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화
1. 개요
前 LG 트윈스의 투수. 지옥에 가서라도 구해 오라는 좌완 강속구 투수였다.
학창시절 땐 '''195cm의 큰 키로 공을 내리꽂는 파이어볼러'''였으나 프로에 와선 각종 논란과 더딘 성장 때문에 빛을 못보고 방출되어 은퇴했다.
2. 선수 경력
대전고등학교 시절부터 빠른 공을 던져 많은 야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파이러츠 구단과 입단 협상을 벌였을 정도로 좋은 재목으로 여겨졌다. 1998년 LG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서승화는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LG는 5억 원의 계약금과 함께 그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2] 그러나 이것은 서승화 입장에서 봤을 때나 5억 원이지, 구단의 입장에선 실질적으로 10억 원(메이저리그 계약 파기금 + 5억 원)을 들여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는 동국대학교 시절 이중계약 파동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LG는 비공식적으로 KIA 타이거즈의 한기주의 10억 계약금 신화를 자신들이 먼저 시전한 것이다.
LG 트윈스의 전설적인 좌완 투수였던 이상훈의 백넘버 47번을 물려받은 것을 보면, LG가 이 선수에게 얼마나 기대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프로 생활 내내 22번을 달다가 은퇴하기 전인 2010~2011 시즌에 달았다는 게 함정.[3]
구속에 비해 제구력이 좋지 않은 것이 흠이라, 당시 김성근 감독이 집중 조련을 했었다고 한다.
문제점은 이뿐만 아니라 체력이 약해서 50구만 던지면 그 이후의 공은 비실비실 들어와서 동네북이 된다는 점이었다. 즉, 구위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
큰 기대를 받고 입단한 서승화가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 LG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뼈아팠으며, LG가 2000년대 들어서 부진한 큰 원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2003년 국민타자 이승엽과 벤치클리어링 도중 난투극을 벌이면서 나쁜쪽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당시 평균자책점 5점대 패전조로 거의 등판하던 서승화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 그리고 꼬리표처럼 '''빈볼러'''라는 이름이 따라다니게 됐다.
그나마 2004년엔 14홀드로 2자리수 홀드를 찍기는 했으나, 그것 외에는 형편 없는 성적을 거두면서 여전히 구단과 팬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활약을 펼쳤다.
팬들 입장에서는 10억씩 주고 데려온 유망주가 성장하지 못하고 등판할 때마다 불을 지르는 데다가 잦은 부상과 사건사고를 터뜨리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결국 2007~2008 시즌은 공익근무요원 복무를 위해 자리를 비우고 2009년에 복귀했다. 그러나 방화로 인한 2패+이병규를 폭행한 사실이 드러나 징계를 먹고 시즌을 마감했다.
2010년 들어 LG는 터지지 않는 만년 유망주인 서승화를 선발로 육성하려고 많은 기회를 주었다. 2010년 4월 1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전에서 5이닝 1실점 무자책점 2피안타로 호투하며 가능성을 높였다. 영점이 덜 잡혔다고 판단한 박종훈 감독에 의해 다시 2군으로 내려갔지만, 이미 심수창의 빈 자리를 메울 4선발감으로 확정된 김광삼을 제외한 5선발군 가운데 이범준과 함께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선수였다.
2010년 5월 21일 데뷔 8년만에 첫 선발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0년 9월 16일 서승화는 김태군과 같이 1군에 콜업됐고 9월 21일 삼성전에서 선발로 등판하였다. 그런데 무려 143구를 던지고 6실점(6자책)으로 '''완투패'''를 당했다. 그런데 서승화가 6실점하는 동안 불펜#s-1에서 단 한 명의 투수도 몸을 풀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박종훈 감독이 이날 서승화에게 벌투를 시킨 것으로 보였고, 실제로 박종훈 감독은 인터뷰에서 투구 밸런스를 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완투시켰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2011 시즌 박종훈 감독의 투수진 구성 계획을 보면 선발 후보 명단에 서승화는 없었다.
2011년 4월 28일을 기준으로 좌완 중간계투가 이상열뿐이라 좌완 중간계투가 필요할 텐데도 서승화는 여전히 콜업이 안 되었다.
2011년 8월에서야 2군 경기에 등판하였다. 부상은 아니었고 언급하기 힘든 사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 8월 이후로 박종훈 감독의 연이은 삽질과 무능, 그리고 안 좋은 얘기들 때문에 서승화, 이형종, 이범준, 이승우의 반발과 항명이 이해가 간다는 동정론도 늘었다. 이들의 반발 원인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기에[4] 재평가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서승화가 이제까지 저질러 온 잘못된 처신을 변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해 결국 서승화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2011년 11월 구단에서 방출이 확정되었다. 이 때 자신의 싸이 미니홈피에다가 자살 암시글을 써 올렸다고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이미 자신이 구단에 스스로 방출을 요구했다고 한다.
