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1. 개요
2. 배경
3. 동북공정의 역사관
4. 목적
5. 대응
5.1. 한국인들의 반응에 따른 부작용
5.2.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한 유사사학자들의 공격
6. 기타
7. 같이 보기


1. 개요




/ 东北工程
공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东北边疆历史与现状系列研究工程)[1] 한국어로 풀어서 해석하면 '동북변강지역의 역사 및 현 상황에 대한 연구 사업'.
중화인민공화국 내지는 청나라 영토에 흥기했던 모든 나라들의 기원을 처음부터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정부 주도의 수정주의적 역사 왜곡 시도로, 2001년부터 2002년 초까지의 준비 끝에 2002년 3월부터 실행되어 2007년 2월에 종결되었다.[2]

2. 배경


당시 1931년 선양 사변과 1932년 만주국 건국과 함께 일본 동양사학자들은 둥베이를 철저히 만주족몽골족 그리고 그들과 종족적, 역사적 유대가 깊은 일본, 조선의 땅으로 규정하고, 그곳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을 외지의 침략자로 규정하고자 했다. 1932년 푸쓰녠(傅斯年)의 《동북사강(東北史綱)》과 1941년 진위푸(金毓黻)의 《동북통사(東北通史)》 등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를 비롯한 과거 중국 둥베이에 흥기했던 나라들을 한족 내지는 중화민족과 연결시키고자 했다.[3]
1980년대 이래 중국 둥베이 지역을 둘러싼 국제환경의 변화[4] 및 “만주와 몽골이 예부터 독립 국가였다”, “주체사관”, “남북국시대론”, 극동과 시베리아의 “문화독립성” 등의 주장을 꺼리던 중국 사학자들이 한국인들이 둥베이에 대해 “선조의 토지”, “우리 고대의 영토”, “북방의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 “고토를 회복”하자는 등의 내용들을 경계하면서[5] 1979년에 강맹산(姜孟山)이 "고구려사는 중국과 한국에서 모두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발표했으며, 1982년에는 중국 사회과학원 초대 원장인 후차오무(胡乔木, 1912 ~ 1992)가 "백제강남(중국)을 400여 년간 통치했다"거나 "고조선의 영역이 중국 산시 성(산서 성)에 이른다"는 대한민국 사이비 사학의 주장 외에도 고구려둥베이를 점유했다거나,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라는 점 등의 반동적인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 결국 1980~90년대 초에 이르러 리뎬푸(李殿福), 쑨위량(孫玉良), 퉁둥(佟冬), 장보취안(張博泉) 등이 고구려와 발해 등이 중국 왕조에 예속된 지방정권 내지는 속국이라는 이론들을 본격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6] 이러한 특징을 반영하듯 1982~1987년에 간행된 관찬지도집인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에서는 고구려를 평양성 천도를 기점으로 이전은 중국 역대 소수민족이 세운 중국사, 이후는 한국사로 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
1993년 8월 지린성 지안시에서 개최된 제1회 한조중 역사학자들이 개회찬 고구려문화 국제토론회석상에서 박시형을 비롯한 북한 사학자들은 고구려를 중국 역사의 소수민족이라고 보는 관점 하에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중국 학자들에 대해 현대 영토를 범주로 역사상의 귀속을 확정한 것은 역사 사실에 반하는 것이라고 크게 비판했고, 이에 쑨진지(孫進己)는 "우리들이 고구려를 중국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오늘의 강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고구려가 오랜 시기 우리나라(중국) 중앙황조에 예속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고구려인의 후예는 다만 조선족인 것이 아니라, 절대 대부분이 오늘의 중국 각 민족 중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으며,[8] 이듬해에는 《關於高句麗歸屬問題的畿個爭議焦點》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이 논쟁은 조선 학자들이 먼저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학자들은 자신들의 논저에서 공개적으로 저희들의 관점을 천명하였는데 1979년에 출판된 「조선전사(朝鮮全史)」에 집대성되어 있다."라고 하면서 다음의 북한 측 주장을 크게 문제삼았다.[9]

조선반도와 중국동북지역에는 고조선유형의 사람이 살았고, 이들이 고조선을 건립했으며, 고구려가 일어나 낙랑군 및 요동군의 한인세력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 및 조선반도 북부를 차지한 이후, 신라/고려/조선이 점차 반도북부를 수복하였다. 동시에 고구려 계승국인 발해국이 동북지구를 수복하고, 신라와 함께 남북조를 형성하였다. 비록 중국과 조선이 압록강과 도문강을 경계로 하고 있지만 조선에 귀속되어야 할 동북지구를 중국이 침략하여 차지하고 있다."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숙원이 오래 동안 조선인민의 마음속에 묻혀있다.

