위의 고상만 씨가 출연해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사실들을 말하기도 했다.
2012년 9월 1일 그것이 알고싶다 팀에서 지난 1993년 방송분에 법의학적 과학적 해석을 추가한 내용을 방송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추락사 혹은 타살이라는 2가지 가설이 대립 중이다.
- 다만 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2가지 가설 중에서 접점을 이루는 것은, 계곡에서 떨어졌을 때 당시 이미 장준하는 기절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14]
- 사고 당시 현장을 찾아간 검사가 본 군인들은 누구인가?[15]
- 장준하 사망 당시 오간 군 내부 전보들의 내용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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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결론은 '이정빈' 교수의 개인적인 조사결과라는 것이다. 참고로 대한법의학회에서는 이러한 이정빈 교수의 조사결과에 대해 타살 후 추락이 아닌 실족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직접 반박까지 하기도 하였다.
새누리당의 의사출신[16] 의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보수 진영 소속 중진의원의 주장이어서 더욱 임팩트가 컸으며, 더욱이 정의화는 두개골 외상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자신만큼 많이 두개골 외상 환자를 치료한 의사가 없다고 자부하며, 장준하의 두개골을 본 순간 타살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그는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있다.
4. 여담
- 2007년 7월 11일 고인을 암살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고인의 아내 김희숙 씨를 만나 사과하였다. 당시 박근혜는 “진심으로 위로드린다. 장 선생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뜨거우셨고 민주주의 열정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저의 아버지와는 반대 입장에 계셨고 방법은 달랐지만 두 분 다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셨다고 믿고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박근혜의 유족 방문에 관한 전후 정황은 고인의 장남 장호권 씨의 인터뷰를 참조할 것. 그러나 고인의 장남 장호권 씨는 박근혜에 대해 "인간으로서는 용서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박근혜는 용서하지 못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박근혜가 정치적으로 아버지인 박정희와 그 세력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족 장호권씨의 자세한 입장은 해당 기사를 참조할 것. 당시 박근혜를 수행했던 참모의 말에 의하면 박근혜는 장준하의 부인인 김희숙 씨와의 만남을 내키지 않아했다고 한다. 당시 둘이 만났을 때 분위기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듯 어색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박근혜는 김희숙 씨를 만난 자리에서 장준하의 의문사에 대해 "역사가 말해줄 것"이라고 답했지만 막상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된 뒤에 장준하의 타살 의혹이 불거지자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며 "이전 정부에서 조사가 다 이루어졌고 이미 끝난 사안이 아니냐"면서 책임을 회피하여 김희숙 여사를 비롯한 유족들의 분노를 산 바 있다. 2015년 삼일절 고인의 3남인 장호준 씨가 박근혜에게 보내는 서신을 공개했다.
- 장준하 본인에 의하면 입대하기 전 아내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눴는데 그 때 "편지 속에 '돌베개'라는 말이 있거든 탈출한 줄 알라"라고 했고 실제로 탈출한 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낼 때 '돌베개'라는 단어를 썼다고 한다.[17] 한편 강만길의 회고와 김준엽의 자서전 <장정>에 의하면 이 일화는 김준엽의 것이라 한다. 어쨌든 장준하는 스스로 자서전의 제목을 <돌베개>라고 지었으며 이 일화가 자신의 경험임을 밝히고 있다.[18] 어찌되었든 전자와 후자가 인과 관계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선후 관계인 것만은 확실하고 후자가 장준하의 본심이라는 게 이후의 행적으로 인해 명백히 드러나는 셈이다.
- 장준하는 이범석이 족청을 통해 발호하자 독립군 시절 사령관이었던 그와 인연을 끊을 정도로 청렴했지만 한편으로는 김원봉이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인 청년들을 미인계로 매수하려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19]
- 야마하 피아노가 일제라고 광고를 싣지 않을 정도의 결벽적 배일주의자면서도 1956년 대표적인 친일 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으며 최남선을 추모하기도 했다. 1957년 12월호 《사상계》를 "육당 기념호"로 발간하며 권두언을 이렇게 썼다. 철두철미한 독립운동가인 그의 말이라 최남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때문에 장준하 평전의 저자 김삼웅은 이를 "장준하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비판했다.[20] 장준하의 이런 모순된 모습들은 그의 시각이 어느 정도 왜곡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냉전 시기 반공주의 지식인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 1967년 5월 8일에 장준하는 대통령 선거법 위반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나,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구 을 지역구에 옥중출마하여 당선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득표수는 57,119표, 2위 후보인 강상욱은 35,386표로 2만2천여표차.
