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야구)
1. 소개
삼성 라이온즈-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약했던 투수. 등번호는 53 - 46번, 코치로서의 등번호는 76번.
'''순수하게 중간계투로만 나와서 20승'''을 거둔 진기록의 주인공이다. 게다가 그 때 당시 던진 이닝은 훗날 2012년 골든글러브 수상자이자 논란의 중심인 장원삼이 소화했던 것보다도 많은 이닝이었다.[2]
2. 선수 경력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삼성 라이온즈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지만, 입단 첫 해인 1993년 1군 6경기에 등판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해 신고선수로 전환되었다.
이후 1995년 5월 류명선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의 최한림[3] , 윤혁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됐다. 거기서 김성근 감독을 만나며 인생이 바뀐다. 김성근 감독은 김현욱을 버릴까 했지만, 김현욱이 자신을 붙잡고 봐달라는 것을 보고 팀에서 가장 성실하게 훈련하는 모습에 주의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고 한다.[4] 이윽고 1996년부터 드디어 1군에 등판하기 시작했는데, 김성근 감독의 믿음에 기량이 급상승했고, 성영재, 김기덕 등 잠수함 투수 군단을 앞세운 쌍방울 레이더스의 투수진에서도 중간계투진의 중심을 차지했다.
1997년에는 '''구원으로만 20승'''을 올리며 다승왕, 평균자책점 1위(1.88), 승률 1위(0.909) WHIP 1위 피안타율 2위(.204), 탈삼진 4위(135개)등 리그를 정복하며 최고의 투수 반열에 올랐지만, '''다승왕 밀어주기 논란'''에 휩싸이면서 안타깝게 이대진에게 투수부문 KBO 골든글러브를 빼앗기고 말았다.[5] 당시 김성근 감독이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도 선발 투수를 5회 종료 이전에 내리고 두 번째 투수로 김현욱을 등판시켜 승리하는 식의 운용이 많았고 이에 대해 승수 밀어주기가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다.[6] 이 탓에 김현욱의 20승은 '억지로 만들어 낸 기록'이라는 인식이 강해 골든글러브 투표에서 외면을 받은 것. 시즌 MVP 투표에서도 이승엽에게 밀리고 말았다.
최고의 한 해를 보내긴 했지만, '''중간계투로 70경기 157과 2/3이닝'''을 던지는 역대 최고급 혹사의 여파로 연말에는 무릎 수술을 받았다. 무릎을 크게 사용하는 사이드암 투수였기 때문이다. 이 때 받은 무릎 수술이 제대로 회복되기 전에 복귀한 바람에 무릎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김현욱의 남은 선수 생활 기간 내내 그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정작 본인은 혹사 논란에 대해서 아직도 자신은 노하우가 있어 혹사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인터뷰하지만, 과연 아직 김성근 감독이 기사를 늘 체크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대놓고 혹사라서 힘들었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이듬해인 1998년에는 무릎 부상에서 미처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복귀하여 그 해에도 선발 등판 없이[7] '''13승 7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3.34'''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68경기 129⅓이닝'''을 던지는 등 여전히 혹사에 시달렸다. '''두 해 동안 합쳐서 287이닝을 던졌다. 그것도 중간계투 투수가'''.
이런 활약 덕분에 몸값이 수직 상승한 김현욱은 모기업인 쌍방울의 부도로 주축 선수들의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는 상황이였던 1999년,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하였다. 이후 1999년 '''93이닝''', 2000년 '''109이닝''', 2001년 '''95⅔이닝'''을 던지며 삼성의 주축 중간계투 요원으로 활약했다.
2002년에는 '''1군 64경기에 등판'''해 76⅔이닝 동안 10승 2세이브 9홀드 평균자책점 2.11, '''승률 1위 (1.00)'''[8] 의 기록을 세웠으며,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하기도 했다. 다만 예전부터 무릎이 좋지 않던 선수를 김응용 감독이 필승조라고 신나게 굴려먹은 점은 비수가 되어서 후에 조기 은퇴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2003년에도 초부터 심한 무릎 통증으로 스프링캠프에서 중도 하차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복귀에 성공하며(...) 63경기에 등판하여 85⅔이닝을 소화하며 2점대 평균자책점에 8승 13홀드를 기록하며 불펜진이 부실했던 삼성의 투수진에서 제 몫을 하였다.
2004년 4월 22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역대 7번째로 500경기 등판의 금자탑을 쌓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 생활 내내 악화되었던 무릎이 치명적으로 악화된 데다가, 오른쪽 팔꿈치 인대 부상까지 겹쳐 FA를 눈앞에 둔 2004년 시즌 중반에는 공을 던지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9][10] 결국 FA를 포기하고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았지만, 재활에 실패하고 2005년 시즌 중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김현욱은 부상이 없었으면 불펜 투수로는 역대 최고의 FA 계약 금액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1] 2004년 말 무려 총액 '''99억'''(심정수 60억 + 박진만 39억)의 대박 계약 을 성사했던 삼성을 생각하면...
2005년 6월 2일, 류중일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은퇴식을 치렀다. 은퇴를 하기엔 나이가 너무 이르다는 아쉬움이 나오는 생각.[12]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13년 간 1군 519경기에 출장, 71승 31패 22세이브 54홀드 평균자책점 2.99를 기록했다.