쑨진지는 "50년대 일부 학자들만 고구려를 조선의 고대국가로 인정하였고 수·당이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대외침략전쟁으로 인정하였다"라고 하며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주장했다.
쑨진지는 이 쟁의 이후부터 중국사상의 고구려를 정립하기 위한 논리개발에 더욱 몰두했고, 다른 둥베이 3성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고구려사는 중국사라고 보는 시각 하에 연구를 진행하는 경향이 짙어졌다.[10] 이러한 경향과 힘입어 1996년 1월 15일 퉁화시에서 통화사범학원 고구려연구소 창립을 기념하여, 《高句麗史 研究専号》이라는 특집호를 발간하고 이듬해 6월 《高句麗歴史奥文化研究》로 출판했다. 탈북자 문제, 한국의 침투선교 문제, 중국 동북지방에서 펼쳐지는 한국-조선 간 첩보전 문제, 남북통일 문제, 북핵문제 등의 한반도 정세변화가 둥베이 변경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고 판단한[11] 중앙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1998년 6월에는 지린성당위원회와 정부의 지지 아래 지린성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과 퉁화사범학원 고구려 연구소 주체로 22개 기관에서 51명의 학자가 참가한 '全國首届高句麗学術研討会'가 개최됐다.[12]
1998년 12월, 창춘 동북사범대학에서 '중국동북지방 사학학술토론회'에서 둥베이의 사학자들은 고구려와 중조(中朝)의 관계, 장백산 지구와 중조국경 문제, 고구려와 조선족 문제 등을 논의하여, 향후 고조선-고구려사 연구에 대해 중앙정부의 통일적 협조와 관리 그리고 연구비 지원을 희망했다.[13] 2001년, 중국 학계는 당시 중국 학계의 고구려사 연구와 인식을 담은 《古代中國高问麗歴史叢論》을 출판했으며, 이어서 현지에서 고구려사를 전공한 겅톄화(耿鐵華)가 고구려사 연구를 총합하여 고구려 역사, 문화사를 중국사상의 고구려의 위상에서 재정립한 《中国高句麗史》를 간행했다.[14]
한편 2000년도,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의 마다정(馬大正)과 리셩(厲聲) 등은 중국공산당 선전부, 중국 외교부 및 국가문물국 그리고 각급 학술 기관들, 유네스코 전국위원회 등과 긴밀히 접촉하며 역사연구사업을 추진하였고, 12월 후진타오 당정치국 상무위원으로부터 둥베이 지역 연구 필요성을 인정받았다. 2001년 6월, 창춘시에서 각급 학술기관과 학자들 그리고 각급 당위원회 지도부 등 100여 명이 참석하는, 중국사회과학원과 중국 공산당 지린성위원회 공동 주관의 '東北疆域歷史與現狀硏究工作座談會'가 개최되었다. 이 좌담회에서는 고구려, 발해 고고학 연구, 고대 한반도 국가와 민족, 고대 둥베이 변강 민족사 및 지역사, 고대 중국 둥베이 강역 이론 등 11개의 주제가 논의됐으며, 당중앙의 결정에 따라 사회과학원과 중국 공산당 둥베이3성의 성위원회가 주도하여 3~5년에 걸쳐 동북공정을 실시하여 양질의 연구성과를 완성할 것을 합의했다.
2002년 2월 28일 ~ 3월 1일까지 동북공정 제1차 전문가위원
회가 베이징 하오위안젠궈호텔(好苑建国酒店)에서 개최되어 동북공정이 정식 출범했다. 동북공정의 고문은 당 정치국원 겸 사회과학원장 리톄잉(李鐵映)과 국무원 재정부장 샹화이청(項懷誠)이, 팀장은 당 중앙위원 겸 사회과학원 부원장 왕뤄린(王洛林)이 맡았다.[15]

3. 동북공정의 역사관


동북공정의 전근대 조공, 책봉, 위소, 토사제도 등을 수정주의적으로 해석하여, 현 중화인민공화국 내지는 청대 영토를 기준으로 흥기하고 가변적으로 팽창, 축소했던 중국 왕조들의 영토 및 인접했던 세력들을 모두 지방정권 및 소수민족으로 규정하고 중화민족이라는 큰 틀에 가두려는 연구 사업이다.
이미 '하상주단대공정'과 '중화문명탐원공정'을 통해 중국문화의 유서 깊음과 우월함을 입증한[16] 이후로는 타이완, 조중관계의 영향을 받는 둥베이, 민중운동이 잦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시짱 티베트 자치구, 영유권 분쟁 중인 남중국해 통킹 만 등 국가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변강지역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동북공정의 주요논리는 속지주의 역사관에 두고 있다는 의견이 있다. 여기서 속지주의 역사관은 중국만 사용하는 역사관이 아니다. 민족주의 정서가 기저에 많이 깔려있는 한국에서는 항간에 속지주의 역사관이 마치 나쁘거나 잘못된 역사관인냥 이야기가 오가지만, 속지주의 역사관이나 속인주의 역사관이나 역사의 주체를 무엇으로 보느냐의 차이일 뿐 딱히 우열이 있거나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니며, 속인주의 역사관 같은 경우도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시대착오적이고 이분법적인 해석이 오간다.[17] 중국사를 민족보다는 땅에 중심을 두고 기술하여 민족으로는 한족이 명확한 중국인이라고 하면서도 현재 중국 영토는 물론 중국화되지 않았던 여러 지역을 포함한 청 제국 영역에서 일어난 다른 종족, 국가의 역사도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것이다.[18] 동북공정은 이것의 연장선상으로, 이들이 고구려를 자국사라고 주장하는 건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발흥지와 고구려 영토의 일부 현재의 중국 영토이기 때문 간단하게 말하자면 둥베이 내에서 과거와 현재 일어나는 일은 중국의 역사이다."가 동북공정의 핵심논지이다.
다만, 동북공정이 단지 속지주의 논리에 기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역사상 중국 둥베이 지방 소수민족들이 본래부터 중화민족이었다주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둥베이 소수민족들을 황제에 연결시키며 신화시대부터 이들이 중국인이었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가거나[19] 신화적 윤색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고려왕건조차 중국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20][21] 즉, 중국인 다기원론을 긍정하면서도 그 융합의 시기를 고대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에 따라 동북지방 소수민족의 국가를 중국사에 편입시킨다. 또한 역사시대 기술에서도 중국 왕조들의 대외관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예속관게를 과장,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원대 이전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특징상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음에도 중국은 이를 실질적 속국관계로 과대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순수하게 속지주의에 기반한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속인주의 논리나 전근대적 역사 해석까지 자신들 유리한 대로 끌어다 쓴다고 보아야 한다.[22] 심지어 장기적으로 한국 역사 전체가 원래는 중국의 것이며 한반도는 원래 중국의 식민지라 주장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다민족국가인 중국이 하나의 중국 지향 하에서 단일민족 이념을 도입해 중국인 = 중화민족(Chinese nation / Chinese ethnic group)으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 동북공정이다. '중국인'이란 현재 중국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며, 이는 다민족 국가인 중국이 중국내 모든 민족을 다 통합하겠다는 내부 집안단속의 정치적 의도에서 시작된 사업이다. 이처럼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있기에 순수하게 속인주의적으로 중국사를 기술한다는 접근을 하지 않고 단일한 중화민족이라는 관념 형성에 유리해보이는 속인주의적 시각, 중화적 시각, 수정주의적 시각 등을 모두 끌어다쓰는 것이다.