- 죽기 직전 마치 직감이라도 한 듯이 아내의 평생 소원이었던 가톨릭식 결혼(혼인성사)을 올렸다고 한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영결미사에서 "장준하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이라고 했다.
- 죽음 당시 3군단장이었던 김재규가 그가 해온 행동에 탄복해 그가 죽은 뒤 암암리에 가족을 도왔다고 한다. 이 외에도 김재규는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에게 "자네 부친의 죽음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며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암시해주었다고 한다.
- 베트남 파병을 '아들들의 피로 경제를 살 수는 없다'는 이유를 들며 반대했지만 막상 파병이 결정되자 장남 장호권씨를 참전시켰다.
- 정준하와 절대 착각하지 말도록 하자. 정준하를 폄하하는 뜻이라기 보다는, 정준하의 직업이 개그맨이라서 고인이 희화화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장학퀴즈에서 답이 '장준하'인 문제를 낼 때, 정준하가 그 문제를 내는 영상을 찍어서 문제를 낸 적도 있다. 또한 무한도전에서 초창기에 방영된 '아이스원정대 특집'에서 온천에서 수중 두더지 게임을 하는데 박명수가 정준하에게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부를 떨어야 되는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같이 훌륭하다"며 개드립을 친 적이 있다. 이 때 정준하는 박명수가 성도 틀린 데다가 고인드립을 쳤다면서 오히려 가까운 자리에 지정하였다.
- 민간요법을 구사하는 치료사 구당 김남수 문제로 방송국에서의 장준하의 아들과 통화했는데, 장준하는 디스크는 없고 대신에 협심증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김남수가 평소 장준하를 치료하였다며 홍보하고 다니는 것에 대하여, 불쾌감을 느끼며 완강하게 부인하였다.
- 강원용[21] 은 그가 존경받아 마땅하나, 사상계 등의 활동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22] 그러던 중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 장준하가 정치적인 목적을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장준하가 '김구한테 붙었다가 장면한테 붙었다가, 또 윤보선을 따라다니며 색깔논쟁에 열 올렸다'는 비판도 있다.
- 2013년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 조사 공동위원회에서 정밀감식 후 사인을 발표했다. 머리를 가격당해 즉사한 후 추락해 엉덩이뼈를 손상당한 것이라고 한다.
- 문재인 대통령은 장준하와 김원봉을 존경하나, 정작 장준하는 김원봉을 상당히 싫어했다. 장준하는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보려고 공작을 했다', '김원봉은 판에 박힌 공산분자'라고 혹평한 바 있다. #
- 2020년 7월 6일 장준하의 유족에게 7억 8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한 1심 판결에 대해 피고인인 '정부'가 항소했다. 정부 측의 항소 근거는 "기존 대법원 판례에 반한다"는 것. 그러나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 당시 국가가 반헌법적, 반인권적으로 국민 개개인을 탄압한 조치였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 배상할 수 없다며 항소한 정부의 조치에 대해 누리꾼들은 상당히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더군다나 장준하 신원에 적극적인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아이러니하다는 반응.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 2020년 8월 1일 행정부 수장인 문재인 대통령이 직권으로 항소를 중지시키고 유족에게 배상할 것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시작됐다. 청와대 국민청원 바로가기
5. 대중 매체에서
- 1991년작 MBC 여명의 눈동자에서 박상원이 맡은 장하림이 장준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인데, 일본 유학생신분에서 일본군 부대로 징집-탈출-OSS활동 등등 그를 빼다 박은 캐릭터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극적구성을 위해 장하림은 쓰카다 부대 탈출 후 붙잡혀 731 부대로 강제징집됐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탤런트 황준욱이 해당 인물을 연기했다.