10시즌 간 LG에서 거둔 서승화의 통산 성적은 2승 23패 1세이브 17홀드 평균자책점 6.25."그렇게 죽을 만큼 아파서 무엇을 얻었냐고 수없이 물었다"라는 글이 써진 사진과 함께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모든 일과 삶은 그만 내려놓겠습니다. 이제서야 떠나게 되었네요. 모든분들께 죄송합니다"
현역 생활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않았고 미국 진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지만, 2012년 2월 27일 사기 혐의로 피소됐다고 하였다. 이후 수년이 지나서야 1심 판결이 나왔는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3. 은퇴 후
2014년 1월에 신윤호의 야구왕국에서 사회인 야구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2019년 동강대 야구부 코치를 맡았다.[5]
4. 사건사고
- KBO 리그 제일의 빈볼러로 '빈볼승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큰 키(195cm)에 좌완 파이어볼러로서 '랜디승화'라는 별명도 있지만 빈볼러로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야갤에서 한때를 풍미한 꾸준글로 '대세는 랜디서', '랜디가면'이 있다. 랜디 존슨의 사진에 얼굴만 합성한 사진이 첨부. 영화 '반달가면' 포스터에 덧붙인 확장형 짤도 있었다.
- 2003년 이승엽과 난투극을 벌여 징계를 받은 일이 있는데, 이 사건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당시 양 팀간의 분위기가 험악한 상황에서 삼성 투수 라형진이 LG 타자 장재중에게 빈볼을 던지자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고, 이미 그 전 타석에서 장준관이 던진 빈볼로 마음이 상했던 이승엽이 서승화와 맞닥뜨려 서로 주먹다짐을 해서 두 명 다 동시 퇴장당했던 사건.[6] 이후 두고두고 빈볼러로 불리며 까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영상을 보면 현장에 접근하던 서승화를 이승엽 쪽이 먼저 멱살을 잡았고 서승화가 왼손을 들어 주먹으로 치려하자 이승엽이 먼저 펀치를 날리고 서로 주먹질이 오갔다. 후에 나온 기사와 벤치 클리어링 영상에는 서승화만 죽일놈 만들고 당시 연일 홈런을 쳐대던 이승엽 실드치기에 바빴다.[7][8]
[image]
후일담도 있는데, 그 해 9월 55홈런을 기록하며 아시아 신기록을 눈앞에 둔 이승엽과 대결하던 중,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어필을 하고 110km/h짜리 아리랑볼을 던지는 황당한 투구를 했다는 것. 당연히 이승엽은 그런 공 따위는 치지 않겠다고 3개를 전부 다 흘려 보냈다. 그리고 경기 후 서승화는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는 트러블 메이커로 등극했다. 물론 단순한 스트라이크 존과 당시 분위기에 대한 항의인지, 상대 타자가 이승엽이라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후일담도 있는데, 그 해 9월 55홈런을 기록하며 아시아 신기록을 눈앞에 둔 이승엽과 대결하던 중,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어필을 하고 110km/h짜리 아리랑볼을 던지는 황당한 투구를 했다는 것. 당연히 이승엽은 그런 공 따위는 치지 않겠다고 3개를 전부 다 흘려 보냈다. 그리고 경기 후 서승화는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는 트러블 메이커로 등극했다. 물론 단순한 스트라이크 존과 당시 분위기에 대한 항의인지, 상대 타자가 이승엽이라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 2004 시즌 빈볼로 인한 퇴장이 4차례, 결정적으로 2004년 6월 2일 두산 베어스와의 당시 경기(LG 홈/두산 원정)에서 1~2루 사이에서 런다운에 걸린 윤재국에게 다리를 걸어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혀 윤재국을 시즌 아웃시켜 버릴 정도로 중상을 입혔다. 이후 윤재국은 2004년 가을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프로야구 병역비리 파문까지 연루되는 바람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했으며,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한화, SK를 거쳐 2009년에 선수 생활을 접게 되었다. 이 정도만 해도 만년 패륜급.
- 여담으로 위에 설명된 윤재국은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김성근 감독이 직접 골라서 영입했을 정도로 총애받던 애재자였다. 훗날 한화 이글스에서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당한 윤재국을 SK에 있던 김성근 감독이 거둬들여 선수 생활을 연장시켜 주기도 했었지만, 2009 시즌을 마치고 무릎 부상이 재발해 윤재국은 결국 재활 포기를 선언한 후 현역에서 은퇴하고 만다.
근데, 둘 다 좌투좌타에 김성근이 총애까지 한거 보며 보통 남다르다는 의미다 김성근 감독도 현역시절엔 좌투좌타 였다.
- 2009 시즌 공익근무요원 소집해제 이후 복귀하면서 꽤나 희망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2009년 8월 23일, 2군에서 후배 타자인 작뱅의 이마를 배트로 밀어 상처를 낸 사실이 드러나 징계를 받은 후 1군 2패만 기록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이 사건으로 선발로 예고된 서승화 대신 박지철이 급히 콜업되어 선발로 등판하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물론 박지철은 털렸고, 얼마 못 가 2군으로 내려가서 시즌 끝나자마자 방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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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26일 이형종과 함께 이탈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싸이에 적힌 것 보면 "LG TWINS xxx 야구 안해 2군행" 이라고. 그리고 얼마 뒤 관련 기사가 나왔다. 본인은 홧김에 저지른 것이라고 언급했다.