4. 목적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동북공정을 팽창주의의 일환으로 한국 고대사는 물론 북한을 침탈하기 위해 거대한 음모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24],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의 중국을 위해 소위 중화민족으로 대표되는 소수민족 분쟁 단초 제거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재야사학이 붐을 이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야사학의 특징은 굉장히 애국적이에요. 그런데 너무 극우로 해서 일본의 극우가 일본에 미치는 영향이 빛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굉장히 애국적인데 대신 일본을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비판받게 하는데, 우리도 바로 이런 재야사학 하는 분들이 아주 애국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위험한 것.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만주를 다 답사하고 여기도 우리땅, 그러고 태극기 꽂고 거기서 의식 같은 걸 치르는데 정말 애국적이고 감격스럽고 가슴 뛰는 일이지만, 중국은 그걸 보고 동북공정을 시작한 거죠. 안 되겠구나. 더군다나 연변 쪽에 조선족도 많고. 그래서 우리가 재야사학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옥자(2008), "대한민국 60년, '역사, 미래와 만나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주의를 표면에 내세웠으며, 1974년 정부의 예비비에서 예산이 할애하면서까지 예산을 지원하여 1975년 국회도서관에서 《간도영유권 관계 발췌 문서》을 간행하였다.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은 간도에 대해 "불굴의 의지로 선인들이 지켜온 간도가", "우리 강역에서 떨어져나가고 말았다는 사실은 통탄치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즉 통일이 성취되는 즉시 두만강북의 국경 문제는 중대한 외교 문제로 등장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다. 따라서 이 간도 문제에 관한 자료 수집과 정리 그리고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국가적인 중대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발언하였다. #1, #2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81년에 개최된 "국사교과서 내용 시정 요구에 관한 청원"에서 국사찾기협의회는 양지임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영역은 동북으로 바다까지, 북으로 흑룡강까지, 서남쪽은 북경까지", "기자는 실존인물이며 영토는 중국 북경까지 뻗쳐", "위만조선의 서울인 왕검성은 중국의 산해관 부근", "고조선과 진번, 임둔, 낙랑, 현도는 다 같이 연나라 동쪽, 즉 북경 부근에", "북경성의 난하가 요수", "백제가 3세기에서 7세기 동안 북경에서 상해까지 통치", "신라의 처음 강역이 동부 만주 전체이고 통일신라의 국경이 한때 북경까지"라는 사이비 역사학이 활개를 쳤다. #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사이비 역사가들은 고토 만주의 회복을 넘어선 중원 호령의 있지도 않은 상고사의 정통을 주장하여 곧 반공 민족주의의 자긍심을 강조하고자 했다.[25] 1980년대 집권한 군부 또한 여기서 피해갈 수 없었는데, 박창암이 발행하는 사이비 역사학 군납 잡지인 《자유》는 1970년대를 거치면서 군부에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주입해 놓은 상태였다. 이 영향으로 육군본부는 1983년 국수주의적 정훈교재인 《한민족의 용틀임-위대한 각성과 웅비》, 《통일과 웅비를 향한 겨레의 역사》를 발간했다. #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민족적 지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단된 민족의 통일이요, 번영을 향한 민족의 웅비가 아닐 수 없다. 그 다음의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잃어버린 만주 대륙, 즉 우리의 옛 조상들의 씩씩한 기상이 어리어 있는 드넓은 만주 벌판을 수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에 우리는 통일과 웅비, 그리고 대륙 수복의 의지가 담긴 진취적인 통일 지향 민족사관을 정립해야겠다.

《통일과 웅비를 향한 겨레의 역사》

《통일과 웅비를 향한 겨레의 역사》에서는 참고서적에 일역본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환단고기》가 실려있으며, 육군본부에서 펴낸 책임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만주 대륙의 회복을 지향했다.[26]국방일보》에서는 아예 중국은 물론 시베리아, 티베트까지 지배했던 "우리의 조상인 치우천황"이 "민족의 가슴에 화려하게 부활"했다고 하는 과거 《민족웅비의 발자취》에도 등장하지 않는 황당한 주장들이 등장한다.[27]

… 6. 국사중심론(国史中心论) (남조선). 대표적인 인물은 한국 안호상이다. 그는 고(구)려가 둥베이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통치 구역은 이미 북쪽으로 북쪽으로 베이징이 시작되어, 남쪽으로 양쯔강 남쪽의 월주(越州)에 이르렀다"며, 백제왕은 중국 강남을 4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말했다.

7. 타국의 관점. 혹자는 당대의 동북의 발해국을 고려인이 세운 나라, 고려의 북국이라고 하였다. 고조선의 강역을 중국 산시 성 경내 상간하(桑干河) 일대로 밀어붙이는 주장도 나왔다.

宋德金(2004), "構建理論體系 提高研究水平——重讀胡喬木致黎澍便函的聯想", 《東北史地》에 실린 1982년 5월 29일, 후차오무(胡乔木)가 리슈(黎澍)에게 보낸 편지의 요점.

김동리안호상서정주김응현 등, 한국 사회의 각계각층이 사이비 역사학에 동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 출간된 다양한 서적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에도 소개되자, 중국 사학자들은 한국인들이 둥베이에 대해 “북방의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 “고토의 회복” 운운하는 내용들을 경계하였으며,[28]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백두산 천지서 한국 관광객들이 태극기를 꺼내거나, "대한민국 만세", "만주는 우리 땅" 등을 외치는 사건들이 벌어지자, 중국 당국도 우려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보안 요원을 배치하여 한국 관광객들이 태극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한편, 연변에서 예정된 한국 가수 공연도 갑자기 취소하는 등 민감하게 대응했다. #
결국 동북공정의 목적은 중국 둥베이 변강에 대한 안정, 즉 국익을 위한 것이다. 2004년 중국 외교부 관계자는 간접적으로 재외동포법에 의한 중국 동포와 중국인간 차별대우, 민간의 둥베이 지방 영유권 주장, 선교사들의 불법 선교 등이 동북공정의 원인이라고 밝혔으며, # 또한 동북공정을 계획하고 주도했던 신장사 연구자 마다정(馬大正)은 당시 중국 변경지역의 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로 한반도 정세 변화가 중국 둥베이에 미칠 영향이라 주장하면서 탈북자 문제, 한국의 불법 선교 문제, 둥베이에서 펼쳐지는 남북간 첩보전 문제, 남북통일문제, 북핵문제를 거론했다.[29] 결정적으로 최근 그 해 8월 방한했던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한국에서 간도가 '조선땅'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 국가였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밝혀졌다. # 즉, 애초에 대외용 패권주의가 아니라 대내용 방어주의였다. 침탈과 왜곡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가진 한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의도가 대내용이나 대외용이나 차이가 없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애초에 시작점이 동북공정으로 타국과 마찰을 빚겠다가 아니라 다민족국가인 중국 내부 정리용이라는 차이가 있다. 즉, "외부로부터 무언가 얻어내겠다가 아니라 외부와 마찰이 있다해도 개의치 않겠다"라는 입장인 것이다.[30]
이를 동북공정에 적용해보자면 만에 하나 지금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자 군사강국인 한국의 존재가 부담되는데, 한반도가 남북통일까지 됐을 경우, 체급도 커질뿐더러 성장 포텐셜이 더 늘어나는 것도 모자라 중국과 육로로 접경하게된다. 그렇게 되면 국군은 물론 중국 접경국가중 유일하게 미군이 주둔한 국가인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유사시 중국에 육로로 진입이 가능한 통로가 된다. 이러면 한국은 중국입장에서 인도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접경국가가 된다.[31] 이때 중국 동북부 영토에 있는 안 그래도 지금도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미묘한 소속감을 가진 조선족들이 한국 쪽으로 붙겠다고 나설 경우(중국에 세뇌되긴했지만...) 최악중에서도 최악인 시나리오라, 이것 만큼은 반드시 저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경제가 부쩍 발전된 상황에서 한중무역도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며 그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어서 중국이 이 역시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당장 백두산부터 분쟁의 단초가 될 가능성이 큰 마당에[32] 이러한 고토 의식 강화는 중국에 있어서 당혹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 근본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중국 정부의 의도로 볼 수 있겠다.