- 고우영 화백은 자신의 만화 수레바퀴에서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반복된다는 말과 함께 "저 높은 곳에서 실족해서 돌아가신 분이 생채기 하나 없네?"라고 하는 사람에게 군인이 "아가리 닥쳐"라고 윽박지르는 컷을 그려놓기도 했다.
6. 연표
-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출생
- 1932년: 평안북도 삭주군 대관초등학교 졸업, 평양 숭실중학교 입학
- 1937년 4월: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 1940년 4월: 도쿄 일본신학교 입학
- 1943년 11월: 김희숙과 결혼
-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7월에 탈출함
- 1944년 8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서 3개월간 군사 교육을 받음
- 1945년 1월: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에 편입, 광복군 대위에 임관되어 독립 투쟁에 몸바침
- 1945년 8월: 중국 시안시에서 미 육군 군사 교육을 받고, 국내 밀파 요원으로 대기하다가 해방을 맞음
- 1945년 8월 18일: 독립군 신분으로 서울에 들어왔으나 일본군의 저지로 다시 돌아감
-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중 한 사람으로 조국에 돌아옴
- 1949년 2월: 한신대학교에 편입학하여 6월에 졸업
- 1952년 9월: 월간 "사상" 창간
- 1953년 4월: 월간 "사상계"를 발행하여 자유-민주-반독재 투쟁에 기여함
- 1961년 1월: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음
- 1962년 8월: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상을 받음
- 1965년: '조국수호협의회'에 참여하여 한-일 조약 반대 투쟁을 벌임
- 1966년 9월: 한국 비료밀수사건 규탄 연설 중 이른바 '밀수 왕초' 사건으로 1달간 옥고를 치름
- 1967년 3월: 4자 회담을 주선, 야당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당에 입당함
-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1달간 옥고를 치름
- 1967년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 을구(현 서울 중랑갑) 국회의원에 당선됨
- 1970년 2월: 새로운 민족세력의 규합을 위하여 신당 운동을 추진함, 민족 문제에 대한 전망을 안고 민족학교 설립 운동에 참여함
- 1971년: '민주 수호 국민 협의회'에 참여함
- 1973년 2월: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최고 위원에 임명됨
- 1973년 12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여 구속됨
- 1974년 4월: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2월에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됨
-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투성이의 사고로 사망함
- 1991년 8월 15일: 건국 훈장 애국장을 받음
-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을 받음[23]
- 1999년 11월 1일: 문화훈장 금관장을 받음
[1] 생전의 백범 선생께서는 장 선생을 부르실 때 장 목사라고 부르셨다.[2] 장준하 포함 3명 모두 이북 출신이었는데 신학 공부를 위해 일본에서 신학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윤동주와 문익환은 정확히 말하면 간도 출신인데 집안이 현 북한 지역에서 간도로 이주했다.[3] 손자가 김성회이라고 한다.[4] 이 때의 일화가 대단한데 일본 유학 중 자신의 제자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귀국하여 제자인 김희숙과 결혼하였다. 당시 유부녀는 징집되지 않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 그 대신 학도병으로 끌려갔는데 말이 자원 입대일 뿐 한 가정에 강제 징집이든 위안부든 선택을 해야 했다.[5] 이 때 장준하는 화살촉이 깊숙이 박혀 생살을 째야 하는데 비명 1번 안 지르고 여유롭게 바둑을 둔 삼국지 관우를 떠올렸다고 한다.[6] 당시에 전쟁이 8월에 일본의 패배로 끝날 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어질지 누가 이길지 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독립운동을 하러 갔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전쟁이 일찍 끝나서 눈에 띄는 활동까지는 못한 것이 본인 의사도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언론 통제로 마지막까지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줄 알고 있던 사람들이 더 많던 상황에 독립운동을 할 생각을 하는건 쉽지 않다.[7] 김구 밑에서 일했지만 1944년~1945년 충칭 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분열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매우 실망하여 '다시 일본군 항공대로 들어가 임시정부를 폭격하고 싶었다'고 한다.[8] 지금 생각하면 납득이 안 갈지도 모르는데, 당시 보온병 하면 당연히 단열재가 유리였다. 높이 30cm 정도에서도 땅에 떨어지면 단열재인 유리가 깨지고, 그러면 그 보온병 버려야 했다.