여담으로 선수 생활 13년동안 1군 경기에서 단 한번도 선발 등판 기록이 없다. 오로지 중간계투(중무리), 마무리로만 등판했다는 게 특이점이라면 특이점.[13]
2.1.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은퇴 직후부터 삼성 라이온즈 1군 불펜 투수코치를 맡았고, 2007년부터 2군에서 투수코치로 있다가 2009년 시즌 막판에는 팬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고 2군으로 내려간 조계현을 대신해 1군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다.
201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그런데 투수코치가 아닌 트레이닝 파트다. 인터뷰를 봐도 트레이닝 쪽을 공부한 모양. 아무래도 본인이 부상으로 보다 일찍 은퇴를 선언했던 것 때문은 아닐런지.
연수를 받은 후 2011년 삼성 라이온즈에 복귀한 그는 같은 트레이닝 코치인 코야마 진 코치와 역할을 분담했는데, 재밌는 것은 내야수 출신[14] 인 코야마 진 코치가 투수 쪽 트레이닝을 맡았고 투수 출신인 김현욱 코치가 타자 쪽 트레이닝을 맡고 있다는 것.
2012 시즌을 끝으로 오치아이 에이지가 귀국하면서 투수코치직을 겸직하게 되었다. 메인 투수코치는 김태한이 담당.
2015 시즌부터는 트레이닝만 전담하며, 2군에서 카도쿠라 켄이 올라와 불펜코치를 맡게 되었다. 2017년에는 감독의 교체로 BB 아크 투수코치를 맡았다.
트레이닝 코치로서 훈련을 매우 강도높게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얻은 별명은 "독사". 그럼에도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가장 믿고 따르는 코치 중 한 명이었다고 하며, 류중일 감독의 퇴진 후에는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2016년 10월 10일 부친상을 당했다.
2017 시즌 후 류중일이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을 때, LG 트윈스에서 그를 코치로 영입한다고 발표했다.
2020년 시즌 종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후 둔촌동에 유소년 야구 아카데미를 열었다.
4. 기타 이야기거리
- 송진우 못지 않은 대인배적 성격을 가졌다는 평이 있다. 야구 자료 취재를 위해 무작정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를 찾아간 이에게도 여러 질문에 친절히 답해 준 일화가 있다.
- "김현욱의 맛있는 야구"라는 네이버 카페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해당 카페는 팬카페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야구 커뮤니티에 가깝지만, 본인도 자주 글을 올리기도 한다.
- 마구마구 2014에서 97 김현욱 엘리트는 중계가 빈약한 팀덱[15] 의 스카우트 용병 1순위. 실제로 2014년 8월 31일 포스팅[16] 에서 97 김현욱 엘리트카드가 무려 2818마구볼에 낙찰되었다.
[1] 1989학번[2] 즉, 중계투수가 규정이닝을 채웠다는 이야기다. 선발투수보다 이닝을 더 많이 채웠으니 김성근의 혹사가 어땠는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3] 최초의 좌완 사이드암 투수다.[4] 사실 김현욱은 김성근 감독 부임 이전, 그러니까 쌍방울로 트레이드된 직후 시즌 끝나고 야구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5] 여담으로 KBO 리그에서 '''20승 이상 + 다승왕'''을 한 시즌에 기록한 투수 중 당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한 사례는 투구내용이 아닌 수비율이 수상 기준이었던 원년의 박철순, 공동 다승왕이었던 1985년의 김일융과 2017년의 헥터 노에시를 제외하면 1997년의 김현욱이 유일하다.[6] 김성근 감독이 대놓고 "다승왕은 김현욱이 될 것", "김현욱은 새로운 기록을 세울 것이다." 등등의 말을 하고 다녔던지라.. 다만 김현욱이 말하기를 김성근이 치바 롯데 마린스에 있던 시절 '이 선수가 나 때문에 20승을 하고도 상을 받지 못했다.'란 말을 한 적은 있었다고 한다.[7] 하지만 마구마구에서는 선발투수로 나와있었다. 지금은 수정된 상태.[8] 1992년 오봉옥의 13승 무패 2세이브에 이은 2번째 '''10승-승률 10할'''의 대기록이다.[9] 2004년 당시 김현욱의 무릎 상태는 하도 많은 투구로 '''무릎 연골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팔꿈치도 '''인대가 끊어질 정도'''로 심각했다.[10] 결국 김현욱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자 당시 신예 사이드암 투수였던 권오준이 필승조로써의 기회를 잡으며 전천후로 활약했고, 동시에 롯데에서 재활하다가 노장진을 상대로 트레이드된 사이드암 투수 박석진이 기회를 얻게 된다.[11] 당시 불펜투수 FA 최고액은 2003년 진필중 이 LG와 계약한 4년 30억이었다. 이후 정대현이 2011년 롯데와 4년 36억에 계약하며 경신.[12] 이라지만 그 당시 30대 중반에 은퇴면 생각보다 이른 편은 아니다. 김현욱보다 1살 어린 이상훈이 04년, 2살 어린 홍현우는 05년 은퇴했다.[13] 사실 특이점이라 부르기도 거시기한 것이, 프로에서 선발 등판을 1번도 안 해본 투수가 은근히 많다. 대표적인 예로 오승환과 정우람.[14] 대학 시절까지 선수로 뛰었다.[15] 롯데올스타, 타이거즈올스타, 기아올스타, 해태올스타, 이글스올스타 등. 그나마 중계 플래티넘들의 추가로 초창기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16] 마구볼(엘리트포스팅)이나 골드(플래티넘포스팅)를 일정량 입찰해서 가장 많은 금액을 입찰한(최고금액이 똑같으면 좀 더 오래 한 유저에게) 유저에게 낙찰되는 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