5. 대응


사실 대응하지 않아도 고구려의 경우는 한국사의 범위 안에 속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우리는 꾸준히 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식[33]했지만, 중국은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찬한 적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옛 중국인들은 한반도만주에 사는 사람들을 동쪽에 사는 이민자들을 비하하는 멸칭, 즉 동이라고 불렀다.[34] 또한 전통적인 중국의 한국인 비하 표현인 가오리방쯔를 생각해보자. 이미 한국을 고(구)려놈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에서 한국이 고구려 후손임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35] 이렇듯 중국은 고구려를 전통적으로 중국사로 여기지 않았으나, 현대에 들어서서 자국사로 편찬하려고 하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지리적 측면에서 봐도 고구려의 인구는 한반도 내 대동강 유역 평야 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구려가 만주 지역을 꽤 많이 차지한 것, 그리고 오늘날의 한반도 쪽 영토보다 중국 쪽 영토가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아진 것은 4세기 말까지 가서의 일이고, 그 전까지는 한반도 쪽에 대부분의 영토를 두고 있었다. 건국 초기부터 함경도 쪽의 옥저, 강원도 쪽의 동예를 자국의 영역에 편입해 나갔었다. 바로 북쪽에는 부여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북쪽 땅은 춥고 척박했으므로 비교적 기름진 평안도 지방 등보다는 쓸모가 덜 했다. 때문에 후반기에 가서는 만주보다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한 나라로 변모했고 주요 3경 중 2개가 평안도, 황해도에 있었다. 수도들 또한, 졸본과 국내성은 압록강과 거의 붙어있는 수준으로 가깝고(오늘날 중국 영토에 있긴 해도) 평양은 그냥 현재 북한의 수도다. 물론 발해야 논란의 여지는 있을 수 있지만.
또한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이질성이 있었다고 해도 연관이 없다고는 볼 수는 없고[36] 연관은 있되 이질적인 집단이 정체성 융합을 통해 단일민족 집단이 되는건 흔한 일이다. [37]이러한 정체성 융합은 적어도 삼국시대 말기부터 시작해서 고려시대 중후반까지 진행되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중국과 일본은 오히려 한국보다도 불리하다.[38][39]
이에 대응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북한에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신청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의 등재를 남북 협력으로 진행했다.# 또한 동북공정을 비솟한 역사왜곡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고구려 연구재단(현 동북아역사재단)이 창설되었으며, 반크 등의 민간단체 활동도 증가하였다.
2006년도 후반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동북공정 반대 운동이 있었으나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묻혀버렸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공식적인 역사 교육에서 동북공정에 대응하는데 발해에 대해 중국에서는 발해를 말갈의 나라이고, 고구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라고 주장하나 한국 교육에서는 일본과의 외교 문서와 고려와의 연관성을 근거로 들어 동북공정을 비판하고 있다. 문왕무왕의 외교 문서에서 발해고구려 영토의 부여 민족이거나 발해왕이 고려 국왕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멸망 후 고려에서 발해 유민들을 그대로 수용하여 발해와 고려는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동북공정 이후 한국 측에서 고구려연구재단을 출범하는 등 외교, 역사 갈등으로 확대되자, 2007년 동북공정이 종료되고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은 역사전쟁의 전면에서 물러났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제11차 5개년(2006~2010) 사업에 역사·영토 연구사업이, 길림성사회과학원에서도 고구려·발해 관련 연구비를 조성하면서 둥베이 3성 등 각급 학술기관에 의해 둥베이 변강사 연구는 양적으로는 증가하고, 질적으로도 수준이 향상되고 있다. 또한 고대사에서 범주를 확대하여 조선의 연행사 등 중근세 한중관계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40] #
2010년부터 중국 지린성에서는 '장백산문화건설공정(長白山文化建設工程)’을 추진하여 당중앙의 둥베이 지구 발전이라는 거시적인 지향에 따라 백두산의 역사문화적 연관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숙신-발해(말갈)-(여진)-(만주족)으로 이어지는 숙신계 종족들의 역사와 그들에게 성산으로 여겨졌던 백두산 사이의 역사, 문화적 연관성을 연구하고 대중화하고 있다. 이는 백두산에 대한 모든 권한을 선점하여 향후에 야기될 수 있는 백두산 영유권 문제를 예방하려는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41]
2016년부터 '동북고대민족역사편년(东北古代民族历史编年)' 프로젝트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자오즈빈(趙智濱)은 자신의 책《 백제역사편년》의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사이에 중국 소수민족인 부여 정권에서 분열되어 이주를 거듭한 끝에 4세기 중엽 중국 왕조의 소유였던 대방고지로 남하하였으며, 멸망 이후에도 당이 웅진도독부를 세운 점이나 그 유민이 당 내지로 이주했다는 점을 들어 중국사와 백제사는 어느정도 불가분적 관계에 있다고 해석했다. 다만 중국의 백제사 연구는 빈약하며, 한국사라고 보는 인식이 여전히 팽배한 상태라고 한다.[42]