[9] 어깨를 붙들려 억지로 끌려간 듯한 흔적으로 보인다.[10] 김용환은 추가적인 인터뷰와 수기를 월간조선에서 한 적은 있다. 다만 이때는 가명으로 처리되었다. 다만, 그것이 알고 싶다 1993년 방송 마지막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발언은 방송국에서 임의 편집했다는 판결이 나왔다.[11] 당시 유족들은 기무사 등을 전부 조사할 수 있도록 과거사위가 전권을 가지고 수사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조사들은 전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조사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12] 원래 이장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홍수에 의해 묘가 파손되어 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파주시가 유해를 모시겠다 하여 장준하 공원이 조성되기로 한 것이다.[13] 참고로 이분은 아버지 사후 정체불명 4인조의 피습을 받아 턱 골절상을 입은 후, 야반도주하다시피 외국으로 나갔다고 한다.[14] 보통 사람이 추락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자기 보호본능 때문에 팔등이 땅에 먼저 닿는 식이라, 이런 부위에 골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장준하의 시신에선 이런 골절이 발견되지 않았다.[15] 장준하 사망 다음날에 박정희가 "보안사령관을 독대했다"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16] 자신이 직접 복당하지 않겠다고 못박았으므로.[17] 팟캐스트 방송 그것은 알기 싫다 1회의 방송에서는 성경의 특정 구절이라는 얘기도 있으며 장준하 선생은 자서전 <돌베개>에서 편지 말미에 "성경 구절이 있으면 내가 탈출한 줄 알라"고 입대 전에 아내에게 얘기해두었다고 한다. 성경을 살펴보면, 창세기에 야곱이 형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아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하던 중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자다가 꿈에 하나님의 사닥다리를 보고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18] 돌베개라는 말은 사실 이광수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광수의 작품 중에 "돌베개"가 있기는 하지만 친일 문학가인 점을 볼 때 근거없는 얘기로 보인다. 아래에서 장준하 선생이 육당 최남선을 평가한 이야기가 와전된 건 아닐런지.[19] 이 부분에 관한 배경을 짚으면 한국광복군 내에서도 내분이 심했던 것에 비롯되었다. 한국광복군은 크게 제1지대(김원봉), 제2지대(지청천), 제3지대(김학규) 이렇게 나뉘었는데 제1지대와 제2지대가 서로 갈등이 잦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장준하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출신이다. 제1지대 출신 부대원과 제2지대 출신 부대원이 김원봉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 극명하게 엇갈림을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서 복무한 김승곤(이후 광복회 회장 지냄)은 김원봉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제2지대에서 복무했던 장준하는 <돌베개>에서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냈다.[20] 사실 평전이라고 좋게 봐준거고 유일까지는 아니다. 단적으로 역시 친일 문학가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도 장준하가 있던 사상계에서 처음 제정했고 장면 정권 시기 참여에 대해서도 장면은 억지로 넘어가준다고 해도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김영선은 일제강점기 군수까지 지낸 대표적인 친일파이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서 친일파 출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한 것도 있다. 장준하와 비슷한 성향을 보였던 김준엽은 자신들이 만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지 않았었다면 이광수, 최남선 등에게 보인 태도 때문에 자신들도 친일파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고 했을 정도이다.[21] 장준하와 같은 종파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사이자 사회활동가였다.[22] 그 '정치적인 목적'이란, 대통령 당선 등 입신양명 하려는 야망을 돌려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23] 한신대학교에서 주는 상이다. 한신대학교는 문익환 목사가 교수로 재직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 학교이고, 장준하 본인 또한 강제 징집 때문에 마치지 못한 신학 공부를 한신대에서 수학하며 끝낸 바 있다. 한신대는 학생부터 교직원까지 전반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기에 문익환, 장준하와 그들의 친구였던 시인 윤동주까지 합쳐 셋을 모두 자신들 학교의 '정신적' 지주이자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