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홍(1903)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재홍은 1903년 1월 18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면 서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에서 인삼행상을 하면서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수료하였다.그러던 중 아나키스트 박열에게 감화되어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재정 자금을 후원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1926년 1월 22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귀국하여 김해주조주식회사 사장, 김해운수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33년경 일제가 김해운수주식회사(金海運輸株式會社)를 탈취하려 하자 그의 부당성에 항거하여 법정투쟁을 전개했으나 오히려 체포된 뒤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태평양 전쟁이 심화되면서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수탈이 심해되던 1943년경 김해군의 시국좌담회 회의장에서 한국인에 대한 강제징용안이 거론되었다.
이에 분노한 그는 한국인의 강제 징용에 앞서 일본인의 징용실행을 주장하면서 군국주의적 식민통치에 항거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1944년 11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8.15 광복 후 우익 정치인이 되어 대동청년단 경상남도 조직부장, 대한국민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국민당 최원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최원호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이후 호헌동지회에 속하였다가 다시 무소속으로 속하였다. 한편 해양소년단 본부장, 실업동지회 경상남도 지부장, 세계연맹정치경제연구회 한국지부 이사 등을 지냈다.
이후 정치에서 물러났는데, 1961년 사기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후 서울에서 말년을 보내다 1979년 6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재홍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