특히 2008년부터 주요 박물관을 무료로 개방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공공문화 서비스를 국가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의 정책적 시행과 그것을 선전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43] 이외에도 방송매체, 바이두 백과, 게임 등으로 동북공정의 후속 연구 결과들을 직간접적으로 홍보하고 대중화하고자 한다. 2020년에 들어 중국에서 문화적 민족주의 경향이 강화되면서 시진핑 주석이 "고고학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정신적 힘"이라면서 "중화민족의 역사와 중화문명의 보물을 전시하고 구축하는 중요한 사업"이라고 평가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역사·문화를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밝히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된다. # 
대종교 민족주의자 김좌진이 이끌고 승리한 청산리 전투 사적지는 녹슬고, 기념관으로 쓰기 위해 지어진 건물도 방치되고 있으며, 건립취지문은 사라졌다고 한다. 아예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인들의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관광도 막고 있으며, 이러한 배경에는 정황상 해당 전투가 항일전쟁이지만, 공산당의 항일무장투쟁과 무관하고, 당시 공산주의자들과 격렬히 대립하고 있던 아나키스트들과 손을 잡고 있던 김좌진이 이끌었다는 점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봉오동 전투에 대해 조선족 반일 무장연합부대의 싸움으로 설명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
2021년 1월 초 반크에 의해 근황이 공개되었는데, 2007년 이후로도 중국은 꾸준히 로비를 해왔으며, 전세계의 교과서 출판사에서 나오는 세계사 교과서나 사전에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역사라는 식으로 기술되거나 한반도가 청나라의 영토로 표기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유럽의 역사 관련 사이트에서도 발해를 중국사, 대조영을 말갈인으로 기술하고 있어 항의를 넣어봐도 "너희 한국인들만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왜 바꿔야 하느냐" 식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한다.#[44]
그러나 영상을 어느 정도 걸러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첫째, 고구려를 중국사로 기술했다 이야기하지만 영상에서 제시하는 자료들은 구체적 텍스트가 아닌 전부 지도들 뿐이며 이마저도 모두 한나라(혹은 한나라 시기로 추정되는) 지도들이다. 영상에서는 한나라 영토로 고구려에 해당되는 색칠되어 있음을 근거로 이들 서적들이 고구려를 중국사로 기술했다 주장하나, 해당 지도들이 한반도 전체를 한나라 영토로 표기한[45] 왜곡과는 별개로 '한(漢) 대=고구려 시기'가 무조건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한(漢) 대 중에서도 정확히 어떤 시기를 기준으로 그려졌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지도만으로 이들 서적들이 고구려를 중국사로 인식한다 결론 내리기에는 어폐가 있다.[46] 만리장성도 이야기도 비슷하다. 영상에서는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연장시키는 중국의 주장이 먹혀들었다며 이를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사로 보는 근거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과거 반크의 지적을 본다면 (영상에서는 구두로만 설명함) 평양까지 연장된 만리장성은 연(燕)진(秦)에 해당한다. 중국이 만리장성을 연장시키는 왜곡을 벌인 것과는 별개로, 이 시기는 고구려라는 국가가 존재하던 시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를 근거로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사라는 주장이 전세계에 먹혀들어간다고 설명하긴 어렵다. 둘째, TIMELINE of History에 삽입된 지도에서 한반도가 청의 영토로 표시된 점을 중국의 왜곡으로 제시하지만 이런 식의 오류는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전 부터 서양 쪽 역사 서적에서 발견되던 문제이다.[47] 동북공정의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과거 상대적으로 한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 발생했던 오류가 시정되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으로 해석하는 편이 적절해보인다. 셋째, 유럽 역사 사이트 사례는 해당 사이트가 정말로 중국 쪽 인식만을 마치 세계적인 인식인냥 주장했을 수도 있지만 발해사의 경계사 성격도 고려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발해를 한국사로 보는 입장이 당연시되나 발해를 무조건적으로 한국사로만 설명하기에는 힘든 측면도 있다.[48]
분명 중국이 자신들의 주장을 꾸준히 홍보하는 측면도 있을테고 서양 쪽 역사 서적에서 한국사에 관한 오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맞다 할 수 있으나, 위 영상만으로 동북공정의 결과물이 전세계에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가고 있다 결론 내리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최근에는 6.25전쟁의 발발원인이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동북공정 같은 고대사 분야 뿐 아니라 근현대사 등 다른 시대의 역사까지도 왜곡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역사왜곡 프로젝트는 이제 소수민족 분쟁요소의 제거라는 내부적, 방어적 성격뿐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명분을 정당화하고, 중국의 타국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하여 중화질서를 재건하려는 확장주의적, 팽창주의적 성격도 띄고 있는 셈이다.# 또한 중국의 한복 왜곡 논란이나 김치를 중국의 문화유산이라고 하며 역사 뿐 아니라 문화적 왜곡에까지 나서는등 왜곡범위를 넓혀가고 있다.[49]

5.1. 한국인들의 반응에 따른 부작용


동북공정은 정치적으로 의도된 움직임이었고 1992년부터 단 5년만 지속됐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여전히 동북공정이 진행중인 것으로 아는데 오래 전에 끝났다. 중국 주류학자들도 동북공정에 참여했던 주앙부, 장박천 등 고구려가 중국소유라는 역사를 쓴 학자들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마크 바잉턴