5. 연도별 성적
6. 기타
- 이광환의 특유의 쇼맨십 때문에 2003년에는 좌타자로도 몇 번 나온 적이 있다. 시절이 시절이었던 데다 그렇잖아도 눈매가 강하고 데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여서 더 위험해 보였다. 게다가 심지어 통산 8타수 3안타(타율 0.375), 2루타도 2개를 기록하며 OPS 1.000이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을 내기도 했다. 원래부터 야구계에서 타격이 진국이라는 평가를 받던 서승화였고 그래서 구단서도 여러 차례 타자 전향을 권유했었지만, 서승화 본인이 거절했다.[9]
- 평소 행보에 의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외모가 잘 생겼다는 얘기가 꽤 있었다.
- 아래로 남동생, 여동생 1명씩 있다. 여동생인 서승오도 야구를 하였다. 원래 농구선수 출신이었으나, 2010년경 여자 야구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월한 기럭지 유전자. 그리고 박노준과 박찬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트라이아웃'에 출연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여자야구 국가대표로 뛰었다.
- 덧붙여 16살 아래의 친동생 서승현도 야구선수로 충남중 - 화순고(공주고에서 전학)를 거쳐 2014년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결국 프로에 지명되지 못했고 병역을 마친 뒤 실업팀 메티스에 입단했다.
- 분노조절장애의 면모를 보인 서승화였지만 정작 자기보다 센 사람 앞에선 쪽도 못 썼는데, 동국대 시절 전 현대 유니콘스 포수이자 대학 동기였던 강귀태와 볼배합으로 트러블이 나고 강귀태를 불러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다가 오히려 강귀태에게 3배는 더 심한 쌍욕으로 보답받았고 그후 대학 졸업 때까지 강귀태의 말을 아주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고 한다.
- 신윤호가 박명환야구TV에서 말하길 잠실 야구장과 구리 2군 연습장을 오고 갈 때 서승화의 차를 타고 항상 같이 다녔는데 다른 차와 시비가 붙어 과속, 위협운전을 했고 서승화와 시민들의 싸움을 신윤호가 말리다가 본인도 욱했다고 한다. "서승화 선수? 신윤호 선수? 왜 그러세요?" 이 말에 신윤호는 "야~가자 가자"하고 서둘러 마무리하고 자리를 떴다.
7. 관련 문서
[1] 대전 서구 도마동에 있는 초등학교로, 초등학교 내 야구부가 꽤 유명하며, 운동장 전체가 야구부를 위해 존재한다 할 정도로 펜스가 넓다.[2] 당시는 지명 후 선수가 대학교에 진학해도 졸업 이후까지 구단의 지명권은 유효했다. 2004년 드래프트부터는 지명받고 2년 이내에 입단하지 않으면 소멸한다.[3] 2015년 12월 이상훈이 코치로 LG에 복귀했을 때 우스갯소리로 "팀에서 47번을 주셨다. 은퇴를 하고 LG 선수들이 47번을 다는 것을 보고 '왜 저 번호를 선택하지' 하고 의아했다. 저주받은 번호가 아닌가. 서승화와 조윤준 모두 안 좋지 않았나. 봉중근 역시 욕을 많이 먹었다. 내가 달면 저주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4] 선발 한 번 던지면 하염없이 2군에 쳐박혀야 했다.[5] 감독은 홍현우다.[6] 이전 문서에는 서승화가 이전 타석에서 이승엽에게 빈볼을 던졌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 날 경기에 서승화는 출전하지 않았다.[7] 사실 그럴 만 했던 게 2003년 시즌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여파로 인한 프로야구의 암흑기였고 이 시즌은 사실상 이승엽과 심정수의 홈런 경쟁만 화제가 되었다. 이러니 이승엽에 더 관심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8] 또 다른 관점에선 이승엽의 성적과 서승화의 평소 쌓여있던 이미지 때문에 언론이 이승엽 편을 들은건데, 사실 빈볼은 인식이 안 좋고 상대방에게 분노를 유발할 수 있는 행위이지만 기본적으로 승부수단 중에 하나이며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경기 중에 이렇게 물리적인 행동을 하는건 두 선수 다 잘못한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이 날의 사건만 놓고 보면 선빵을 때린 이승엽이 원래 더 욕먹어야 맞는거다. 근데, 사실 서승화는 이승엽을 이전에 매우 존경했는데 저때 사건으로 팬들에게 안좋은 이미지로 쌓이게 되고 이후 일본으로 진출한 이승엽과 마운드에서 상대하는 일은 없어졌다.[9] 결과론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만약 타자로 뛰었다면 프로에서 성공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고교야구 때 투타 모두 우수했던 선수였던 만큼 타자로써의 재능도 좋았기때문에 특히나 더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