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철
전 롯데 자이언츠, LG 트윈스의 투수.
2000년대 초반 롯데 자이언츠의 암흑기 시절에 고군분투했던 에이스였다.[1]
등번호는 45번을 달았다.
1. 프로 선수 시절
주형광과 입단 동기로 1994년에 입단했는데, 실제 입단할 때는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무도 불러 주는 구단이 없어서 입단 테스트를 거친 다음에야 연봉 600만원의 연습생으로 입단했던 철저한 무명 투수였다. 1994년은 롯데 주축 선수들의 상당수가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 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해 선수층이 많이 얇은 관계로, 성적보다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해로 방향성을 잡은 해였다. 그로 인해 개막전 선발을 프로 입단 후 투수로 전업한 1차지명 신인 강상수가 맡았고, 그제껏 거의 원 포인트 릴리프나 패전처리로만 기용되던 가득염이 그 시즌 풀타임 선발로 활약했을 정도였다. 박지철도 그런 팀 사정 덕택에 연습생 신분이었음에도 개막전부터 1군 엔트리에 들 수 있었고, 실제로 개막전에서 3번째 투수로 등판하며 1이닝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이라는 나름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신인 첫 해 주로 중간계투나 패전처리로 1군 14경기에 등판, 32 2/3 이닝을 던져 2.2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같이 입단했던 600만원의 연습생 멤버들 중 유일하게 정식 계약으로 살아남은 케이스.
1995년에 롯데는 위에서 언급한 방위병들이 대거 제대하여 돌아와 전력이 급상승한 덕택에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준우승을 기록했는데, 박지철은 이해 중간계투 겸 땜빵 선발로 활약하며 팀에서 없으면 아쉬운 레귤러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2] 당시만 해도 초반부터 치고 나가는 팀이 아닌 포스트시즌 진출을 놓고 다투는 팀들은 잡을 경기는 확실히 잡고 버리는 경기는 버려 버리는 전략이 대세였는데, 이 해 롯데에서는 이렇게 버리는 경기의 선발 투수를 박지철이 거의 전담해서 맡았다. 아직 주축 선발투수들보다 기량이 모자라 많은 피안타와 사사구를 허용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5~6이닝을 꾸역꾸역 버텨준 덕택에, 롯데로서는 당초 버리려 했던 경기들이 해 볼만한 경기로 바뀌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으며, 실제로도 심심찮게 승리를 따내곤 했다. 시즌 성적은 5승 4패 3.9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96년부터 에이스 윤학길의 부상과 염종석의 시즌 아웃으로 인해 풀 타임 선발로 활약했는데, 약간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지만 위에서 내리꽂는 투구폼으로 약 145 km/h 언저리의 직구 스피드를 기록했다. 하지만 성적은 대단히 좋지 모해 이 해 1승 9패 평균자책점 4.70의 안습한 성적을 남기며 밑천이 드러난 게 아니냐는 의심도 들었지만, 1997년에 드디어 포텐이 터졌다. 이 해 특유의 낙차 큰 커브를 앞세워 14승 5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해 롯데의 에이스로 대활약했다. 올스타전에서 당시 최고 타자 이종범을 풀 카운트 끝에 폭포수 커브로 헛스윙 삼진을 잡았던 장면이 그야말로 백미. 이 때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시즌이 한창일 때 김현욱과 박지철은 다승왕을 비롯한 여러 타이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박지철이 농담조로 "너무 열내지 말고 사이좋게 타이틀 나눠먹자"라고 했는데, 그 말이 있고 나서 갑자기 김현욱이 폭풍처럼 승을 쓸어담아 버렸다(...).
1997년의 대활약을 밑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었지만,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오른쪽 어깨 부상. 이 심각한 오른쪽 어깨 부상 때문에 1998년 2승 11패 방어율 7.73의 극도의 부진을 보였고, 어깨 수술로 1999년 시즌을 통으로 날렸다. 때문에 전설의 1999년 플레이오프 때도 불참.[3] 영상
2000년에 복귀하여 6승 9패 방어율 4.60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다승왕 손민한을 받치면서 13승 7패 4.03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선전했으나, 야구 팬이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롯데의 암흑기인 '''8888577'''이 시작된 때라 결국 가을 야구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가을야구는 더 이상 못 했다.
박지철은 이 시기 손민한과 함께 롯데 선발진의 축으로 고군분투하지만, 2004년 이후 어깨 부상이 재발하여 많은 이닝을 던지지 못하게 되었다. 은퇴 후 본인의 말에 의하면, 2002년부터 어깨 통증이 재발했으나 참고 던졌는데, 그게 일이 커졌다고. 2005년에도 여전히 안습한 행보를 이어가다가 2006년에는 롱 릴리프로 꽤 좋은 모습을 보여 주며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2007년 갑작스런 구위 저하로 거의 2군에만 머물다가 시즌 후 롯데에서 방출당했다. 롯데 방출 당시 나이가 고작 32세밖에 안 된 것으로 미뤄서, 짐작컨대 더 이상 재기하기 힘들다고 구단 측에서 판단한 듯.
1년 휴식 후 2009 시즌을 앞두고 LG 트윈스에 입단 테스트를 받아 입단했는데, 노쇠화의 여파로 2군에만 머물렀다. 8월 23일 사직 롯데전에 시즌 첫 선발로 등판했는데, 원래 이 날 경기는 서승화가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승화가 2군에서 작뱅을 폭행한 사건이 드러나 잔여 시즌 출장금지 처분이 내려지면서 서승화 대신 선발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친정 팀 앞에서 2와 1/3이닝 동안 4안타 3실점하고 조기 강판당하며 패전의 멍에를 썼다. 2009년에 3경기에만 등판하여 2패만 기록했으며, 시즌 종료 후 LG에서 방출되어 현역에서 은퇴했다.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의 기준으로도 꽤나 준수한 외모를 가진 선수였고 특히 배우 박용우와 상당히 닮아서 많은 여성팬을 몰고 다녔다.
2. 지도자 시절
현역에서 은퇴한 후 귀향한 그는 2010년 8월에 새로 창단한 부산 신정중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3. 연도별 주요 성적
[1] 2013년 부산을 방문한 호세가 박지철에 대해 그 당시 우리 팀 최고의 투수였고 다른 투수들은 모두 아플 때 혼자 잘해줬다며 그를 기억했다.[2]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 연장전에서 김상현의 뒤를 이어 패전처리로 등판했으나 실점하지는 않았다.6차전에도 등판하였다.[3] 그렇긴 한데, 2013년 6월 26일 사직 NC전에 있었던 1999년 레전드(펠릭스 호세, 박정태, 주형광, 마해영 등)들이 롯데 구단의 초청을 받은 행사에 초대되어 참석하기도 했다. 예우 차원에서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