2003년 5월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부여국과 그 사람들, 그 유산의 역사(A history of the Puyŏ State, its People, and its Legacy)"는 부여사 분야를 처음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마크 바잉턴(Mark Edward Byington)는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The Korea Institute, The Harvard University)의 한국고대사연구실의 ‘한국 고대사 프로젝트(EKP)’가 중단된 것에 대해 동북공정은 사실상 현존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현존하는 위협으로 과장했다고 지적했다. #
다만, 기사 말미에도 스스로 인정했듯이 바잉턴 교수는 한가지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2002년부터 5년간 진행된 동북공정을 1992년부터 진행되었다고 잘못 말한 것이다. 얼핏 보면 그냥 숫자 헷갈린 문제지만, 이 잘못된 발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한국에 주목받을 당시 분명히 심각한 현재진행형의 화제"였던 동북공정을 "한국에 주목받을 당시 이미 끝난 문제"으로 오해해서, 한국인들이 쓸데없이 뒷북치며 과민대응을 했다고 곡해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바잉턴 교수의 말 전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에서는 끝난 프로젝트"라는 포인트에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한국인들이 바잉턴 교수의 지적처럼 이미 10년도 더 전에 종료된 동북공정을 아직도 크나큰 위협으로 지나치게 민감하게 바라보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동북공정의 위험성이 한국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에 비해 2007년 종료될 때 종료에 대해서는 언론의 주목도가 낮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50] 또한 중국이 동북공정이 종료된 뒤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른 분야, 특히 한국인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한국전쟁 관련 역사관에서 지속적으로 노골적인 정권 주도 역사왜곡을 진행하는 나라라는 점, 그리고 언론이 이런 다른 역사왜곡 프로젝트를 동북공정과 묶어서 보도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51] 즉,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이미 종료된 프로젝트인지 인식을 못하는 것, 그리고 인식을 했더라도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동북공정을 부활시키고 다시 억지를 부릴 수 있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점을 한국인들이 인지하고 있음에 한국인들의 과잉된 반응의 원인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응은 물론 타당한 걱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한가지 심각한 문제를 낳기도 했다. 바로 이덕일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자들이 정치권에 큰 영향을 끼치거나, 그런 류가 아니더라도 언론이나 미디어 등에서 한국 쪽에 아전인수적인 역사해석을 하는 미디어가 출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상파 3사가 한국인들의 반 동북공정 정서를 타고 만든 3대 고구려 사극인 연개소문, 주몽, 대조영이 그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이야 아예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 드라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악한 수준이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고, 주몽의 경우 연개소문보다야 양호하지만 중간에 환빠스러운 지도가 잠깐 지나간다든지, 막판에 역사적인 근거 없이 부여와 고구려가 힘을 합쳐서 한나라에 대항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짓는 등 역사적 사실보다는 현대의 정치적 메세지를 담은 내용을 첨가했다는 문제점이 있다. 대조영의 경우 위 두 드라마보다는 당시 국제관계에 따라 내용을 전개하는 데 신경썼다는 좋은 평가를 받지만,[52] 드라마 후반부가 될수록 거란 같은 국가들의 주 인구 구성원은 고구려계가 아닌데 정작 수뇌부가 고구려계, 또는 고구려계와 연관있는 인물들의 비중이 늘어나는 등의 문제가 생겨서 이런 문제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53]

5.2.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한 유사사학자들의 공격


사건 자체에 대한 설명은 해당 문서 참조.
이 사건의 문제점은, 이덕일 같은 유사역사학자들이 동북공정에 대한 반감을 양분으로 정치권을 통해 주류 역사프로젝트에 큰 영향을 미쳐서 좌초시켰다는 것이다.[54]
사실, 한국인들 대다수의 이 사건에 대한 여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증명하는 지표가 없는 이상, 한국인들 다수가 국수주의 역사관에 경도되었단 평가는 억울할 수 있다. 사태 당시의 관련 여론조사 등이 시행되지 않아 당시의 민심은 불명이며, 해당 문서에서 보듯 한참 뒤 이덕일 쪽에서 진행됐던 김도형 해임 청원이 제대로 된 호응을 받지 못하고 무산된 사례를 볼 때 시간이 지난 후 한국인들의 최근의 여론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무관심 그 자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55] 하지만, 다수의 한국인이 아닌 당시의 일부 정치인들을 상대로는 유사역자학자들의 영향력이 먹혀들어갔다는 문제점은 여전하고, 이덕일 등은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므로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6. 기타


워낙 2000년대에 이슈가 된 화제라, 인터넷 등지에서는 특정 관점으로 과거문제를 과장하거나 왜곡/날조하는 짓을 ~공정이라는 접미어를 붙여서 속칭하기도 한다.[56]
일본에서도 고구려와 발해를 자국사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일본 정부에서는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애초에 고구려와 발해에 관심도 없는 나라이다. 물론 고구려 유민들이 오늘날 사이타마 현의 코마라는 지역으로 집단이주한 것은 사실이고 코마 지역에서는 여전히 고구려를 기리는 행사[57]를 하지만 해당 지역에서만 챙기는 경우이다. 정부차원에서 대놓고 역사조작을 하는 중국과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고구려어일본어족에 가깝다는 주장은 꽤 나온다.[58]

