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대
'''拔刀隊 '''
1. 개요
1885년 작곡된 일본군 육군의 군가로 가사의 배경은 세이난 전쟁의 타바루자카 전투에서 비롯된다. 이 전투에서 백병전이 발생했는데, 민간인을 징집[1] 하여 이루어졌던 신정부군은 사무라이로 이루어진 사이고 군의 발도 돌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에 신정부는 검술에 능한 사무라이 출신자들을 경시청 소속으로 특채[2] 해서 경시청 발도대(警視庁抜刀隊)[3] 를 편성하여 사이고 군에 맞서 싸웠다. 이런 조치는 전쟁이 반란 분자에 의한 소요이며 그렇기에 군 대신 경찰을 투입한다는 논리로 메이지 신정부 측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세이난 전쟁은 국내 문제라는 것을 외국에 주장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곡의 작곡자는 당시 일본군 군악대를 양성하기 위해 군사고문으로 일본에 왔던 프랑스인인 샤를 르루(Charles Edouard Gabriel Leroux, 1851~1926), 작사자는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토야마 마사카즈(外山正一, 1848~1900). 공교롭게도 이 곡은 수십년 후 일본군에게 점령된 프랑스 영토에서 연주된다.
노래는 메이지 15년(1882년) 발표되었다. 가사의 특징으로는 끝 네 구절을 반복하는 것인데, 이는 미국 유학파였던 토야마가 미군 군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현재도 육상자위대와 일본 경찰에서 이 노래를 약간 편곡한 육군분열행진곡을 열병식 때 행진곡으로 사용하고 있다.
2. 가사
참고
가사를 보면 알수 있듯, 정부군의 정당성을 주창하고 사쓰마군을 역도로 묘사하며 디스하는 내용이다.
3. 여담
- 일제강점기 시절 남인수가 부른 친일가요 '이천오백만 감격'[9] 에 이 곡의 일부가 2절과 3절 사이의 간주로 쓰이기도 했다.
- 고 보이즈 - 마지막 잎새 사수 프로젝트 라는 영화에도 등장 한다.고등학교 연극부를 소재로한 영화인데, 후지산 근처로 단합대회를 갔다가 연극부원 한명을 잃어 버렸다가 찾았는데... 일본군의 혼령과 어깨동무를 하고 이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었다.
-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 전쟁이후로 일본 내에서는 '적성국의 교란행위를 막는다'는 구실로 범정부 차원에서 서구 음악[10] 들을 금지곡으로 지정하거나 불법화했는데, 이 곡도 적국이었던 프랑스인이 작곡한 곡이었기에 금지곡으로 지정할경우 육군 대표 군가가 금지곡이 되는 골때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 육군의 눈치를 봤던 일본정부는 군가를 약간 편곡한 후 작곡자를 바꾸어 계속 연주했다.[11]
- 조선의 서울에서도 연주된 전적이 있다. 1943년 병력이 모자라던 일제가 대학생과 구제전문학교 학생들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징집해 배치했는데,[12] 소집된 이들이 실사한 시가행진[13] 에서 연주된 적이 있다.
- 상술했듯 일본군경의 상징적인 노래이기 때문에 이를 이어받은 자위대나 일본 경찰에서는 부대개방이나 퍼레이드 등 행사 시 자주 연주하는 곡이지만, 사이고 다카모리의 고향이며 사이고에 애정이 각별한 지역인 가고시마 주둔 병력은 지역 환경과 문화를 고려해 되도록이면 연주하지 않는다고.
[1] 아이러니하게 징병제를 결정한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2] 군간부로 특채한다면 징병제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문제가 생기겠지만 경찰관으로 특채했으니 문제는 없다는 논리였다.[3] 징모순사대(徴募巡査隊)라고도 한다.[4] 死する로 부르는 버전도 있다. 이쪽이 좀 더 한자어의 느낌이 강하다.[5] 朝敵.조정에 반역하는 적(역적)[6] 독음으로 닛폰토라 부르기도 하고 훈음으로 야마토가타나라고 부르기도 한다.[7] 불교의 지옥중 하나인 도산(刀山)지옥. 칼이 박혀있는 산을 오르며 고통을 당한다. 즉, 죽어서 혼령이 된 다음이 아니라 현실에서 칼의 산(=도산지옥)을 보았다.[8] 墓なく.허무하게 라고 발음하지만 뜻은 '무덤도 없이'임. 중의법[9] 식민지 조선인 2500만이 일제의 징병에 감격한다는 가사[10] 주로 미국의 재즈와 가곡 등이 탄압 대상이 되었다.[11] 비시 프랑스 수립 후에는 프랑스는 명목상이나마 독일의 괴뢰국이 되었으니 규제에서 제외되었다.[12] 당연히 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병력이 모자라다지만 전후 사회를 재건할 엘리트 인력은 남겨놔야 하기 때문. 물론 이때는 일본도 미쳐 돌아가긴 했지만 아예 정신줄을 놓지는 않았던만큼 장교나 사관후보생으로 징집했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정신줄을 놓은 대전 말에는 엘리트고 뭐고 닥치는대로 씹어먹고 일반 병으로 징집해 가미카제 등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이때 징집된 조선인중 가장 유명한 이가 고 김수환 추기경.[13] 당시 명칭은 출진학도 장행회(出陣学徒壮行会)로 일본 각 대도시와 조선, 대만, 심지어 만주국에서도 실시되었다.