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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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대한민국의 군인, 유사역사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1923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출생했다. 연길의 연길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 있다가 1943년 만주군의 간도 특설대에 입대하였다.
간도 특설대 복무 경력에도 불구하고 박창암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중국 허베이 성에서 만주군 하사관으로서 만군 조종사 박승환이 주도한 항일 조직인 건국동맹 군사분맹에 가입하여 활동했기 때문이다.
1945년 월북하여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군사영어학교에 제1기로 입교하였다. 같은 해, 북파되어 조선인민군 창군 작업에 관여하고 인민군 수뇌부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48년 북한을 탈출, 1949년 육군 중위로 특별임관하였다. 1951년 대한민국 최초의 정규 특수부대인 육군본부 직할 특수부대 9172부대 근무하였다. 1952년 미국 특수전학교를 수료하고 같은 해 항일 공산 게릴라 전문 토벌 부대 간도 특설대의 경험을 살려 제주도 공비 토벌을 지휘하였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에서 사관생도의 혁명지지를 선동하였고, 이러한 조력을 토대로 쿠데타가 성공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혁명검찰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1월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1963년 혁명공약에 따른 원대복귀를 요구하다 김동하, 박임항 등과 함께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1968년부터 반공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월간 《자유》를 발간하였다.
1976년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 국사찾기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유립을 통해 가짜 역사서인 환단고기를 전파하는데 일조하였다. 이는 일제의 만선사관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의 군인으로서 일본의 여러 중국으로부터 만주를 분리하기 위한 역사 작업들을 접할 기회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동북공정[1] 같이 역사를 활용한 최초의 국가가 일본이라는 점과, 친일파 최남선이 환빠들과 같은 실지회복주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2] 은 이런 그의 행동을 분석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