7. 같이 보기



7.1. 중국의 역사왜곡




7.2. 중국의 한국 문화 예속화 시도




7.3. 기타



[1] 번체자로는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다. 한 중학교에서 공식 명칭을 쓰는 것이 6점짜리 시험문제로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2] 김지훈(2020), "2002년 전후 중국 동북공정의추진과정과 추진 주체", 《白山學報》 117, p. 54.[3] 이병호(2008), "‘東北工程’ 前史 - 傅斯年의『東北史綱』비판", 《동북아역사논총》 20; 김현숙(2004), "고구려의 민족, 정치 분야에 대한 중국학게의 연구동향",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동향 분석》 p. 82.[4] 이병호(2008), "‘東北工程’ 前史 - 傅斯年의『東北史綱』비판", 《동북아역사논총》 20, p. 243.[5] 김지훈(2020), "2002년 전후 중국 동북공정의 추진과정과 추진 주체", 《白山學報》 117, p. 32.[6] 김현숙(2004), "고구려의 민족, 정치 분야에 대한 중국학계의 연구동향",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동향 분석》 p. 72~73; 이인걸(2004), "동북공정과 간도영유권 분쟁", 《한국 근대의 북방영토의 국경문제》.[7] 2012년 미국 상원 보고서에서는 이 지도집이 1954년 이후 진행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1980년대 이전까지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는 시각은 비주류였다(이인철(2004), "중국학계의 시기별 고구려사 연구동향 분석",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동향 분석》 p. 27.)는 점에서 1950년대 후반 이래 중국 역사학계의 입장이 반영된 성과물이라기 보다는 지도집이 발행될 무렵의 입장, 다시 말해 강맹산의 일사양용(一史兩用) 관점을 반영한 결과물로 해석하는 편이 적절해 보인다.[8] 김현숙(2004), "고구려의 민족, 정치 분야에 대한 중국학계의 연구동향",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동향 분석》 p. 72.[9] 이인철(2004), "중국학계의 시기별 고구려사 연구동향 분석",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동향 분석》 p. 51~52.[10] 김현숙(2004), "고구려의 민족, 정치 분야에 대한 중국학계의 연구동향",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동향 분석》 p. 73.[11] 이병호(2008), "‘東北工程’ 前史 - 傅斯年의『東北史綱』비판", 《동북아역사논총》 20, p. 243.[12] 이인철(2004), "중국학계의 시기별 고구려사 연구동향 분석",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동향 분석》 p. 54.[13] 이인철(2004), "중국학계의 시기별 고구려사 연구동향 분석",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동향 분석》 p. 54~58.[14] 김현숙(2004), "고구려의 민족, 정치 분야에 대한 중국학계의 연구동향",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 동향 분석》 p. 74.[15] 김지훈(2020), "2002년 전후 중국 동북공정의 추진과정과 추진 주체", 《白山學報》 117.[16] 하나, 국제학계는 물론, 중국 자국 내에서도 프로젝트가 지나치게 부실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실제로도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성과가 없어서 중국 역사학계에서도 정치권의 생각없는 행동으로 예산낭비만 했다며 지적을 받았다. 그나마 이 과정에서 나온 성과라고 해봐야 - - 의 이상적인 선양 과정이 이상적이라고 하기에는 대단히 수상하다는 것 정도뿐이다. 근데, 이게 하상주대단공정의 성과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게, '중국 정치권에서 하나라 실존 증거 찾음 → 중국 및 국제 역사학계에서 프로젝트가 매우 부실하다는 지적을 받음 → 중국 역사학계에서 삼황오제와 하나라 관련 사료들을 찾다가 이상한 기록들을 봄 → 요순우의 선양과정이 수상한 것 같다?'의 테크트리를 타서 연구되었기에 정계의 하상주대단공정과 무관하게 나온 성과다. 거기에다가 하상주대단공정은 하나라 유적들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점을 보면, 중국 역사학계 말대로 정계의 일방통행으로 인한 엄청난 예산낭비가 맞는다고 볼 수밖에 없다.[17] 대표적인 예로, 현 터키의 강역인 아나톨리아 반도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종족과 국가들이 흥망성쇠하던 문명의 요람으로, '땅의 역사'인 아나톨리아 지방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의 역사를 나눠서 연구하고 있다.[18] 이때 기준이 왜 '청나라'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은 티벳 등에 대하여 과거부터 '본질적으로' 중국의 영토였다는 식으로 접근하며 동북공정 역시 다르지 않다. 보통 속지주의적 역사를 기술은 현 영토 내에 존재해온 과거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동북공정식 접근은 이와는 다른 영토 '본질주의'에 가까운 접근이다. 현 중국 또는 청나라의 영토가 '본질적으로' 중국에 귀속되며, 그 영토 내의 역사가 '본질적으로' 중국에 귀속된다는 입장이다.[19] 이런 신화 연관짓기가 학술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모르나 동북공정의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고려하면 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20] 사실 고려 왕실에서 중세 동아시아에 막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 당 황실의 후손이라는 족보 윤색이 있었는데 중국 측에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중국인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하지만 고려 왕실이 그렇게 주장했다고 해도 고려라는 국가의 실체가 바뀐다고 볼 수 없다.[21] 참고로 백제인들도 자신들이 부여에서 이주한 고구려 주몽 내지는 고리국에서 이주한 부여동명왕의 후손이라고 믿었고, 성왕은 일시적으로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기도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초기 고구려와 백제의 연속성은 전무하며, 영국인들도 자신들이 트로이에서 이주한 왕족 브루투스의 후손이라고 믿은 적 있었고, 심지어 브리튼이라는 이름도 트로이 왕족 브루투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그리스나 지중해 역사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윤색의 대상이 되었던 당 황실도 엄연히 호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후손이라고 윤색한 적 있다.[22] 예를 들어 러시아가 새로이 '러시아 민족' 개념을 만들고 자신들의 슬라브적 뿌리에 따라 폴란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의 역사가 자신의 역사라 주장하고 동시에 우랄어계 민족이 섞였으므로 핀란드와 헝가리사도 러시아사이며 퉁구스계 민족도 섞였으므로 청나라도 러시아사이고 투르크족도 섞였으므로 돌궐, 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도 자국사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실제 러시아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은 결국 러시아의 역사관이 중국의 역사관만큼 아전인수적이지는 않고 오히려 중국에 비해 모범적인 역사관이라고 평가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23] 이병호(2008), "‘東北工程’ 前史 - 傅斯年의『東北史綱』비판", 《동북아역사논총》 20, p. 279.[24] 일례로 위에서 참고문헌으로 인용했던 논문인 이병호(2008), "‘東北工程’ 前史 - 傅斯年의『東北史綱』비판", 《동북아역사논총》 20에서도 동북공정을 ‘공세적 중화주의"라고 설명하고 있다.[23][25] 김대현(2018), "《환단고기》에 숨은 군부독재의 유산",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사이비역사학의 욕망을 파헤치다》.[26] 이문영(2018), 《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p. 140.[27] 한홍구(2005), 《대한민국사 3 : 야스쿠니의 악몽에서 간첩의 추억까지》. [28] 김지훈(2020), "2002년 전후 중국 동북공정의 추진과정과 추진 주체", 《白山學報》 117, p. 32.[29] 이병호(2008), "‘東北工程’ 前史 - 傅斯年의『東北史綱』비판", 《동북아역사논총》 20.[30] 물론 여기에 대하여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핑계라고 부정하는 음모론도 없지는 않다.[31] 웃을일이 아닌게, 광대한 서부 사막지대와 남부 지대의 물리적 거리가 존재하는 타 접경국과는 달리, 주한미군 본진인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서 중국 수도 베이징간의 직선거리는 고작 900km밖에 안된다. 이 거리면 한국의 중단거리 미사일이 닿는 거리다! 여기에 한국군도 아닌 미군이 들이닥친다고 생각하면 중국도 등골이 서늘한 상황일 수 밖에 없다.[32] 특히 백두산은 통일초기부터 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33]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유사, 삼국사기[34] 다만 고구려도 삼국시대 초중반기에는 신라를 동이족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35] 또한 한국을 비한자문화권 국가들이 부르는 명칭은 고(구)려에서 기원한 "KOREA"다. 물론 왕건이 세운 고려로 인해 퍼지기 시작한 명칭이지만, 왕건의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대내외적으로 피력하고 인정받았기에 현대 한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것은 당연한것이다.[36] 고조선과 고구려는 둘 다 예맥 집단이고 삼한과 신라의 경우 고조선계 예맥집단의 남하가 배경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무관한 집단이 아니다.[37]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의 경우 서로 문화적 지리적으로 외부세력까지 끌어들여서 서로 갈등을 일으켰고, 정주민의 속성이 약하고 유목이나 목축, 수렵채집을 기반으로 하는 여진족, 몽골족들은 말할 것도 없다.[38] 현 중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의 경우, 서로 이질적인 문명이었던 황하 문명(화하족)과 장강 문명(오족, 초족)의 융합으로 형성되었다. 당장 장강 문명 출신인 항우의 학살 행위도 장강 문명과 황하 문명간의 이질성에서 기원했다는 의견도 있다. 비한족계열의 소수민족의 경우, 명나라 시대까지 계속된 내몽골의 몽골족과의 갈등, 중화민국 시기까지 계속된 한족과 만주족과의 갈등과 학살은 현 중국이 한국의 민족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후안무치한 행동인지를 보여 준다.[39] 일본인 또한 야요이인과 조몬인 간의 융합으로 형성되고 혈통이나 문화에 있어서 조몬계의 영향이 존재하지만 조몬계의 영향이 강한 남규슈, 혼슈, 도호쿠가 가마쿠라시대까지도 오랑캐 지방으로 멸시받았던 과거 또한 존재했으며 조몬계의 상당수가 부라쿠민으로 전락하기도 하는 등 삼국 간의 이질성보다도 더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 중에서도 특히 홋카이도의 아이누가 일본의 소수민족으로 편입되었던 때는 에도시대 이후이다. 근현대까지도 독립운동 시도가 있었던 류큐는 말할 것도 없다.[40] 김지훈(2020), "2002년 전후 중국 동북공정의 추진과정과 추진 주체", 《白山學報》 117, p. 56; 김현숙(2016), "동북공정 종료 후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동향과 전망", 《동북아역사논총》 53.[41] 윤휘탁(2016), "중국의 ‘백두산공정’ — ‘長白山文化建設工程’에 관한 試論 —", 《中國近現代史硏究》 78.[42] 이동훈(2018), "중국 학계의 백제사 연구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60.[43] 양시은(2019), "문화정책에 따른 중국 동북지역 박물관의 역할과 특징", 《동북아역사논총》 69.[44] 그 외 대조영은 말갈인이며 만리장성의 끝은 평양이라고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45] 이것도 TIMELINE of History에 삽입된 지도는 한반도 중부를 포함시키거나 만주 일대에 과정된 측면이 존재할 수 있는 부분만 제외하면 한나라 시기 낙랑군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했다는 점에서 마냥 틀렸다 하기도 애매하다.[46] 두번째로 제시한 지도가 기원후 200년을 기준으로 한 점에서 해당 영상의 설명이 맞다 느낄 수도 있으나, 이쪽은 부여가 있었던 길림 일대로 보이는 지역이 영토에서 제외되어 있다. 동북공정의 관점이라면 부여만 한나라 영토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동북공정의 견해가 반영된 지도라기 보다는 고구려의 위치를 잘못 설정했거나 해당 지도를 그린 담당자가 아무 생각없이 그린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47] 이 당시 청과 조선의 관계가 의례적 종속관계이긴 했지만 적어도 "part of"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48] 자세한 내용은 발해/역사귀속과 계승인식 참조[49] 다만 현재 벌어지는 일련의 사회 현상들이 동북공정과 중국 사학계 동향의 일환은 아닌만큼 현재 벌어지는 팽창주의적 역사왜곡까지 한국의 국수주의 세력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치부할 수는 없다.[50]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51] 사실, 독재정권의 안정을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정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 기술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긴 하다. 다만 그 분야는 고대사와 근현대사이므로 엄연한 차이가 있다.[52] 대표적으로 발해의 건국이 국뽕스럽게 고구려인들의 힘만으로 가능했다고 하기 보다는 이진충의 반란 덕분에 가능했다는 내용을 넣었다는 것이 있다.[53] 사실 대조영 자체가 흥행을 위해 등장인물의 수명을 지나치게 늘리는 오류가 있으므로, 이 부분이 과연 국수주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인지, 혹은 고구려 내부가 주 무대였던 드라마 초반부부터 주요 등장인물들을 등장시키는 무리수를 둔 탓에 이리 된 건지는 알 수 없다.[54] 물론 이 프로젝트 자체도 해당 항목에서 보듯이 마찬가지로 유사역사학자들이 끼어 있던 문제점이 있긴 하다.[55] 청와대 국민청원은 그 지명도와 접근성에 비해 여론 부풀리기에 취약하다는 비판이 많다. 한 사람이 다수의 소셜 미디어 계정과 포털 계정을 동원해서 숫자를 몇 배로 부풀릴 수 있을 정도. 그런데도 저렇게 사그라들었다는 것은 여론의 관심에서 아예 벗어났다는 것이다.[56] 대표적으로 키움 히어로즈 팬들이 현대 유니콘스의 후계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다투는 데서 많이 나온다. ex) 겆북공정. 다만 여기는 현대 유니콘스와는 전혀 관련 없는 팀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키움은 현대가 최종적으로 해체가 된 이후 시간이 조금 지나서 창단된 팀이다. 즉 현대와 키움은 전혀 다른 팀이라는 것. 상세는 삼청태현문서 참조.[57] 2016년에 130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했다. 716년이 당시 일본 정부가 고구려 유민들을 위해 코마군을 창설한 해이다.[58] 이런 류의 주장은 크리스토퍼 백위드의 논문에 기반하지만 고구려어-일본어 동계설은 알렉산더 보빈에게 이미 반박당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